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깔사탕 / 임정자
여자들은 무섭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본능적으로 엄마를 찾는다. 엄마의 존재가 나를 보호해주고 항상 내 편이라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며 언제 어디서나 엄마를 부르면 나타나 구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찾는다. 지인들은 특정 종교의 아버지를 뜻하냐고 묻기도 하지만, 내가 부르는 아버지는 내 정신적 지주 같은 친정 아버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말해주듯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어디를 가더라도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다녔다. 울퉁불퉁한 길을 만나면 아버지는 허리를 껴안고 있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다 분유 깡통에 손목이 끼여 살이 찢어진 적이 있다. 함께 놀던 친구는 재빠르게 아버지를 모셔왔다. 피투성이가 된 내 손목을 보고 놀란 아버지는 나를 업고 뛰었다. 시골 두메에 의료시설이라 해보았자 장터 약방 하나 있는 게 고작이었다.
요즘처럼 응급실에 의사가 있는 병원에서 응급처치 할 상황은 아니었다. 시골 장터 약방에는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계셨다. 깊게 패인 상처에 지혈이 되지 않아 즉시 봉합해야 한다는 약방 할아버지 말씀에 나는 마취 없이 찢어진 상처를 꿰매야만 했다. 마치 모시 저고리에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상처를 꿰맬 때마다 나는 통곡했고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봉합한 상처는 손끝에 바람만 스쳐도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눈물 콧물 범벅인 나에게 아버지는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눈깔사탕 하나를 손에 쥐여주었다. 아버지는 울음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도 힘들어하던 아이가 눈깔사탕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던 모습을 보고 “사탕이 약이구나!” 하셨다. 눈깔사탕은 동그란 게 크기도 얼마나 컸던지 볼 따귀가 터질 듯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사탕을 입에서 손으로 다시 입속으로 넣어 녹아내리자 사탕은 작아졌다. 여러 번 되풀이하다 보니 작아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장에 가는 시간만 기다렸다. 집에서 장터까지의 거리는 20분 정도, 다시 집으로 가는 시간까지는 40분이다. 나는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길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시장에서 하지 말아야 할 놀이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구실이 생겨 장터에 가는 시간을 기다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종종 아버지는 약방에 나를 두고 사라지곤 했다. 치료를 마치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날들이 여러 날 있었다.
어느 날은 기다려도 오지 않아 아버지를 찾아 시장을 헤매고 다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꽃무늬 일바지가 서 있는 옷가게 모퉁이를 돌아가니 손수레에 별의별 사탕이 다 놓여 있었다. 알록달록 형형색색 크레파스처럼 누워있는 사탕과 마법의 눈깔사탕도 보였다. 손수레 옆에는 몇몇 아저씨들이 둘러앉아 화투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림이 화려한 화투판 앞에 천 원 지폐가 놓여 있었고 백 원 동전들이 오고 갔다. 그곳에는 낯설어 보이는 아버지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 아버지 집에 가요.”라고 소리쳤다. 나를 본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아야, 잠깐만 기다려 봐라.”하셨지만 나는 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수레 아저씨는 진달래 연분홍색 줄이 있는 눈깔사탕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나는 그 사탕을 손에 들고 아버지 옆에 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뽀로통하게 서 있는 딸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아쉬운 듯 동전을 주섬주섬 모으시더니 화투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손수레에서 사탕을 하나 집어 들더니 입에 넣고 오물오물 사탕을 녹아내리시더니 “사탕이 달달한 게 맛있구나.”라고 하셨다.
더 놀고 싶은 아버지의 속마음도 모르고 화투 놀이 하지 말라고 투명스럽게 던진 딸 말에 서운했을 텐데 아버지는 허허 웃기만 했다. 아버지는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옥순아 오늘 화투 치는 거 엄마랑 할머니에게 말하면 안 된다.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야. 응? 우린 한편 먹은 거야.” 아버지와 나만이 아는 둘만의 비밀이 생겼다는 말에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바지 주머니에서 눈깔사탕을 꺼내 주며 우린 한편 먹은 거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 같다.
손목 치료가 끝나 더는 약방에 갈 일이 없었으나 아버지 자전거 외출은 잦았다. 엄마와 쉬쉬하며 싸우던 부부싸움도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잦은 싸움에서 엄마의 눈물을 보고서 나는 할머니에게 말해버렸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부르셨고 그날 이후 다시는 눈깔사탕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가끔 시골장 가는 날이면 오돌토돌 설탕이 묻어 있는 분홍색 줄무늬 눈깔사탕에 손이 갔다. 아버지가 생각나 사탕을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공굴리기하면 달달한 설탕물이 목젖을 적시며 녹아내린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내 오른쪽 손목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다. 눈깔사탕을 보면 아버지가 떠오르듯 세월이 흘러도 그 상처는 아버지와 내 삶을 하나로 이어주는 듯하다. 나는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엄마보다는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
첫댓글 아버지와의 잊지못할 추억이 있어 좋으시겠네요. 둘 만의 비밀 참 재미있습니다.
그 시절에 아버지들의 놀이가.... 다행하게도 집 문서,논 문서는 잡히지 않았답니다.
하하하
저도 선생님 글 속에서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선생님은 글로 잘 풀어 내셨네요.
그렇군요! 지현님 아버님도 그 놀이를 좋아하셨나봐요?
@메릴 예. 유치원정도일때 화투장였는데 전 집에 가자고 울고 아빠는 과자 하나 사주면서 달래구요.
흔히 볼 수 없는 외출 이네요. 글 고맙습니다.
그때 아홉 살 아이가 뭘 알았겠어요? 사탕맛에..
이번 주는 유난히 한 편의 동화처럼 아름다운 글이 많네요.
아버지를 원망한 기억밖에 없는 저는 선생님의 추억을 훔치고 싶을 정도로 부럽네요.
동화처럼 읽어 주시다니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추억 속의 눈깔사탕을 다시 보았습니다. 군침이 돕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따뜻한 사랑 표현을 한 번도 해주시지 않아 선생님이 부럽기까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