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흑룡강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만주지방의 항일유격대 서열표, 김일성 이란 이름은 한 줄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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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최영재 기자 =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이 1930년대 중국 공산당에 편제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국 공산당 자료에는 그런 기록이 한 줄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특히 중국 공산당은 북한의 건군 기념일인 1932년 4월 25일을 날조된 역사라며 외면하고 있다.
또 중국 공산당 기록은 북한이 조선인민군의 모태라고 선전하는 안도항일유격대 관련 자료에서 김일성의 이름을 한 줄도 적지 않고 있다. 아울러 중국 공산당은 일본군이 만주를 강점한 1932년부터 1934년 봄까지 만주 지방 도처에서 발족된 공산당 유격대 조직 어느 곳에서도 김일성이 활동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있다. 1932년을 전후해서 만주지방에서 활동한 항일무장투쟁조직 15개였다.
북한의 건군 기념일은 4월 25일이다. 북한에서는 이날이 김일성 주석이 1932년 안도반일유격대를 결성한 날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국내의 종북 세력과 북한 주민, 심지어 탈북 동포 대다수도
1945년 광복은 김일성이 이끈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과 무려 10만 차례 전투를 거듭하면서 쟁취한 결과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북한 측이 기록한 역사책 말고는 어느 나라 역사도 김일성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영국·일본의 전쟁기록은 고사하고, 그들의 우방이었던 중국·소련에서조차 그러한 문헌을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의 건군 기념일인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가장 잘 전시돼 있다.
| 중국 흑룡강성 박물관에서 만주지방의 항일무장투쟁을 설명하는 전시물,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이 1930년대 중국 공산당에 편제되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정작 중국 공산당 자료에는 그런 기록이 한 줄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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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반일유격대장은 김일성 아닌 이영배
그러나 이 박물관에는 △유격대명칭(遊擊隊名稱) : 안도반일유격대(安圖反日遊擊隊) △성립시간(成立時間) : 1932년 4월 25일 △주요영도인(主要領導人) : 이영배(李英培) 라고만 적혀 있다. 중국측 기록은 대장이 ‘김일성’이 아니라 ‘이영배’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 박물관에는 만주지방의 중국 공산당 항일투쟁역사와 국공 내전 당시 사적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곳에 항일무장투쟁을 설명하는 벽면이 한 곳 있는데 ‘항일유격대조직서열표’라는 것이 붙어 있다.
이 조직 서열표는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를 강점한 1932년부터 1934년 봄까지 만주 지방 도처에서 발족된 공산당 유격대(당시는 반일 유격대라는 명칭을 썼다)의 명칭, 그 결성 시기, 지휘한 영도자, 활동지역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조직 서열표에는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이 만들었다고 선전하는 1932년 4월 25일에 만들어진 ‘안도반일유격대’의 영도자는 이영배로 돼 있다. 아울러 이 안도유격대가 최초의 항일유격대가 아니라 이미 그해 3월에 ‘왕청(汪淸) 반일유격대’가 발족돼 있었고 양성룡(梁成龍)이 그 대장인데 그의 활동지역이 안도 및 왕청이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양성룡은 이름난 조선족 투사였다. 북한 기록은 이 양성룡을 김일성 주석의 부하로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양성룡은 안도반일유격대장 이영배의 상급자로 돼 있다.
이 서열표에는 김일성이란 이름은 한줄도 나오지 않는다.
북한의 말대로 혈맹 관계인 중화인민공화국조차 김일성의 활동 무대였다는 중국 동북 3성 만주에 있는 역사박물관에 김일성의 이름을 단 한줄도 써놓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북한 기록인 조선전사(17권, 1981)는 안도반일유격대의 발대식이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있었다고 쓰고 있다. 또 대원은 이영배를 포함한 5명만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5·1절에 안도반일유격대가 안도현성에 입성해 시위를 했고 며칠 후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이 방문하해 대원들을 쓰다듬어 주며 격려했다고 적고 있다.
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2)(1992년 발행)’에는 대원이 100명 가량이며 김일성이 대장 겸 정치위원이었다고 돼 있다. 조선전사에 등장한 5명의 대원을 포함한 대원 19명의 이름도 등장한다.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 생모 강반석이 방문한 날이 5·1절 며칠 후가 아니라 5·1절 당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이영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덧붙인다. 김일성은 이처럼 이영배를 자기의 부하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김일성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안도반일유격대장은 이영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중국 공산당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중국 흑룡강성 박물관에서 만주 지방의 항일무장투쟁을 설명하는 벽면.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이 1930년대 중국 공산당에 편제되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정작 중국 공산당 자료에는 그런 기록이 한 줄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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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마다 말이 바뀐 조선인민군 창건 기념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자신이 제일 먼저 반일 유격대를 조직했다고 했다. 즉 해방 직후 시점에서는 1931년 겨울 간도(間島)에서 조직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1958년 무렵에는 1932년 중국 안도현(安圖縣)에서 조직했다고 말을 바꾼다. 또 1968년 시기에는 1932년 4월 25일에 조직했다고 날짜까지 덧붙였다.
말을 바꾸다 보니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도 바뀌게 된다. 당초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은 1948년 2월 8일이었다. 그날 김일성도 열병식에서 ‘조선인민군 창건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연설까지 했다.
그런데 ‘안도반일유격대’ 발족일이라고 하는 1932년 4월 25일로 소급해 인민군의 뿌리를 짜 맞추느라 창군기념일도 1978년부터는 4월 25일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그렇게 해놓고 오늘의 인민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던 김일성의 혁명전통을 이어받아 조국해방전쟁(6.25 전쟁을 북한이 일컫는 말) 때는 미군과 괴뢰군(대한민국 국군)을 쳐부수는 빛나는 전통을 세웠다고 북한 주민들에게 교양하고 있다.
북한 당국에서 발행한 김일성 회고록들은 이처럼 특정인의 사실상의 역사가 아니라 특정인을 주인공으로 한 하나의 역사소설적 창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1인칭 소설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소설’을 북한 주민들만 읽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 내부의 지식인과 정치인, 특히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현재의 40대, 50대가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386세대들은 이 ‘소설’들을 창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였다. 또 대부분이 지금도 이런 역사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는 2010년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북한의 천안함에 대한 군사도발 규탄 및 대응조치 촉구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고, 북한인권결의안이 10년 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것이 본지가 ‘김일성 바로 알기’ 연재를 하는 문제의식이다.
3bong@as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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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안주셔도 됩니다.
알아서 잘 찾아보고 있습니다.
해방이후 중국내전 시기의 신문 기사를 검색해보면,
만주에서 47년 초에 공산군이 총 44만명이었는데,
그 중 김책이 이끄는 북조선공산군 지원군이 14.5만명이었고,
소련의 조차지인 대련, 여순에서 대규모 병력을 키우고 항복한 관동군, 만주군 무기로
무장을 시킵니다. 그 당시 소련군은 여순대련 과 만주 각지에 30만이 주둔합니다.
미군은 산동성에 10만명, 주요항구에 5만명이 주둔합니다.
그 당시 뉴스를 보면 소련이 무장시킨 조선 병력 규모를 보면 40~50만으로
반복해서 보도됩니다.
중국은 그 당시 동북에서 중국내전 전쟁에 대해서 철저히 비밀로
취급하여 비공개하고 있죠.
동북 조선인 동포들이 내놓은 중국내전 참전 역사를 보면
전투병과 기간, 무장민병 모두 합해서 16만명쯤 되는데
북조선 14.5만명과 합하면 30만명이 넘어가는 대군이었던 셈이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몇명 근무하는 주재소 기습사건 이라고 , 별볼일잆는 불량배들의 치기어린 만행 이었다 로 평가 절하 ,,,, 그러나 조선백성 모두가 독립에대한 열망이 좌절되고 실의에 차있을때 꺼진불씨를 재점화 시켰다는데 역점을둬야 하지않을 까요~~ 뱀입앞에 개구리가 뱀에게 대항한다는 상상은 해봤나요?
90년대까지 학계에 지배적이었던 가짜김일성설이 완전 김빠지니 급기야 짱개연결시켜 신종 가짜설만들기 작업의 일종인 듯...
설마 아시아투데이 비열한 글쪼가리 하나에 목숨거는 사회라면, 노답
무슨 신문쪼가린지 몰것지만,,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 기획이란게,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라니...
이런 똥종이는 가급적 안 보는것이
위생건강에 이로울겁니다....^^:
항일독립운동을 했든지 말든지 관심없음.
그보다 더큰 죄를 민족사에 끼쳤기 때문.
6.25남침 유도설은 진보 학자들 까지 허구로 인정.
@찰옥수수 Copy 무식은 참 위험하죠
무식한 자가 용맹스러울 때는 더욱 위험하고
@air22 유식한 분께서근거를 올려주시길
골방에서 찌질거리지 말고...^^
@air22 김일성의 남침은 소련기밀문서가 해제됨으로서
물증이 드러났음.
미국의 에치슨 라인을 오해했다는것을..
조국통일전쟁에 미국이 참전한것을 욕하면
김일성은 조국통일전쟁을 위해 스탈린에게가서 48번이나 퇴짜받으며
허락을 받은것부터 해명해야함
@우람 그게 브루스커밍스의 교전확장설인데
소련기밀 문서 해제이후 본인이 정정했지요..
남한은 조봉암의 농지개혁으로 교전확장 가능성을 줄였고
설사 교전확장설이 맞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확장시킨데 대해 변명의 여지는 없어요.
@새벽이 올때까지 ㅋㅋ 책 한 권 읽고 세상 모든 일 평가하는 잉간만큼 위험한 존재는 없답니다...
소련기밀문서는 영변핵위기 연속 선에서 94.7월 미국과 한편인 러시아가
북-소 외교전문과 정보문서 중에서
49.1.7일자 이후의 전문과 정보보고 문서들에서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선택하여 공개합니다.
이 문서들을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소련 대국의 것이니까 올커니 사실이라고 받아먹는게
바로 사대주의 머저리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체는 그 당시의 전략적 맥락과 상황에서
판단해야 옳은 인식에 도달합니다.
사대주의 머저리들도 판단할수있는 정보가 역사적 진실이죠..
무슨 주체적 판단 따위가 중요한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무슨놈의 그리 복잡한 머리돌림이 필요하단말인가요
@새벽이 올때까지 현대사는 패권국의 관점에 따라 우리에게 제공되는
역사의 매트릭스마저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대국과 강국의 이러한 왜곡력은 항상 발생하므로
이를 교정하는 과학적 추론이 필요합니다.
전제가 되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군요.
이 정황을 다루는 여러곳의 기록을 교차대조해서,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론하는 수고가 필요해보입니다.
역정보에는 진실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