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선정(崇先正)
중국에서 문묘(文廟)에 추숭(追崇)할 때의 칭호를 버리고 ‘선성선사(先聖先師)’로 고쳐 적었는데, 조정에서도 이 제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성인(聖人)의 덕이 붙여진 봉호(封號)에 따라 더해지거나 덜해지거나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미 오랜 세대에 걸쳐 이 칭호로 불리며 존숭되어 왔고, 정자(程子)나 주자 같은 대유(大儒)들도 이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는데, 하루아침에 삭제하는 것은 실로 온당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지금 이 일을 어찌 가볍게 의론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종사(從祀)하는 전례(典禮)에는 이해하지 못할 점이 많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경우는 그저 문장을 숭상했을 뿐이고, 불교(佛敎)에 아첨함이 또 심했다.”
또 말씀하셨다.
“그의 문집(文集) 중에 나오는 불교 관련 소(疏) 등의 작품을 볼 적마다 매우 미워하면서 통렬하게 끊어 버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를 문묘에서 함께 제향(祭享)하는 것이 어찌 선성(先聖)을 심하게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개탄스럽고 개탄스럽다.”
또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사현(四賢)의 경우는 비록 공덕(功德)이 있으나 문묘에 종사하기까지 하는 것은 또한 가벼이 의론해서는 안 된다.”
이 당시에 관학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종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그 말을 듣고서는 끝내 옳게 여기지 않으셨다.
“천곡서원(川谷書院)의 이천(伊川 정이(程頤)) 선생 제문(祭文) 가운데 ‘혁(赫)’과 ‘훤(喧)’ 두 글자는 온당치 못하니, ‘정(正)’과 ‘대(大)’ 자로 고쳐야 한다. 이는 〈화상찬(畫像贊)〉에서 ‘전야대성(展也大成)’이라 하였고, 시호(諡號)를 ‘정공(正公)’이라 했으니, ‘정’ 자와 ‘대’ 자가 더욱 적절해서이다.”
오천(烏川) 김부필(金富弼)이 여쭈었다.
“역동서원(易東書院)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받들어 제사 지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정자와 주자 모두 역학(易學)에 크게 공이 있는 분이다. 서원 이름을 ‘역동(易東)’이라 하였으니,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들고 우 좨주(禹祭酒)를 배향(配享)하는 것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하지만 서원의 제반 여건이 몹시도 엉성해서 학전(學田)도 없는 데다 전복(典僕)도 거의 없다. 그러니 경솔하게 이런 중한 예를 정해 놓았다가 결국에 가서 소홀해지게 되면 받들어 모시려다가 도리어 소홀히 대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간편하게 우 좨주만 제사 지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김부필이 여쭈었다.
“서원의 학전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부족합니다. 곡식을 비축해 두고 이자를 받으시지요.”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식리(息利)’ 두 글자는 유자(儒者)가 할 말이 아니다.”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를 서원의 사당에 배향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해주(海州)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서도 그렇게 하려 하였으나 여론이 몹시 들끓어서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 일도 시비가 정해지기를 기다려서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또 그가 사당을 세웠는데 거기에 그를 배향한다면 그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대개 주세붕은 이기(李芑)의 문하에 발을 들여놓아 그 처신에 크게 낭패스러운 점이 있었다. 선생의 이 말씀에는 실로 숨은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