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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29
6월17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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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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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MfTRsGIO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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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원 기도 끝에는 반드시 + α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기도를 추가합시다!>
열왕기 상권 18장에는 참으로 통쾌한 장면이 소개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한판 정면 승부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남은 예언자라고는 엘리야 예언자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아차린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 예언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450명이나 되는 바알의 예언자들이 카르멜 산으로 속속 모여 들었습니다. 바알 측 예언자들을 위해 황소 한 마리, 엘리야 예언자를 위해 황소 한 마리가 번제물로 준비되었습니다.
바알 측 예언자들이 먼저 토막난 황소를 장작 위에 올려놓았지만 불은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알 신에게 불로 응답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450명이나 되는 바알 예언자들은 오전 내내 번제물 앞에서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아무런 응답이 없자 자신들이 만든 제단 주변을 절뚝거리며 계속 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알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다급해진 바알 예언자들은 더 큰 소리로 바알을 불렀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알 예언자들은 창과 칼로 자신들의 몸을 찌르며 피를 흘려댔습니다. 이리 저리 길길이 뛰면서 정신줄을 놓기도 하면서 바알의 이름을 외쳐댔지만 의미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바알 예언자들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고 비참했으며, 봐줄 수가 없을 정도로 민망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또 한 가지 통쾌한 일이 있었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바알 예언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야 예언자가 그들을 놀립니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반대로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자 마자 즉시 응답이 왔습니다.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온 백성들은 그제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는 꽤나 왜곡되어 있었고, 제한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강제적이었습니다. 동시에 당시 고대 근동 지방 이교도들의 기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기도는 길고 장황했으며, 요란스럽고 정신 사나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형식적이고 정형화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굿하는 광경과 유사했습니다. 괴성과 비명을 지르고, 길길이 뛰고 난리치면서 잡신이란 잡신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오늘날 사이비 교도들과도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개인기도나 자유기도, 묵상기도나 침묵기도, 다시 말해서 마음이 담긴 진정성있는 기도는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소란스런 기도, 틀에 박힌 기도, 위선적인 기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대 근동 이방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장황한 기도, 말잔치를 벌이는 기도, 잡다한 신들을 잔뜩 불러 모아놓고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동시에 집요하게 졸라대는 방식의 유치한 기도를 멀리 하라고 경고하십니다. 대신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6장 6절)
우리의 하느님은 길길이 뛰지 않아도, 바락바락 악을 쓰지 않아도, 자해를 하고나 데굴데굴 구르지 않아도 않아도, 입에 거품을 물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우리를 챙겨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열심히 청원기도를 바쳐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목전에 두고 게세마니 동산에서 이런 청원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오 복음 26장 39절)
오늘도 우리는 우리 각자를 위해, 우리 가정을 위해, 우리 공동체와 지역 사회와 나라를 위해, 지구촌 전체를 위해 간절한 청원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우리 자녀의 합격을 위해, 내 오랜 고질병의 치유를 위해, 취업과 승진을 위해 간절히 청원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단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청원 기도 끝에 + α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기도를 반드시 추가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의 청원기도는 반쪽 짜리 기도로 전락하게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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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타인은 지옥이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7ya1heZzu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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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소설작가 지망생이자 사회 초년생 주인공이 월세가 싼 어느 허름한 고시원에 들어오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고시원에서는 계속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직장에서도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애인에게 이런 사실을 말했지만, 너무 예민하다며 그의 말을 믿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상한 일을 고시원의 한 친구에게 털어놓습니다. 그 친구만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고 공감해줍니다. 그런데 사실 그 친구가 이 모든 살인사건의 주범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타인처럼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 그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래야 혼자만 타인으로 머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살인을 저지르는 데 쾌감을 느끼는 괴물이 됨으로써 비로소 그 사회에 속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부는 정말 일심동체인가요, 아니면 가끔 타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나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몇 년 전부터 우울증약을 먹고 상담을 받습니다. 저녁에 피곤해서 들어오면 그냥 의미 없이 TV를 돌려보다가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약을 먹어도 크게 호전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내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집에 둘이 있어도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있을 땐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둘이 있어도 자신에게 짜증만 낼뿐 다정한 미소를 짓는 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 타인과 함께 지내는 것은 지옥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타인처럼 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이 지옥이라면, 친구와 머물 땐 천국이 됩니다. 누가 타인이고 누가 친구일까요? 타인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입니다. 친구는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나에게만 신경 써 주는 사람입니다.
유럽에서는 남녀가 길거리에서 애정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마치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게 행동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둘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를 아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둘의 그런 모습에서 소외를 느끼고 그러면 지옥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제한된 에너지를 몇몇 사람에 쏟아버릴 때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켜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관계에서 우리는 천국도 느끼고 지옥도 느낍니다. 타인을 좋아하여 지옥을 체험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타인으로 만들어 남도 지옥에 살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타인으로 만들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관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는 안 됩니다. 우선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세상 모든 사람이 타인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계를 맺어줄 능력이 있으신 분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가운데 세상으로 관계를 넓혀가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신경 쓰다가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행복을 사람들에게 걸어야 해서 자신을 타인 취급하는 이웃들에게서 큰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이와 관련된 아주 좋은 예화가 나옵니다. 행복은, 마치 숟가락에 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려 그것이 흘리지 않고 들고 다니며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숟가락 위의 기름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며 에너지가 남는 만큼 이웃과의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먼저 이웃과의 관계에 집중하면 숟가락 위의 기름이 쏟아지고 그러면 내가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잃었기에 결국 자신을 타인 취급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애정을 구걸하러 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그도 그 외로움 때문에 모든 사람을 소외시키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선행도 이웃이 아닌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하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식할 때도 세상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에게 먼저 신경 쓰면 숟가락의 기름이 흐르는 것도 모릅니다. 숟가락에 기름이 흐르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타인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도 자신을 친구로 여겨주지 않는 세상에서 영원한 타인으로 지옥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라디오를 들을 때 두 주파수를 동시에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타인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선은 세상을 타인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친구가 되면 그 기쁨과 계명으로 어떤 누구도 타인으로 만들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선은 주님과의 관계를 위해 세상 사람들을 향한 신경을 끊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림을 보는 것보다 숟가락 위의 기름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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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1-6.16-18 : 올바른 자선
우리가 자선을 베풀 때는 그 자선이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뜻으로 사람들 앞에서 베풀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되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몰래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고 말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것에 대한 관심을 버리라고 하신다.
자신의 덕을 내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남 앞에서 넘치게 기도함으로써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하느님 때문에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은 인간의 칭찬이란 바람 속에 쏟아 붓는 것이다. 그런 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의 칭찬이라는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신심 깊은 마음의 표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선은 자랑하려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 “왼손”의 의미는 이것이다. 오른손은 의인이나 의로운 행위를 말하고, 왼손은 죄가 되는 행동이나 죄인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하고,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안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대천사가 토빗에게“너희의 기도를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토빗 12,12)라고 했듯이 기도는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천사들 손에 들려 하느님 앞으로 간다.
골방이라는 것은 마음의 침실이다. 그 마음으로 자기가 기도하는 것과 자신이 기도를 바치는 분만을 생각하도록, 기도할 때에는 다른 것은 보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외적인 생각과 걱정을 완전히 끊기 위해, 육신의 감각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닫아걸라는 말씀이다.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자선과 기도가 그렇듯이 단식을 할 때에도 겉꾸미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는 행위나 꾸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겉으로 꾸민다.”고 하시지 않고, “그들은 얼굴을 찌푸린다.”(16절)고 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남에게 드러내는 자랑거리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는 말씀으로 양의 옷차림을 한 이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지 실제로 양인지 결국 드러날 것이다. 말씀으로 언제나 참 열매를 맺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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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어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을까요? 도벽이 있는 사람은 물건을 훔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 버리기 마련입니다. 어떤 행동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이 습관으로 이어져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도 그 행동을 하게 되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좋은 행동을 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미사에 참례하러 성당 가는 길에 묵주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집 대문을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묵주를 꺼내 듭니다.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설거지할 그릇이 눈에 보이면 고무장갑에 손이 갑니다. 이외에도 어려운 이를 보면 도와주는 일, 슬픔에 잠겨 있는 이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 외로운 이들에게 찾아가는 일 등 오랫동안 몸에 배어서 왼손도 모르게 하는 오른손의 일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왼손도 모르게 오른손이 베푸는 자선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자선을 베푸는 이들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실제 우리 사회에는 남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코로나19 사태에 대구 어느 시장의 청년 상인들은 의료진에게 200인분의 도시락과 커피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서는 소외 계층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9년째 선행을 이어 오는 익명의 기부 천사가 있다고 합니다. 산골짜기 은둔 장소에서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는 봉쇄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다짐하고 몸에 배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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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이 말씀에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위선적인 자선을 하는 것보다는 자선을 베푸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자선을 베푸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자선을 베푸는 일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린다는 생각만 해야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상을 주실 것이고,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보상을 ‘기대’하고 ‘희망’하기는 해도 그것을 ‘요구’할 권한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언제나 항상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은혜입니다. 만일에 미리 맡겨 놓은 자기의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하느님께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을 자격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교만죄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래도 어떻든 그 자선 덕분에 도움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동기는 위선이라고 해도 결과만 보면 선행이 아닌가? 선행이라면 칭찬받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는 ‘동기’가 강조되고 있는데, 마태오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동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결과’만 강조되어 있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일을 한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를 남들이 판단하기는 어렵고, 실제로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그 결과만 보고서 선행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 자신도, 자기가 하는 일이 위선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식별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도움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는가? 아닌가?”입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면, 도움을 준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하든지, 무엇인가를 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사람 쪽에서 고마움을 느끼기는커녕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만 입는 경우가 있는데, 위선자들이 위선적으로 자선을 베풀 때 그런 일이 실제로 생깁니다. 그 경우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까? 뭔가를 할수록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만 늘어난다면, 그것을 선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죄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演技)일 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짓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짓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죄가 되는 일입니다. (미사 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심으로 미사 참례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귀찮아서, 또는 잔소리를 듣는 것이 싫어서 억지로 참석하고, 미사 시간 내내 딴 생각만 했다면, 그것도 미사 참례를 하는 척 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주일을 지키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지킨 것은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을, “세상일에(이웃의 사정에) 관심 갖지 말고 골방에서 기도만 하여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웃 사랑 없는 기도는 ‘실천 없는 믿음’이고,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26) 따라서 이웃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관심도 없이 골방에 숨어서 하는 기도는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태도도 역시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8)
위선자들도 실제로 단식을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신심과 고행을 사람들에게 과시합니다. 그런 위선자들의 단식과 신심은 하느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라는 말씀은, 단식을 하면서도 안 하는 척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라는 뜻은 아니고, 자신의 신심과 고행을 사람들에게 과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을 좋아할까? 아마도 하느님의 평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의 평가는 금방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늘 의식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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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바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외무부 장관입니다. 각국의 방송에서 한국의 외교부 장관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이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우리보다 선진국이고, 의료시스템도 잘 되어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들이 한국의 외교부 장관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질문은 한국의 방역에 대한 것이 많았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했는지, 한국은 그런 과정에서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침해는 없었는지 질문하였습니다. 한국의 외교부 장관이 침착하고, 자신 있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터뷰를 보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가 잘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코로나19의 긴박한 상황에서 전국단위 선거를 안전하게 실시한 것을 물었습니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개막된 것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한국의 방역 체계와 그런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능력에 대한 부러움이 느껴졌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은 근대세계를 주도하던 나라였습니다.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프랑스는 문화와 예술의 나라라고 합니다. 독일은 산업과 기술의 강국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당연히 현존하는 최강의 경제, 군사 대국입니다. 이런 나라들이 한국의 방역 시스템에 대하여 취재를 하는 것이 조금은 낯설기도 했습니다. 외교부 장관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앞으로의 사회는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몇 가지 변화가 생겨납니다. 예전에 가졌던 이름이 있지만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의 이름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한 이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런 방면으로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 바랍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스포츠는 그 방면에 뛰어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세상은 1등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2등의 이름은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얻은 이름은 나눔, 희생, 섬김을 위한 이름이어야 합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는 그런 이름을 얻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갔었고, 십자가를 지고 갔으며,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화려한 꽃이 되기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양분을 얻는 뿌리의 삶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런 이름을 노숙자들을 위해 밥을 나눠주는 현장에서, 환자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현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지난날의 죄가 사해집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그렇게 됩니다. 신앙은 그것을 은총이라고 하며, 성사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은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희망입니다. 세례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구별과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나라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허물이 있지만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세례로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다시금 세상의 이름이 가지는 편안함과 풍요로움 속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 적인 방법으로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유혹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끊임없이 회개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회개했음을 드러내는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내 뜻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이 다르게 변하듯이,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 생색내는 일,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을 경계하십니다.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중용 23장은 이러한 삶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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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꽃>
마태오 6,1-6.16-18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꽃>
꽃이 핀다
보는 이 없어도
꽃은 핀다
다만
꽃이기에 핀다
그렇게 피기에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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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태리에서 어학이 끝나가던 시절, 제가 지내던 봉쇄 수녀원의 할머니 수녀님께서 저를 잠시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90이 넘으신 연세에 대상 포진으로 고생하고 계셨는데 모처럼 수도원 정원에 나와 계신 관계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저에게, 로마로 언제 올라가냐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올라간다고 이야기하자, 로마에 가면 바티칸에도 가 볼 수 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볼 수 있을 테니 너무 부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한 번도 로마에 가 본 적이 없어서 한번쯤은 가보고 싶었고 지금의 교황님도 보고 싶은데 이제는 몸도 늙고 어차피 봉쇄 수녀원에 있으니 그럴 수 없음이 아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시골의 봉쇄 수녀원에 들어왔고 평생을 수녀원 안에서만 사셨으니 당연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 이전에도 로마에는 가 본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말미에 하신 말씀이 퍽 인상 깊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래도 괜찮아. 프란치스코 교황님만 빼면 다른 교황님들은 다 하늘나라에 있으니 거기서 만나면 되거든”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수녀님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 나오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은, 이렇게 평생을 묵묵히 기도해 온 겸손한 수녀님들의 기도를 통해 유지되어 온 것은 아닐까? 교황님을 비롯한 우리 성직자들은 세상에 묻혀 고요히 기도하시는 수도자들의 손에 의해 오늘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부터 봉쇄 수도회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습니다. 봉쇄 수도원이란 외부로 나오지 않고 기도와 금육, 노동 등의 내적 명상으로만 살아가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매일을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수덕 생활을 하며 모든 활동을 하느님께 집중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있는 봉쇄 수녀원에 가면 수녀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 철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해야 하고, 가까이 가서 뵐 수 있는 순간은 성체성사 때 뿐입니다.
얼핏 보면 매우 고독하고 힘든 삶일 것 같지만 그곳에 가서 수녀님 혹은 수사님들을 만나게 되면 그 모습은 참으로 밝고 아름답습니다.
작은 농담에도 밝게 웃는 수도자들의 모습, 부탁드린 기도를 한참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은 참으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참으로 겸손한 삶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리고 네가 단식할 때,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모든 삶이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되는 삶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거나 감추어 져야지 자기의 욕심과 의지로 뽐내어 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질그릇 같은 우리의 마음은 명예를 찾게 되고 나아가 교만해지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감추어 지게 되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소중한 선물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삶의 귀중한 가치를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사람보다는 겸손한 사람을 더욱 더 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자의 낡은 신발이 그 어떤 신발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어 보이고 할머니의 오래 쓴 낡은 물건이 다른 어떤 사물들보다 푸근하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종종 우리 자신을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나 자신의 의견을 더욱 고집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내가 더 인정받고 내가 더 남들보다 앞서야 하는데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를 믿고 살아가는 생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허물이 많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을 더 가치 있게 바라볼 수 있었으며, 기도할 때에는 홀로 산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니 다른 누가 우리를 알아봐 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숨은 일도 보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모두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결국,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남들의 인정’이 아닌 ‘주님의 인정’인 것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 자신의 부족함을 털어 놓으며 진심어린 기도와 선행을 행할 것을 약속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은 그저 죽음 후에 들어서게 될 “주님의 집” 그 하나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성체 송이 이야기 합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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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엘리야 예언자의 제자이며 동반자인 엘리사는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엘리사는 불 병거와 불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의 모습을 쳐다보며 크게 외칩니다. 엘리사의 탄원이 받아들여져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은 기적의 영험을 전해 주는 징표가 됩니다. 그 겉옷으로 강물을 치자 물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 신기한 장면은 ‘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할 때 외면적으로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도록 명하십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내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훌륭한 유다인, 신심 깊은 유다인입니다. 그들은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심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들은 점점 남에게 보이려고 가식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기도가 하느님께 바치는 순수한 유향 연기가 되지 않고, 명예와 허영을 부추기는 도구가 됩니다. 자선은 속죄의 행위라기보다 선행을 자랑하여 인정받고 반대급부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단죄하시며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보여 드릴 것을 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드러내지 않도록 당부하십니다.
골방에 숨어서 기도하는 것, 기쁜 표정으로 단식하는 것, 자신의 선행을 떠벌리지 않는 것은 신령한 하느님께 바치는 진정한 선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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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 1-6)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나팔을 불지 마라/ ...해서는 안 된다/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표정을 짓지 마라." 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반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는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온다.
즉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런 구분을 지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부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아니면 긍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우리는 비교적 "... 하지 마라"는 것은 하고, 반대로 "..하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각자 "..하지 마라."는 것 중에 내가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 하라"고 한 것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내가 하는 선행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예뻐 보이려고 화장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화려한 경력이나 학력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들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은 늘 경쟁의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려고 하니까 늘 다른 사람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질투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급기야는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요구하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도 말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금식할 때에는 애처로운 표정을 짓지도 말고 오히려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고까지 말씀하신다.
도대체 이런 사람은 어떤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에서 초월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삶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완전하신 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 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원칙은 분명하다.
즉 아버지를 닮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피할 것이고 아버지를 닮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할 것이다. 반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것은 취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자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남들한테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모든 관심은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 받고 존경받는 것에 있다.
이런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마음이 허전하고 그래서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한테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바쁘다.
그리고 여기 저기 쫓아다녀야 하고 좋은 것을 입어야 하고 항상 최고의 것을 지향한다. 그래야 남한테 칭찬받고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힘이 분산되고 산만하다. 안정되지 못하고 늘 쫓기며 불안해 한다.
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조용하면서도 모든 힘을 한 곳으로 모은다. 따라서 시간 낭비가 없고 힘이 분산되지 않으며 한 곳에 투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는 소원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투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하느님한테서 힘을 받고, 그 힘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한테 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한다.
사람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고 세 번째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이 세 가지 관계는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 져야 다른 관계도 원만하게 이루어 지고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하고 해야할 것은 최선을 다할 할 때 완덕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한발작 더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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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위선할 수밖에 없는 우리>
어제 길을 가다 초등학생의 어머니들로 보이는 이들의 얘기를 엿들었습니다.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들린 것은 그동안 큰 궁금증 중의 하나였던 것에 대한 대화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전철을 탔을 때 요즘 아이들-청년까지 포함하여-거의 대부분이 어르신이 앞에 있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양보하는 모범을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양보해야 한다는 의식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닌지,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지 않을까 늘 생각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풀린 것입니다.
얘기인 즉 학교에서 자기 아이에게 선행일기를 쓰고 어머니 서명을 받아오라고 하였는데, 보니 여러 날 일기를 한꺼번에 쓴 것이었고 똑 같은 내용의 거짓 일기였기에 서명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선행의 내용이 무엇이었냐 하면 집에서 어머니 도와드린 것, 길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 길 친절히 가르쳐드린 것, 전철에서 자리 양보한 것이었는데, 이런 몇 가지를 시간, 장소, 상황만을 조금 바꿔서 일기를 쓴 것입니다.
선행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선행을 하지 않는 아이들과 선행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 사이의 僞善의 Mechanism(매카니즘)이 너무도 잘 드러나는 얘기였습니다. 한 마디로 위선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 사회인데 이것은 비단 요즘의 우리 사회 뿐 아니고 보편적 인간의 역사가 위선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너도 나도 선하지 않는데도 선행을 요구 당한다는 것이고 선행을 요구한다는 것은 비록 선하지 않지만 모두 선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의 선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위선적입니다. 그렇다고 위선을 하지 않기 위해 악행을 일삼으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위선도 그렇게 나무랄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나는 위선적이지 않고 이들만 위선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다면 이것이 더 고약한 위선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인간이 나의 것이라곤 죄와 악습밖에 없고 나의 선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하느님의 것이기에 아무도 자기의 선과 선행을 자랑할 수 없는데 인간은 그 선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즉 하느님의 선과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서 이루신 선을 찬미, 찬양하지 않고 자기 것인 양 자랑합니다.
저는 프란치스코의 제자이기에 이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위선하고픈 것을 꾹 참습니다. 그리고 내 놓고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비웃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저를 들여다보면 제가 더 나쁜 위선자입니다. 은근히 하느님의 선을 내 것인 양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위악도 좋지 않고 위선도 좋지 않지만 위선을 가리는 고차원적인 위선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구역질나고 참으로 나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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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에는 도대체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공중전화 부스입니다. 한 20년 전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아마 공항에서만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보기 힘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빨간색 우체통입니다. 지금 거의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1993년 전국 우체통 수는 57,599개였지만, 2015년에는 14,920개로 거의 75% 가까이 줄었다고 합니다. 우체통 안에 석 달 동안 편지가 한 통도 없으면 그 우체통은 철거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편지보다는 SNS나 E-Mail을 이용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손편지가 사라진 것입니다. 공중전화와 우체통. 지금은 거의 무용지물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때의 추억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필요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추억의 한 칸을 차지할 뿐이라는 사실에 어디에 중심을 두어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전혀 변하지 않는 분,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중요한 분으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누구에게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바로 주님께 집중해야 하며, 특히 주님의 뜻에 철저하게 따르며 사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세상의 눈과는 다른 시각을 제시하십니다.
‘폼생폼사’라는 말이 예전에 아주 유행했던 적이 있지요. 즉,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라는 뜻인 이 말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중요하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은 마음속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자선, 기도, 단식. 이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를 남에게 보이기 위한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남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할 뿐이라고 하십니다. 자선, 기도, 단식. 모두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훌륭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었을 때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숨은 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시는 하느님께서 모두 갚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아닌 숨어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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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일도 보고 계시는 하느님.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길을 가다가 아는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했는데, 그분이 모른 척하며 그냥 무심히 지나갑니다. 이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되십니까?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어간다면 별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생각에 머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 ‘나를 무시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마음에 분노를 품습니다.
- ‘다른 사람이 이 상황을 봤을까?’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은 수치심을 갖게 됩니다.
- ‘나는 인사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분노, 수치심, 우울. 모두가 좋은 마음이 아니지요. 이런 마음을 가질수록 나의 삶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에 빠지지 않도록 흘려 버리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정말로 힘들다면 직접 물어보는 용기가 최선입니다. 혼자 끙끙 앓아봐야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도 더 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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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농부 하느님>
-겸손과 온유, 진실과 지혜-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수도원 농장에 살면서도 어제는 참 부끄럽게도 오랜만에 야외 농장에서 오전 한나절 매실 수확을 도왔습니다. 책 몇권 읽은 것보다 많은 깨달음을 얻은 날입니다. 하루 11193보를 걸었고 체중도 1kg 줄었습니다. 역시 자연은 살아있는 성서요, 자연속에서 함께의 농사 노동은 사람들에게 참 바람직한 일임을 새삼 깊이 깨달았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예수님은 하느님을 농부 아버지라 고백합니다. 농부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복음 말씀이겠는지요. 온몸과 온맘으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농부들을 볼 때마다 창백한 이론의 한계와 더불어 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어제 읽은 글도 나눕니다.
“소유와 소비가 삶의 질을 좌우하는 도시적 삶을 거부하고 땅으로 돌아간 사람을 나는 ‘미래를 먼저 사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내게는 저 지역들이 아직은 미미하지만 ‘좋은 삶’의 발상지로 보인다. 가난하지만 의미를 추구하는 삶들이 모여 공생공락하는 사회가 탄생하는 곳말이다. 석유가 발견되면서 벼락부자가 된 중동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우화가 있다.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타고 아들은 비행기를 탄다. 아들의 아들은 다시 낙타를 타게 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경고다. 우리의 할아버지는 농업을 하고 아버지는 상업을 하고 아들은 서비스업을 한다. 우리 아들의 아들은 아마 다시 농업을 하게 될지 모른다. 미래를 먼저 사는 사람들을 새삼 눈여겨 본다.”(경향6.16.이문재)
사막의 교부 아르세니우스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압바 아르세니우스가 어떤 연로한 농부에게 자기 생각들에 관해 조언을 구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후에 압바에게 물었습니다.
-“압바. 아르세니우스님, 그렇게 훌륭한 교육을 받은 압바가 어째서 이 농부에게 당신 생각들에 관해서 묻는 것입니까?”
아르세니우스가 대답했다.
“나는 참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지만 이 농부의 알파벳조차 모릅니다.”-
자연성서속에서 살아 오며 삶의 지혜를 터득한 농부들이야 말로 누구보다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들입니다. 기다림과 인내, 겸손과 진실의 농부들의 덕은 그대로 하느님의 덕을 닮았습니다. 매실 열매가 작고 병이 들은 것도 많았습니다.
“가물어서 그렇습니다. 약을 쳐야 하는 건데 약을 치지 않았네요!”
농부 수도형제의 답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은총의 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아무리 품종 좋은 나무라도 물이 없고 거름을 하지 않고 때로 농약을 치지 않으면 좋은 수확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물, 비료, 약은 농사에 3대 필수요소임을 깨닫습니다. 마치 기도, 성독, 노동이란 영성생활의 필수 3대 요소와 흡사합니다.
어찌보면 농사뿐 아니라 모든 일이 깊이 보면 섬김의 일, 서비스업에 속합니다. 하여 부단한 기도를 통한 사랑의 열정, 공부를 통한 유능한 실력, 운동을 통한 건강 체력의 배양培養이 섬김의 일에 필수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이런 깨달음도 더욱 겸손하게 합니다.
혼자의 노동은 불가능합니다. 함께 들어야 하고 함께 옮겨야 합니다. 더불어 형제애도 생기고 형제들에 대한 고마움도 갖게 되니 저절로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정말 큰 배밭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얼마나 많은 일손들을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 마침 적과를 하던 다섯 자매들도 얼굴의 복면과 마스크를 벗고 함께 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적과때에는 볼 수 없는 얼굴들을 보니 반가웠습니다.
일하다가 맞이하는 간식의 휴식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참된 시간인지요. 노동의 수고가 있기에 이런 감미로운 휴식시간입니다. 정말 동지애, 형제애도 함께의 노동을 통해 형성됨을 봅니다. 함께함이 위로와 격려가 되고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주는 은총의 힘입니다.
자매들을 보며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은 얼마나 본능적인지 깨닫습니다. 짧은 간식의 휴게 시간중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거울을 들여다 보며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각자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닌 제 얼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보며 정성스레 화장을 하듯 하느님 거울에 자신의 영혼을, 마음을 들여다 보며 정성을 다해 화장에 힘쓰는지 묻게 됩니다.
보이는 얼굴보다 더 소중한 영혼의 얼굴, 마음의 얼굴입니다. 정말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성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겸손의 향기라면 어떤 화장보다도 보이지 않는 영혼의, 마음의 얼굴을 아름답고 고귀하게 가꿀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루 7회 시간경의 시편성무일도와 매일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영혼의, 마음의 얼굴들을 돌보는 화장시간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 은총이 마음을 정화하여 순수하고 지혜롭게,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듭니다. 거룩한 함께의 전례기도뿐 아니라 함께의 육체 노동도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하여 진실하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어제는 모처럼 함께의 육체 노동을 통해 겸손에 대해 많이 깨달은 날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도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랑, 겸손한 믿음, 겸손의 아름다움, 겸손의 힘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영성의 잣대, 성덕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복음은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을 통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한 줄도 모릅니다.
주님은 절대 위선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자선을 숨겨 두라 하십니다.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십니다. 단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하십니다.
모두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위선을 혐오하셨는지, 참으로 진실과 겸손이 얼마나 귀한 덕인지 깨닫습니다. 비록 감춰진 수행이지만 절대로 닫힌 수행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열린 수행들입니다. 세차례에 걸쳐 반복된 결론 말씀도 주목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참으로 철저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기인하는 은총의 열매가 겸손과 진실이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은 엘리야의 승천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겸손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에녹과 모세에 이은 세 번째 승천한 분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땅에서 모세처럼 겸손한 사람이 없었다 하는데 엘리야도 그렇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제의 대화가 의미심장합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 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 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엘리야의 승천으로 하느님은 그의 겸손을 인정하셨음을 봅니다. 엘리야가 참으로 겸손했음을 확증하는 승천의 은총입니다.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한 엘리사, 바로 그의 겸손의 눈이 열렸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교만으로 내려가지만 겸손으로 올라갑니다. 이 또한 영적 삶의 역설적 진리입니다.
참으로 영적 삶은 깨달음의 여정이자 겸손의 여정입니다. 깨달아 가면서 날로 겸손과 온유, 진실과 지혜의 주님을 닮아 갑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달음의 여정, 겸손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이 사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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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라>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의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상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있는 척...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겉치레는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든, 자선을 베풀든, 단식을 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나 자선, 단식을 함에 있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을 명확히 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 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희망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드러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심지어 의로운 일마저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를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함께야)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에 앞서 하느님의 시선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공연한 인간적 명성은 참된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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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시선을 갈망하는 자가 동시에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어렵지요. 타인의 눈과 칭찬과 영광에 취하면 매사를 그들 평가에 맡기게 되고, 지향의 순수성보다 돌아오는 칭찬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게 됩니다. 이제 수행은 더 이상 수행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마태 6,4.6.17)
숨어서 드리는 기도, 남모르게 베푸는 자선, 드러내지 않는 단식은 아버지의 "봄", 그분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고, 자선은 하느님 사랑이 흐르는 곳으로 동행함이며, 단식은 하느님을 더 담아 충만해지려는 자기 비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타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하느님과 나와의 내밀한 통교입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예언직 승계 장면입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2열왕 2,9)
엘리야가 떠나기 전 엘리사는 스승님 영의 두 몫을 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맏아들이 다른 이들보다 두 배의 상속 재산을 받는 관습이 있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엘리야의 영적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달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2열왕 2,10).
엘리야는 "봄"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엘리야가 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엘리사 본인과 주님께 달렸다는 의미 같습니다. 스승의 지상 여정 마지막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본인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맛볼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봄"은 곧 기도, 특별히 관상의 경지를 가리키지요.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열왕 2,6)
그 "봄"의 첫째 조건입니다. 상대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 곁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의지이고 열망입니다. 관상기도는 주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쟁취해 거기서 서로에게 친밀히 머무르는 기도입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2열왕 2,11)
"봄"의 둘째 조건은 이야기, 곧 말씀입니다. 이 중요한 순간 두 예언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 성경에는 별 언급이 없지만 적어도 뒷담화나 심심풀이 한담은 아니었을 테지요.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염려와 자비,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의 소명 등 그들은 더 뜨겁게 말씀 안을 걷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관상하는 이는 엠마오 제자들처럼 말씀이 닿으면 뜨겁게 타오릅니다.
"봄"의 셋째 조건은 함께 계속 동행하는 지속성입니다. 관상기도는 잘 되는 것 같으면 열렬히 바치다가 메마름이 오면 손을 놓는 일희일비의 감정놀이가 아닙니다. 은총의 희락에 젖을 때나 주님 부재의 무미건조함 속에서도 다름없이 꾸준하고 항구히 동행합니다. 그래서 그는 골방이나 외딴곳을 더욱 사랑합니다. 하느님과 머무르는 충만한 고독을 찾아다니지요.
관상하는 이는 하느님의 시선 앞에 자신을 두고, 타인의 시선은 물론 자기 자신의 시선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봄" 앞에 머물러 그분을 봅니다. 사람이 주는 영광과 칭송이 더 이상 그에게 매력이 되지 못하듯, 사람의 비난과 공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어계시는 아버지를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이미 그분은 우리를 보고 계시니 우리는 그분 시선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 눈에 비치고 그분 마음에 들면 족합니다. 그 자체가 그분 사랑 안을 헤엄치는 것이니까요. 사람에게서 오는 대가성 위안들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처럼 "쓰레기"(필리 3,8 참조)에 불과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나만의 내밀하고 은밀한 골방에서 그 "봄"에 취하고 그 사랑에 취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그 골방에서 사랑이 되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진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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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 사랑에 마음을 열고 <감사>와 사랑으로 <성경> 읽기
끊임없는 감사생활을 훈련해야 한다.
감사의 시간표를 만들어 새벽에 일어나면서,
여행할 때, 단순노동을 할 때, 틈이 날 때….
훈련은 운동선수의 체력을 단련시켜 주듯이
감사 훈련은 영혼을 훈련시켜 하루를 감사하며
살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성경을 습관적으로 읽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저 도덕적 시각으로만 읽는 것에 습관이 되었다. <사랑의 눈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서
♣아무리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상응하는 감사의 생활이 없고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의 눈으로 읽지 않으면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태도가 아닙니다.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훈련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감사의 시간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일을 하기 전과 일을 끝내고 나서, 특히 저녁기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님께 하루 중에 감사할 일들을 적어도 세 가지 이상 떠올리고 감사하는 습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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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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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산상설교에서 “의로움”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PR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PR은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 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도 저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않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기도할 때 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시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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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시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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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LjzYDkRjM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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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마태 6, 2)
무엇을 위한
단식과
기도입니까.
하느님께
드려야 할
단식과 기도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을
만나는 마음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모순을
깨뜨리는
단식과
기도입니다.
쥐고 있던 것을
놓는 단식과
기도입니다.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단식과 기도입니다.
단식과 기도가
우리의
위선과 연극을
멈추고 벗어나는
새로운 변화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놓치고
잃어버린 것이
감사임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도 단식도
자아 안에
갇혀있고
고여 있으면
마음도 썩고
생활도 썩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음을 살리는
단식과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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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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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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