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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스크랩 1918.01.08 미국 윌슨 대통령, 민족자결주의 원칙 주장
조영석 추천 0 조회 154 16.05.23 14: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18.01.08  미국 윌슨 대통령, 민족자결주의 원칙 주장

 

 

 

 

 

 

1914.05.07  어머니날 지정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6704

1924.02.03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12893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 선언(1918.01.08)
-국제신문, 2011.01.07.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10108.22002213253


미국 윌슨, 민족자결주의 선언(1918.01.08)-경향신문, 2009.01.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71744035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14개조 평화원칙(Fourteen Points)' 공표(1918.01.08)-네이버뉴스, 2004.01.0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221535

 

 

 

 

 

 

 

 

 

ㆍ불공평한 원칙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한인 유학생 400여명이 모여들었다.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자 백관수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 모임은 곧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됐지만 20여일 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불씨를 지폈다.

 

2·8독립선언과 3·1운동은 당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민족자결주의는 1918년 1월8일 윌슨이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의 ‘평화원칙 14개조’에서 제시됐다. 이는 전 세계의 수많은 피압박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었다.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저항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제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 원용되면서 변질된다. 전후 처리의 ‘키 플레이어’가 된 승전국 영국과 프랑스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강력히 반발하면서다. 결국 이 원칙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고,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된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등은 독립국이 되지만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이던 조선은 ‘해당사항’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는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았지만, 여전히 어떤 민족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쿠르드족은 아직도 터키와 이란, 이라크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티베트와 체첸 민족 역시 오랜 투쟁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 최근 가자지구의 참상이 증명하듯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완전한 독립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에 외세의 힘을 빌려 이스라엘을 세웠다. 지난해 2월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코소보 역시 민족자결주의가 ‘선택적’으로 발현된 현장이다. 코소보의 독립은 세르비아의 ‘뒷배경’인 러시아를 발칸 지역에서 견제하려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주요 국가들의 계산이 있어 가능했다.

/경향신문

 

 

 

 

 

 

민족자결주의[ 民族自決主義, self-determination ]

민족의식을 지닌 한 집단이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상.

 

이 민족자결주의 개념은 정치적 원리의 하나로서 일찍이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에서 표방된 민족주의 사상에서 부수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은 평화적 목적을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받아들였다.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 14개 평화 조항' 중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전후 세계질서에 필요한 주요목표로서 상장했다. 그결과 이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 러시아의 영토였던 발트 해 연안지역 등이 여러 신생국가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의 발표는 당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전세계의 수많은 약소민족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세계적 흐름은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아 곧 국내에 전해졌으며,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민족자결주의의 발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교민들이다. 이들은 세계적 독립추세에 편승하여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이승만(李承晩)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보내는 외에도 독립운동을 뒤에서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모금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같은 사정은 중국에서도 나타나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었으며, 김규식(金奎植)이 대표로 파리에 보내지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있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에게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결과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淸年獨立團)을 조직했으며, 이를 근거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이다. 곧 2·8독립선언은 국내에 알려졌으며 나라 잃은 설움을 뼈저리게 느껴온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민족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3·1운동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직접 경험하는 국내 사람들에게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하나의 바람직한 이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자결주의는 식민통치를 경험하고 있던 많은 약소국에 커다란 기대와 희망을 안겨준 사상이었으며, 실제로 3·1운동과 같이 중요한 민족운동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가 진정으로 약소국의 해방과 독립을 원해서 발표된 것은 아니다. 사실상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당시 유럽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던 강대국들의 의도를 표면화한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자결주의의 결과 독일·오스트리아 등 패전국의 많은 식민지들은 독립을 성취하게 되었지만, 그밖의 전승국들이 보유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이 원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독립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자결주의는 3·1운동과 같이 민족 스스로 독립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촉진제로 기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식민지 민족들의 자결을 증진시키는 것이 국제연합(UN)의 주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UN의 전신이라 할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도 이 원칙을 인정했지만 UN이 발족되면서부터 그 사상이 더욱 명확하게 제기되고 인정되었다.

 

UN 헌장은 민족자결이라는 말의 의미를 2가지 측면에서 명시하고 있다. 첫째, 국가는 자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도를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자결권이 있다는 것이며, 둘째, 어느 민족이라도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거나 기존 국가와 연합하는 것을 자유로이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자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2가지는 UN 헌장 제1조 2항과 제55조 1항에 명시되어 있다. 또 제73조 a, b항과 제76조 b항에서는 다른 나라에 예속된 영토에서 행정당국은 정치적 진보와 자치정부 발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네이트 백과사전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 12. 28 미국 버지니아 스톤턴~1924. 2. 3 워싱턴 D. C..

미국의 정치가.

 

 

고답적이고 융통성 없는 이상주의자로 잘 알려졌으며, 미국의 제28대 대통령(1913~21)으로 재임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파리 평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주창했다. 베르사유 조약(1919. 10~11)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신경쇠약과 반신불수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했다.

 

우드로 윌슨은 개인적인 자질과 공공복지에 대한 탁월한 책임감으로 인해 최고위 공직을 수행해낼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이나 부하들에게는 관대한 태도로 대했다. 또한 온화하고, 유머스럽고, 사려 깊고, 폭넓은 문화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들로부터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나 자신이 싫어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할 때는 잔인했던 적도 있었다. 깊은 이상주의적 신념으로 인해 그의 정치적 지도력은 강화되었고 뛰어난 웅변술이 그 지도력을 한층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이상주의적 신념이 너무 강해서 효과적인 타협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당파적 반대는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이 신(神)의 계시에 따라 추구하는 노선은 절대로 이탈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는데, 그 주장에는 완고한 칼뱅주의자 같은 기풍이 있었다. 그는 고귀한 이상은 정치 현실을 타파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국제정책은 파산의 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였으나 정치적 직관과 수완은 부족한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직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평화회의에 더욱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며, 미국을 국제연맹에 가입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윌슨의 초기생애

월슨은 위로 매리언과 앤이라는 두 누이를 두었고 아래로는 남동생 조지프를 두었다. 윌슨의 아버지 조지프 러글스 윌슨은 굽힐 줄 모르는 성품과 해박한 신학지식을 지닌 엄격한 장로교 목사였는데 미래의 대통령이 될 윌슨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윌슨은 유년시절을 조지아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보내면서 남북전쟁의 전화(戰禍)와 전후 남부재건시대에 남부지역이 겪은 고통을 직접 보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데이비드슨대학에 잠시 재학하다가 1875년 지금의 프린스턴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대학교에서 토론회, 문학활동, 학생체육행사의 주관 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졸업성적은 중간이었다. 학부시절에 이룩한 성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미국의회의 위원회 제도를 예리하게 분석한 논문을 들 수 있는데, 그의 원숙한 정치철학을 예고해주는 것이었다.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한 후 버지니아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중퇴했다.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려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존스 홉킨스대학교에서 행정학과 역사학의 박사과정을 밟아 188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윌슨의 박사논문 〈의회정부 Congressional Government〉는 미의회의 위원회 제도를 공격한 것이었다. 1886년 조지아 주 서배너 출신의 엘렌 루이스 액슨과 결혼했고 브린마대학에서 역사학·정치경제학 부교수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1888년 코네티컷 주의 웨슬리언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고 2년 뒤 프린스턴대학교의 법학·정치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1902년에는 그 대학의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프린스턴대학교 시절 윌슨은 그당시 정치문제에 대하여 많은 강연과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되었다. 1910년 9월 그는 민주당으로부터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출마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윌슨은 자신이 프린스턴대학교 당국에 내놓은 정책이 받아들여질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출마 제의를 즉각 받아들였다. 그는 정력적이며 과감한 선거유세전을 펼쳐 뉴저지 주 전역의 진보파 인사들의 지지를 얻어내면서 당선되었다. 뉴저지 주지사직을 과감하게 잘 수행해냈기 때문에 전국을 상대로 한 정치무대에 뛰어들게 되었고, 1912년 6월 대통령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이어 벌어진 대통령 선거 유세전에서 윌슨이 내놓은 분명하고 적극적인 국내정책으로 인해 민주당은 미국 전역에서 진보파들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윌슨의 대통령 재임기

첫번째 임기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윌슨은 선거유세시에 공약했던 몇 가지 주요법안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아주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의회에 보내는 첫번째 메시지를 직접 의회에 나가 읽음으로써 존 애덤스 대통령 이래 사라졌던 관습을 다시 부활시켰다. 이 회기뿐만 아니라 그 뒤에 열린 회기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하원의원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임기중 첫 2년 동안에 윌슨이 거둔 법안통과 실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가 거둔 첫번째 승리는 언더우드 관세법안(Underwood Tariff)을 통과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다수의 산업 이익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세를 인하시킨 조치였다. 관세에 의한 수익이 하향조정(下向調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법안은 개정된 헌법수정안 16조에 근거하여 연방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 색인:조세). 새로운 관세법에 이어 대규모 통화개혁법안이 도입되었는데 1913년 12월 23일에 서명된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이 그것이다. 개인금융기관의 횡포를 방지할 목적으로 도입된 이 법은 미국연방준비위원회(Federal Reserve Board)를 창설하여 미국 금융구조의 틀을 잡는 지주가 되었다. 1914년에는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되었는데 이 기구는 무역에서의 경쟁적 조건을 유도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힘을 행사하는 수단이 되었다. 1914년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이 통과되어 노사분규시 정부가 강제금지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다만 복구불능의 파괴행위가 예견될 때는 금지명령을 내릴 수 있음), 또 파업과 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함으로써 노동기구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 (→ 색인:노동조합) . 이 네 분야에서의 업적은 새로운 사회·경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윌슨의 외교정책은 약소국가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약소국가의 권리와 이해를 존중해주는 것을 그 특징으로 했다. 필리핀 국민들에게 자치(自治) 체제를 갖추도록 준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윌슨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미 의회는 미국선박에 대한 파나마 운하통행료의 면제 법률을 폐기했는데, 이로 인해 영국과의 긴장관계가 크게 완화되었다. 카리브 해의 소요사태에 직면해 미국은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1915년 9월 16일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미국은 아이티에 대한 사실상의 보호권을 장악했다. 미국 순양함이 산토도밍고를 사전 답사했고 이어 1916년 여름 미해병대가 이곳에 상륙하여 11월에는 미국 감시하에 새로운 군사정부가 수립되었다 (→ 색인: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혁명은 윌슨에게 아주 혼란스런 상황을 가져왔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을 독재자의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못하게 되자 윌슨은 '관망하며 기다리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상사(商社)들이 요구하는 공식적인 개입에는 반대했다. 1914년 4월 미국 해병에게 모욕을 가하고도 아무런 사과를 해오지 않는 사태에 이어 독일 군함이 멕시코에 군수물자를 하역(荷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해군은 베라크루스의 항만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했다. 우에르타 장군 정부가 전복되어도 멕시코 내전은 종식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미국 상사들은 계속 위협을 받았다. 윌슨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는데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916년 3월 게릴라 지도자 판초 비야가 이끄는 군대가 미국 영토 내로 침입해 들어오자 윌슨은 존 J. 퍼싱 장군이 지휘하는 보복원정대의 출정을 허가했다. 멕시코 혁명은 윌슨의 행정부가 끝날 때까지 윌슨을 괴롭힌 문제가 되었다.

 

1914년 7월 이후 미국의 외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중립국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 윌슨의 노력이 그 주된 내용이다. 공식적인 중립선언에 이어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중립국 국민답게 처신하라는 미국인에 대한 윌슨의 개인적 호소가 더해져서 중립선언의 내용이 강화되었다. 한편 중재자 역할을 자원하고 나선 그의 제의는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고, 비밀 평화협상을 추진하려던 노력은 실패했다. 1915년 2월 4일 베를린 정부는 영국 제도(諸島) 주위의 수역(水域)을 전쟁지역으로 선포하고 이 지역 내의 모든 교전국 함정을 격침시킬 것이며 중립국의 선박 또한 마찬가지라고 위협을 가했다. 1915년 2월 10일 윌슨은 강력한 항의문을 발표하여 독일 잠수함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독일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상선의 파괴나 미국 인명의 살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립권 침해"로 간주될 것이라고 윌슨은 말했다. 그러나 독일은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여 5월 7일 영국 정기선(定期船) ' 루시타니아호'를 사전 경고 없이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격침시켰다. 1,000명 이상의 인원이 익사했고 이중에 128명의 미국인이 끼어 있었다. 윌슨은 전쟁을 피할 목적으로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그뒤 몇 주 동안에 걸친 협상에 임했다. 특히 독일이 순양함 전투의 규칙을 반드시 지키게 하겠다는 의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독일에 대한 윌슨의 항의문은 너무나 강한 어조여서 국무장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그 항의문에 서명하기보다는 사임하는 쪽을 택했다. 1915년 8월 '아라빅호'가 격침된 후 독일정부는 앞으로 정기선은 사전 경고 없이 격침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916년 봄 증기선 '서식스호'에 대한 어뢰공격 때문에 독일과의 교전이 임박하게 되자 윌슨은 최후통첩에 가까운 어조로 항의문을 발표했고 마침내 독일정부로부터 잠수함 전략을 전면 폐기하겠다는 포괄적인 약속을 얻어냈다 (→ 색인:독일사). 그후 7개월 동안 독일과의 긴장된 관계는 다소 완화되었다 (→ 색인:서식스호 폭파사건).

 

2번째 임기

이같은 외교적 승리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연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191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윌슨이 재선되는 데 기여했다. 이 승리는 윌슨이 미국의 중립국적 권리를 성공적으로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을 전쟁 참가로부터 지켜냈다"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주장은 미국인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특히 미시시피 이서(以西) 지역에서 높은 호응을 얻었다. 찰스 에번스 휴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공화당은 대(對)독일 문제나 대멕시코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윌슨이 우유부단하며 비겁했다고 매도했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법제개혁(法制改革)이 대중선동적이라고 비판했고, 특히 애덤슨 법을 문제 삼았다. 이 법은 윌슨이 철도파업을 피하기 위해 의회에 통과를 강요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노조에 대한 때아닌 굴복이라는 것이었다. 동부의 해안지방과 중서부의 공업지대 대부분에서는 단합된 공화당이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미시시피 서쪽의 농업지대와 태평양 연안지역은 윌슨의 강세였다. 윌슨은 진보파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는데 이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신봉하여 공화당 진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한 세력이었다. 선거의 결과는 너무나 백중세여서 수시간 동안 공화당의 승리가 인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서부지역의 집계가 시작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윌슨의 재선이 확정되었다.

 

1917년 1월 9일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재개함에 따라 윌슨의 평화협상 노력은 좌절되었다. 윌슨은 상선과 여객선을 예고 없이 격침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협상할 용의가 있었으나 독일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독일이 잠수함 공격의 재개를 선언하고 그결과 미국 항구 내에 화물이 적체되기 시작하자 미국 내의 여론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독일-멕시코-일본의 3국이 동맹관계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멕시코가 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 등지를 재정복할 것이라고 암시하는 치머만 전보(電報)가 공표(公表)되었으며, '라코니아호'의 피격으로 미국인의 인명손상 사건이 또 터지게 되자 미국인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여론의 압박과 사태악화를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윌슨은 그해 4월 2일 의회에 전쟁선포를 요청했고, 그 요청은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미국은 전쟁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않았는데 윌슨의 책임이 아주 컸다. 그러나 일단 참전하게 되자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18년 1월 8일의 연설에서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의 요체(要諦)라고 판단되는 14개조를 제안했고, 그뒤 8개월 동안 그 조항의 구체적인 내용을 준비했다. 독일이 1918년 10월초 패전에 직면하게 되자 윌슨에게 강화의 조건으로 14개조와 그뒤의 연설내용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강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연 되어 있지 않았지만 연합군 사령관과 독일정부는 향후 협상의 바탕으로 14개조(일부 조항은 제외하고)를 받아들였다. 윌슨은 향후의 평화회담에서 전략적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으나, 1918년 11월의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여 새로 구성된 의회에서 공화당이 상원을 장악하게 되자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또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상원외교분과위원회가 정적들에 의해 장악된 것이었다.

 

윌슨은 직접 파리 평화회의에 참가하여 자신의 원칙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그 회의를 주도할 작정이었다. 이 원칙들은 ① 인민을 해방시키고, ② 적과 동지에게 정의(正義)롭게 대하고, ③ 국제연맹의 설립을 통한 평화보장의 3대원칙으로 압축되는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2월 13일 프랑스의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각 나라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열망과 충돌하게 되자 명예가 다소 실추되었다. 윌슨 대통령은 국제연맹의 설립이 평화조약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각국 대표들에게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승전국의 영토 분할과 배상금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양보함으로써 국제연맹 설립 안도 그 빛이 바래졌다. 1919년 6월 28일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튿날 윌슨은 귀국 항해길에 올랐다. 파리 평화회의를 주재하면서 느낀 긴장감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육체적·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태였다. 윌슨은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놓고 전개해야 하는 상원의 정적들과의 싸움을 이끌어나갈 여력이 별로 없었다. 상원을 압도할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에의 지지를 호소하는 유세에 나섰다. 그는 1919년 9월 25일까지 34번의 연설과 수십 번의 인터뷰, 행진, 객차승강구 연설회를 끝냈다. 그러나 그뒤 전국 순회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탈진된 상태로 워싱턴 D. C.로 돌아왔고 그 직후에 혈전증을 앓아 반신불수(왼쪽)가 되었다.

 

윌슨 이외에는 아무도 조약의 비준을 위해 투쟁을 이끌어나갈 지도자가 없었다. 타협을 이루려는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신체의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정신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음) 정치적 안건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윌슨은 조약 비준 문제를 '대국민투표'라는 특별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 제출하려는 현실성 없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상원의 양당 합동회의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은 공화당 내 비타협파의 끈질긴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1920년 3월 19일 비준 해결안을 결정하는 최종투표가 벌어졌으나 이 해결안은 여전히 제10조(집단안보의 설정)에 대하여 대단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윌슨은 이에 격노하여 그의 지지세력들에게 비준 해결안을 부결시키라고 강권했고 그중 23명이 부결표를 던졌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온 사람의 강권으로 인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게 되었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윌슨의 후기생애

윌슨은 신체적으로 허약하여 1920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민주당은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M. 콕스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윌슨은 이 선거가 자기 자신과 국제연맹안에 반대하는 세력의 영수인 헨리 캐벗 로지 상원의원 사이의 신임투표라고 생각했으나 그 결과는 윌슨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국제연맹안을 지지했던 많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공화당 후보 워런 G. 하딩을 지지했고 선거는 공화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윌슨은 선거결과에 크게 실망했으나 1920년 12월 자신에게 수여된 1919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가 의회에 보낸 연두 메시지에는 그 자신이 늘 소중하게 여겼던 국제연맹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는 1921년 3월 4일 자신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외교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윌슨은 남은 여생 3년 동안을 워싱턴 D. C.에서 살면서 정치적 논평을 피했고 정치인들과의 교제도 멀리했다. 그가 퇴임 후에 하고 싶어했던 법률 및 문학활동은 날로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불가능했으며 1924년 죽었다. 그가 1915년 12월 18일에 재혼한 2번째 부인 에디스 볼링 골트 윌슨은 1961년 12월 28일까지 살았다. 백악관시절 그의 건강이 최악의 상태에 달했을 때 그녀는 그의 정치적 번민을 덜어주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직에 속하는 책임의 상당부분을 그녀 자신이 떠맡았다.

 

 

C. Seymour 글

 

 

 

/네이트 백과사전

 

 

우드로 윌슨

“이 위대한, 평화로운 국민을 전쟁으로, 그것도 가장 무섭고 참담한 전쟁으로 이끈다는 일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평화보다 가치 있는 것이 정의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나 소중히 했던 것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약소국가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모든 나라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자유롭게 만들어줄 정의의 보편적인 지배를 위해. … 이제 미국이 피를 흘릴 때가 왔습니다. 이 나라를 탄생시켰으며 행복과 평화를 지켜온 원칙을 위해 싸울 때입니다. 신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이 싸움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17년 4월 2일,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의회의 연단에 서서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했다. 이미 경제력에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라 있던 이 나라는, 그것으로 비로소 군사와 정치에서도 세계에 군림하는 나라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자유, 정의, 온갖 아름다운 이상의 이름으로.

 

잠자는 거인

 

미국은 1776년에 13개 주로 영국에게서 독립한 후 백 수십 년간 멈춤 없는 성장을 계속했다. 국토가 넓어지고, 인구는 늘었으며, 경제력이 성장했다. 어린애 팔 비틀기처럼 쉬운 전쟁, 또는 매입을 통해 꾸준히 늘어난 국토는 19세기 중반 태평양에 도달했고, 유일한 재앙이라고 할 수 있었던 남북전쟁을 거친 후로는 경제력까지 유럽 국가들을 능가했다. 20세기에 갓 접어들었을 무렵, 미국이 가진 부는 영국의 2배, 프랑스의 3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또한 유럽 국내의 기근이나 전란을 피하여, 또는 신분제도나 국교의 압제를 피하여, 계속해서 밀려드는 이민자들은 새로 획득한 영토를 개발하고 공업 부문의 성장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인력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국은 북아메리카에서의 확장과 유지에 힘썼을 뿐, 나날이 커지는 국력을 내세워 서구 열강들의 패권 다툼에 끼어드는 일은 삼가왔다. 1823년에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밝힌 ‘먼로독트린’은 미국이 국제정치 무대에 끼어들지 않을 것임을 표명했다. “아메리카는 유럽에 간섭하지 않겠다. 유럽도 아메리카에 간섭하지 말라.”


 

 

 

다만, 이 독트린이 미국만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불간섭을 의미한다면, 유럽 제국들은 이를 수십 년간 농락했다. 영국은 남아메리카에서 꾸준히 식민지를 확대했으며,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멕시코를 손에 넣으려 시도했다.

 

 

 

 

 

같은 공화당 출신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윌리엄 태프트의 이전투구를 그린 풍자화. <출처 - PawełMM at en.wikipedia.org>


하지만, 이는 ‘방어적 목적’에서 미국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19세기 말, 미국은 빌헬름 2세의 독일보다도 더 야심적인 해군력 증강에 나섰으며, 이에 성공했다.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힘을 내세워 영국과 독일을 베네수엘라에서 내몰고, 파나마를 콜롬비아에서 독립시켜 속국화하며 파나마 운하를 건설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아메리카의 경계를 넘어 1898년에 하와이를 병합했으며, 같은 해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괌과 필리핀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미국도 유럽식의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끼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의 일에만 열중해야 하며 제국의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는 고립주의적 여론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 여론을 업고 루스벨트의 대외정책을 공격했던 사람이 바로 우드로 윌슨이었다. 그는 연방정부의 힘을 강화해온 루스벨트의 국내정책에도 반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제28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윌슨은 민주당 후보였던 반면 루스벨트는 후계자인 공화당의 태프트 대통령에 반발해 진보당을 만들어 그 후보로 나선 참이었다. 공화당 표가 둘로 갈라진 덕분에 윌슨은 쉽게 이겼고, 민주당은 12년 만에 백악관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윌슨 자신이 루스벨트의 노선에 따라 미국을 국제정치의 중심 국가로 세우고, 연방정부의 힘과 권위를 크게 높이게 될 줄을.

 

 

 

 

 

명문대학 총장, 백악관에 입성하다


토머스 우드로 윌슨은 1856년 12월 28일에 버지니아 주의 스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로교회 목사이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이었는데, 토머스라는 이름보다 어머니의 성에서 따온 우드로(Woodrow)라는 중간이름을 더 즐겨 썼다. 경건하고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착실한 모범생이었으며, 데이비드슨 컬리지를 거쳐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다시 버지니아대학교의 로스쿨을 나온 그는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학문 연구가 더 적성에 맞다고 생각해서 존스홉킨스 대학교의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1885년에 펴낸 [의회정부론]은 입법부와 행정부를 분리한 미국 정부의 특징을 잘 짚어내었고, 1887년의 [행정론]에서는 행정 영역을 정치에서 독립시켜 정치적으로 중립인 공무원이 실적에 따라 임용, 승진하도록 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미국 최초로 현대적인 행정이론을 선보인 것이었으며, 윌슨은 이로써 ‘행정학의 시조’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런 혁혁한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그는 여러 대학의 교수를 거쳐 프린스턴 대학교에 정착, 존경받는 교육자이자 학자가 되었다. 1902년에서 1910년까지는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을 지냈는데 입시제도에서부터 대학운영 방식, 심지어 대학 캠퍼스 구조까지 전면적인 개혁을 시도했으나 학내 세력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정부와 대기업이 휘두르는 권력을 경계하고, 사회와 경제에서 개인적 자유를 극대화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이상을 책과 강의실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하기를 꿈꾸었다. 그 기회는 1910년, 뉴저지 지사 선거에서 ‘참신한 새 인물’을 찾고 있던 민주당이 그에게 영입 제의를 하면서 찾아왔다.
 
주지사에 당선된 윌슨은 공화당의 개혁그룹과도 초당적인 연대를 하며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주 선거에 주민이 직접 투표하는 예비선거를 도입함으로써 주의 민주당 간부들의 영향력을 없앤 일은 돋보이는 민주적 개혁이었다. 학자로서의 명성에 개혁정치인의 명성까지 갖추게 된 윌슨은 마침내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고, 1913년에 백악관에 입성했다.


젊은 시절의 윌슨. <출처 - Scewing at wikipedia.org>

 

 

 

진보의 엇갈리는 길들


윌슨은 ‘진보적 대통령’이라는 기대에 맞게 여러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그중에는 서로 모순되거나 진보와는 거리가 먼 것들도 있었다. 관세 인하(1913)와 연방준비은행 수립(1913), 클레이튼 반트러스트법 제정(1914) 등은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대기업과 금융자본가들의 힘을 억제하는 의미가 컸다. 하지만 1914년 록펠러 가에서 러드로우의 탄광촌 파업을 기관총으로 제압한 ‘러드로우 학살’은 어떻게 손을 쓰지 못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참전도 어찌 보면 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라 볼 수 있었다. 전쟁의 결과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에 투자한 거액의 자본이 손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윌슨은 누구보다도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중요시한 대통령이었으며 어린이 노동의 금지, 노동시간의 단축 등 진보적 조치도 많이 취했다. 그러나 남부 출신이어서인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의식은 심했다. 그래도 많은 흑인들이 그의 진보적 이미지를 믿고 그에게 투표했으나, 윌슨은 취임하자마자 극렬 인종차별론자들을 요직에 앉혔다. 그리고 새로 짓는 정부 소유 건물은 철저히 흑백분리 원리에 따라 짓도록 했으며, 많은 흑인 공무원들을 해고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병력이 모자람에 따라 흑인들도 징병 대상에 포함했지만, 백인과 흑인의 막사를 따로 둘 것, 흑인은 장교가 될 수 없으며 흑인 부대도 백인이 지휘할 것, 위험하거나 힘든 일에는 흑인을 앞세울 것 등을 강제함으로써 일부 성난 흑인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KKK단을 찬양한 우드로 윌슨.(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 중 한 장면에 인용된 윌슨의 발언) <출처 - Quadell at en.wikipedia.org>


그는 [미국민의 역사]라는 책에서 흑인을 살해하고 폭행하는 일을 일삼던 백인 극우단체 큐 클럭스 클랜(KKK단)을 “남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려는 숭고한 단체”로 찬양하기도 했다. 이밖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문제에도 진보적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미온적이었고, 세계대전 참전 후에는 반전 운동을 가차없이 탄압했다.

 

대외정책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정책을 비판해온 그는 필리핀에 자치를 허용하는 등 ‘반제국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는 듯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법치가 확실히 보장된 정부만이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그렇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국가에는 “힘으로라도 개입해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뿌리내리게 할 것”임을 선언했다. 최근 문제가 되었던 미국의 “불량국가들에의 무력 개입” 노선의 선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1916년에 카란사 정권을 돕기 위해, 또한 카란사와 미국을 적대해온 판초 비야를 응징하기 위해 멕시코 영토 깊숙이 원정대를 침투시킴으로써 그런 개입 노선이 말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세계대전에 뛰어들다


그러나 윌슨이 미국의 오랜 고립주의 전통을 결정적으로 깨트린 것은 누가 뭐래도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본래 고립주의를 선호했던 자신의 대외정책관도 이유였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일계와 영국-프랑스계 사이에서 한쪽 편을 들기 곤란했던 까닭도 있었다.
 
1915년 5월에 미국인 128명이 탑승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했을 때도, 윌슨은 당장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억제하며 독일의 사과와 배상을 받는 선에서 무마하려고 했다. 그리고 “유럽의 전쟁에 절대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며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독일이 비무장 상선 서섹스 호를 공격하는 등(1916년 3월) 적대행위를 그치지 않고, 1917년 1월에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등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오자 결국 참전을 결심하게 된다.

 

 

 

의회에서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하는 윌슨. <출처 - Adam at en.wikipedia.org>

 

 

 

그러나 윌슨은 참전을 국익 또는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숭고한 이상을 따르기 위한 거룩한 희생으로 포장했다. 적어도 그 스스로는 그 말을 믿었다. 이 전쟁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되어야 하며, 악의 축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무찌른 다음에는 누구나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이상적인 국제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이상은 1918년 1월 8일에 발표된 “14개조 평화원칙”에 표현되었는데, 사실 이 원칙이 발표된 배경은 그중 제6조인 “러시아의 영토 전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 러시아에게 모든 형태의 원조를 제공한다 …·.”에서 나타나 있었다. 당시 10월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된 러시아는 독자적으로 전선에서 이탈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를 달래기 위해 러시아에 침투시켰던 반혁명군의 철수와 원조 제공 등을 제의한 것이다. 러시아는 결국 독자 종전협정을 맺었기에 그 당면한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14개조의 보다 고차원적인 내용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든 비밀 외교를 금지하는 제1조, 주권 평등과 민족 자결주의를 규정하는 제5조와 그 구체적 실천 과제를 정한 6조에서 13조, 그리고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창한 제14조는 “오직 힘이 말한다”는 식이던 기존 국제질서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14개조 선언문의 말미에서 윌슨은 이렇게 말했다. “세력이 강하든 약하든 관계없이 모든 민족과 국가에 정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들 모두가 자유와 안전을 동등하게 보장받으며, 더불어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


1918년 12월 5일, 윌슨은 조지워싱턴호에 올라 파리를 향해 출발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의 해외 방문으로는 사상 최초였다. 그리고 이 방문의 역사적인 의의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전에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일단 휴전에 들어간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에 도착한 윌슨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평화의 사도, 새로운 세계의 예언자처럼 받들어졌다. 그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건 세계 각국의 약소민족들이 줄줄이 청원서를 들고 왔다. 신한청년단이 파견한 김규식도 한국독립을 청원하는 서한을 윌슨에게 전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담소하는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 오를란도 이탈리아 수상,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 윌슨.(왼쪽부터) <출처 - Ssolbergj at en.wikipedia.org>

 

 

 

그러나 1919년 1월 18일(48년 전 같은 날 독일제국이 수립되었다)부터 시작된 파리강화회의는 이상과는 거리가 먼 힘 위주의 현실이 지배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도 불구, 독일은 영토의 육분의 일을 내주어야 했다. 또한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하며,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고, 최소 규모의 군대만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했고, 투르크도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패전국들, 특히 독일에 대한 이처럼 가혹한 처분은 국민적 원한을 남김으로써 결국 나치스의 집권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약소민족들의 염원도 아랑곳없이 승전국들은 기존 식민지를 그대로 보유했고, 러시아에는 사회주의 정부를 쓰러트리려는 각국의 침략군이 속속 투입되었다.
 
윌슨은 베르사유조약에서 국제연맹의 수립이 결정된 점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국내 여론이 고립주의로 급격히 선회했던 것이다. 미국 사상 유례가 없었던 ‘전시체제’를 너무 급격히 해체한 후유증도 크게 작용했다.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은 4백만 명의 퇴역군인들은 대책 없는 실업자로 사회에 돌아갔고, 전쟁 중에 폭등했던 농지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가의 파산이 속출했다. 여기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나서면서 경제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따라서 “이 판국에,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에서 뭘 하는지, 자르가 독일로 갈지 프랑스로 갈지 따위가 미국에게 무슨 상관인가?”와 같은 인식이 급증했으며, 결국 1920년 3월에 미국 상원은 베르사유조약 비준을 부결했다.

 

 

 

윌슨은 국민에게 직접 국제연맹 참가의 당위성을 설명하려고 전국을 다니며 강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치명적인 현실이 그를 가로막았다. 바로 그 자신의 건강이었다. 어려서부터 허약했던 그는 대통령이 되기 직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의 심각한 질병을 앓아, 그의 주치의는 “과연 임기를 다 채울 수나 있을까”라고 염려했다고 한다. 윌슨은 임기를 채웠을 뿐 아니라 재선까지 해냈지만, 상태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파리강화회의 무렵에는 이미 정상적인 집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가 보다 건강했더라면 파리강화회의의 결과도 달랐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결국 올 것이 왔다. 1919년 9월 25일, 그는 콜로라도의 푸에블로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목숨은 건졌지만 반신이 마비되고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백악관은 윌슨의 병세를 숨겼고, 상원에서 조약 인준이 부결되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강연회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1921년 3월, 그는 휠체어에 타고 백악관을 나왔다. 그리고 나날이 악화되는 건강 속에서 실의에 빠져 살다가, 1924년 2월 3일에 숨을 거뒀다.

 

윌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상의 실현을 위해 희생할 의지와 힘을 가진 나라, 그런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은 과연 누구의 이상일까. CIA가 다른 나라 대통령의 진퇴를 결정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위해” 전쟁을 벌여 고귀한 생명을 수없이 날려 버리는 나라. 그런 나라로 나아가도록 문을 활짝 연 장본인은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철학자적인 대통령이었다. 


뇌졸중 발작 직후의 윌슨. 정상인 것처럼 연출해 찍었으나 그는 이미 정상적인 집무가 거의 불가능했다. <출처 - Durova at en.wikipedia.org>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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