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8월 하순.
1박2일 간 사랑하는 형제들과 부부동반으로 '오대산'을 탐방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한 차례씩 큰 산을 종주하곤 했었다.
작년엔 '남덕유산'부터 삿갓봉, 향적봉, 백련사를 거쳐 '덕유산' 국립공원 입구까지 약 28킬로를 함께 종주했다.
종주 코스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산정의 광활한 전망과 아름다운 야생화 군락들 그리고 덕유의 영봉을 타고 흐르는 짙은 운해의 파노라마를 필설의 묘사하기란 불가능했다.
감동이 밀려들었다.
때론 장엄했고 때론 호쾌했다.
연방 쏟아지는 탄성을 억제할 수 없었다.
금년엔 '오대산'을 찾았다.
큰 비가 내린 뒤의 트레킹이라 소금강의 시원적 감흥과 빼어난 지세를 제대로 흠향할 수 있었다.
수백 년 된 거목이 많은 가지를 보듬고 있듯이 산 꼭대기부터 쭉쭉 뻗어 있는 크고 작은 계곡마다 각양각색의 폭포와 여울들이 포효하듯 흘러 넘쳤다.
깎아지를 듯한 기암괴석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다양한 물줄기들은 또 하나의 비경이 되어 소금강을 더욱 생동감있고 다이나믹하게 연출하고 있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웅장한 자연은 신이 창작하신 한 폭의 진경산수화, 바로 그것 이었다.
과연 설악의 천불동과 견줄만한 소금강이었다.
우리 민족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대학자, 율곡 이이.
그는 자신의 저서인 '청학산기(靑鶴山記)'에서 이 계곡의 독특한 산세와 지경의 빼어남이 가히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기술하셨다.
그러면서 진심어린 찬미와 감탄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저술 이후로 사람들은 이 길고도 아름다운 계곡을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렀다.
지금도 강원도 최고의 명승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동안 몇 번을 탐방했던 소금강이었다.
그러나 이 대자연과 조우하는 순간,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곳만의 청청한 기운에 금세 압도되고 만다.
예외는 없었다.
언제나 동일하게 내 가슴팍을 격하게 흔들어 댔다.
천혜의 코스가 선사하는 소금강만의 아우라조차도 검푸른 기상으로 넘실댔다.
또한 춘하추동을 따라 탐방객들의 영혼을 적셔주는 알록달록한 색채감과 자연미는 단연 압권이었다.
갈 때마다 매번 신선하고 웅대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탐방객들도 그리 많지 않아 호젓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하늘은 높았고, 명경지수는 투명하고 시원하게 우리의 폐부를 적셔주었다.
멋진 트레킹을 끝내고 계곡 아래 아담한 펜션에서 여독을 풀었다.
능이백숙, 감자전, 각종 산채나물에 강원도 옥수수 막걸리로 힘차게 건배했다.
그리고 경쾌하게 수다를 떨었던 사랑하는 형제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다.
부족함이 없었다.
푸짐하고 정갈한 음식에 밤이 깊도록 다감한 대화를 이어갔다.
오대산의 한여름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다음 날,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선재길' 트레킹에 나섰다.
선재길이 조성된 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다.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이 깊은 산 속 오솔길을 따라 오가며 사바의 탈속을 위해 수행에 힘썼다.
그런 연유로 그 길이 '선재길'이 되었다.
선재길은 거울 같이 맑은 오대천을 따라 나 있는 기돗길이었다.
징검다리를 몇 번씩 건널 수밖에 없었다.
깊은 숲길을 통과하고 아주 오래 전 산속 주민들이 경작했던 폐 화전을 지나 다시 오대천과 교행하는 사색과 치유의 명상길이었다.
그 길을 혼자 갈 때보다 형제들과 함께 가니 더욱 감사했고 기분이 삼삼했다.
선재길 트레킹의 시작은 역시 월정사 '천년숲길'부터 였다.
수령 5-600백 년을 뛰어 넘는 아름드리 전나무숲길은 언제 접해도 감동 그 자체였다.
그 특유의 곧음과 상록은 한국 불교의 자랑인 '승가의 얼'을 그대로 표상하고 있었다.
또한 정토로 들어가는 겸손한 몸가짐과 치성을 숲길이 나즈막이 당부하고 있었다.
조고각하였다.
전나무숲길을 지나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천년고찰, 월정사에 다다랐다.
신라시대 수행과 공부를 위해 중국에 유학했던 자장율사가 용맹정진하던 중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어렵게 구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극진하게 봉안했던 유서깊은 가람이었다.
그곳이 바로 수많은 불자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월정사의 적멸보궁이다.
그 보궁을 비롯해 고색창연한 대소 가람들이 백두대간의 상서로운 기상을 잔뜩 머금은 채 기품 있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 주석하며 종단과 교계를 이끌었던 탄허 큰스님의 낙랑한 독경과 일침이 금방이라도 귓가에 울릴 듯했다.
또한 큰 스님의 제자들이 지금도 용맹정진하며 그 청청하고 형형한 대가람의 법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언제라도 불심 깊은 고승의 법문이 산사 곳곳에서 들릴 것만 같았다.
짧게는 3주, 길게는 두세 달 간이나 이어지는 월정사 단기출가 수행은 예로부터 정평이 나있었다.
또한 경내 어느 한 켠에선 개금불사를 위한 뜨거운 공력이 열적게 진행 중이었다.
각 산문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합장한 뒤 월정사를 뒤로하고 상원사로 향했다.
아름드리 전나무숲길, 월정사, 선재길 들머리, 선재길 날머리 그리고 상원사까지 약 12킬로의 청정 오솔길은
내가 경험해 본 팔도의 여러 길들 중 단연 최고의 길이었다.
그 오솔길은 영험한 기상이 서려있는 '사색의 길'이요 '수행의 길'이었다.
오감으로 전해지는 그 길 고유의 감성과 감흥은 매우 독특한 백미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꼭 한번씩 탐방해 보시길 권한다.
한국 문수신앙의 성지 오대산.
1563 미터 비로봉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아우라지'를 돌아온 골지천과 두물머리에서 하나가 되어 정선으로 향한다.
정선을 지나면서 크고 작은 시내를 품고 또 품어 비로소 '동강'이 된다.
다시 그 푸른 물길이 '어라연'과 '도담삼봉'을 휘돌아 '청풍명월'(충주호)에 이르면, 이윽고 가던 길을 멈추고 거친 호흡을 가다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남한강의 중추이자 골격이다.
그런만큼 심산유곡을 따라 흐르는 오대천 명경지수의 맑음과 시원함은 두 말해 무엇하겠는가.
'선재길'의 날머리에 본찰 월정사의 말사인 상원사가 있었다.
국보 36호인 동종을 비롯해 몇 종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고즈넉한 고찰이다.
그 고색창연한 사찰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천고의 지혜'하면 바로 문수전인데, 그 문수전은 가파른 돌계단을 걸어 한참을 올라가야만 닿을 수 있었다.
그 돌계단 초입엔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란 작은 비문이 있었다.
"오호,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 너무 멋진 걸?"
나도 모르게 가벼운 탄성이 흘렀다.
문수전에 합장하고 종각 망루에 섰다.
일망무제로 탁 트인 전경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오대산의 구중심처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이 말사가 수행자들이나 성불을 갈망하는 수많은 불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과연 득도와 해탈의 기품이 서려있는 정토 중의 정토였다.
또한 웅대한 지세와 호연지기 속에서 소리 없이 녹아 흐르는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가 뭉근하게 느껴졌다.
범상치 않은 영지였다.
시원한 산들바람에 땀을 씻고 산문, 전각, 요사체를 순차적으로 둘러본 뒤 문수성지(文殊聖地)를 내려왔다.
양일 간 참 많이도 걸었다.
우리네 영혼은 더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으나 특히 여성들의 다리가 못내 팍팍했으리라.
이제는 좀 편안하게 휴식하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었다.
차를 몰아 가까운 계방산으로 향했다.
그곳에 우리가 자주 가는 평창의 명물이 있었다.
청정 1급수에서 길러낸 송어횟집들이 성업 중이었다.
과거에도 형제들과 함께 들르곤 했던 낯익은 곳이었다.
깊은 산 속의 횟집들과 양어장의 풍경 그리고 시원한 물소리와 정겨운 새소리들이 우리를 반겼다.
마냥 좋았다.
쫀득한 육질, 부드러운 식감, 건강한 미소와 다감한 대화들.
자연스럽게 감사가 흘렀다.
사랑하는 형제와 각각의 배우자들이 있어 마냥 행복했고 다감했다.
'형제'란 단어엔 대개 두 가지 정도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 하나는 '영원한 동반자'란 말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시작'이란 표현이다.
주변을 봐도 그렇고, 나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신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위대한 자연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나 그 자연 속에서 숱한 추억을 쌓고 사랑을 엮으며 행복의 나무를 키워가는 건 신의 역할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들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형제자매를 건강하게 낳아서 반듯하게 길러주셨다.
그러나 그 형제들이 '영원한 동반자'로 살 수도 있지만 남보다 못한 '타인'처럼 살 수도 있다.
주변에서 숱하게 보았다.
형제간의 우애는 부모님의 역할이 아니다.
그건 전적으로 형제들 각자의 몫이자 자신들의 영역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배려하며 역지사지할 것인가.
나도 인생을 살아보니 삶의 요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확실해 지고 또렷해 지는 생의 화두였다.
그랬다.
삶이란 게 본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니던가.
언제나 건강한 웃음과 굳건한 신뢰로 서로의 인생에 격려와 사랑을 보내주는 웅포 형제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행을 자주 했다.
함께 부대끼며 진한 우애와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왔던 지난 30년.
그 한결 같은 소망과 배려에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잘 갈무리하면서 2014년 8월의 일기장을 덮는다.
세상은 참 아름답다.
그리고 얼마나 향기로운 공간인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모두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브라보 !!!
2014년 9월 10일.
오대산 사진을 정리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쓰다.
형제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