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약 / 박명숙
색이 바랜 가로수의 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정처 없이 흩어진다. 물기 없는 몸이 서로 부대끼며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힘을 잃었다. 저들도 나무라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까?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워도 갈 수 없다는 슬픔이 그들에게도 있을까? 근육이 빠져 가벼워진 자신을 보며 서러워하기도 할까? 우리 엄마처럼. 싱싱함이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낙엽 위에 친정 엄마의 깊게 주름진 얼굴이 겹친다.
면회 가면 환하게 웃으며 반가워하는 건 아주 잠깐이다. 금세 표정이 변하면서 “집에 가자. 너는 길을 아냐? 나는 못 걸으니 나 좀 데려다 줘야겠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어야지. 여기 있다가 자식들도 못 보고 죽어서야 쓰겄냐?”라고 하시며 목소리가 높아진다. 온화하던 엄마였는데, 자식들에게 화 한번 내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서운하고 억울했으면 저러실까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그래요 엄마, 집에 가서 놀다 옵시다. 엄마 곁에는 항상 우리가 있으니 걱정 말아요.”
양쪽 고관절 수술하고 몇 년 겨우 걷다가, 화장실에서 넘어지면서부터는 휠체어 타고 생활했다. 거기에다 치매까지 겹쳤다. 밤에 잠을 안 자고 식구들을 불러서, 온 가족의 뒷날 일에 지장이 많아 요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리가 아파도 기어 다니면서까지 일하던 엄마다. 건강해야 일을 할 텐데, 움직여야 몸이 좋아진다는 철칙을 스스로 만들어 엄격히 지키며 살았다.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을 만큼 완고했다. 부모는 열 자식도 거뜬히 키운다는데, 자식은 한 부모도 못 돌보고 결국 요양원으로 모셨다. 거기서 지내는 엄마 생각하면 한시도 마음이 안 편하다. 벌써 4년째 평생 몸담았던 데를 떠나 계시니 앉으나 서나 온통 집에 갈 생각뿐이다. 1주일에 한 번은 꼭 찾아가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데도 엄마에게는 양도 안 차는지 왜 이제서야 오냐고 한다. 한두 달 간격으로 외박 신청해서 친정집에도 가 보고, 우리 집에도 모시고 와 하룻밤 자고 들어가기도 한다. 이 정도로는 위로가 안 되는지 요양원으로 돌아갈 때마다 눈물을 흘려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엄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 좋아진 건 딱, 하나다. 건강에 도움이 되는 비타민, 유산균, 순도 99.9% 용융 소금물을 주면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아프기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약국 약을 먹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늦게까지 일하고, 밤에 잠깐 자고 새벽 예배를 드리러 가다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 냇물에 빠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다. 피를 많이 흘리고 속 뼈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처인데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빨간 요오드로 소독하고 하얀 가루를 뿌려 가며 치료하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오죽했으면 우리가 ‘인내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왠만하면 참아내든지, 민간요법으로 해결했다. 약 재료는 여러 가지다. 된장, 쑥, 질경이, 나무뿌리, 식초, 베이킹 소다, 소주 등등. 아마 지금도 걸을 수만 있으면 들과 산으로 약초 캐러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며칠 전에도 서울에 사는 남동생이 내려와서 아침 일찍 외박을 신청했다. 친정 집에 들러서 점심 식사하고 조금 놀다가 우리 집에 모시고 왔다. 집에 오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며 준비해 놓은 음식들을 많이 남겼다. “엄마, 약 드시게요. 약이 늘었네요?” “그래? 난 모르겄다. 주는 대로 받아 먹제. 내가 뭘 안다냐?” 하시며 식사 마치고 건네는 약을 마다하지 않고 덥석 받아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물과 같이 흔들어 넘긴다. “엄마, 약 참 잘 드시네요. 잘 삼키는 것도 고마운 일이네요. 우리,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살아요.”
불안하지 않게 누구든지 잘 보이는 거실에 허리 안아프게 두툼한 침대용 요를 깐다. 보일러 온도도 높이고, 암막 커튼도 친다. 엄마가 좋아하는 찬송가를 조용히 튼다. 어젯밤에 우리 오기를 기다리느라 잠을 못 잤는지 약을 드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그 옆에 나란히 누워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이 든 엄마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작은 얼굴이 주름으로 가득 차 있다. 더 깊게 넓게 늘어날 공간이 없을 만큼. “푸우우 푸우우.” 위아래 입술 사이로 공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다. 깊이 잠들었다는 증거다. 다른 날 같으면 분명 한 번 깼을 새벽인데도 여전히 편안한 호흡을 내쉬고 있다.
아침 일곱 시가 되니 살며시 눈을 뜬다. “엄마, 오늘은 푹 주무시네요? 이렇게 안 깨고 오래 자는 건 처음이예요.” “그러더냐?” 집에 오니까 좋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는데, 보약 드셨네요? 엄마에게는 집이 보약이군요.“라고 말하니 활짝 웃는다. 부디 엄마가 이런 추억을 오래 간직하면 좋겠다.
첫댓글 어머니껜 집에 와서 푹 주무시는 것이 보약이며,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선생님은 보물이십니다.
엄마에게는 늘 죄송한 마음뿐이랍니다. 글솜씨가 부족해서 그 표현을 다 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요양원에 어머니 때문게 걱정이 많으시네요. 나도 한때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을 하시던데
그러지 못 하시니 더욱 마음 아프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