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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 누구를 위하여 하는가? (마25:14-30)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 역시도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교만과 확신’ 또한 ‘비굴과 겸손’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이 둘을 구별하기가 어려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구별은 쉬운데 ‘선택과 행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매사에 ‘나 중심’의 손익 계산이나 희로애락만을 따지려 하다 보면 뜻대로 된 경우라면 교만해질 수 있고, 그 반대라면 비굴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에게서 되어지는 모든 걸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 하면 확신과 겸손은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주실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어느 주인이 먼 나라에 다녀올 일이 있어 떠나기 전에 세 명의 종을 불러 각자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을 맡겼는데, 이후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걸 밑천으로 장사해서 각각 받은 만큼의 달란트를 남겼다고 했으며 그로 인해 돌아온 주인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 놓고 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마치 맡긴 것 찾아가라는 식으로 그냥 내어놓았다가 주인으로부터 책망과 함께 쫓겨남을 당하게 됐다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달란트가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달란트는 유형과 무형의 가치로 각각 구분되었는데, 유형의 가치로 보자면 화폐나 금의 단위로 쓰였던 말로 ‘1달란트’는 당시 임금 노동자의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으로 오늘날 시세로 환산해도 대략 17억에서 20억 원 정도가 되는 액수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액수만 봐도 비유에서의 주인은 종들에게 온전한 신뢰를 담아 달란트를 맡겼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형의 가치로 보면 달란트의 헬라어 원어 발음이 ‘탈란톤’인데, 영어로는 ‘탤런트’로 번역되어 주로 ‘재주나 재능’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본문이 이런 어마어마한 액수의 달란트를 맡기고 맡는 것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데, 사실 본문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는 본문에서 ‘달란트’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잊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린 달란트가 아닌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읽을 수 있어야 본문이 의도했던 교훈을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 주목해야 할 본문에서의 다른 부분은 무엇일까요?
그 건 바로 ‘달란트의 출처’입니다.
본문을 보면 종들이 받은 달란트가 어디서 난 것이라고 했나요?
주인이 각자 재능대로 맡겼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런저런 달란트가 나에게 없든, 남에겐 있든, 시간도, 건강도, 재능도, 재물까지도 다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면 우리는 뭐든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맡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제대로 된 믿음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그런 믿음으로 인생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내기 위하여 열심을 다 하는 것을 순종 또는 충성이라고 합니다.
주변에서도 보면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하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합니다. 개중에 어떤 사람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합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것들로 나와 남을 비교하려 하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다 맡겨진 것들이기에 다른 사람이 많이 가졌다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은 왜 내겐 달랑 한 달란트만, 아니. 내겐 왜 아무 달란트도 맡기질 않으셨느냐고 서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진 것, 있는 것을 보기 전에 우선은 하나님은 현재의 ‘나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다는 것부터 인정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재능을 과소평가하셨거나, 여러분에게 처음 맡겨진 그대로가 평생 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아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8절로 29절을 보면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만족인지 불만인지를 따지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나에게 맡겨진 것이 얼마든, 또는 얼마나 남았던지 현재 내게 있는 그 달란트를 가지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야 할 믿음의 숙제인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여러분이 잘 아는 명언 중에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았다가 다시 전장에 복귀하고 보니 적군의 배는 수백 척인데 장군에게는 당장 전투에 투입할 만한 군선이 12척만 남아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 앞에서 주눅 들고 한숨 쉬는 대신 내가 가진 것이 얼마든, 남은 것이 무엇이든 우리도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종에게는 아직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이 있나이다.’ ‘저에게는 아직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나이다.’라고 자신만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믿음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를 남겼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이 얼마나 되는 가를 보실 뿐입니다.
이쯤에서 본문과 관련한 나쁜 예도 하나 들자면, 전에 어느 분의 설교를 보니 ‘봐라. 하나님께 이렇게 남겨서 두 배로 바치니까, 복을 더 받게 하시지 않느냐? 그러므로 우리도 가진 달란트를 갑절로 남겨 하나님께 두 배를 드리려는 열심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남기는 건 고사하고 자칫 맡은 원금이라도 까먹었다면 어땠을까요?
확실한 거로 따지자면 맡은 달란트를 꿍쳐 놓았다가 주인에게 원금이나마 고스란히 되돌려준 종이 칭찬받았어야 마땅할 겁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주인이 종들에게서 자기 재산을 불려 놓길 원했던 게 아니라는 것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 보면 주인이 명하기를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게으르고 무익한 사람에게 맡겼던 걸 다시 빼앗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쳐도 주인은 그걸 누가 가지게 하라고 합니까?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하시며, ‘너 다 가져라.’ 그럽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애초에 주인은 종들에게 맡긴 것을 되돌려 받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서 자기를 위해 돈을 남길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종들이 자기를 위해 얼마나 충성하는지를 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사전에서 보면 ‘충성’의 뜻은 ‘국가나 임금, 윗사람 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은 주인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땠나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보니 오죽하면 주인이 그 종을 향해 네가 정말로 나를 위하려고 했다면 “마땅히 내 돈을 취리 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해야 했을 것 아니냐?”라는 말까지 합니다.
이는 남긴 것이 없어서나 이자를 남겨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서는 기대했던 충성을 볼 수 없었기에 했던 주인의 실망스러운 책망이었던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많든 적든, 있든 없든, ‘맡은 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무엇을 해야’, 또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보시기에 충성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겁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도 뭔가를 ‘남겨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은 버려야 합니다. 이런 강박에 빠지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하니 한편으론 충성을 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나도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믿음 대신 스트레스만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넘겼다는 점에서 두 종만 놓고 볼 때, 여러분 생각엔 누가 더 많이 남긴 종일까요?
남긴 걸로만 보면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겠지만, 그 종은 애초부터 더 많은 원금을 갖고 시작했으니 무조건 그가 많이 남겼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 종을 향한 주인의 반응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21절과 23절을 보면 주인은 두 종에게 각기 똑같은 말로 칭찬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똑같은 칭찬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도 남긴 건 100%였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남긴 건 100%였습니다. 결국 주인은 종들이 남긴 것 때문이 아니라 종들의 ‘100%의 충성’으로 인해 기뻤던 겁니다. 따라서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본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종들이 우리라면 우리 역시 해야 할 일이 자명합니다.
“100% 충성하자!”
그렇다고 이번엔 또 ‘100%’라는 말에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하나님은 이미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린 최선을 다해 충성하되 이왕이면 10%, 50%만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100%의 최선을 다해보자는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의 충성을 수량이나 갯수로가 아니라 농도로 판단하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나에게 있는 달란트가 얼마인지, 또는 몇 개나 되는지 등으로 교만해지거나 비굴해지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받은 것이 없다고요? 맡은 것이 없다고요? 그러나 그런 것도 염려하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누가복음 12:48절에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슴을 믿으신다면 나에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지금이, 또한 나에겐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지금이 ‘충성하기 딱 좋은 때’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충성을 보실 때면 결과가 아니라 농도를 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믿음을 보실 때면 결심이 아니라 행함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결과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있는 믿음의 농도를 올리는 일에 더 힘써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복 주심의 원칙이 ‘가진 대로’나 ‘있는 대로’가 아니라 ‘믿음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100% 충성하는 방법을 알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후에 세 명의 종들이 각기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겠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은 매일매일 장사에 열중했을 겁니다. 그때 그 종은 어떤 마음으로 장사를 했을까요?
“주인을 위하여!”
두 달란트 남긴 종도 매일매일 장사에 열중했을 겁니다. 그때 그 종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주인을 위하여!”
그렇다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종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나를 위하여!”
믿음의 농도가 언제 높아지고 낮아지는지가 이해되십니까?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얼마를 가지고 어느 정도나 힘을 써야 성공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의 농도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지금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하는가?’를 늘 염두에 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번다고요? 가족을 위해 집안일을 한다고요? 직장이나 회사를 위해 충성한다고요?
잘못 아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권면하기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로 논쟁할 때 음식 때문이 아니라, 그 음식을 통해 우상을 섬기던 자들로부터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려니 먹지 말라는 권면을 먼저 하지만, 그러나 곧이어 그 음식이 제물에 쓰였더라도 우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감사함으로 먹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주면서 했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는 믿음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것.
이렇게 뭘 하든 믿음과 기도를 붙잡고 매 순간을 살아가다 보면 그게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믿음의 삶이 됩니다.
그런데 믿음 생활을 잘 못하시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이 ‘위하여’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나를 위하여’ 믿으려 하고, 교회를 나와도 ‘나를 위하여’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려고만 하고, ‘나를 위하여’ 목사가 설교하고, 교회와 교인이 섬겨야 하며, 사장이 월급을 줘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서라도 ‘나를 위하여’가 충족되지 못하면 일순간 너무도 쉽게 믿음이 흔들리고 금방 실망하고 근심에 빠져버립니다.
이에 본문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사전에서도 보면 ‘위하여’란 말에는 ‘이롭게 하거나 잘되게 한다.’ 또는 ‘이루어 기쁘게 한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말도 풀어쓰면 ‘하나님을 이롭게 하거나 잘되게 한다.’ 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어찌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사람도 그렇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믿어 드릴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한마디는 “하나님이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는 것을 꼭 기억했다가 수시로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매사에 믿음을 붙들고, 매 순간 기도하며 살아가는 한 저나 여러분의 삶에 실망은 없습니다.
소위 금수저가 못돼 흙수저로 시작하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적은 일에 충성한 것만으로도 잘하였다고 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이제 곧 예수님이 펼쳐주시는 ‘즐거움에 참여’하는 기쁘고 복된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믿으세요. 그리고 감사하시고, 끈질기게 기도하세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고 복 받는 인생은 ‘내게 있는 것’으로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 29절에서도 보면 주인이 결산할 때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는데 이때 주인이 말한 ‘있고 없고’의 기준은 돈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9절의 진짜 의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나를 위하여 일한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가 되는 것입니다.
아셨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기준점’을 분명히 알고 믿으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이제까지 ‘나를 위하여’는 알게 모르게 할 만큼 해 오지 않았는지요?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삶의 목적을 ‘하나님을 위하여’로 바꿔보는 것도 해봄 직하지 않겠는지요?
살아가는 중에 뭘 하든 노력하고 힘쓰기는 매한가지일 테지만 마음으로의 결심만큼은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하느냐?’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참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점을 깨달아서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려 함으로써 결국엔 ‘하나님이 해 주시는 복’을 내가 받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