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ㅡ 광대패와 각설이 타령 ㅡ
(지난 글을 fb에서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주시면 교정하겠습니다.)
오늘은 코로나 시기(19~22년)이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강조하고 싶은 날이다.
지난 30여년은 서양 뮤지컬로 밥을 먹었고, 20년의 세월은 한예종 교수로서 정년을 하며 탈춤과 우리 것을 강조하며 삶을 살아 왔다.
한예종 현직에 있을 때도 원형源形의 수업과 옛과 현대의 만남을 강조한 창작 작업 공연을 했다. 기록의 자료로 남기고 싶었다.
연희학과 외에 본교 음악과, 무용과, 본부교양선택 과목 등, 일주일에 16시간을 강의했는데, 보직자가 강의를 너무 많이 하니 줄이라고 해서 기본 9시간만 하고 학과장 직책을 잘 수행하며, 창작연희극(뮤지컬) 기획, 제작까지 했다.
일본에 방문했을 때, 일본의 가부키(歌舞伎)가 피아노(현대)와 만남으로 관객의 눈 높이에 맞게 그 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 연주했다.
우리도 탈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춤을 춘다면 이해를 했을까?
한예종교수들이 일본의 노(能)극장에서 초청공연을 받아 필자도 탈춤 원형공연을 했다.
원형은 원형(源形: 근원적인 본디모양) 전형(典型: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특성) 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단어풀이만 되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바뀌면, 이해가 되겠는가?
때문에 원형과 창작을 구분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행위는 대면이어야 한다.
지금 코로나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지만 형식적인데, 코로나 기간동안 오히려 많은 것이 정립이 되고 있다. 필자만 그런지 모르겠다.
한예종 현직 교수로 있을 때도 이론을 강조했지만, 실기학교이기에 저학년에게 필수과목인 우리 것을 이론적으로 강조함으로, 고학년에게는 서양 뮤지컬과 한국연희극과 마케팅! 콘텐츠 등, 특히 뮤지컬 작품의 기획ㆍ제작에 대해 강의를 통해 이론과 실기를 강조한 바 있다.
지난 컬럼 때는 [마당극과 무대극]을 제시한 바 있으며 무대와 마당! 우리는 마당이 곧 무대이었다. 뜨락이나 대청마루, 또는 궁궐에서 악사들이 연주하면 무희들이 춤을 추는 것을 영화에서 많이 보았을 것이다.
곧 대청마루나 정자(궁정)에 앙반들이 앉아서 ~ 청산리 벽계수야 ㅡ 시조를 하다가 너무 심심하니까 ~
여보게 최진사! 자네 종놈이 소리를 잘 한다지? 한번 불러보게나! ~
여봐라! 게 없느냐?
쇠뚝이가 달려와서
예! 부르셨습니까? 가서 말뚝이 좀 불러오거라! 쇠뚝이가 논 농사를 짖고 있는 말뚝이에게 ㅡ 말뚝아! 말뚝아! 주인영감이 빨리 오라네! (말뚝이 급히 등장)
말뚝이:(정자에 앉아 있는 주인과 양반들에게) ㅡ예! 부르셨습니까,
양 반: 너! 뒷간(便所:화장실)에 가다가 들은 소리를(사랑방에서 들은 소리!) 그거 한번 해봐라!
말뚝이:(말뚝이와 부친이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면서 놀부 심술타령을 했던 소리다.)
(ㅡ 똥누는 놈 주저 앉처 애 밴 부인 뱃 똥차고 미나리 깡에 소몰아 넣고 고추밭에 말 달려)ㅡ (생략)
스토리가 있는 해학(諧謔: 설명적: 우스꽝스런 말)과 풍자(諷刺: 행위적: 비웃음 비판)적인 소리를 듣고 양반들은 즐기면서 수고 했다고 댓가로 동전 한 잎을 던저 주고 좋아했다.
그래서 기ㆍ예능보유자가 탄생한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댓글주시면 더 연구, 공부하겠습니다. ㅡ
그러나 예전에는 이름이 고귀하면 귀신이 잡아간다고 해서 말뚝이, 쇠뚝이, 개똥이, 소똥이, 꼴뚝이, 먹쇠 등 이름을 어른들이 명명했다고 한다.
앙반들 앞에서는 각설이 타령은 하지 않았다.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밥 얻어 먹기가 미안하여 소리로 보답하다보니 여러가지 종류의 민요풍이 발전이 된 것이 아닌가? 예견해 본다. 시장에서 장타령으로 구걸하는 동냥위주이지만, 숫자풀이, 인문학적인 국문풀이 등이 있다.
특히 1에서 9까지 골계적으로 비유한 내용으로 고발과 풍자적인 은유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판소리는 배에서 나오는 고급 소리(복창터지는 소리, 이태리 벨칸토 창법)이고 각설이 타령은 스토리가 전개된 인간의 생활과 지역의 관광지 소개 등, 소개하는 소리가 목을 깎아서 내는 소리이다.
옛날에는 고구마, 감자 등으로 먹고 살았지 서민들이 돈은 구경을 못할 때였다.
새경(한해 동안 머슴에게 대가로 주는 월급) 이라고 해서 1년 내내 일해보았자 보리 한 가마 정도 받았을 뿐이었다.
우리 서민들은 이렇게 하다보니 입에 풀칠로 생활이 겨우 될 수 있어 세월이 흐르다보니 직업이 바뀌었다. 얻어 먹고 빌어 먹고 거지, 거렁뱅이, 장돌뱅이, 동냥아치, 구걸자, 사당패, 걸립패, 광대패 등, 예를 들어 보았다.
그러나 부모들은 깡통에다 돈을 받는 것보다 봉투에다 월급 받는 면面서기를 부모들은 원했다. 반대로 유식한 사람도 있었지만, 각설이는 족보가 없다. 죄인도 얼굴은 숯(숱)으로 까막게 칠을 해서 유배를 보냈고, ~ 있어도 가문의 영광을 위해 기록도 없지만 있으면 삭제했을 것이다.
정승판서 자제도 돈 한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제구실도 못한 상황을 요즘은 대학에서 연구논문도 있을 것이다. 강의를 하다보니 아는 지식대로 작성해보았습니다. 댓글주시면 교정하겠습니다.
예술은 상대를 끌어들여야 돈 벌고 힛트치는 세상으로 변한 지금, 세월이 흘러 국제화ㆍ세계화시대에 동ㆍ서양이 함께 가자고 하지만 ㅡ 서양의 공연예술도 처음에는 윈형무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만이 가질 수 있던 독특하고 특색있고 운치있는 자연의 무대가 바로 산대(山臺)이었다.
우리는 원시시대부터 고대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까지 장막의 다락에서 연희할 때, 채붕綵棚, 산붕山棚, 오산鰲山의 무대를 산대잡극에서 산대를 봉래산 같다고 묘사했다
산대놀이를 했던 산대는 규모와 형태에 따라 대산대(大山臺), 예산대(曳山臺), 등 백제금동항로에도 산대의 모습과 봉래산의 제일봉, 형상을 본 따 선산(仙山)과 같다고 산봉우리와 꽃과 나무, 정자, 사람이 밀거나 기계장치에 의하여 조작시킬 수 있는 조형물을 설치했던 것이 그림(사진 자료참고) 에 그대로 있다.
따라서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설무대인 채붕! 서민들이 맨땅에서 공연하는 모습과 놀고 구경하고 중국 사신들을 영접할 때나 서민들이 구경할 때, 봉사도처럼 정자 주위에서 관극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스케치되어 있다.
우리 서민들은 타작마당에서 가마니 및 돗자리만 피면, 언덕이 무대이지만 오산鰲山이라는 명칭도 있다.
조선조(조선부) 시대에에 명나라 사신의 동월의 영접시에 무악제 홍제동부터 사신을 영접할 때, 산대설치의 기록이 있다.
그림에 있는 중국사신을 영접한 ‘봉사도奉使圖(각종행사 절차 풍속, 풍경을 그린 20장짜리 화첩, 영조1년, 중국 사신 아극돈阿克敦(1685~1756)의 봉사도는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 소장), 제 7폭의 모화관에서 고려, 조선시대의 연희장면을 보면, 그림 속에 바퀴가 달린 거대한 예산대(소산대)의 뒤에서 밀고 있는 사람의 모습과 광대들의 연행 장면을 볼 수가 있다. 대산대의 연행장면은 수원에서 초청하여 우리 한예종 연희학과에서 시연한 바 있다.
우리도 자료부족으로 잘 모르고 있는 것들을 감히 상상과 생각도 못했던 그 근원의 뿌리를 외국인이 그 자료를 제공했기 때문에 찾아 볼 수 있었다.
이제 지금 늦었다고 해도 우리 것을 하나하나 복원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 경기도 광주의 조성자 줄타기 등의 복원도 필요하다.
대한민국 헌법 9조를 아십니까?
여기가 대한민국입니까?
여기에 부합되는 문화정책을 운영해야 전통문화예술을 하는 전승자의 앞길의 희망이 있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 처음에 시행령 개정안 등 지시, 발의자, 논의과정, 회의록과 참가자 등, 자문을 구했다면 누구인지? 참석자 명단을 공개를 요구한 것은 2010년 문화재 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한 반론과 공개질의서에 무형문화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었다. (자료참고 2010.7)
그래서 처음뵙는 사람에게 ~ 헌법 9조? 대한민국?~ 상투적으로 필자는 질문하였다. 우리는 지금 상위법을 모셔놓고 하위법으로 운영하다보니~ 정책부족으로 우리는 지금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무형문화재는 교육이다!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교육과 지도자와 교재 부족으로 기성인부터 초등학교까지 교육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국가적으로 교육을 한예종에서 매주 요일을 정해 놓고 개인적으로 강의하고 있는 것이다.
교재의 부족은 물론 이것을 하면 천민(賤民)으로 창피하고 천하고 등한시하다가 오늘날 해외 유학생들로 하여금, 더욱 기를 못피고 살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회개하며 너무도 모르고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의 근본적인 요소들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당시 예능이 뛰어난 유랑예인집단으로 과거 전국 지역을 떠돌며 연행하던 연희패를 남사당패라고 지금은 제도적으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유랑예인집단은 우리의 전통연희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문헌적 역사가 없었지만, 윤광봉교수의 한국연희예술사(민속원)가 출판되어 나와 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남사당패와 여성국극단, 여성농악대(유ㅈ화 보유자)의 사당패는 소고춤, 덧뵈기춤 등, 해당되는
사당벅구춤(社堂法鼓舞), 서도, 경기민요, 남도민요, 산타령 등 민요창을 연행되어 있고 ㅡ솟대는 마을 공동체신앙으로 神의 하나이다.
솟대장이패의 솟대타기는 광대가 긴 대나무 장대 또는 두 개의 장대에 줄을 걸어 놓고(사진 자료 참고) 그 위로 줄을 타고 올라가서 물구나무서기, 장고치고 몸을 뒤집고 풍물, 땅재주, 얼른(요술, 마술), 줄타기, 병신굿(지주와 머슴 2인극) 등 재주를 피고 소리와 악기를 연주, 예능을 연출했다.
일제강점기 까지는 그 예능이 전승되었는데 천민(賤民)들이 하는 것이라고 기록이 부족했고 또 먹고 살기에도 바빳기 때문에 얼마전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강의와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회장 김ㅅ옥)에 지원하여 진주에 복원작업을 직접 필자가 파견되어 발표하게 하고 관리한 바가 있다.
다음은 여러 종류의 패들을 보면 ㅡ
ㅡ광대패, 또는 대竹광대패, 초란이패, 솟대쟁이패, 굿중패 등, 유랑예인집단으로 위에 제시한 모든 놀이를 구사하면서 지역을 순회하면서 풍물, 버나, 땅재주, 줄타기, 죽방울치기, 한량굿(1인 창무극, 배뱅이굿, 장대장네굿, 병신굿 등) 등을 연행하면서 음악은 삼현육각, 판소리, 민요창(12잡가 포함), 춤과 무용적인 사위, 땅재주 등, 애기장사패는 홍길동전, 고대 소설이나 전래동화 등을 한사람의 구연자가 연기 등을 보이며 낭독을 했고, 초란이패는 괴기스러운 탈을 쓰고 탈놀음, 얼른, 죽방울치기, 초란이굿 등, 비교적 폭넓은 종목의 연행을 담당하였다. 1930년대에 쯤 남사당패에 흡수되었다.
ㅡ각설이 패 타령은(걸립패)
어! 씨구 씨구(식구食口: 밥을 얻어 먹으러 왔다의 뜻) 들어왔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품바! 픔바! ㅡ 그래서 "품바" 라고도 하며 악기가 없어 나무나 돌, 입방구(구두로 악기 멜로디를 내는 것: 전통 비트박스?)반주를 했다.
각설이패는 위에 제시했지만, 걸립패로서 소리를 하며 집집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비나리, 풍물, 줄타기, 버나, 살판, 기타 등을 연행하였고, 그냥 밥만 구걸했던 것이 아니라 각설이 타령, 통속민요 등 노래를 불러주고, 밥을 구걸한다고 해서 각설이 타령을 하였지만, 시조는 양반들에 의해 기록으로 많은 종목들이 있었고, 전승이 단절된 부분도 많다. 이제 이런 전통문화예술을 천賤하다고 무시하지말고 우리 것을 보존, 전승해야할 의무가 있다.
ㅡ 현재 와서는
각 보존회가 지방공연은 물론 세계일주 공연을 하고 있다.(사진 참고)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결재자, 전문가, 지도자, 전승자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제부터다! 함께 해봅시다.
댓글주시면 연구하고 공부하고 교정하겠습니다.
☆ 사진 설명
奉使圖. 길놀이, 솟대타기, 한국문화재단 설립 당시 프로그램 기획, 제작, 미국공연 포스터 등
글쓴이:
飛松 최창주 평론가 석좌교수
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 부회장
대한민국 문화독립군 총연합회장(대문총)
전 세종문화회관 뮤지컬단기획담당(실장)
전 한예종 연희학과장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차관급) 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