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2] 최봉춘(崔奉春) - 일본 개척의 감회 3. 밀항과 수감 - 1
1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밤늦도록 기다려도 배는 오지 않았다. 밤 12시경에 바다가 보이는 숲속에 숨어 있었다. 마침 밀선이 와서 타게 되었는데 그 배의 안내자는 경관이었다.
2 그들에게 잡혀가서 두들겨 맞고 다시 풀려나왔다. 또 기다리다가 배가 와서 타면 경관이 다시 나타나 우리를 잡아가서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내기를 석 달.
3 그 후 선생님은 직접 쓰신 편지와 함께 사람 한 분을 보내셨다. 그 편지에는 일본에 가는 것을 그만두고 올라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렇게도 굳게 결심해 가지고 떠나온 내가 어떻게 선생님을 뵈올 수 있겠는가.
4 선생님께서 올라오라는 명령을 하셨는데 그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어서 선생님께 “3일만 저에게 여유를 주십시오, 내가 3일 안으로 출국을 못하면 헤엄을 치고 바다를 건너다가 죽더라도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하는 말씀을 전달했다.
5 그 후 3일 만에 기다리던 배가 왔다. 그때는 일본 왕래의 정식 통로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노정을 거쳐 1958년 6월 15일 밤 일본행 밀항선에 올라 6월 17일 밤 일본 고쿠라항(小食港)에 입항하였다. 그러나 상륙 허가를 얻지 못해 온 종일을 배 안에서 보내고 18일 하오 이와쿠니(岩國)를 향해 떠났다.
6 6월 22일 히로시마(廣島)에 기착했으나 역시 상륙허가를 얻지 못해 구레(契)를 목표로 다시 항해 중 하오 3시 반경 드디어 구레해 상보안부의 경비정에 발견되어 연행되었으며, 22, 23 양일간 취조를 받다가 저녁에 결국 밀입국 혐의로 정식 유치되었다.
7 이튿날 24일, 다시 끌려 나와 창고방에서 매를 맞고 머리를 잡고 땅에다 내리찧기는 곤욕을 치렀다. 25일 아침에 검찰청에 송치되어 정식 입건되고 저녁때 요시우라(吉痛) 구치소로 이송됐다.
8 2사 2방(二舍二房) 수인번호 60번, 권순남(權順南)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나 지문 조회 결과 본명이 밝혀졌다. 살인범 절도범들과 구류되었지만 일본 복귀의 한날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9 구류 만기로 석방될 것을 기대했으나 결과는 선장 등 주요 선원 수 명과 함께 기소 처분을 받았다. 일행 30여 명이 있었지만 내가 6개월이라는 중형을 받은 것은 성경과 원리해설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갖고 있던 소지품까지 몽땅 잃어버렸고 수중에는 돈 한 푼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