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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병초소에서 바라 본 낙동강하구의 해안 사주. 진우도를 시작으로 신자도, 도요등이 줄줄이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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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덕도는 뭍이 그리운 섬, 그 자체였다. 배를 놓칠 때면 섬처럼 막막한 심정으로 하염없이 육지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으레 조미미의 노래 ‘바다가 육지라면’이 불리곤 했다. 그렇게 노래를 불렀던 탓일까.
가덕도는 이제 섬딱지를 뗐다. 거가대교가 들어선 이후 가덕의 공기는 일순 바뀌었다. 특히 주말은 북새통이다. 시내버스는 천성까지 들어간다. 마을버스도 증차됐다. 이 혼잡이 또 다른 개발수요를 불러들이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가덕 사람들은 이 흥청거림을 지금 막 즐기고 있다. 1989년 가덕도가 부산시로 편입된 지 20년 만이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덕은 경남의 여러 시군에 적을 두었다.
문헌으로 가덕도의 존재가 기록되기 시작한 때는 조선 세종 이후부터이며 경상도지리지에서는 ‘왜구의 침입으로 황량한’ 땅으로 표현되던 곳이다. 실제 가덕은 동남해가 연결되는 수로에 위치함으로 인해 오랜 세월 왜구의 노략질에 노출된 섬이다. 가덕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선창 갈마봉 자락과 눌차에 있는 왜성의 존재는 그 증거다. 근세에는 일제의 군사기지로서 그 흔적 곳곳에 아픔이 서린 섬이다. 한편 가덕도는 국토의 또 다른 끝자락이다. 백두대간에서 지리산으로 산줄기가 내달리다 경남의 해안산지를 두루 관통한 뒤 김해 신어산에서 훌쩍 뛰어 가덕도 연대봉(烟臺峰·459m)에서 마지막 꽃을 피운 낙남정맥의 혈이 가덕도다. 연대봉을 주봉으로 가덕의 산세는 동으로 가파르게 난 바다로 열린 반면 서쪽으로는 완경사를 이루며 잔잔한 진해만을 터 삼아 사람살이가 해안을 따라 열렸다.
가덕도 둘레길 들머리는 선창에서 시작한다. 선창은 가덕진의 수군함정이 정박했다 하여 지명으로 된 곳이다. 눌차만(동선만)으로 조수가 들고 나는 목이다. 천가초등학교까지는 약 1.5km 가는 길에 유자밭 가장자리에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김근도 선생의 흉상이 서 있다. 골목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대원군의 척화비가 있는 천가초등학교까지는 옛 마을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척화비는 원래 선창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하여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요소에 세웠는데 부산에는 대변항과 자성대 등에 원형이 남아 있다.
마을길이 끝나는 곳까지가 성북마을이다. 성북은 가덕진성의 북쪽 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한 동네인데, 성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동선소류지를 지나면 소망보육원이 있고 밤골 비탈을 올라야 한다. 한동안 숨이 가쁘다. 뒤돌아보면 마치 속리산 말티재처럼 구불구불하다. 눌차만의 죽도가 또렷하다. 고개를 넘었다 싶으면 예비군 교장이 있고 한국전쟁 당시 가덕 출신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23용사 충혼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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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선창에서 바라 본 눌차도. 2 기도원을 지나 동선항으로 가는 구비로 맛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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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아름다운 연대봉길
273고지와 매봉 사이로 난 임도를 따라 어음포 초소까지 1.4km 이동한다. 아름드리 소나무 몇 그루 용케 살아남아 옛 이야기 전하는 호젓한 길이다. 어음포 초소는 안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어음포와 지양곡, 선창 방면 사거리 역할도 한다. 대부분의 이용자들이 다리쉼을 하는 곳이다. 화장실과 안내판이 있어 오가는 거리를 가늠하기도 한다. 예서 본격적인 연대봉 길이 열린다. 솔숲을 벗어났다 싶으면 소사나무와 팥배나무가 무리지어 서 있다. 동쪽사면 급경사에는 서어나무와 나도밤나무군락이 포진하고 있다.
특히 이 계곡 비탈은 봄이 아름답다. 3월경 꿩의바람꽃을 비롯해 노루귀와 얼레지, 현호색, 개별꽃이 일제히 피었다 자취를 감춘다. 딱 그때뿐이다. 가파른 비탈을 오르며 족두리풀의 꽃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길도 이 구간이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도 모르고 스칠 뿐이지만 연대봉을 오를 때는 자연스럽게 숲 바닥을 볼 수 있는 자세가 된다. 그러다 가끔씩 뒤돌아보면 남해의 푸른빛이 몰려온다.
조망점이 점차 확산되면서 연대봉이 코앞이다. 진달래며 철쭉이 조만간 산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연대봉은 만장형 산지로 산정이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동쪽 산록은 수직절리가 촘촘한 기반암의 단애를 이루면서 성채의 경관을 이룬다. 산림은 부산에서 몇 안 되는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으로 지형경관, 야생 동·식물 분포, 생물다양성 등이 우수한 곳이다.
연대봉은 조선시대 연안의 방비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그 이름이 유래했는데, 이곳의 봉수는 북쪽으로 녹산의 성화례(省火禮)와 서쪽 진해 웅천의 사화량(沙火良) 봉수에 연결되었다. 실제 정상에 서면 주변 해안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선명하고 서쪽으로는 거제도와 진해만 일원의 다도해가 수려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낙동강하구의 사주도 새롭게 보인다. 흔히 낙동강하구는 세 지점에서 봐야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있다. 다대포 아미산과 김해 신어산과 더불어 가덕 연대봉이 그 현장이다.
부산 강서사람들은 연대봉을 강서팔경 중 제6경으로 칭송한다. 포효무제 연대봉(咆哮無際 煙臺峰)이라 하여 일망무제로 파도치는 천성 연대봉의 장쾌함을 노래했다.
돋아난 땀들을 지우고 지양곡으로 향한다. 줄창 내리막길이라 수월하고 펼쳐진 풍광도 시원하다. 바다빛은 남색에 가깝다. 그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은 보석처럼 빛난다. 거제를 향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던 대죽도와 중죽도며 저도는 거기대교가 지나면서 하나가 되었다. 진해만 쪽으로는 초리도, 잠도, 우도가 포진하고 있고 가덕수로 쪽에는 수도, 송도, 연도가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호남도, 입도, 토도가 점점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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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덕도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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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 바다 중죽도(中竹島)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 때문에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까지 보물찾기가 파도처럼 휩쓸고 간적이 있다. 광복 직전 일본군이 동남아와 중국 등지에서 노략질해 온 3조 원 추산의 금은보화 40여 궤짝을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공병대를 동원, 지하 60m 암반에 묻었다는 것이다. 보물을 묻은 사람은 일본군 필리핀 남방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맥아더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이라고 한다. 숱한 약탈과 민간인 학살을 일삼던 그는 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1946년 마닐라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보물을 떠나 그들의 이야기를 추적하다 보면 남경학살이며 정신대이야기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섬 하나에 이렇듯 많은 사연이 있지만 그 섬들에 개발이 시작되면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지양곡은 연대봉이 천성만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리다 성토봉(172m) 어깨쯤에서 잠시 머무는 지점이다. 사람도 자동차도 여기서 쉬어 간다. 대항으로 가는 길은 차도를 따라 이동한다. 크게 6번 정도 굽이치며 고개를 내려선다. 1.7km의 구간 굽이굽이 돌 때마다 바다로 돌출된 산자락들이 풍경을 만들어 낸다. 다만 때때로 차량의 존재를 의식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보차 분리가 안 된 상태에서 곡각지점은 차나 사람 모두 위험할 수 있다. 관할 지자체인 강서구청이 조만간 보행로를 만들 것이라 하니 기대된다.
지역 전통어로법 대항 숭어잡이 볼 만
대항은 마을 분위기 자체가 들떠 있다. 마을 진입로가 확장됐을 뿐 아니라 뭍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 반증은 전에 없이 늘어난 식당들이다. 그중 예약제로 장사하는 소희네 집(971-8886)에서 요기를 했다. 가덕도 토박이인데다 찬거리의 대부분을 배타는 남편이 잡아 온 해산물과 시어머니가 키운 채소로 요리를 만드는데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맛깔나고 푸짐해서 다시 찾게 된다.
대항은 가덕의 다른 마을에 비해 오래전서부터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봄이 오면 마을 전체가 술렁인다. 숭어떼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대항의 ‘숭어잡이’는 지역 전통 어로법으로 여섯 척의 배가 진을 치듯 타원형으로 그물을 바닥에 깔아 놓고 기다리다가 숭어 떼가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어로장의 구령에 맞추어 동시에 그물을 끌어올려 숭어를 잡는 ‘육수장망’ 어로로서 지역의 생태적 조건과 공동체가 만들어 낸 보기 드문 구경거리이자 전통문화유산이다. 마을에는 민박집이 몇 있어 숙박이 가능하다.
대항새바지로 넘어간다. 새바지 가는 길은 목(項)의 형태로, 도로를 경계로 아침햇살이 먼저 닿는 양달과 반대쪽 음달마을로 나뉜다. 언덕을 넘자 국수봉이 품은 또 다른 몽돌해안이 촛대바위와 더불어 아늑한 풍광을 제공한다. 언덕 아래 물양장 뒤편 몽돌해안에는 일본군 수비대가 파 놓은 인공동굴이 있다. 굴 모양은 T자형, 1자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중 2곳은 앞뒤 출구가 완성된 반면 한 곳은 일제의 패망으로 공사가 중단된 그대로 남겨졌다. 굴착공사는 강원도 태백에서 동원한 광부들이 했는데 1945년 8월 이후 이들이 살아서 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대항 주변 외양포 등지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사령부가 주둔했던 곳으로 군막사와 포진지가 남아 있다.
첫댓글 부산의 비경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즐거운시간 보내세요~하루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즐거운시간 보내세요~둥이부님
가덕도라 함은 부산의 상징이겠져?
잘,보고 갑니다.수고하신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즐거운시간 보내세요~마음바다님
잘보았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