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사노바를 향한 기억
이 홍사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오늘은 무슨 일부터 해야 하나 궁리하고 있었는데 불현듯 카사노바가 떠올랐다.
카사노바, 그 작자는 이 새벽에 어디서, 어떤 여자를 끼고 자고 있을까?
한국이 이곳보다 두 시간 반이 빠르다. 시차가 있으니 이 시간이면 한국의 카사노바는 일어났을 수도 있겠다. 아니다. 옛날 버릇대로라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밤에 집중이 잘 된다고 새벽까지 뒤척이는 버릇이 있는 작자가 그 시간에 일어났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상상하기 힘든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여자, 또한 끼고 자지 않는다는 상상도 마찬가지다. 필시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여자를 끼고 잤을 것인데.
성국이가 누구인데? 천하에 둘도 없는 카사노바가 아닌가?
한데, 그 잊고 있었던 작자가 지난밤 난데없이 꿈에 보였을까?
참 희한한 꿈이었다.
그 꿈으로 인해 기억의 수면 아래 가라 있던 인물, 카사노바가 수면 위로 불쑥 솟구친 것이고 지금까지 그가 생각과 기억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맴돈다.
오전 내내 카사노바에 대해 생각하는라 다른 일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 꿈이란, 때때로 뚜렷한 입체감과 선명함, 그리고 현실에 대해 기묘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현실에 대한 기묘한 유사성?
어떤 유사성을 지녔기에 카사노바가 꿈에 보였을까.
새벽에 일찍 일어난 탓인지 점심을 먹고 나니 몸이 나른하게 가라앉는다.
한숨 자고 싶지만 때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때쑤는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누가 집을 사러 왔으며 가격은 얼마를 제시했으며 다른 집을 더 둘러보고 다음에 오기로 했다고 하면서, 가정부 에모에 대해서 얘기했다. 매니저인 때쑤는 에모를 오늘 처음 만났다. 나는 사흘 전부터 새로 온 가정부를 관찰하는 눈으로 보았지만, 아는 것이 없다. 그녀에 대해서 이름과 나이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꿈 이야기부터 하자.
꿈을 꾸다가 깨어서 이른 새벽에 깨어서 지금까지 자지 못했다.
잠이 유독 많은 나에게는 드문 일이다. 아침을 먹으면 잠깐씩 자기도 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꿈속에서 카사노바 성국이가 이번에는 또 바뀐 여자의 팔짱을 끼고 어디선가 나타났다. 여기서 ‘또’라는 단서를 붙이는 건 만날 때마다 그의 옆에 있는 여자가 바뀌는 까닭에 또, 라는 단서가 붙는다.
꿈의 무대는 홍랑의 고향 마을의 낮은 뒷동산의 고갯길이었지 싶다. 어릴 적 그 고개로 넘어서 학교에 가곤 했다. 아무튼, 상당히 낯이 익은 곳이었고 카사노바는 알지 못하는 고갯마루다.
너? 또 여자가 바뀌었나?
여자를 가만히 보니, 어라? 이게 누구야? 에모였다.
꿈이란 언제나 논리적이지 못하지만, 이 여자를 왜 네가 데리고 있어?
카사노바에게 무겋게 물엇든가?
그는 특유의 이죽거리는 듯한 웃음으로 그 물음에는 대답이 없이 팔짱을 끼고 있던 에모의 팔짱을 풀어서 웃으며 에모의 손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순진한 여자를 너처럼 위험한 작자가 끼고 있으면 안 되지?
꿈속의 나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이 에모의 손을 잡았다. 보드라운 손인 줄 알았는데 촉감이 너무 딱딱했다.
손바닥이 왜 이렇게 딱딱해?
중얼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잠이 깨었다. 깨고 보니 내 손에는 베갯머리에 던져두었던 에어컨 리모컨이 쥐어져 있었다.
에모는 며칠 전에 어렵게 구한 미얀마 현지의 가사도우미다.
피부는 가무잡잡하고 눈망울은 빛나는데 너무 순진해서 무슨 말을 하면 울어버릴 것 같아 말을 걸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아가씨, 아니 젊은 과부다.
젊다기보다는 어린 과부. 이 어리고 순진한 여자가 카사노바와 팔짱을 끼고 있다니?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으려고? 상처가 깊으면 흉터는 오래간다고 했는데.
에모는 나이가 스물여덟이고, 아홉 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스물여덟에 아홉 살짜리 아이가 있다면 몇 살에 결혼한 거야? 그리고 왜 그 나이에 혼자 살아?
궁금한 게 많지만, 물을 수가 없었고 에모가 무슨 연유로 그 나이에 과부가 되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에모를 소개한 살린이라는 녀석은 서툰 한국말로, 그냥 남편은 없고 아들 하나를 키우며 홀로 사는 여자라고만 했다. 그리고 소개비를 알뜰하게 받아서 가버렸다. 아가씨든 과부든 상관이 없다. 사고만 치지 않고 가사도우미로서 일만 깨끗이 잘하면 그뿐이다. 월급과 휴가는 살린의 통역으로 간신히 알아듣고 채용했다. 살린이라는 녀석은 한국의 양말공장에서 칠 년간 일했다고 한국어를 조금 하는 녀석이었다.
지난번 아가씨는 노처녀였는데 별명이 능구렁이로 사고를 쳤다. 그녀는 누구에게 급하게 빌려준다고 하고 돈을 여러 번 받아 갔으며 급기야는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오토바이까지 팔아먹고 도망을 쳤다.
간덩이가 부었지. 어떻게 오토바이를 팔아먹을 생각을 해?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오토바이를 팔아먹을 적에는 나는 한국에 머물던 시점이었다. 아무튼, 그 능구렁이를 찾기는 찾았지만 받아야 할 금액을 포기하고 좋은 말로 그만두라고 했다. 한국 음식은 입에 맞게 잘하는데 더 데리고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그만두라고 내쫓았다.
여기는 타국이다. 가능하면 내보낼 때 좋게 내보내야 뒤탈이 없는 법.
그래야 후환이 두렵지 않단다.
능구렁이에겐 이젠 문제가 생길 게 없다. 이번에 어렵게 구한 가사도우미는 능구렁이가 아니라 너무 순진하게 생겨서 말을 걸어 뭘 시키기가 상당히 조심스럽다. 어쩌다가 이 층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아래층 부엌에서 일하는 에모를 부른다. 책상 앞에 앉아서 불러도 실내 계단으로 통하는 구조이니 아래층에서 들린다. 그러면 에모는 올라온다. 대답부터 하고 올라오면 편하고 좋으련만, 대답도 없이 올라오곤 했다. 불러놓고 에모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참 불편했다.
홍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올라온 에모가 바짝 긴장하고 책상머리에 선다. 그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야! 긴장 풀어.
한국어로 지껄였으니 무슨 말인지 에모가 알아들을 리가 만무다.
영어로 해도 마찬가지다. 학교를 어디까지 다녔는지 영어가 단 한마디도 되지 않는 처녀였다.
미얀마어로 하면 좋겠지만 내가 아는 미얀마어는 고작 몇 마디에 불과하다.
쌩머푸 바네!
긴장하는 처녀를 보고 그 말을 하지만, 그 말의 정확한 뜻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긴장하지 말라는 미얀마 말을 나는 구사하지 못한다.
에모를 채용한 지 이제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이다. 같이 생활하다 보면 긴장은 풀리게 되는데 그 기간이 사람에 따라서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언젠가 긴장은 풀게 되어 있다. 그녀가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무엇을 시키려고 불렀는지 잊어버리는 경우도 가끔 있다.
에모를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며 생각한다.
저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다니?
당치 않다고 생각되지만, 이 나라는 조혼을 하는 나라라서 여고생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임신하여 불룩한 배를 밀고 다니는 건 예사고, 아주 앳된 처녀가 노천카페에서 젖통을 내어놓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이는 나라다. 옛날 우리나라 할머니들이 열일곱에 시집와서, 서두에 그렇게 말을 꺼내는데, 이 나라가 바로 그렇다. 결혼을 일찍 하니 무슨 연유로든 과부가 일찍 되는 여자도 존재하는 건 당연한 이치.
카사노바, 성국이가 왜 꿈에 보였을까?
에모의 손을 넘겨주다니, 현실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꿈이 너무 또렷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꿈은 또렷했지만, 카사노바의 얼굴은 확실히 보지 못했다. 꿈이란 언제나 그렇다.
성국이! 이젠 그의 얼굴 기억조차도 희미하다.
카사노바! 그를 직접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대충 짚어도 이십 년은 족히 넘을 터. 그는 구미라는 공단 도시에 잠시 머물다 간 인물이다. 고작, 이삼 년 정도? 잠시 머물다 갔다고 하지만 뿌린 이력은 화려했다. 그가 구미에 있는 동안 바뀐 여자가 서너 명 정도? 그를 아는 친구들이 술자리에 만나면 가끔은 기억을 들추어 그의 얘기를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어떤 여자를 끼고 늙어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들 서울에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젠 전화번호조차 바뀌어 연락이 끊어진 상태.
성국은 서울에 가서도 가끔은 구미에 내려왔다.
일 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지만,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특별한 일이 있으면 내려오곤 했다. 한데 중요한 것은 내려올 적마다 동행하는 여자가 바뀐다는 점. 그를 아는 친구들은 이제 놀라지도 않는다. 그렇게 바뀌는 게 성국이다운 일이라 생각했다.
희한한 일이지, 카사노바에겐 여자가 잘 붙는다.
어떻게 꼬셨냐?
구미에 있을 적에 여자가 바뀌면 친구들은 뒤에서 묻곤 했다.
꼬시긴 뭘 꼬셔? 내가 넘어가 주는 거지!
그런 질문에 성국은 무덤덤했다. 그리고 성국은 여자에게 돈을 쓰지 않는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여자가 항상 지갑을 연다. 심지어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 술판이 어지간히 끝나가면 성국은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가서 계산서를 들고 와서 동행한 여자에게 슬쩍 찔러 준다. 아직 술판이 끝나지 않았는데 여자는 슬쩍 일어나 역시 화장실 가는 척하며 가서 계산하곤 했다. 그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카드라는 물건이 통용되던 시절이 아니었고 만나는 족속, 모두가 주머니가 얄팍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봉을 어디선가 낚아서 데리고 나타나곤 했다.
카사노바 성국은 아가씨를 낚아채는데 뜸을 들이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아니다. 간단하게 넘어온다.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눈을 딱 감고 간단하게 넘어가 준다.
카사노바가 얼마나 쉽게 여자를 낚아채는지 일례를 들어보자.
옛날에 카사노바가 구미 주공아파트에 살 적이었다. 카사노바는 인근의 전자회사 총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주공아파트가 재개발되었지만, 당시에는 열 평짜리였는데 인근 공단의 근로자들이 다수가 자취하던 아파트였다. 성국이가 자취하던 아파트는 석 달간 전기요금을 내지 않아 전기를 끊는다는 계고장을 받았다.
그걸 들고 성국은 씩씩거리며 한전 구미지점을 찾아갔다. 이유는 이런 계고장을 받고 놀랐으니, 약값을 물어달라고 억지를 부리거나, 싸우러 찾아간 것이다. 전기요금을 내면 간단한 문제인데 거기까지 찾아간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튼, 찾아가서 잠시 사이, 삼십 분이 안 되어 해결하고 나왔다.
결코, 전기요금을 납부하고 나온 게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것을 전담하던 한전의 아가씨가 제 돈으로 전기요금을 냈고 그날 저녁에 바로 그 아가씨가 영수증을 들고 약속 장소로 나왔는데 빌려준 전기요금을 받기는커녕, 와서 그 아가씨가 술값까지 내고 갔다. 그날 모인 몇몇은 영문도 모르고 술을 얻어먹기는 했는데 모두가 카사노바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한전에 근무한다는 아가씨는 상당한 미모를 지닌 팔등신이었다.
고작 삼십 분 만에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후로도 가끔 그 아가씨가 나와서 우리 일당에게 술을 산 적이 몇 번 있었다. 카사노바는 입성은 항상 깔끔했다. 옷을 입는 데는 상당히 까다로웠다기보다는 까탈스럽게 굴었다. 제 손으로 빨래해서 직접 다려입는다는데 언제 보아도 멋쟁이티가 줄줄 흘렀다. 갸름한 얼굴에 뽀얀 피부, 귀공자 스타일이었는데 경상도 사투리가 아니라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서울이 고향이었는데 어쩌다 구미까지 발령받아서 왔는데, 음악에는 상당히 차원이 높은 귀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기타를 잘 쳤으며 문학에도 남에게 글을 간섭할 정도는 되었다.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그랬는지 어울리는 사람들이 주머니가 얄팍한 문청文靑이었다. 그렇다고 카사노바가 직접 시나 소설 나부랭이를 쓰는 작가가 아니었다. 비평이나 잡다한 평론을 하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글로 쓰는 게 아니라 입으로만 하는데, 들어보는 예리한 감각으로 남의 글을 조목조목 논리 정연하게 짚었다. 그래서 당시의 구미 문청들은 그에게 동류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검열을 받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는 구미라는 공단 도시에 와서 문청들과 어울리며 물을 흐려놓고 삼사 년 근무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로 올라갔지만, 관계를 정리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왔다.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강변 시인학교 행사를 처음으로 기획할 적에 그가 내려왔다. 당시에 문학의 불모지라고 불리는 구미 공단에서 문학에 뜻이 있는 근로자들이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거대한 행사를 기획했다. 구미 공단에 산재해 있는 문학도들이 모으자는 것이 취지였다. 그렇게 인재를 발굴하여 문학의 씨앗을 뿌리자는데 뜻을 같이하여 포스트를 만들어서 붙이고 참가자를 모았다. 그게 바로 여름 휴가철에 거행했던 강변 시인학교였다. 일박이일의 행사였는데 첫해와 다음 해에 카사노바가 내려와서 행사 진행을 도왔다. 물론, 카사노바 혼자 내려온 게 아니었다. 동행한 미모의 서울 아가씨가 있었는데 분명한 것은 첫해에 데려온 아가씨와 다음 해에 동행한 아가씨가 같은 아가씨가 아니었다는 점.
심야 백일장을 하는 시간에 나는 카사노바와 강변 모래밭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야 백일장이란, 모든 행사가 끝나고 초청 문인이 시제를 정해주고는, 다음날 점심시간에 모아서 심사했다. 그 당시에는 저명한 시인들도 초청하여 강연도 듣고, 가장 궁금해하는, 유명 시인의 습작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질의와 응답 시간을 가졌고 백일장 심사를 부탁했다. 그 당시 열기는 대단했다. 문학의 불모지에서 고기가 물을 만나 격이었다. 이름만 들었던 저명한 시인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문학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땅에 문학의 텃밭을 일구고 창작 의욕을 불어넣는다는 취지였는데 취지에 걸맞게 대성공이었다.
대략 이삼십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인근 대학교의 문학동아리까지 전원 참석을 해서 그 숫자가 백오십을 넘었다. 그해에 행사가 끝나는 자리에서 다음 해에 또 하자고 모두가 결의를 다졌다.
시를 포기하고 소설을 긁적이고 있었으니 나는 카사노바와 밤새 술을 마셨다.
강변 물가의 모래밭에서 카사노바와 그가 데려온 아가씨와 마셨는데. 그게 내가 카사노바를 마지막으로 본 자리다. 서울에서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에, 저녁에는 피아노를 치며 작곡하고, 낮에는 헬리콥터에 들어가는 부품을 개발하여 국방부나 조달청에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헬리콥터 부품?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
관심을 가지면 다 보여!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나의 예측으로는 그런 일을 하면 바빠서 아가씨를 낚을 짬이 없어 보였는데, 아가씨는 수시로 바뀌었다. 아가씨도 보통 처녀가 아니라 빼어난 미모와 매력을 지닌 아가씨를 골라서 데리고 나타나는데 가슴이 뜨거웠던 나는 한편으로는 부럽기조차 했다.
카사노바의 말마따나 눈을 맞추고 최면을 걸면 삼 분 안에 넘어오는 게 여자인가?
정말 그게 가능할까?
그게 궁금했지만, 옆에서 대화를 지키고 듣는 아가씨를 의식해서 물어보지 못했다. 더 궁금한 사항은 만나는 것도 만나는 것이지만, 헤어질 적에 어떻게 그토록 깔끔하게 헤어질 수가 있는지. 그것도 만나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미련이나 뒤탈이 없이 깔끔하게 헤어지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 후로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연락은 지속되었다.
누구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카사노바가 시간 관계상 참석하지 못할 적엔 아가씨를 대신 보냈는데 보낼 때마다 아가씨가 달랐다. 구미에서 문학에 지향점을 둔 청년들은 그가 보낸 아가씨를 통해서 그의 근황을 들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누구 어머니의 장례식에 부의금 봉투를 들고 내려온 어느 아가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서울 근교 어느 공단에 자그마한 정밀 가공 공장을 만들어서 항공기에 들어가는 부품을 직접 제작한다고 들었다.
일거리가 밀리는 실정이라 못 내려오고 있다는데. 카사노바 성국이가 기계공학이나 항공학을 전공한 게 아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그런 부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공장을 차렸을까? 시골의 문학청년들은 감히 넘보지 못할 영역이라 궁금증은 더욱 확대되었다. 카사노바는 평소에 워낙 궁금증이 많고 호기심이 일면 꼭 일을 저지르는 작자라 사고를 쳐서 성공한 모양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그다음에 술자리에서 그의 얘기가 나오자, 누군가 일전에 통화가 되었다고 했다.
카사노바의 공장은 잘 돌아간다고 했다.
남이 하던 작은 정밀 공장을 인수하며 은행에서 받은 융자가 꽤 있었는데 어지간히 갚아간다고 했으며 일감은 더 늘어나서 항공기와 선박에 들어가는 부품까지 주문 제작하고 있다고 했으며, 특허가 몇 개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수완이 좋은 녀석이니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에 관해서 얘기하다 보면 아가씨 이야기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녀석은 강변 시인학교에 참석했던 아가씨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었고 어느 자식은 누구 어머니의 장례식에 심부름을 왔던 아가씨가 가장 예뻤다고 입맛을 다시곤 했다.
그 후로 카사노바의 소식은 우리들의 대화에서 자꾸 뜸해졌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구미 촌놈들은 카사노바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다음부터 카사노바는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 가끔 싸구려 술집에서 안줏거리로 등장하는 게 전부였다.
한데, 잊고 있던 그 카사노바가 미얀마까지 따라온 것이다. 미얀마의 꿈속에서 그를 본 것이다. 얼굴의 형상은 희미했으나 카사노바 성국이가 확실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자를 끼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바로 가정부 에모였다니.
꿈은 현실과 기묘한 현상을 지닌다고 했는데 그가 에모의 손을 넘겨주는 꿈을 꾸다니 이게 무슨 의미일까?
새벽에 일어나 카사노바에 대해 생각했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에모같이 순진한 여자가 절대로 카사노바인 성국의 손에 들어가면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데, 손을 순순히 넘겨준 건 무슨 의미일까?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에모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었고 길 건너 하자보수 현장에 가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다 지은 건물에 하자가 생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문제가 돌출되었다. 미얀마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모두가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자바라라는 철문으로 만드는 버릇이 생겼다. 자바라라는 문은 우리나라의 접이식 옷걸이처럼 옆으로 밀어주면 접히면서 열리고, 당기면 사이가 넓어지며 펼쳐져서 닫히는 형식인데 모두 쇠로 만들어서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가기가 불가능한 구조의 미닫이문이다.
미얀마는 쌍팔년도에 항구 노동자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반발로 시위를 벌이다가 민주화 운동의 불을 지폈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양곤의 중심부 술레파고다를 중심으로 수천만의 인파가 밀집해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때 독재의 군부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천 명이 넘는 주동자들을 조준 사격으로 사살했다.
그리고도 분이 불리지 않은 군부에서 시내를 중심으로 불이 켜진 집으로 들어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그때부터 불을 켜더라도 집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철문을 다는 것이 유행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집은 허술해도 미얀마 집에는 그 문은 분명히 달려있다. 자바라로 된 철문은 안에서 밖을 훤히 내다보고 누군지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줄 수가 있기에 그 대문이 인기를 끌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구조의 문을 고집하는 주민이 다수다.
그런 철문이 없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주민이 아직 존재하는 실정이라 집을 지어서 팔려면 그런 문을 달지 않을 수가 없다. 팔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런 구조의 문을 달아야 했는데 그게 집을 오래 비워두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수십 개의 핀으로 연결된 마디마디에 녹이 슬어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에 미얀마로 나와서 현장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그런 단점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혼자 힘으로서는 도저히 안 되어 이웃 사람들을 불러 지렛대를 넣어 억지로 열긴 했는데 혼자 힘으로는 닫을 수가 없을 정도로 뻑뻑했다.
사람이 사는 집에서는 날마다 열고, 닫으니 그렇게 녹이 슬 겨를이 없지만, 집을 살 주인은 어디에 있는지 나타나지 않고 계속 비워두니 문제가 생겼는데 이웃에서는 기름을 치라고 했지만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그런 문을 미닫이가 아닌 여닫이로 개조하기로 마음을 먹고 직접 도면을 그려 인부를 사서 공사를 시켰다.
생각지도 않은 하자보수 공사고 공사비가 추가로 들어가는 공사. 한 채가 그렇다면 만만한 금액이겠지만 여러 채가 되니 결코 만만하게 여길 추가 비용이 아니었다.
도면을 주었지만, 눈을 돌리면 도면과 달라지는지라 감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꿈 때문인지 여태 잊고 있었던 카사노바의 얼굴이 오전 내내 눈에 어른거렸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늙어가고 있을까?
독신을 고집하던 그가 아이라도 낳았을까?
어떤 여자와 살고 있을까?
지금도 여자가 수시로 바뀔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급기야는 홍랑 자신이 왜 카사노바에 관해 이렇게 집착할까? 꿈 때문일까? 짜증이 날 정도로 그에게 집착했다. 오전 내내 그랬다.
현장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으러 들어오니 때쑤가 와 있었다.
집에 있던 때쑤를 보고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걸 알았다.
여기 있으면 날짜 가는 줄을 모르겠다. 뭣이 그리 바쁜지 혼자서 허둥대는 날의 연속이다.
벌써 일요일이야?
때쑤는 처음에 미얀마로 진출하면서 구한 현지 매니저이자 통역이며 딸이다.
나를 두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때쑤는 서른 채 가까이 되는 주택의 건축공사는 다 마쳤고 집이 팔리지 않으니, 앉아 놀면서 월급 받기가 송구하다며 양곤에서 버스로 일곱 시간이 걸리는, 새로 이전한 미얀마의 수도 네피도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제 전공인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나가고 있다. 그곳에 앉아서도 부동산 소개 업자와 연락해서 집을 팔고, 문의 전화를 받고 있다. 때쑤는 정해진 월급을 거절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월급이라는 명목으로 주지 않고 올 적마다 얼마간의 경비를 주고 집이 팔리면 알아서 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상태다.
점심을 때쑤와 같이 먹었다.
점심을 먹으며 때쑤에게 에모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했다.
때쑤는 사람을 구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에모를 처음 본다.
아버지 사람을 어떻게 구했어요?
그게 그저 신기한 모양인 때쑤에게. 고향이 어디이며, 어쩌다가 과부가 되었는지, 하나 있다는 아들은 누가 데리고 있는지, 식구는 몇인지,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는지, 성품이 어떤지, 모든 걸 알아보라고 했다.
사흘을 한집에 살았다고 하지만 그동안 홍랑이 에모와 한 말을 채 열 마디도 되지 않는다. 그것도 내가 미얀마어로 겨우 한 말이고 에모는 그저 벙어리처럼 손짓으로만 소통했다. 에모가 입을 닫은 것이다. 외국인이고 자신은 영어가 안 되고 미얀마어를 해도 못 알아들으니 입을 닫고 보디랭귀지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리라.
새로 채용한 에모의 신상에 대해서 궁금한 게 무척이나 많았다.
서로의 눈빛이 교차하는 점심을 먹고 이 층으로 올라와서 한참 있으니 에모의 설거지까지 도와준 때쑤가 올라왔다. 같이 설거지하면서 모든 걸 알아보리라고 생각했다.
에모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때쑤에게 물었더니 못 들었다는 것이다.
설거지 하면서 뭐했어? 왜? 에모가 말을 안 해?
그 말을 하자 때쑤는 고개를 저으며 아래층에 있는 에모를 불렀다.
처녀는 또 긴장하며 올라왔다. 긴장하는 티가 역력했다. 한집에 사는 가정부가 긴장하는 게 엄청 불편했다.
때쑤의 제의에 나무로 된 응접 소파에 셋이 둘러앉았다.
마주 앉자 때쑤가 아버지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라고 했다. 때쑤는 통역이 되는 셈이다.
네가 알아보라고 하니까, 왜 통역을 하려고 해?
그 말은 에모가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터이고 때쑤는 아버지와 둘이 살 여자니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워째 그런댜?
가끔 장난삼아 전라도 사투리를 해도 때쑤는 대충 알아듣는다.
한국어와 영어를 혼합해서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때쑤는 에모의 대답을 그대로 통역만 했다.
학교는 9학년까지 다녔으며, 시골이라고 하지만 양곤에서 버스로 멀지 않은 양곤강 하류의 섬이고,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겨서 집을 나갔으며, 아들은 아홉 살인데 여동생이 돌보고 있으며, 봉제 공장에 석 달을 다녔는데 그 공장이 문을 닫았고, 엄마와 아빠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아들은 고향인 그 섬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집은 아빠가 물려주신 집이고, 아들의 이름은 칸테와이고, 다른 형제는 없고 오직 여동생 하나이며, 그 강에 다리가 놓여서 버스가 들어가며,
궁금한 것을 다 물었다.
그리고 덧붙인 게 있다면, 집에서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으니, 영어책을 사서 영어를 공부해라. 간단한 소통이라도 되도록 기초만이라도 익혀라. 그리고 월급은 미루는 일 없이 줄 것이니 요긴하게 쓰며 살림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식구처럼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일을 하고 오래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말 뒤에.
아들이 보고 싶겠구나.
며칠 있다가 방콕을 이틀 갔다가 올 것이니 그때 집에 잠시 다녀와라. 홍
한국에 머물 적에도 그렇게 했다. 일주일에 닷새는 집을 지키고 이틀은 아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와도 좋다. 일요일은 집을 사려고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고 또 때쑤가 내려올 터이니 일요일을 피해서 주중에 집에 다녀오는 게 좋겠다. 당시에 했던 말을 거듭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새벽의 꿈을 생각했다.
혹시, 내가 성국이처럼 카사노바가 되어 이 불쌍하고 어린 과부를 여자로 생각하면 어쩌나?
그런 의문이 일자 에모를 마주 앉아 있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카사노바가 된다면? 더듬던 상상만으로 화들짝 놀라면서도 카사노바에 관한 기억이 떠올라 앉은 자리가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책상 위에 던져준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었다. 일반 전화가 아니라 카톡의 보이스톡 벨 소리였다. 미얀마 사람들은 카톡을 잘 쓰지 않는다. 거의 카톡과 기능이 유사한 바이브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누군가가 나를 찾는 전화다.
냉큼 일어나 책상 앞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때쑤는 에모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눈치로 미루어 내 성격을 설명해 주고 마음 편하게 내 집처럼 생활하고 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며 한국에서는 무슨 사업을 하고 미얀마에서는 무슨 사업을 한다. 얼마간은 한국에 있고 얼마간은 미얀마에서 생활한다는 등의 제가 할 이야기와 주의 사항을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화면에 나타난 발신인을 확인하니, 어라? 아내가 아니라 실패한 시인이었다.
실패한 시인!
등단이야 했지만 뜨지 못했으니 실패한 거라고 놀려대는 강호.
가끔 카톡을 주고받는다. 심심할 적에 한국의 유튜브 동영상을 가끔 보내주고 정치에 관한 뉴스를 보내오는 사이다. 습작 시절부터 내게 형이라 불렀던 실패한 시인은 삼십 년 지기가 넘는다. 실패한 시인이 입에 풀칠하기 위해 차린 찻집에 가면 대놓고 실패한 시인이라고 호명할 정도로 격의가 없는 사이다.
녀석은 김천의 시내 변두리에 물려받은 텃밭에 아담한 전원주택을 짓고, 별채를 만들어 요즘 흔하디, 흔한 커피전문점을 열었다. 녀석보다 다섯 살이 많은 정애 씨와 살고 있다. 시를 쓴다고 깝죽대다가 만난 사이.
정애 씨는 김천 시내에서 미용실을 한다. 녀석은 시를 제법 쓴다. 그러나 문운 탓인지 여러 군데 응모했지만, 신춘문예나 그렇다 할 잡지로 등단하지 못하고 이름도 없는 출판사를 통해 자비로 시집 한 권을 낸 것이 고작이다. 그의 시는 출중하다. 그건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알아주는 평론가나 독자가 없는지라 실패한 시인이다.
무슨 일이기에 보이스톡을 다 때리냐?
형! 성국이 형이 내려왔어요.
뭐? 성국이 형이라니? 설마 카사노바가?
대답할 틈도 없이 실패한 시인이 카사노바를 바꾸어 주었다.
넌 어쩌다가 미얀마까지 나갔냐?
카사노바의 목소리였고 특유의 서울 말투였다. 울컥, 반가웠다.
야! 안 죽고 살아있었구나! 너무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물어볼 말이 마땅찮네. 어떻게 잘 늙어가고 있냐?
나야 늘 그렇지.
늘 그렇다면 또 바뀐 여자를 데리고 내려왔냐?
하마터면 그 말을 할 뻔했다. 카사노바는 그가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사생활에는 절대 간섭하지 말라고 못을 박은 적이 있다. 심지어 신성불가침 영역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카사노바는 안산으로 공장을 옮겨서 정밀 공장을 계속하고 있고 했다. 카사노바와 통화를 하면서 기억을 더듬으니 갑자기 녀석의 얼굴 기억이 뿌옇게 변해버리는 것이었다. 직접 거는 국제전화와는 달리 이 보이스톡은 아무리 길게 통화를 해도 요금이 없다. 무료 통화인 셈이다.
야! 얼굴 기억조차 희미하다.
나도 그래! 언제 한번 만나자. 연락처를 실패한 시인에게 남겨둬! 내가 서울 올라가든지 할게!
아니야. 내가 자주 내려오지. 정말 오랜만에 통화를 하니 할 말이 궁하네?
알짜배기 없는 말로 통화를 하고 끊었다. 끊고 생각하니 간밤 꿈에 카사노바를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꿈은 현실과 기묘한 연관이 있다고 했는데 거짓은 아니었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사노바의 얼굴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얼굴은 뿌연 안개에 가려 있었다.
돌아보니 때쑤는 에모에게 무언가를 끝없이 설명하고 있었고 에모는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주억이며 듣고 있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미얀마말이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교육과 숙지사항을 주입하는 게 분명할 터.
이제 에모의 입이 열리려나?
날카로운 미얀마의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에모의 어깻죽지에 내려꽂히고 있는데 때쑤가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물론 에모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이었다.
아버지 얘와 살았던 남편이 카사노바래요. 순전히 바람둥이! 그래서 이혼을 했다네요.
그래? 카사노바!
그 말을 하고 나니 성국이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의 수면 위로 솟구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나 카사노바는 있는 모양인데, 저 어린 과부에게 내가 카사노바가 되어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한참 동안 멍하니 창밖 하늘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카사노바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카사노바의 언어를 어떻게 익히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