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의 원리와 수필의 재미
- 수필시대 11-12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문학의 속성으로 ‘교훈성’과 ‘쾌락성’을 든다.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글이 좋은 글이라 할 수 있겠지만 두 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훈성을 자기 성찰을 통한 깨달음을 독자에게 전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쾌락성은 여러 문학적 장치를 말하겠지만, 본고에서는 아주 쉽게 ‘재미 혹은 눈길을 끄는 에피소드’라고 보고 평을 전개해 나가보고자 한다.
수필은 자기고백적 문학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자기 반성적인 성찰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가끔씩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가치를 두는 면에 있어서 좀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 그 모티브를 어디서 어떻게 구하느냐는 것이 작가의 관심사이며 발견한 제재를 상관화와 동화의 단계를 거쳐 성찰의 단계까지 이끌어나가면 좋은 수필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된다. 물론 수필가이니만큼 주제적 면이 아닌 구성이나 표현의 아름다움을 기하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평자가 졸서 ‘수필미학론’에서 정리했던 것처럼 본격수필의 네 단계 원리 중 마지막 원리는 성찰의 원리다. 이는 수필이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문학으로서의 특성을 갖고 있고 작가의 인품과 융화되어 문학성을 가질 때 독자에게 또 그 자신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수필의 기본이 되는 문학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찰의 내용은 가치로운 것이어야 하며 또 남들이 쉽게 찾아내지 못한 새로운 시각을 통해 본 성찰이어야 할 것이다. 보편화되어 있어 진부해져 버렸거나 독자가 동조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면 감동의 물결은 끝자락도 잡지 못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수필을 쓰는 이는 누구나 자신의 글이 많이 읽혀지기를 원할 것이다. 읽혀지는 글이 되기 위해서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재미는 글의 짜임이나 인용, 수식이나 비유, 전개의 방법 등등 여러 가지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관심이 가는 일화, 그것도 상관성이 떨어지는 소재를 주제와 절묘하게 매치시켰을 때 느끼는 재미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게 한다. 오정순, 우미정, 한계주, 김미숙의 수필에서 이런 성찰과 일화를 통한 재미를 만날 수 있었다.
Ⅱ.
오정순의 <참새 방앗간>은 흔들리기 쉬운 우리 인간의 본성을 다룬 작품이다. 야릇한 중독증세를 앓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드러냄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잡아놓는다. 계속 읽어가면 어느 순간엔가는 독자 자신이 쇼핑에 목말라하거나 게임이나 골프 등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어서 재미에 빠져버려 소위 매니아가 되는 모습을 되돌아보고 어느 새 독자들은 작가에게 동조하게 된다. 수필 감상에서 감동이란 바로 작가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런 공감이다.
서두에서 ‘한동안 나는 야릇한 중독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남들이 일으키는 이러저러한 사회적 현상을 접하면서 나에게만큼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고 한 전제가 결말에서는 ‘속으로라도 비웃고 욕했던 세상 사람들 속에는 다 내가 있었다. 용납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나름의 이유 있는 행동을 하며 살아남는 것이었다.’라고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된 것은 글의 전개과정을 통해 자신의 참새 방앗간 드나들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독자에게 가지게 되는 연민, 일시적 중독을 가슴 비우는 출구로 정의하는 작가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 나타난 중독 증세를 자신의 삶에 병균이 들어와 자신을 지배한다고 한 처절한 자기고백과 반성에 힘입은 것이다. 누구나 금기시하는 ‘중독’이란 낱말에 숨통을 터주는 작가의 성찰이 새롭다. 결말부의 문장 속에 나타난 ‘용납할 수는 없지만’이란 어구가 작가의 성찰에 대해 독자의 동의를 좀더 쉽게 얻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수필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은 어차피 교훈의 기능,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태도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미정의 <미쳐야 꽃이 핀다>는 꽃이라는 실로 짠 타피스트리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제재와 연관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엮어 만든 타피스트리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보니 그 속에 주제가 구현되어 있는 그런 양상을 보인다. 머리에 꽃을 얹었을 때에만 즐거워 보이는 친구의 큰언니를 시작으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강혜정, 그녀는 동막골 사람들과 북한군들의 전투 중에 머리에 꽃을 꽂고 나타남으로써 난장판을 진정시켜 버린 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가까운 과거의 철쭉과 남편간의 소통을 그리고 현재 자신이 읽고 있는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을 통해 자신을 꽃처럼 피워낸 사람들을 끌어낸다. 그리고 드디어는 진짜 꽃들에게로 상념의 방향을 틀었다가 그 꽃들을 통해 얻은 생각을 자신에게로 옮아와 ‘살면서 나만의 꽃을 피우는 일은 나를 수식하는 이름 하나 세상에서 얻는 일이겠다.’는 성찰을 얻어내고 결말에서 희망의 씨앗 하나 조심스럽게 품게 되는 것이다. 서두르거나 길이를 위해 무리를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제재들을 사용하면서도 수예작품의 고가 나가지 않게 세심하게 틀을 짠 작가의 역량이 작가의 성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머리에 꽃을 단 여성’은 그가 누구이든 관심의 대상이 된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에 지나치던 이도 한번 더 돌아보게 마련인 사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기도, 그 자유로운 정신세계에 위안의 눈길을 보내보기도 하는 대상이지 않은가. 총구를 막은 하얀 손가락을 무시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구에서 마술처럼 꽃 한 송이가 피어나올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영화 속 강혜정의 똥그란 눈동자 또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재가 된다. ‘미친 년 프로젝트’에서 본 사진들 또한 관심을 끈다. 미친 여자가 관련된 네 가지 제재를 통해 펼쳐낸 생각의 고리는 ‘일반적 상식의 시각으로만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는 성찰을 전개부에 심게 한다. 그러나 가장 멋진 문구는 ‘미쳐야 꽃이 핀다’가 아닐까. 꽃이란 태생적으로 여성적이다. 외모의 아름다움, 연약함, 씨앗을 배태하는 것 등등. 어쩌면 이 글을 엮는 데 쓰인 ‘꽃’과 관련된, 혹은 ‘미친 것’과 관련된 제재들을 통해 작자는 자신도 모르게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면 내 생각이 과한 것일까.
한계주의 <사이코패스>는 최근에 실제로 일어난 연쇄살인범의 극단적인 어두운 면을 통해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잃은 인간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사회구성원의 인식을 촉구하는 글이다. 연쇄살인범 황 아무개의 범죄는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두려움이다. 이런 생생한 제재를 가지고 옴으로써 작가는 독자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독자가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 인간성에 대한 두려움은 작가가 제시하는 대량사육 양돈사의 비생명존중의 실태로 인해 증폭된다. 동물도 살아있으며 인간보다는 못하더라도 본능과 감성이 있는 존재이다. 오로지 인간의 먹이가 되기 위해 최소한의 움직임까지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을 보며 작가는 ‘살아있는 동안은 짐승다운 삶을 살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한탄한다. 여기까지는 마음이 편치 않다가 드디어는 2백억 만 년 세월의 기억을 담고 있다는 DNA에까지 생각이 가고, ‘억겁 윤회를 거친 내 몸에 저장된 DNA속에 담긴 어두운 인자가 내 몸 속에도 있을 것 같은 불안에 남의 생명을 빼앗고도 뻔뻔스런 사람들을 마구 비난하지 못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사이코패스를 주제재로 다루면서 그런 어두운 그림자가 자기 안에도 잠재되어 있을까 두려워함은 얼마나 적극적인 자기반성인가. 하지만 그렇게 결구는 맺어졌어도 독자는 자신을 포함한 사회 전체로 시선을 돌린다. 목소리만 크다고 남을 설득할 수는 없는 법, 작가는 자신을 비판하는 겸허한 태도로 인해 사회에 더 큰 울림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제의 무게나 호기심을 끄는 제재의 선택, 사이코패스의 비인간적, 비논리적 행태와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보통 사람들의 동물학대의 현장을 ‘생명존중’이라는 주제를 끌어내는 재료로 활용한 점이 재미를 준다. 문단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데 좀더 신경을 썼더라면 눈으로 보는 재미와 생각이 한 덩어리씩 정리되어 연결되는 문장론적 멋을 맛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김미숙의 <에지edge>는 피겨 퀸이자 국민 영웅인 김연아를 제재로 하여 자신의 발전을 위한 수양과 단련을 결심하는 자기반성적 수필이다. 김연아에 대한 이야기는 뉴스나 잡지를 통해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국민 모두가 그 아름다운 공연과 성취에 매료된 만큼 일단은 눈길을 끄는 제재가 된다. 거기다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피겨의 전문용어나 김연아에 대한 일화를 아는 재미가 쏠쏠한데 거기다 아사다 마오와 비교를 하는 통에 더 읽는 재미가 난다. 하지만 재미만 느끼며 죽 읽어나가다 보면 느낌은 머리에만 머물고 가슴에 내려오질 못하는 법, 작가는 결말부에 이르러 드디어 자신을 글 속에 불러들인다. 결말부로 갈수록 연아의 빙판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작가의 태도는 성숙해진다. ‘안쪽 날을 쓸 때 안날을 쓰고, 바깥쪽 날을 쓸 땐 바깥날을 써야 하는 것, 쉬우면서도 또한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라는 인식이 ‘에지’라는 제목에 힘을 싣는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을 세우는 일이 더러 있다. 스스로를 다그치며 자신 속의 모난 부분들을 억지로 쳐내려다 상처받은 이는 작가 자신이었기에 이제 작가는 연아처럼 날을 쓰는 기술이 섬세해질 때까지 오르고 또 뛰어 올라 자신의 모를 보다 성숙하게 다스릴 수 있는 내일을 위해 에지를 자신의 강점으로 삼아보리라는 결심을 한다.
처음부터 글의 80% 정도를 김연아에 관한 이야기로 일관하였다. 주제를 나타내는 데 꼭 필요한 제재라고 하더라도 좀 많은 느낌이 든다. 수필의 완성 요소에는 '균형성'이라는 게 있다. 에지와 관련되면서 같은 주제와 연관시킬 수 있는 일화가 더 가미되었다면 단조로운 느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긴 글의 마지막에 가서만 의미화를 이루는 것도 글을 단조롭게 한다. 중간 중간 필요한 부분에 자신의 목소리를 배치하는 것도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의미화를 이루고 다음 문단과 연결시키거나 일관성 있게 주제를 향해 글을 진행해 나간다면 읽는 재미를 더 줄 수 있을 것이다.
Ⅲ.
삶을 성찰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반성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미, 천천히 맛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건이고 인간은 성찰의 존재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수필의 감동은 솔직한 자기고백에서 시작하고 자기 반성에서 끝을 맺는다. 반성은 그 강도가 강할수록 자기 체험의 가치를 높여준다. 그리고 반성적 성찰이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힘이 되는 것이며 독자에게는 감동을 주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서술방법의 신선한 도전이 눈에 띄는 노정숙의 <冊책, 울다>, 리듬감 있는 문장을 따라 읽다보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박용수의 <내 마음의 완행버스>, 사소한 일상사에서도 깊이있는 삶의 성찰을 이루어낸 최원현의 <계단을 오르며> 등도 좋은 수필이나 다루지 못하였다. ‘성찰과 호기심을 끄는 에피소드를 활용한 수필’이라는 것에 평의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수필이 힘의 문학으로 변용되어 인류 구원이라는 문학의 사명에 값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