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국방송통신대학이여,
석 홍(법학박사. 수성대학교 교수및 교목실장[전]. 현 민주당오산시지구당위원장)
1. 머리말
70년대 초에 울릉에서 공직생활을 할 때 통신대학이 생겼다. 나는 고교에서 농업과를 졸업했고 산림보호 직이니 농학과에 지원하여 합격하고 입학했다. 그러나 내가 당시 행정고시를 공부하고 있었기에 전혀 취미에 맞지 않아서 다음해에 행정학과를 다시 지원 합격하여 입학 하였다. 대구 달성군청으로 발령 받아서 행정학과에 수업 중에 대학본부로부터 호출이 왔다. 이중 학적자로 되어있어서 하나를 자퇴 처리하라기에 농업과를 자퇴처리 하였다.
그리고 행정학과를 수업하면서 학생들을 모아서 4년제 대학편입을 위한 편입검정고시 준비와 다양한 활동과 총동문회결성 등 통신대학과 나와는 땔 레야 땔 수 없는 다양한 활동과 사연들이 있으므로 간략하게 정리 해보고자 한다.
2. 통구회모임
4년제 대학교 2,3학년에 편입을 위한 재학생모임이다. 당시에는 2년제 전문대학과정으로서 일반 전문대학도 편입검정고시가 아니면 편입자격이 없었다. 경북대학에서 1학년 2학기 수업을 할 때 여학생 교실까지 다니면서 신분을 밝히고 내년에 1년을 함께 공부하여 편입검정고시에 합격하면 우리도 일반대학교 3학년이 될 수 있다 모이자고 하여 30여명의 학생들을 모았다. 농협, 검찰청, 세무서, 병무청 등등 다양한 직장을 가지고 공부하는 통대 생 들이었다.
그리고 이름을 [통구회]라 하여 내가 회장을 맡아서 매주 수, 토, 일요일은 편입을 위한 영어 국어수업을 했다. YMCA에 방을 월세주고 강사를 초빙하여 수업을 하면서 친목활동도하고 통신대학 신문에 통구회 모임안내를 기사화했더니 1학년들이 몰려왔다.
수업할 때는 내가 출석을 부르고 등산, 모내기봉사, 등등 써클 같은 모임으로 보람 있게 운영하였다. <회가>도 내가 작사하여 곡을 달아서 행사 등에는 단체로 불렀다. 당시 박정희 유신하의 긴급조치로 대학생 자율모임이 자칫 단속대상이라서 대학본부의 김종서 학장님과 만나서 대책을 의논하기도 했다.
졸업을 앞두고 서울에서 편입검정고시에 응시하였다. 여학생1명과 나를 비롯한 남학생 4명이 합격하여 내가 영남대 법정대학 법학과 3학년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영남대 경영과, 충남대학, 계명대학, 여학생은 효성여자대학 3학년 교육학과에 합격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고 축하파티도 열고 강사선생님께 선물을 드리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통신대학 졸업식에는 큰고모도와서 축하를 해줬는데 영남대학 법대 편입한 상태라서 흐뭇했고 예쁜 여학생과도 기념촬영을 하고 뒤에 잠간 만나서나 ......
4. 경통회모임
4년제 대학에 편입학한 통신대학 출신들의 모임 이였다.
우리 위의 선배들이 이창우씨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주로 영남대학 이였다. 같이 어울리며 친목을 도모하고 후에는 내가 회장을 맡아서 통신대학생들이 수업중인 경북대학교에 가서 격려도하고 서울 편입생들 모임과도 만나서 친교하며 편입검정 고시장에 가서 후배들을 격려하기도하며 편입생 일반대학생으로서의 특권의식도, 자부심도 갖고 다양한 친교도 가젔다.
5. 대구. 경북 통신대 동문회 창립준비위원장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여 직장과 수업을 하면서 대구시내의 통신대학 자율모임 대표들을 불러서 모임을 갖고 공적인 친목단체로 대구, 경북 총 동문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내가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서울의 통신대학 본부에 올라가서 이응백 학장님을 만나서 취지를 보고드리고, 대구, 경북에 주소를 둔 통신대학 졸업생들을 큰 고모 아들인 병래에게 부탁하여 2천여명의 주소와 명단을 정리하여 동문회 창립총회를 알리는 엽서를 인쇄하여 발송하였다.
안동으로 발령 나서 근무 하는 중에도 동대구역 가까운 라이온스회관에서 140여명의 통대 졸업한 동문들이 모여서 대구, 경북, 통신대학동문회창립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초대 회장에는 연세가 제일 많고 경산 실업중학교 교장이신 정유열(농학과졸, 영남대 농대 축산과3년 편입, 추후에 학습관장 및 농학박사취득)씨가 이사회 의장으로는 시인이요 국교 교사인 하청호(국문학과, 추후 교장역임)씨가 선출되고 나는 수석부회장을 맡았다.
그 이후에 이사회 의장을 맡았으나 상공회의소에서 중책으로 근무하던 송모씨가 너무 권위에 욕심내어서 자기를 고문으로 하거나 파행적으로 운영에 개입 하여서 결국 동문회에 흥미를 갖지 못하게 되고 정직하고 순수한 회장 등 임원을 지낸 동문들로 매월 모이는 친목계 형식의 [두래모임]결성 후에는 동문회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6. 한국방송통신대학 총동문회 부회장 등 임원역임
통신대학에서의 재학중과 편입중에나 대구, 경북통신대 동문회 창립 활동 등을 통하여 특히 서울의 활동하는 동문들과도 친분이 많았다. 통대신문에 가끔씩 기고함으로 더 알려 지기도하였다. 그 중에는 같은 2회로 수석 졸업하여 성균관대학 법학과 2학년에 편입학한 조재연과 친하였는데 후에 조재연은 사법고시22회 수석을 합격하여 서울에서 같이 만나서 총동문회의 KBS방송국방문과 대구로 초빙하여 재학생들에게 사법고시 수험담 등을 특강하기도하며 통대 총동문회의 초대 감사로 나와 같이 맡았다가 2년 후에는 같이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사법연수원 졸업후에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하다가 전두한 정권하에 대모한 대학생들에 대한 선처의 판결 등으로 강릉지법 판사로 갔다가 지금은 로폄에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로는 통신대학 동문회에 전혀 협조나 활동은 전무하나 페이스북 등의 학력에 한국방송통신대학이라고 기록됨을 보면 페친 요청을 하여 나도 통신대학이 기반임을 이야기 하곤 한다.
7. 두레모임
대구, 경북에서 통구회장, 경통회장, 동문회 창립준비위원장으로 활동을 많이 한바 통대출신들을 많이 알고 그 중엔 서로 마음이나 이념 등이 소통되는 동문들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어울리기 힘든 경우도 있다. 특히 상공회의소의 간부로 있었던 송 모 동문은 대구, 경북 동문회 회장 등을 맡아서 권위에 사심으로 파행적으로 하고 스스로 고문을 만드는 등의 권위에 욕심을 보이는 등으로 그렇지 않는 순수한 동문들로 친목회로 자연스럽게 모임을 형성하게 되어 처음엔 15여명이 모이다가 지금은 10여명이 매월 둘째 주 토요일 날 대구 명동식당 등에서 30여 년째 모임을 가져오고 있다. 내가 17대 대구 수성갑구에서 국회의원 출마 했을 때는 양복 한 벌을 해주었고 경주에 살면서 연단과 함께 전임교수 사임을 하였을 때에는 당시 50만원이라는 큰돈을 위로금으로 주기도 했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온 동문들이다 아직까지 대학교수로 있는 경영학박사도 있고, 경북대학 사무관으로, 대구은행 지점장으로, 조폐공사 노조위원장으로 지냈거나, 현제 여행사 사장으로, 벽지 등의 대리점 대표로, 큰 기업체 간부로, 등등 지금도 변함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이다. 퇴직 후에 늦게 공인중개사로, 박사학위과정에서 수업하는 경우도 있고, 대구시내 기독교계의 유명인사인 부지런한 장로도 있다.
나는 오산에서 생활하다보니 매월의 모임에 참석을 잘 못하고 시간대가 맞아야 가끔씩 모임에 참석하는 형편이다.
8. 결론
사람들은 대게 고생한 지난날을 잊고 싶어 하고 출신학교가 좀 저급하면 숨기기가 일수다.
그러나 나는 정직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나의 지나온 삶에서의 대학교수나. 법학박사나. 목사나 사회복지학석사 등등의 모든 기반이 한국방송통신대학 2년제 행정학과 졸업임을 숨길수가 없다. 부족한 내가 그렇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도우심이다. 그리고 그 기반이 통신대학이므로 통신대학에 대한 감사함으로 어딜 가나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통신대학 출신임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