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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정복 전쟁(2)
주임교수 추천 0 조회 102 16.10.29 06: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스만의 유럽 정복 전쟁(2)_200여 년에 걸친 팽창

모하치 전투

모하치 전투

오스만의 유럽 정복 전쟁 전쟁 개요

전쟁주체
오스만투르크 제국, 헝가리,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도바, 신성로마제국
전쟁시기
1389년-1529년
전쟁터
현재의 발칸반도, 그리스, 중부 유럽, 흑해연안
주요전투
코소보 전투(1389/1448), 바르나 전투, 베오그라드 공방전, 바스루이 전투, 타르고비스테의 야습, 모하치 전투, 빈 공방전

 

“나는 이교도들의 오른팔을 잘랐도다”

서남부 유럽(발칸반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오스만투르크는 항구가 필요했다. 지중해의 해상무역에서 경쟁상대인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을 누르려면 항구를 많이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광범위한 정복활동에 수반되는 많은 병사들과 보급품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서라도 항구는 매우 중요하였다. 콘스탄티노플과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을 점령하면서 흑해의 중요성은 증가하였고 흑해에서의 해상활동에는 제노바가 장악하고 있는 크림반도의 카파와 함께 몰도바 왕국에 있는 칠리아와 아케르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도나우강 유역의 주요관문이며 흑해에서 몰도바와 왈라키아를 거쳐 폴란드 내륙에까지 이르는 교역망의 출입구였기 때문이다. 이 두 항구를 차지하기 위하여 몰도바, 왈라키아, 제노바,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오스만투르크가 이 두 항구를 중요시한 데는 군사적인 이유도 컸다. 만약 이 두 항구를 오스만투르크에게 적대적인 기독교 세력이 장악할 경우 왈라키아나 헝가리, 폴란드 등의 병력이 집결하여 새로이 투르크의 수도가 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1600년대 몰도바, 트란실바이나, 왈라키아의 위치

1600년대 몰도바, 트란실바이나, 왈라키아의 위치

 

 

앞에서 등장한 헝가리의 야노스 훈야디는 트란실바니아의 군주가 된 후 헝가리 왕국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1448년에 칠리아를 몰도바왕 페트루에게 ‘하사’받아 중요한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였다. 이후 몰도바의 군주들은 헝가리에게 넘어가 버린 칠리아를 찾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1462년에 몰도바의 왕인 스테판 3세는 자신의 친척인 왈라키아의 블라드 3세가 투르크와 싸우고 있었음에도 아랑곳없이 기독교도로서 무슬림인 투르크 황제의 후신(候臣)을 자처하였고 투르크와 동맹군을 이루어 칠리아를 공격하였다. 칠리아에 주둔해있던 왈라키아 병력은 헝가리의 도움을 받아 동맹군을 물리쳤으나 이후 블라드가 헝가리에서 감금되어있는 상황에서 왈라키아 병력은 어느 쪽(블라드와 라두)에게 충성할지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스테판은 칠리아를 몰도바에게 주라는 폴란드왕의 서신을 확보하여 칠리아의 수비병들에게 보냈고 피를 흘리지 않고 칠리아를 확보하였다. 이에 화가 난 헝가리왕 마티아스(야노스 훈야디의 아들)은 1467년에 군을 동원하여 몰도바를 쳤으나 바이아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그러나 라두가 왈라키아의 군주이자 오스만 투르크의 제후가 된 상황은 몰도바에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오스만투르크는 칠리아를 확보함과 동시에 몰도바를 완전히 복속시켜 크림반도와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친(親) 투르크 왈라키아는 몰도바 공격에 좋은 교두보가 됨과 동시에 투르크의 원정군에 왈라키아 병력을 제공하여 줄 수도 있었다. 이에 스테판은 베사라브 라이오타란 인물을 왈라키아의 군주로 내세웠다. 라두/메흐메트와 라이오타/스테판은 엎치락 뒤치락 승패를 주고 받으며 1474년까지 싸웠고 결국 스테판이 이 대리전에 직접 개입하여 오스만/라두 동맹군을 격파하고 라이오타를 왈라키아의 군주로 세운다. 그러나 라이오타는 이듬해에 스테판을 배반하고 오스만의 제후가 되었고 왈라키아에서 스테판의 ‘장난질’을 보다 못한 메흐메트는 스테판에게 이스탄불로 와서 제후로서의 인사를 할 것을 명하였다. 스테판은 이를 거절하였고 거절은 바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메흐메트 2세는 1474년 12월에 6만이 넘는 오스만군을 동원함과 동시에 왈라키아의 꼭두각시인 라이오타의 1만 7천, 그리고 불가리아에서 2만의 장정들을 급하게 징집하여 결성한 약 10만의 대군으로 몰도바를 치고자 하였다. 오스만군의 지휘는 고위 관리인 하단-파샤가 맡았다. 스테판은 약 4만의 병력을 동원함과 동시에 몰도바에 살고 있던 헝가리계 주민인 제켈리인들, 그리고 헝가리와 폴란드 병력 약 1만을 더하여 오스만군과 맞섰다. 스테판은 원정군인 오스만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일종의 청야(淸野)전술을 폈고 오스만군은 겨울추위를 피함과 동시에 대군을 쉬게 할 곳을 찾기 위하여 몰도바 중부에 있는 도시인 바스루이로 향하였다. 스테판은 바스루이 근처의 지형을 십분 이용하여 소규모 병력을 보내어 두 개의 고지 중간에 있는 좁은 계곡으로 오스만군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계곡 동쪽에 있는 고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스테판은 유인작전으로 오스만군이 계곡에 깊이 들어왔다고 여긴 순간에 고지에 매복시킨 병력을 돌진시켰다.

 

폴란드의 사가(史家)인 요아네스 디우고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의 전사자는 4명의 ‘파샤’를 포함하여 무려 4만 5천에 달하였고 패주하는 오스만군은 몰도바군의 추격에 쫓겨 도나우강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군이 기독교도들과의 전쟁을 시작한 이래 거의 최악의 참패로 손꼽힌다. 물론 1456년의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패하기는 하였지만 바스루이처럼 성에 대한 공방전이 아닌 야전에서 상대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패한 경우는 없었다. 이 전투에서 이긴 스테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교도들의 오른팔을 잘랐도다”

물론 오스만군은 다음해에 설욕전에 나서 1476년에 발레아 알바의 전투에서 몰도바군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바로 농성에 돌입한 몰도바군을 깨지 못하고 변변한 성 하나 차지하지 못한 채 물러나와야 했다. 그러나 몰도바는 오스만투르크의 막대한 병력자원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1484년에 술탄인 바야제트 2세가 파견한 투르크군은 칠리아와 몰보다의 해안 유역을 모두 점령하였다. 비록 완전히 점령당하지는 않았지만 몰도바는 주요 무역항을 빼앗기면서 내륙국가가 되었다. 이는 1482년에 보스니아 전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수중에 들어간 사건과 겹쳐 발칸의 기독교국가들이 오스만투르크와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오스만투르크의 약진과 유럽의 안일함

발칸반도의 기독교 국가(특히 헝가리)들이 오스만투르크군을 맞아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에도 프랑스나 독일(신성로마)는 동유럽의 상황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1396년에 니코폴리스에서의 패배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 이후 헝가리, 왈라키아, 몰도바 등의 선전으로 전선(戰線)은 발칸반도 남쪽에 머물러 있었다. 그나마 헝가리가 카톨릭 국가였기에 교황청에서 헝가리 왕가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등 관심을 보였지만 1396년의 패배가 뼈아픈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은 ‘남의 일’이었다. 몰도바의 스테판 3세가 바스루이에서 오스만군을 크게 무찌르고 유럽국가들에게 지원을 청하였을 때도 폴란드만이 관심을 보일 뿐 서유럽의 국가들은 지원은커녕 몰도바의 지원요청을 들은 체 만 체하였다. 결국 서유럽국가들의 무관심 속에 발칸반도의 기독교도들은 목숨을 걸고 오스만투르크와 싸웠다.

 

1479년 오스만투르크는 다시 세르비아 방면으로 쳐들어왔다. 이때의 침공은 점령전이라기 보다는 국경지역을 약탈하고 소란스럽게 만들어 기독교 국가들을 피로하게 만들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헝가리를 위시한 동유럽 기독교도들과의 정면대결에서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자 오스만투르크가 작전을 바꾼 것이다. 오스만투르크군의 대부분은 경무장(輕武裝)의 약탈부대인 ‘아킨지’였다는 것만 보아도 투르크군의 목적이 약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해 10월에 벌어진 ‘빵의 들판’(현재 루마니아 시보트) 전투에서 헝가리-세르비아 동맹군 1만 5천은 투르크 약탈군 2만을 대파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헝가리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창설한 ‘검은 군단’이 큰 역할을 하였고 그 중에는 발칸 역사에서 천하장사로 유명한 팔 키니치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두 자루의 대도(大刀)를 마치 작대기처럼 휘두르고 세 명의 투르크인을 양팔과 이빨의 힘으로 가볍게 나르는 이 장사의 활약으로 호되게 당한 오스만 투르크군의 약탈군은 수년간 세르비아 국경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헝가리에 있는 마티아스 왕의 흉상

헝가리에 있는 마티아스 왕의 흉상

 

비록 헝가리군이 세르비아 방면에서 투르크군을 막기는 하였지만 알바니아 쪽 사정은 좋지 못하였다. 알바니아군을 효과적으로 이끌던 스칸데르베우가 1468년에 사망한 이후 알바니아군은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460년대와 1470년대에는 베네치아가 동부 지중해에 걸쳐 보유하고 있던 거점들이 하나 둘씩 오스만투르크의 진격 앞에 무너져갔다.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협력관계에 있었지만 스칸데르베우의 사망 이후 지리멸렬하던 알바니아는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고 1479년에 크루예의 함락으로 알바니아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에게해의 여러 거점이 오스만 수군에게 점령당하고 1479년에 베네치아가 알바니아에 보유하고 있던 최대의 거점인 슈코드라가 오스만군에게 무너지며 베네치아의 지중해 무역은 중대한 타격을 받았다. 1480년대 초반에는 헝가리군이 보스니아의 일부를 회복하였지만 곧 상실되고 앞서 이야기한대로 1482년에 보스니아는 완전히 오스만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다. 마티아스의 ‘검은 군단’은 1480년대에 걸쳐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로 진격해오는 투르크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여 스레야닌과 테메슈바르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하였으나 주변국들이 거의 모두 오스만제국의 편이 되거나 복속된 상태에서 헝가리 하나로는 오스만제국군에게 역부족일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의 동쪽 끝에서 오스만군의 맹공을 버티던 몰도바마저 1486년에 오스만술탄 바야제트 2세의 군대 앞에 굴복하고 술탄의 권위에 확실히 복속된 제후국이 되었다.

 

마티아스왕이 사망한 후 헝가리의 왕좌가 공석이 되지 신성로마군이 헝가리에 진주하였고 이어 1490년에서 1494년까지 헝가리에서는 왕위계승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신성로마를 등에 업은 폴란드왕 카시미르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가 블라디슬라프 2세로 등극하였다. 전 왕인 마티아스가 육성한 ‘검은 군단’의 병사들은 블라디슬라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가 해체되는 비운을 맞는다. 근 80년에 걸쳐 중부유럽을 지켰던 헝가리가 약화되자 오스만군의 진격은 거칠 것 없었다. 1493년에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동맹군이 현재 크로아티아 남쪽의 클바바(Krbava)에서 오스만투르크군에 궤멸되면서 아드리아 해안 전체가 오스만투르크군에 노출되었다. 투르크군은 해안을 타고 진격하면서 1503년에는 잠시이긴 하지만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출하였다. 서유럽 국가들은 동로마가 무너진 후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에 대한 방벽의 역할을 하던 헝가리가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같은 카톨릭 국가인 헝가리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신성로마의 경우처럼 그 불행을 틈타 한 몫 챙기려 하였다. 다행히 1500대 초반에 오스만 제국의 동쪽 이란 지역에서 이스마일이 사파비 왕조를 세우고 오스만제국에 대한 변방민들의 반란을 사주하는 바람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오스만군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유럽에 대한 압력이 잠시 해소되었다. 1509년에 이스탄불이 대지진으로 파괴되고 1510년-1512년에는 그의 두 아들인 셀림과 아흐메트가 왕위쟁탈전을 벌이면서 오스만 제국의 정국은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바에지트 2세는 결국 왕위계승전에 승리한 셀림에게 반강제로 황위를 내어준 후 셀림이 마련해 준 은거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한다. 새로이 술탄이 된 셀림 1세는 새로이 세워진 사파비 왕조와의 전쟁, 그리고 남방(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헤자즈)원정에 군사력을 집중하느라 유럽전선에서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셀림 1세는 사파비 왕조군을 칼디란에서 쳐부수고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꺾어 이집트를 제국의 영토로 만드는 등 정력적인 정복활동을 펼쳤다. 남방원정를 마친 후 셀림은 다시 유럽, 특히 헝가리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20년에 사망한다. 이에 그의 아들인 술레이만이 술탄이 되었고 후일 대제(大帝)로 불리는 술레이만 1세의 치세하에 오스만제국은 그 절정기를 맞게 된다.

 

 

술레이만 대제

술레이만 1세는 즉위하자마자 대외원정 준비에 착수하였고 그 방향은 아버지 셀림 1세가 죽기 전 공격하려 하였던 헝가리였다. 오스만투르크가 사파비 왕조와 맘루크 왕조 등의 강적들을 연이어 격파하고 국세(國勢)가 크게 성장한 반면에 헝가리는 연이은 왕위 다툼으로 인하여 왕계(王系)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정치가 혼란스럽고 왕의 권위도 제대로 서지 않았다. 1490년에 ‘검은 군단’을 이끌었던 마티아스 왕이 죽은 후 신성로마의 입김으로 인하여 헝가리인이 아닌 외부인(리투아니아계) 야기엘론 왕가의 블라디슬라프 2세가 왕으로 섰다. 새로운 왕가는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중간층과 함께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고 블라디슬라프가 늙어가면서 왕권이 약해지는 기미를 보이자 1514년에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야노스 자폴랴(Janos Zapolya)를 비롯한 귀족들은 왕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군을 움직여 농민반란을 짓밟았다. 이후 1516년에 블라디슬라프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라요스(루이) 1세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불과 10살의 소년에 불과하였기에 주변의 귀족들과 함께 야기엘론 왕가의 ‘후견’세력이었던 신성로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은 더욱 높아졌다. 실제로 라요스는 아버지 블라디슬라프의 사망 후 신성로마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의 양자로 입적이 된 상태였고 야기엘론 왕가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와 마찬가지로 ‘황금양털 기사단(Order of the Golden Fleece)’의 일원이며 이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왕가는 야기엘론 왕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더더욱 강해졌다. 1522년에 라요스는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와 결혼하였고 헝가리는 거의 합스부르크의 위성국이 되었다.

 

라요스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521년, 오스만투르크의 술레이만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유럽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기 때문이다. 소년왕 라요스는 귀족들에게 농민들과 의화의 중간층과 농민들과 싸우는 것을 중지하고 투르크의 진격을 막는데 집중하여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나 귀족들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으며 결국 1521년에 난공불락의 도시였던 난도페헬바르(베오그라드)는 오스만투르크에게 함락되었다. 그리고 현재 세르비아 북부인 사바츠도 함락되었는데, 이때 이미 발칸국가들은 모두 오스만투르크의 영토가 되거나 복속이 된 상태였고 헝가리만이 남아있었다. 술레이만 1세의 1526년 원정은 소소한 약탈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헝가리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중부유럽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헝가리를 무너뜨리면 다음 목표는 신성로마였고 그 다음에는 유럽전역이었다. 술레이만 1세의 목표는 단순히 영토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전 무슬림의 영도자로서 진정한 신인 알라를 믿는 자들이 사는 땅, 즉 ‘복종의 영역(다르 알-이슬람)’을 넓힐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모하치 전투

술레이만 1세는 헝가리를 공격하기 전에 라요스에게 ‘평화’를 몇 차례 제안하였지만 라요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오스만투르크와 비교하여 확실히 열세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라요스가 술레이만의 평화제안을 어찌하여 거부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술레이만의 제안은 헝가리의 복속, 또는 최소한 오스만투르크가 헝가리로부터 빼앗은 남부의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헝가리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울러 1526년에는 본격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오스만투르크의 약탈부대에 의한 소규모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 약탈부대에 마저 밀리면서 변경부락들을 하나 둘씩 빼앗기고 있던 것이 헝가리의 상황이었다. 라요스는 잃어버린 영역을 하나하나 찾을 여력은 없다고 생각하고 만약 큰 회전(會戰)에서 투르크군을 꺾을 경우 모든 것을 한꺼번에 찾을 수 있다고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군과 싸우는 것마저도 라요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스만투르크군이 이스탄불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라요스는 주요 귀족들을 동원하려 하였지만 약속한 날에 군진에 도착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라요스가 스스로 무장하고 군진에 나타났을 때에야 굼뜨게 움직여 군진에 하나 둘 도착하였다. 오스만투르크와 싸울 헝가리군 부대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라요스가 지휘하는 본군이었고 야노스 자폴랴가 트란실바니아에서 군을 이끌고 오기로 되어있었으며 크로아티아의 프란코판이 다른 부대를 이끌고 오기로 하였다. 이들이 군을 합친다면 약 4만정도가 모일 수 있었으나 술레이만이 1526년에 동원한 군은 10만에 달하였다. 헝가리군은 대부분이 기사, 그리고 활과 단병기를 든 보병부대였던 데 비하여 오스만군은 보병 중 상당수가 화승총을 가지고 있었고 다양한 구경의 포를 160문이나 동원하였다. 즉 헝가리군은 수적으로도 열세인데다가 구식무기를 들고 당시로서는 최신무기를 보유한 적과 싸우게 된 것이다.

 

헝가리군은 모하치에 먼저 도착하여 며칠을 쉬면서 장거리 행군의 피로를 덜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오스만투르크군은 찌는 듯한 더위에 행군하였고, 전장에 도착하였을 때 헝가리군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위에 찌들고 지친 오스만군이 도착하였을 때가 헝가리군으로서는 최고의 기회였으나 먼 행군에 노곤한 상대를 치는 것은 ‘떳떳하지 않다’고 하여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비록 일종의 야담이라 실제로 그러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서양판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술레이만 대제 초상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술레이만 대제 초상


지금의 부다페스트 남쪽인 모하츠에서 1526년 8월 29일에 헝가리군과 격돌하였을 때 초반에는 헝가리군이 유리하게 보였다. 콜로챠의 주교이자 장군인 토모리가 이끄는 중기병이 오스만군의 좌익에 있던 비정규병들을 들이치면서 거세게 몰아붙였고 술레이만에게 화살을 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다고 한다. 그러나 예비대로 있던 오스만의 예니체리가 투입되면서 헝가리군의 기세는 꺾였고 오스만군의 화승총과 야포사격으로 헝가리군은 도리어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만다. 헝가리군은 재차 공격을 하고자 하였으나 오스만군의 사격을 견딜 수 없었다. 헝가리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였고 곧이어 오스만군의 총반격이 이어지면서 헝가리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헝가리군의 지휘관인 토모리가 전사하고 무려 1만 5천의 헝가리군이 시체가 되어 모하치의 늪지대에 쓰러졌다. 전투 종료 후 술레이만은 포로를 잡지말고 모두 죽일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수천의 헝가리군 포로가 술레이만이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라요스의 군은 사라졌고 술레이만은 선대(先代) 술탄들을 괴롭혔던 강력한 헝가리군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진 사실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술레이만 1세는 혹시라도 후속부대가 있을까하여 모하치 근처에 머무르면서 주변을 정탐해보았으나 어디에도 후속부대는 없었다.

 

오스만군이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에 입성하였을 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헝가리는 사실상 몰락한 것이다. 비록 1526년에 야노스 자폴랴가 하급 귀족들에 의하여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신성로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를 헝가리 왕으로 내세웠다. 자폴랴는 할 수 없이 스스로 술레이만 대제의 제후가 되었고 헝가리는 신성로마가 장악한 지역과 오므만투르크 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헝가리 지역은 신성로마와 오스만투르크가 벌이는 패권전쟁의 전장으로 변하였다. 11세기에 건국되어 4세기동안 부유한 왕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던 강대국 헝가리의 역사는 모하치의 전투에서 종언을 고한 것이다.

 

 

빈 공방전

야노스 자폴랴와 대립하고 있던 페르디난트는 1527년에 헝가리 전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1527년에 부다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때 마침 술레이만 1세는 사파비 왕조와의 분쟁때문에 페르시아 방면에 가 있었고 페르디난트를 막을 수 없었다. 1529년에 페르시아와 휴전을 약속한 후 술레이만 1세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유럽으로 향하였다. 이번 전쟁의 목표는 신성로마로 넘어간 헝가리의 영역을 모두 차지하고 중부유럽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술레미만 1세는 기록에 따라 12만에서 35만의 대군(필자는 전자를 택한다)을 이끌고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중간에 헝가리에 들렀다. 그의 제후가 된 헝가리왕 야노스 자폴랴는 6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중나왔고 군을 합친 두 사람은 빈으로 향했다.

 

술레이만 1세가 빈에 도착했을 때 빈의 상황은 수비군에게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빈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두께는 불과 2미터에 지나지 않아 공성무기의 공격을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그나마 수리도 잘 이루어지지 않아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전투에서 보았듯이 오스만투르크는 당대 어떤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는 거대한 공성포를 여러 기 보유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도 제대로 버티어내지 못한 투르크의 공성포를 상대적으로 허술한 빈의 성벽이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신성로마의 황제는 프랑스와 교황청과의 대립으로 인하여 빈의 수비에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빈의 수비는 페르디난트에게 맡겨졌다. 수비대장이 된 페르디난트는 수성전에 관한 구체적인 상황을 70살의 노장인 살름 공(公) 니콜라스에게 일임하였다. 니콜라스는 1476년부터 무려 50년을 넘도록 유럽의 전장을 누빈 노련한 군인이었고 그는 매우 효과적으로 준비작업에 임하였다.

 

일단 성안에 있는 사람들 중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후방으로 보냈다. 이는 약자를 고려했다기 보다는 장기전을 대비하여 식량의 소비를 줄이려는 방책이었다. 아울러 빈 앞의 민가(民家)는 모두 철거되었다. 비정한 조치이기는 하지만 사격에 필요한 시야를 확보함과 동시에 오스만군이 사용할 수 있는 엄폐물을 없애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1529년 여름 빈의 방어군이 성을 지킬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유럽남부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는데 이는 빈의 방어군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모든 도로가 진창이 되어 오스만군이 빈 공략에 필요한 거포(巨砲)를 운송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오스만군은 공성포를 후방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고 이동 가능한 소형포만으로 공격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스만군이 가진 컬버린을 포함하여 소형포로는 상대 병사만을 사격할 수 있을 뿐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여름도 지나고 1529년 9월 27일에 빈에 도착한 술레이만은 자신의 군으로 하여금 빈을 포위하게 한 뒤 이전 전투에 잡혔던 유럽인 포로들에게 터키옷을 입혀 빈의 방어군에게 보내 협상을 제안하였다. 만약 빈의 방어군이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연다면 군신(君臣)의 관계만 맺고 신속히 철수할 것이며 빈에는 단지 약간의 오스만 관리들만 남아있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굽히지 않고 싸움을 택한 다면 빈을 철저히 파괴되어 그 흔적도 남지않을 것이라 경고하였다. 방어군 총수인 페르디난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그대로 사절들을 돌려보냈다. 사실상의 거절이었고, 오스만군의 빈 공격이 시작되었다.

 

오스만군과 유럽군이 격돌하는 16세기 판화그림

오스만군과 유럽군이 격돌하는 16세기 판화그림

 

 

성벽을 공격할 수 있는 공성포가 없었기에 오스만군은 성벽 밑을 파서 공격하였다. 이때 오스만군에서 한 포로가 방어군 쪽으로 도망왔고 이 포로는 오스만군이 파고 있던 갱도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빈 방어군은 투르크군의 갱도 밑으로 굴을 파서 그 굴을 붕괴시키거나 지하에서 투르크군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여 모두 격퇴하였다. 그러나 투르크군이 파고 있던 모든 갱도가 들킨 것은 아니었고 일부는 성공하여 빈 성벽 곳곳이 붕괴되었다. 무너진 구간 중에는 말이 몇 마리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로 무너진 곳이 있었지만 방어군은 무너진 구간을 나란히 선 창병으로 막고 그 뒤에 참호를 파서 방어하였다. 비록 어릴 때부터 전투를 배운 정예병인 예니체리도 나란히 선 창병(pikemen) 수십 명이 지키는 곳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10월 12일에는 매우 넓은 구간이 다시 붕괴되었고 예니체리 정예병에 의한 돌격이 이어졌으나 창병에게 밀려 전사자 1200명을 남기고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방어군 창병들을 돌파할 수 없다는 것 외에도 투르크군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투르크군의 보급수레가 도착하지 않아 식량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뒤져보았지만 방어군이 투르크군의 도착 이전에 이미 민가들을 모두 철거한 상태에서 먹을 것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울러 도착한지 2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사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 무려 2만에 이르고 있었다. 식량사정도 좋지 않았고 더 이상 지체하면 후퇴하기도 전에 겨울 추위가 닥칠 수 있었다. 그리고 뜻밖의 일이 일어났으니 바로 투르크군의 최정예인 예니체리들이 감히 술탄에게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자신들이 이유 없이 희생되고 있다며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사실 예니체리들을 창설한 목적이 바로 이유를 묻지 않고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정예병들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목숨을 술탄에게 바치기로 맹세한 그 정예병들조차 술탄에게 반항한 것이다. 술레이만 1세는 궁여지책으로 만약 예니체리들이 한 번만 더 공격을 해서 성을 무너뜨린다면 후한 상금을 주기로 하고 겨우겨우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였다.

 

빈 전투를 묘사한 판화그림

빈 전투를 묘사한 판화그림

 

 

10월 14일, 투르크군은 빈의 성벽 밑으로 판 갱도에 화약을 가득 채우고 이에 불을 붙였다.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투르크군은 운이 나빴다. 성벽이 앞으로 무너지면서 투르크 병사들의 진격을 오히려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니체리들은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피하면서 무너진 곳으로 뛰어가야 했고 불과 몇 명씩 뛰어드는 투르크 병사들은 오스트리아 창병들의 장창에 처참히 꿰어죽었다. 마지막 공격마저 실패하자 투르크군은 더 이상 빈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술레이만은 공격의 실패를 인정하고 철수를 명하였다. 이에 투르크군은 가져갈 수 없는 물건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놓고 불을 지르고 그 동안 잡았던 포로들도 모두 불에 던졌다. 그리고 밤사이 텐트를 걷고 아침이 되기 전에 일제히 후퇴하였다.

 

 

맺는 말

1300년대 중반에 2세 술탄인 오르한이 유럽 본토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오스만투르크는 200년에 걸쳐 유럽에서 그들의 영역을 넓혔다. 그 과정에서 천 년의 사직을 유지하였던 동로마가 멸망하고 무슬림 투르크군은 유럽의 심장부를 향하여 돌격하였다. 그 중간에 발칸 국가들, 특히 헝가리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약 80년간 지리멸렬하였으나 막대한 인구자원과 함께 신무기의 도입, 잘 훈련된 정예병을 활용하여 유럽을 몰아붙였다. 오스만투르크의 위협에 대하여 안이한 태도로 일관한 서유럽인들은 함께 동유럽을 도와주기는커녕 수수방관하기만 하였고, 이는 오스만투르크의 동유럽 정벌을 간접적으로 가능케 하였다.

 

오스만투르크에 의한 유럽방면으로의 팽창은 1529년의 빈 공방전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낡은 성벽위의 2만 2천 병력이 투르크의 12만 대군을 맞아 2주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오스만군에게 2만이 넘는 전사자를 안기고 이슬람의 대규모 침공을 격퇴한 것이다. 물론 술레이만 대제는 이후에도 유럽정복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스만투르크의 정복활동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빈 공격 이후 서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을 깨달았고 지중해안과 중부유럽에서 투르크에 맞서 싸웠다. 만약 1529년에 빈이 무너졌으면 오스만투르크가 전성기였음을 감안할 때 유럽으로 더욱 깊숙이 밀고 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을 것이다. 

 

1529년의 공격이 좌절되자 술레이만은 1532년에 다시 빈 공략을 시도하였으나 크로아티아의 코체그(귄스)에서 막혀 시간을 허비하고 신성로마가 8만의 대군을 모아 싸우러 나오자 싸우지 않고 철수하였다. 아울러 동쪽에서 다시 사파비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터지면서 더 이상 유럽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1541년에 헝가리를 온전히 오스만의 영토로 편입시키기는 하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때의 제국은 헝가리에서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아덴만까지 넓어져 있었고 이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술탄들이 계속 배출되어야 했지만 술레이만 1세가 사망한 후 건국기/팽창기와 비교하여 무능한 술탄들이 계속 뒤를 이었고 오스만투르크는 결국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18세기를 기준으로 유럽에게 밀리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에는 ‘유럽의 병자(病者)’취급을 받게 된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세계사]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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