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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893년경 「합천유계회중래문(陜川儒稧會中來文)」
1893년(고종 30)경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의 유계(儒?) 유림 측이 경상도 현풍현(玄風縣)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합천유계회중래문(陜川儒?會中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합천유계회중래문」에서 유계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이연서원(伊淵書院)과 관련되어 있다. 서원 건물은 철폐되었지만, 옛 이연서원 유림들은 유계를 통해 존모(尊慕) 활동을 지속해 나가고 있었는데, 본 통문에서 유계 측은 소학당(小學堂)으로의 계소(?所)의 이전 및 이연서원 복설 방안에 대하여 도동서원 측에 의견을 문의하고 있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893년경 慶尙道 陜川郡의 儒稧 유림이 稧所의 이전 및 伊淵書院 복설 방안과 관련해 의견을 묻고자 경상도 玄風縣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893년(고종 30)경 慶尙道 陜川郡의 儒? 유림 文圭漢·鄭邦鉉·裵晉祺·沈斗煥 등이 경상도 玄風縣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陜川儒?會中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료 본문에는 통문의 작성 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통문 중간에 때마침 우리 고을의 公?가 옛 터로 환원되었다는 구절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893년경에 발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천군 관아는 원래 지금의 합천군 합천읍 일대에 소재했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있었던 홍수로 수해를 입어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 야로리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893년 군민의 여론에 따라 합천읍 지역으로 다시 이전되었기에, 본 통문의 작성 시기를 1893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통문에서 유계 측은 ?所의 이전, 伊淵書院 복설 등의 문제와 관련해 도동서원 측에 의견을 묻고 있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유계는 이연서원과 관련되어 있다. 이연서원은 寒暄堂 金宏弼[1454~1504]과 一? 鄭汝昌[1450~1504]을 祭享하던 합천군의 賜額書院이었으나,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하지만 옛 이연서원과 관련된 유림들은 유계를 운영하며, 두 先賢에 대한 享祀를 지속하였고, 훗날 복설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합천유계회중래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서두에서는 먼저 보내 주신 통문에 小學堂으로 유계를 옮기는 일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로, 자신들은 망설일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답하고 있다. 본 통문에 앞서 도동서원 측이 소학당으로의 유계 이전을 건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소학당은 김굉필이 젊은 시절 독서하던 한훤당을 후학들이 새로 지은 것이다. 또 도동서원은 김굉필을 제향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 때도, 철폐를 피한 사액서원이다. 모두 김굉필을 연고로 하고 있는데, 서원 철폐 이후 소학당과 이연서원 유계는 일정부분 도동서원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통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소학당이 一鄕 사림이 共築한 것이 아닌데, 우리 유계가 여러 해 동안 소학당에 붙어 있어, 寄借한다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사문이 액운을 당하여, 서원 院宇는 모두 철폐되어 邑?에 나뉘어져, 무릇 衣冠한 자들이 갈팡질팡하며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임을 한탄하고 있다. 소학당으로 유계의 계소를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서원 복설에도 미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우리 고을의 향교가 서원의 터 근처로 이건해 왔고, 양선생이 모두 文廟에 從祀되어 있는 관계로 우리 유계가 여기에 우선 붙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였다. 실제 陜川鄕校는 1890년 수해 때,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로 이건하였는데, 유계가 여기에 관여하며 양선생에 대한 존숭을 이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目今에 읍의 터를 옛 공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서, 시렁을 버리고 갔으니, ?物이 약간 나아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서원 복설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소학당 가까운 곳에 건물을 하나 지어 계소로 삼아, 尊慕의 정성이 머무는 곳으로 활용하는 것이 어떨지 의견을 물으며, 통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즉, 유계 측은 1893년 합천군 관아가 옛 터로 돌아가면서, 건물 부속 자재를 남겨두고 갔는데, 이를 활용한 서원 복설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흥선대원군 서원훼철령 이후, 院祠 복설을 도모하던 유림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본 통문에서 등장하는 이연서원·도동서원·소학당은 모두 김굉필과 연관된 곳으로 서원훼철령 때 도동서원을 제외하고 모두 철폐되었었다. 그럼에도 이들 원사 및 서당에서 활동하던 유림들은 활동을 지속하며, 철폐된 건물의 복설을 도모하였다. 먼저 소학당이 복설되었고, 이연서원의 경우 유계를 중심으로 복설이 모색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연서원·도동서원·소학당은 김굉필이 매개가 되어 상호 간에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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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陜川儒?會中來文【文圭漢鄭邦鉉裵晉祺沈斗煥】
右文爲答告事來喩中儒?之移所於小學堂誠是
美事鄙等何待僉君子今日之指使也然竊有所一
款難便之端堂非一鄕之所共築而謂有學?修行
者已有年所則斯?之移所恐不免寄借之嫌也淵
院舊址何等尊重而不幸値斯文百六之會院宇旣
?而便成邑?凡之衣之冠者??然無所依歸矣
適値鄙鄕校宮移建於院址之右而亦兩先生從享
之所則斯?之姑爲寄行何害於尊慕之誠也目今
邑址還舊公??棄則院址之復故必有其理第待
?物稍優更圖堂宇之索本而若不如意則終當於
小學堂密邇之地?成一堂永定?所以寓尊慕之
誠爲料伏愿僉君子以此諒燭之千萬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