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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독송 : 쉬운 한글 현대적 번역
대승기신론 Mahāyānaśraddhotpāda Śāstra
마명보디사트바(아슈바고샤) 지음
양나라 서인도 眞諦三藏(Paramārtha) 漢譯
밥통 스피커 이문호 쉬운 한글 현대적 번역
프롤로그 : 생사 일대사인연의 서막
제1장 인연분(因緣分) : 논설하는 이유
제2장 입의분(立義分) : 본론 1 : 대승의 뜻 : 총론
제3장 해석분(解釋分) : 본론 2 : 대승의 뜻을 해석 : 각론
제4장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 믿는 마음을 수행
제5장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 믿음 수행의 이익을 권유
독송의 범위는 프롤로그와 논설하는 이유 및 본론에 해당하는 총론과 각론까지입니다.
프롤로그(prologue) : 생사 일대사인연의 서막
불법승 3가지 보물을 생명을 다해 깊이 믿고 의지합니다.
일체 모든 시공간에서 가장 뛰어난 활동력과 지혜를 갖추시고, 몸과 세계에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시며, 크나큰 사랑으로써 삶과 죽음의 고통과 공포에서 구원해주시는 구세주이시며,
그리고 태어나고 죽는 신체 모습을 나타내시는 방법으로써, 진실의 바다 단일의식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가리키시니, 이로써 자유와 평안에 이르는 보물창고를 알려주십니다.
진실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일상세계와 꿈세계와 죽음세계에서 실천합니다.
이 논술을 지은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에 대한 의심과 개인적 동기를 멀리하고, 一心 단일의식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을 일으켜, 자유와 평안에 이르는 길을 가리킴(직지 포인팅)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논설하여 널리 알리고자 한다. 진실(일심 단일의식)이 있기에 능히 대승(종교혁명)에 대한 믿음을 잘 일으킬 수 있으므로 응당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다.
(元曉 起信論疏)
初中言有法者 謂一心法 若人能解此法 必起廣大信根 故言能起大乘信根 信根之相 如題名說
초중언유법자 위일심법 약인능해차법 필기광대신근 고언능기대승신근 신근지상 여제명설
信根既立 即入佛道 入佛道已 得無窮寶 如是大利 依論而得 是故應說
신근기립 즉입불도 입불도이 득무궁보 여시대리 의론이득 시고응설
(원효성사 기신론소 핵심부분 한글 번역)
대사께서는 오직 일심 단일의식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개인적 수행 공부 깨달음 체험은 도무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생사 해탈의 구조 : 영원한 구원받음의 구조
1. 有法 해탈 구원은 눈앞에 있다.
2. 謂一心法 그것은 일심 단일의식이다.
3. 人解此法 도반이 이것을 이해하면
4. 必起信 반드시 믿음이 일어나고
5. 信根既立 믿음이 일어남은
6. 即入佛道 즉 해탈 구원의 문으로 들어감이다.
7. 入佛道 得無窮寶 如是大利 들어가서 참고 있으면 무궁한 보물과 이익이 그저 주어진다.
8. 依論而得 是故應說 이 모든 일은 (제법 실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논설에 의지해서만 일어나므로 이 논을 마땅히 설한다.
제1장 인연분(因緣分)
이 논설은 (내용에 따라) 다섯 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장 인연분은 대승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논설하는 이유, 제2장 입의분은 대승의 뜻, 제3장 해석분은 대승의 뜻을 해석, 제4장 수행신심분은 이해와 믿음을 수행함, 제5장 권수이익분은 이해와 믿음의 실천에 따르는 이익을 권유함이다. 제1장 인연분을 논설한다.
질문 : 어떤 이유로 이 논을 지었는가?
답변 : 여덟 가지 이유로 이 논을 짓게 되었다. 여덟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총체적(공통적) 이유로서,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과 공포를 벗어나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지,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칭찬받고 존경받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여래께서 말씀하신 가리킴을 (다시 본래의 뜻으로 되돌이켜) 해석해서 모든 중생이 바르게 이해하여 그동안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다.
셋째는 진실을 사랑하는 성숙한 중생이 대승법을 잘 받아들여 믿음이 뒤로 물러나지 않게 하고자 한다.
넷째는 진실을 사랑하는 습성이 약한 중생이 믿는 마음을 연습하여 익숙해지도록 하고자 한다.
다섯째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바르지 않은 습성을 뒤로하고 자아를 잘 보살피며 어리석음과 교만(개인적 동기)을 봄으로써 무의식적 사로잡힘에서 풀려나게 하고자 한다.
여섯째는 개인적 동기를 지양하고 일심 단일의식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연습하여 “내가 모든 행위의 주체”라는 ‘상상의 자아’(imaginary self)에 대응하여 다스리고자 한다.
일곱째는 (오직 일심 단일의식에) 전념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불국토에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는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고자 한다.
여덟째는 이익을 제시하여 믿음 수행을 권유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이 논을 짓는다.
질문 : 경전 sutra에 이미 그런 말씀이 있는데, 왜 중복해서 설명하는가?
답변 : 경전에도 이런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마다 성격과 생각이 같지 않고 듣고 이해하는 상태 역시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면 화신 고타마 붓다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의 귀와 가슴이 열려있고 설법하는 사람도 몸과 정신이 훌륭하여 한 번 강설하면 서로 다른 성격의 중생들이 하나로 같이 이해하므로 이런 논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여래께서 멸하신 후에는 어떤 중생은 혼자 힘으로 많이 듣고 이해하여 아는 자도 있고, 어떤 중생은 혼자 힘으로 적게 듣고 많이 이해하는 자도 있으며, 어떤 중생은 스스로는 힘이 없으므로 많은 양의 경전과 논서에 의지하여 이해하게 되는 자도 있으며, 어떤 중생은 많은 양의 경전과 논서의 문장을 번잡하게 여겨 간략한 문장이지만 깊은 뜻을 포괄한 것을 좋아하고 잘 이해하는 자도 있다. 이와 같아서 이 논설은 간략하지만 동시에 여래께서 가리키신 한없이 넓고 깊은 뜻을 모두 포함하고자 이 논을 설한다.
제2장 입의분(立義分) : 본론 1 : 대승의 뜻 : 총론
이미 이 논설을 짓는 이유를 말했고, 다음으로 대승의 뜻을 밝힌다.
대승이란 무엇인가? 총론적으로 해설하면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法) 즉 대승의 정체이고, 둘째는 의(義) 즉 대승의 속성과 기능이다.
법 즉 대승의 정체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의식(마음)을 말함이니, 이 의식은 곧 일체의 일상세계와 비 일상세계를 모두 포함하고, 이 의식에 의지하여 대승의 속성과 기능이 나타나 보인다. 왜 그런가? 이 의식 본래 진실 된 모습이 대승의 본체를 보이기 때문이고, 이 의식은 나고 죽는 모습(나타나고 사라지는 모습)으로 대승 자체 가상의 생멸작용을 보이기 때문이다.
의 즉 대승의 속성과 기능은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본체로서 일체 하나로 같은 진실 존재는 평등하며 증감하지 않고, 둘째는 모습으로 나타난 진실 존재는 보물창고로서 한량없는 자유 평안 기쁨이 저장돼 있고, 셋째는 작용으로서 일체 일상세계와 비 일상세계에서 소망(선택)에 따른 정확한 결과를 보장(善因果)한다(신은 부처님은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천지불인 성인불인)(강제로 개입하지 않는다)
일체 제불이 본래 타는 바이고, 일체 보살 모두가 이 일심 단일의식만을 타고 여래의 땅에 도달한다.
제3장 해석분(解釋分) : 본론 2 : 대승의 뜻을 해석 : 각론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했고 다음으로 해석분(解釋分)을 설한다.
해석분은 세 종류이다.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대승의 올바른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고, 둘째는 착각된 집착에 대응하여 다스리는 것이고, 셋째는 발심하여 진실을 탐색하는 모습을 분석하는 것이다.
제1절 正義를 顯示하다.
진리는 일심 단일의식이다. 일심에는 2개 문이 있다(일심으로 들어가는 2개 문, 2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심) 2개는 무엇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인데, 이 2개 문은 각각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무슨 말인가? 이 두 문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1항) 진여문(眞如門)
심진여(心眞如)란 바로 이 단일한 존재 세계로서 총체적(모두 하나로 합친) 관점으로 드러나는 본체다. 이른바 의식의 본성은 나고 죽지 않지만 일체 모든 개별존재의 가상적 성질을 보지 않음으로 인하여 차별적으로 있게 되고, 만약 가상적 성질을 본다면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이 없을 것이다(경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경계는 그대로 있되 경계의 비 실재성을 보므로 풀려나 해탈 자재)
그러므로 일체 존재는 본래 물체라고도 정신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그 어떤 이름도 적합하지 않으며 생각과도 무관하므로, 결국 평등하고, 다르게 변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모습일 뿐 파괴 불가능하다.
오직 이 단일의식(一心)이기에 진여라 이름한다. 일체의 언설(言說)은 가상적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데 다만 오해에 따라 가상을 실체로 여긴다.
진여라고 말하는 것도 모습의 실재가 없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궁극의 이유는 말로써 말을 떠나 (일심을 알도록) 함이다. 이 진여 자체는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일체 모든 존재는 다 진실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거다”라며 특별히 세울 것도 없으니(도가도 비상도) 일체 모든 존재가 다 하나로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 하나인 존재는 이름 붙여 설명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저 진여라 한다.
질문 : 만약 그런 뜻이라면 모든 중생이 어떻게 따라가야 능히 (진여문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답변 : 만약 일체 법을 비록 설명하지만, 설명 가능한 내지 설명할만한 것이 있지 않음을 안다면, 비록 생각하지만, 생각 가능한 내지 생각할만한 것이 있지 않음을 안다면, 이를 따라간다고 하며, 만약 (진실에 대한) 오해를 바른 이해로 대체한다면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이 진여를 이름과 말을 수단으로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다. 두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 여실공(如實空)이니 결국 실체가 (현상으로) 나타나기에 (공하지만),
둘째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그 자체로 (고통과 공포 아닌) 자유와 평안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에 (공하지 않다)
공(空)이라고 말하는 바는 본래 처음부터 일체의 오염(오해)과 서로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 차별되는 모습을 떠난다 말한다. 부질없는 개인적 추구가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진실 되고 같은 스스로의 성품(일심)을 알아야 한다.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모습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모습이 있음과 동시에 없는 것도 아니며, 모습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모습이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모습이 하나인 동시에 다른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떤 모습이든 모습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모습 그것이다, 제상비상)
종합해서 말하면, 일체중생이 오해를 바탕으로 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진여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공(空)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오해와 잘못된 생각을 정견과 정사로 대치하면 실제로는 공이라 말할 것도 없다.
불공(不空)이라고 말하는 바는 진실의 본체는 텅 비어 있지만 동시에 허망하지 않음을 드러냈으므로(진공묘유, 진실불허) 바로 이것이 진심(眞心)으로서 항상 하여 변하지 않고 순수의식으로 가득 차 있기에(mindfulness) 불공(不空)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인식할 수 있는 모습이 있지 않으므로 오해로 물들지 않은 경계는 오직 증거로써 통한다.
제2항) 생멸문(生滅門)
심생멸(心生滅)이란 지혜의 보물창고로부터 나고 죽는 모습의 가상개별자가 나오는 것이니 소위 不生不滅과 生滅이 서로 다투지 않아,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
이 의식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일체 존재를 거두어들이고, 일체 존재로 나타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깨달음이고, 둘째는 깨닫지 못함이다.
각(覺)이라고 말하는 뜻은 마음(의식)의 정체에 대한 오해가 없음이다. 오해가 없는 (의식의) 모습은 공간과 같아서 없는 곳 없이 골고루 있으므로 하나의 단일한 세계가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을 본각(本覺)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각이란 시각(始覺)에 대응한 상대적 개념이니 시각은 곧 본각과 같고, 시각이 있는 이유는, 본각에 의지하여 불각이 있고 이 불각에 의지하여 시각이 있게 된다.
또 의식의 본원 자기 자각을 ‘평등한 깨달음’이라 이름하고, 의식의 가상개별존재로서의 자기 자각을 ‘평등하지 않은 깨달음’이라 (이름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범부는 나쁜 생각이 일어남을 깨달아 알고는 능히 후속되는 생각의 일어남을 멈출 수 있으므로 이를 각(覺)이라고 이름 붙이지만 이는 곧 불각(不覺)이다(개인 실재견 아상이 강철같이 굳건하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생각의 변모 즉 아상과 세계상의 시시각각 다양한 변모를 깨달아 생각 안에서 생각의 변모가 없는데, 이는 거칠게 주객으로 찢어 나누는 습관을 어느 정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相似覺)(닮은 깨달음)이라 이름한다(개인 실재견 아상이 얼음이다)
법신보살(法身菩薩) 등은 무의식적인 생각의 초점활동(focus)을 깨달아 생각의 초점을 해제하여 주객으로 나누는 거친 습관을 떠나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한다(얼음이 녹아 물이 되다)
보살지(菩薩地)는 방편을 다 겪어 넘었고 한 생각(정견)에 통하고 일어나는 마음(念이 아닌 心)을 깨달아 마음에 처음 모습이 없는데, 이는 미세념(微細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언제나 변함이 없으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능히 무념(無念)을 본다면 곧 불지(佛智)를 향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지각 가능한 처음 모습이 실재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처음 모습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즉 무념(無念)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이 깨달았다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행위 주체라는) 믿음 믿음이 이어져 여태까지 한 번도 그 믿음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시작이 없는 무명(無明)이라 말한다. 만약 무념을 이해하면 의식 현상의 생주이멸을 알 수 있는데 단일의식으로서 동등하기 때문이다. 실제에는 시각(始覺)이 다르지 않으니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는 것이어서 홀로 서지 못하니 본래 하나로 같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또 다음으로 본각(本覺)을 오염 여부에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지만, 이 둘은 본각과 서로 다름이 아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맑고 투명한 지혜의 모습(智淨相)이고, 둘째는 불가사의하게 행동하는 모습(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智淨相)을 말하는 것은 법신의 힘에 의지하여 새롭게 익숙해지는 연습을 성실하게 행해서 방편이 만족해진 까닭에 제8식의 이원적 융합을 깨뜨리고 계속 이어지는 자아 관념을 멸하여 순수하고 맑은 법신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일체 마음-의식이 나타난 모습은 모두가 무명(無明)이고 무명의 모습은 본각의 성품(覺性)을 떠나지 않으므로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파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마치 큰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면 물과 바람이 서로 버리고 떠나지 않지만 물 자체는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니 만일 바람이 그쳐 멸하면 움직이는 모습도 즉시 멸하지만, 물의 젖는 성질은 파괴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의 자성청정심이 무명의 바람이 움직임(아상 태동)으로 인해서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어 서로 떠나지 않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니, 만일 무명이 멸하면 이어지던 아상도 즉시 멸하지만, 지혜의 성품(智性)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는 것은 지정상(智淨相)에 의하여 온갖 훌륭하고 묘한 모습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모습은 항상 끊어짐이 없고 중생들이 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통하도록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어 이익을 얻게 하는 까닭이다.
또 다음으로 깨달음의 정체의 모습이란 것은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고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일체 의식세계의 모습을 멀리 떠나 나타낼 만한 존재가 없고 비추어 안다는 뜻도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니,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다. 일체 세계의 모습이 그 가운데서 출현하지만,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사라지거나 파괴되지도 않아서, 항상 일심으로 있으면, 이로써 일체 존재가 깨달음이 되므로 또한 일체의 오염된 존재가 더럽힐 수 없는바, 지혜의 본체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빠뜨림 없이 원만하게 중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불공법을 말함이니 번뇌의 장애와 앎의 장애를 탈출하고(아공 법공) 생멸과 융합된 모습을 떠나 순수하고 맑고 밝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진실에 의지하여 이름과 모습을 떠나 탈출하여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올바른 견해와 생각을 연습하도록 가리킨다.
생각을 따라 (일체 모든 땅과 하늘의 세계가) 나타남을 보이기 때문이다.
불각이라 말하는 바의 뜻은, 진여법이 단일함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고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서 그 오해가 있게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오해는 스스로의 모습이 없어서 본각을 떠나지 않으니, 마치 헤매는 사람이 방향 때문에 헤매게 된 것이므로 만약 방향을 떠나면 곧 헤맴이 있지 않음과 같다. 중생 역시 이와 같아서 각(覺)이 있는 故로 헤맴도 있는 것이니 만약 각이라는 모습을 떠나면 곧 불각도 없는 것이며, 깨닫지 못했다고 오해한 고로(혹은 깨달았다고 오해한 고로), 능히 생각과 의도를 알아채고 진각(眞覺)이라 말하는 것이니, 만약 깨닫지 못했다는 오해를 떠나면 곧 말할만한 진각 스스로의 모습도 없다.
또 다음으로 불각으로부터 세 가지 모습이 나타나 저 불각과 함께 통하여 떠나지 않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불각에 의하는 고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고 이름하여 말한다. 이해하면 곧 그치고, 움직이면 고통이 있으니, 결과가 원인을 떠나지 않는 까닭이다.
둘째는 능견상(能見相)이니, (가상 주관의) 움직임 때문에 (개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며, 움직이지 않으면 (개인 관점으로) 보는 것도 없다.
셋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니, 주관에 의하기 때문에 객관 세계가 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주관을 떠나면 객관도 없다.
(외부) 객관 세계가 있는 연고로 다시 여섯 가지 괴로운 모습이 나타난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객관 세계에 의하여 마음이 일어나 좋다 싫다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에 의하여 괴롭다 즐겁다가 생겨나고 각심(覺心)이 일으키는 기억과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계속 이어짐에 의하여 객관 세계를 붙잡고 매달려 고락에 매몰되어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부질없는 집착 때문에 헛된 생각과 모양으로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名字)에 의하여 이름을 찾고 집착하여 여러 가지 행동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행동에 이어 묶인 결과를 받아서 자재(自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명이 일체 오염된 존재를 나타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 오염된 존재가 전부 다 깨닫지 못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으로 각과 불각에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같은 모습이고, 둘째는 다른 모습이다.
동상(同相)이라는 것은 비유하면 다양한 종류의 질그릇은 전부 다 같은 진흙의 성질과 모습이듯이 깨닫거나 못 깨닫는 허깨비 같은 행위들은 모두 다 같은 진여의 성질과 모습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이런 진여의 뜻에 의지하여, “일체중생은 본래부터 열반에 들어가 영원히 머물고, 지혜의 법은 닦을 수 있는 상(相)도 아니요, 지을 수 있는 상도 아니어서 끝내는 얻을 수도 없고 그 빛깔과 모습을 볼 수도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물질과 모습을 (의식과 별도로 독립해서) 실재한다고 보는 것은 오직 오염을 따르는 허깨비 같은 행동이 만든 것인데, 이는 의식·물질의 (동시) 실재성이 아니며, 지혜 (자체는) 볼 수 있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異相)이라는 것은 갖가지 질그릇이 각각 같지 않은 것같이, 무루와 무명이 오염을 따라 허깨비같이 차별되는 것처럼 성품의 오염으로 허깨비같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異相者. 如種種瓦器各各不同,如是無漏無明隨染幻差別,性染幻差別故。
첫댓글 자비심에 깊이 귀의합니다
동안 강독 들으며 고개 끄덕였던 내용들이 머리를 스쳐갑니다.
이해하기 쉬운 번역으로 진실에 다가가게 안내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대승기신론 쉬운 한글 번역으로 일심 단일의식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강력하게 포인팅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알파와 오메가 영원을 문답하다"와 함께 독송하며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절인연으로 스피커 교수님과 여러 도반벗님의 강독과 글을 접할 수 있어 너무 감사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간절히 기도 드리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