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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제3장 1-2절.
부흥케 하옵소서
바티칸 대성당을 잠깐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베드로 성당을 들어가다 보니 우측에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像)이 서 있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 앞에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피에타 조각상은 미켈란젤로가 특별히 아꼈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십자가에서 그 시체를 끌어내리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돌아가신
예수님을 품에 안고 아주 비탄에 잠겨있는 모습의 상(像)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애정을 나타내기 위해
그 옷자락에 자신의 이름을 친히 서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이 위대한 작품이 그 앞에 보안을 위한 철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상 증세를 가진
한 젊은 사람에 의해 훼손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품에 해머와 망치를 숨겨 가지고 들어와서 이 철책을 뛰어 넘어 그 망치로 이 작품을 깨뜨렸습니다.
이 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특히 미술애호가들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과연 이 피에타 상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복원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어쩌면 우리 민족이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복 가능성에 대한 질문
갑자기 수년 전부터 우리나라가 몹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라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업도 우리의 가정도 흔들리고 깨어지면서 우리 마음속에도 동일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 가정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민족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런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전(主前) 약 600년 전에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선지자가 비슷한 질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일컬어졌던 바빌로니아 등에 의해 침략을 받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흔들리고 있었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사업을 접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론가 도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흔들리고 정치가 흔들리고 가정이 흔들리고 개인들의 삶이 깨져가던 시간,
하박국 선지자는 이 중대한 질문을 끌어안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던졌던 질문이 이것입니다.
주님, 다시 한 번 이 민족이 회복될 수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우리의 표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흔들리고 깨져 가는 꿈이 다시 한 번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하박국은 엎드려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질문을 끌어안고 드렸던 기도, 그 입술로 튀어 나왔던 기도가 바로 3장 2절 말씀입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가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지난 3월10일 주사랑교회 설립예배를 드리고 우리 인생에 마지막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고자하면서
가장 간절하게 떠올리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과연 그것은 ‘부흥’이라는 단어입니다.
한번 따라 하십시오. “부흥케 하옵소서.”
부흥이라는 말은 영어로 'revival'입니다. 동사형는 ‘revive’로 원래 뜻은 ‘다시 한번 살려주옵소서’입니다.
우리가 죽어갑니다. 우리가 무너져갑니다. 우리가 깨져가고 있는데 다시 한번 살려주시옵소서.
다시 한 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흔들리는 이 나라. 깨져가고 있는 우리의 가정. 상처받고 있는 우리들의 교회. 하나님 다시 한 번 부흥케 하옵소서.
이 말을 바꾸면 ‘다시 살려 주세요’ 입니다.
이렇게 하박국은 엎드려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 민족의 회복에 대한 간절한 부담이 있으십니까.
흔들리는 가정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갖고 계십니까.
진정 우리는 부흥을 갈망하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부흥을 위해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엎드려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도해야 옳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박국 3장 2절을 통해 찾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위한 기도
우리가 정말 부흥을 갈망한다면 우선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이 민족을, 이 교회를 긍휼이 여겨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눌 본문 하박국 3장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부흥케 하옵소서’란 말 다음에 무슨 말이 있습니까.
‘이 수년 내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란 말이 나옵니다.
아주 대조적인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하나는 ‘진노’, 또 하나는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박국이 왜 이런 기도를 하게 됐을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하박국 1장을 살펴보면 1장이 열리자마자 하박국의 입술에서 계속 튀어나오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하박국 1장 3절입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3절은 ‘어찌하여’란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Why'입니다. 왜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보게 하십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왜 제게 보게 하셨습니까.
왜 그렇죠.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어찌하여‘란 단어는 하박국 1장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1장 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 우리 민족이 주님 앞에 별로 내놓을 것 없는 부끄러운 민족이란 것 제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싸우러 오는 저 갈대아 사람들은 우리 보다 훨씬 악질입니다.
왜 저들로 인해서 우리가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 왜 버려두십니까.
이 단어는 다음 절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하나님, 바다 속의 고기에게도 리더가 있는데 그 리더를 잃어버린 바다 속의 물고기떼처럼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린 채 해매고 있습니다.
땅을 기는 곤충도 리더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데 왜 잃어버린 곤충처럼 흐느적거리며 땅을 치고
아파하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왜’라는 질문이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1997년,2020년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이 땅에 IMF, 코로나19 란 사건이 우리 민족사에 다가왔을 때
우리가 똑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까.
진노가 마땅한 민족
하박국 1장에 보면 ‘어찌하여’란 말 외에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2절에 등장하는 ‘어느 때까지리이까’입니다.
이 두 개의 단어와 함께 하박국 1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잘나가던 한국 교회가 어느 순간 아파하고 정체하고 흔들거리며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과
조소의 대상이 됐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 민족의 국론이 분열된 채 심각한 몸살을 앓고 괴로워하며 미래에 대한 더 이상의 희망과
낙관과 전망을 갖지 못하고 아파하는 모습.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이 고통 이 아픔이 언제까지 계속되겠습니까.
이 어두운 밤이 얼마동안 계속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박국 1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만 이 아픔을 겪는 다는 것에 승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하박국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기도하면서 더 엎드리면서 더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주님 앞에 묻고 물으면서
하박국의 마음속에 중요한 하나의 결론이 생겨나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깊이 엎드려 생각해보니 우리 민족이 정말 잘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가 조금 잘 살게 됐다고 동남아를 휘젓고 다니면서 부도덕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 민족을 쉽게 깔보고 더 이상 사람을 귀하게 보지 않고 물질과 향락과 사치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갔던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진노 받아 마땅한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이, 진노가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드디어 3장 2절에 결정적으로 대조적인 두 단어가 나옵니다.
‘진노 중에라도’와 ‘긍휼을 잃지 마옵소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저는 이 민족이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도 인정하겠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도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이 진노 중에라도 이 긍휼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긍휼이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박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긍휼을 주님 앞에 구할 때 주께서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냥도 아닌 풍성하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계시면서 사람들을 접촉하고 사람들을 만나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인격 속에, 존재 속에 제일 현저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바로 이 긍휼의 모습입니다.
목자 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상처입고 흔들리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민망히 여기시다’입니다.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의 고통을 그분의 고통으로 같이 느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생각하십니다.
우리의 방황을 당신의 방황으로 생각하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당신의 슬픔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신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떳떳하지 못하지만
저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가 한국교회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가 우리의 가정을 불쌍히 여겨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는 우리의 자녀를, 이 땅의 젊은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담대히 그 분 앞에 나와 이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말을 하고 보니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납니다.
저는 아내와 결혼해 감사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관계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제 아내의 기도 버릇 가운데 하나가 제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내가 기도 중에 제일 자주 쓰는 표현이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입니다.
저는 우리 처지가 불쌍하다고 비칠까봐 자제를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가까이 지켜보니까 아내도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었고 그런 사람이 있을 땐
반드시 이 표현을 써가며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귀가 시 들어서려는데 아내의 ‘불쌍히 여겨주소서’란 표현이 흘러 나오길래
이번엔 누가 아내를 상처 줬는지 알려고 엿들었습니다.
아내는 그 때 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저는 제 아내가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 덕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거의 자기 PR에 가까운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꼬박 내고...
하지만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를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저는 어떤 때보다도 이 시대가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붕괴되고 흔들리는 가정들을 보면서 이 땅의 가정을, 이 땅을 젊은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생존의 기로에서 허덕이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부흥을 사모하십시오. 부흥을 갈망하십시오.
하나님 자신을 기뻐해야
긍휼을 구하는 기도 외에 필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 자신으로 인하여 기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박국의 클라이맥스가 나옵니다. 17, 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지금 유다민족이 갈데아 민족에게서 침략을 받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 충분히 예견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업을 접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더 이상 그들은 무화과나무를 먹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의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우리에는 양이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당연시 여겼던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양, 밭의 소출 등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들.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리고 있던 하나님의 선물이 하나씩 떠나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포도나무도, 감람나무도 키울 수 없습니다.
이때에 놀라운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18절입니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내가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인해 기뻐했지만,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인해서만 기뻐했지만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가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떠나가는 이 마당에 하박국은 무엇을 붙들고자 합니까.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축복에, 선물에 눈 먼 사이
`그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향한 시작을 잃어버린다면 축복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성경의 한 구절이 예수님을 믿으려는 저의 마음을 방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나...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구절을 보고 나는 예수 믿기는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순종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음이 왔습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 목숨, 이것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들 아닌가. 만일 이것들이 소중하다면
이를 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일까. 이것은 내 처자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소중하게 생각해야한다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은 미국 집회를 가기 전 둘째 아이가 미국 병정인형을 사달라고 조르는 게 아니겠습니다.
집회 내내 모든 의식을 아들 선물에 초점을 두고 어렵사리 선물을 사서 돌아왔습니다.
초인종을 누르니 둘째 아들이 가정 먼저 달려와 안겼습니다.
결혼을 참 잘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참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영국병정을 찾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줬더니 자기 방으로 문 닫고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선물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 녀석이 아버지를 기다린 게 아니라 선물을 기다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기다리고 축복을 기대하지만 이것들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기쁨을 주는 늦둥이였습니다.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그렇게 사랑을 줘가며 키운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제단에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을 시험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고통스러웠지만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결론에 도달했을까요.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축복에 몰두한 나머지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동안 한국교회가 우상 숭배를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박국의 놀라운 고백을 배워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신 것으로만 기뻐한다고 하박국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부흥을 갈망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전의 산에 다시 서도록
마지막으로 하박국의 중요한 기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19절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 1장은 골짜기입니다.
하지만 3장은 하나님께서 골짜기에서 높은 정상으로 데려다 주실 것이란 믿음의 고백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목표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정상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아직 정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아름다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여러분 이번 파워웨이브를 통해 아름다운 비전을 꿈꾸기 바랍니다.
꿈은 포기하기 전에는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비전을 꿈꾸고 아름다운 정상에 오르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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