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퍼온글입니다 ^^
터키 제국의 발칸 지배 역사 중 가장 흥미있는 제도의 하나는 바로 예니
서(?)리였다. 이 말의 어원은 터키어 예니 체리(Yeni Ceri)이다. 우리말
로 굳이 번역하면 신군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예니서리는 프랑스의
외인 부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른바 터키 제국의 용병 근위 부대를 지칭했
다.
그러나 예니서리는 가장 비인륜적인 방법을 통해 육성됨으로써 후세 연구
가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터키 황제의 최측근 정예부대였던 예니서리의
충원은 바로 이슬람이 아닌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들 가운데 어린이들만
뽑아 천애의 고아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터키는 이들을 제국으로 데
리고가 이슬람으로 개종시킨뒤 전형적인 무사로 양육했던 것이다..
연구가들에 따르면 예니서리는 술탄 무라드 1세(1360~1389) 집권초기에
처음으로 창설되었다. 예니서리의 공식 해체는 1826년 술탄 마무드
(Mahmud)2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공식 기록을 고려하면 예니서리 역사
도 5백년에 달한다.
예니서리의 창설 배경은 터키 제국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터키의 최고 지도자인 술탄의 권한은 사실상 터키 제국의 영
토 전역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대 대제국이 그러했듯
이 터키에서도 속주(屬州)에 파견된 총독이 전권을 행사했다. 술탄은 이
스탄불을 지키고 있었지만 속주에 보낸 총독들이 언제 반기를 들어 자신
의 지위를 찬탈하려 할지 몰랐던 것이다.
이에 술탄은 자신의 왕권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동시에 술탄 이외에는 어
느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 친위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즉 술탄
은 충성을 백 퍼센트 보장받을 수 있는 새로운 군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술탄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한 것이 바로 예니서리 제도였다. 이
예니서리는 전적으로 황제의 직속 부대로 다른 명령 계통을 전혀 거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창설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며 예니서리 제도 자체가 처
음부터 특정한 방식을 지향했던 것도 아니었다. 우선 술탄의 입장에서는
직속 친위대를 창설하는 것이 속주의 총독을 자극할 우려마저 있었기 때
문이다. 이에 따라 예니서리 초창기에는 터키 제국이 가진 관례를 적용했
다. 술탄은 수하 장군이 전쟁에서 이길 경우 전맃품의 약 5분의 1을 상납
하도록 하고 있었다. 술탄은 이 같은 제도를 통해 포로가된 적군 가운데
우수한 인적 자원을 선발. 예니서리 부대를 창설했으며 전쟁이 있을 때마
다 이를 충원해 나갔다. 그런데 이들 포로들을 규합해 부대를 만들었지
만 전술적으로 이들이 뛰어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적군을 최측근에 둔
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른바 '데브쉬르메'라 불리는 충원 방법이 가장 빈번하
게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발칸 전역에서 그리스 정교회나 가톨릭
의 신앙을 지닌 사람의 자제를 강제 징집하는 것이었다. 더욱 잔인한 것
은 성년이 된 젊은 사람을 징집해 가는 것이 아니라 보통 8세 내외의 철
부지만을 무조건 붙잡아 천애 고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제도에 대
한 첫 공식 기록은 1385년으로 되어있다.
에니서리에 대한 훈련방식 또한 이제까지의 문화와 완전히 격리시키는 잔
혹한 방법이었다. 특히 1453년 이후에는 주로 어린이들만 징집해 일단 이
스탄불로 호송했다. 이곳에서 출신 성분,건강 상태 등 이들에 관한 전면
재검토를 실시하고, 일단 이 면접 시험에 합격하면 터키 제국이 핵심이라
고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9현재의 소아시아 지방)으로 보냈다. 이곳에서
보통 7년을 보내는데, 군사 훈련을 시켰던 것이 아니라 터키 인들 사이에
서 생활을 하며 그들의 말과 문화와 생활 방식 등을 철저히 익히세 하여
완전히 터키 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이들은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 신병 부대인 아예미 르그홀람스
(Ajemi Lghlams)에 배치돼 철저하게 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때 이들은 모
두 의무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야 했다.
술탄은 또 이 예니서리 부대가 술탄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구조적인 여건을 만들어 두었다. 우선 예니서리는 터키인 의 입
장에서 보면 이교도들이었다. 아무리 이슬람 교로 개종하고 터키 문화를
터키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터키인이 아니었다. 터
키인은 결국 이들을 멀리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예니서리의 전사들은 그들이 이제 이슬함으로 개종했다는 이유 때
문에 고향에서도 버림받은 신세였다. 그들은 오직 황제를 통해서만 생명
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황제에 의지해서만 생존해 나갈 운명을 가지고
잇었다. 특히 예니서리는 전사로 복무하는 중에는 결코 결혼을 할 수 없
도록 되어있었다. 가족이 있으면 싸움을 두려워하게 되고 전쟁을 치해 도
망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탄과 예니서리의 관계는 가장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주인과 노예관계였다. 예니서리의 전사들은 터키의 전성기에
는 최고의 엘리트 부대로 각광받으며 동서로 종횡 무진했지만 그들은 마
침내 처절한 운명의 멍에에 묶이게 된다. 그 멍에의 매듭은 바로 세르비
아인의 반란이었다.
16세기부터 투르크군이 사용했던 무기중엔 "총(handcannon)"이 있는데,
이건 거의 주력병이라 할수있는 "예니체리가 주로 사용합니다(초기의 예
니체리는 창과 칼, 활을 사용했다).
총알은 작은 호두 정도의 크기이고,방식은 심지를 사용하는 화승총으로
써, 예니체리는 대열을 짜 집중사격으로 적을 분쇄할수 있었습니다. 휴대
시에는 총을 멜 줄이 없기 때문에 그냥 총을 어께에 대고 다녔죠(의장대
식).
활은 유목민의 후예답게 복합식 단궁으로써 상당한 위력을 가지는 놈이었
죠(비잔틴의 수비대장 유스티니아니가 이것으로 부상) 이것은 콘스탄티노
플 공략전 당시에 원거리무기로 쓰여졌죠.
칼은 언월도로써 접근전용으로, 예니체리는 사격전 이외에도 접근전에 돌
입하면 정말 "죽음을 모르고 싸웠다"는군요(이 예니체리를 정면으로 맞
아 싸워 승리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루마니아의 블라드 대공, 일
명 드라큘라. 예니체리들과 그 밖의 포로, 정적들, 백성 등을 잔인하게
말뚝에 꽂아서 죽였다. 그러나 그도 결국 투르크군과의 싸움중 예니체리
에게 죽임을 당해-부하가 죽인것이라는 소문도 있다-그의 시체는 그가 평
소에 하던것처럼 꼬챙이에 찍힌다)
방패는 둥그런 모양의 작은 것으로써 유사시 방패를 이용해 적을 가격하
거나 밀어버릴수도 잇었죠.
글구 18세기 유럽의 보병 전진에서 용기를 북돋아주는 "고수"처럼 예니체
리도 고수가 있습니다. "아타바르"라고 하는 아랍의 북으로 이걸 치고 싸
우면, 병사들이 마구 흥분한다고 합니다(내가 알기론 "엘시드"라는 영화
에 이 북이 나온거로 알고있다)
이거 말구도 다양한 북과 나팔등으로 무장(?)한 군악대가 직접 전장에 나
와 전투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고 합니다(2차 빈 포위전이
후, 이러한 터키의 군악을 듣고 당시 오스트리아 음악계에는 터키풍의 음
악이 유행하였다. 좋은 예로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시면 알듯.거기 빈
궁중의 첫장면에서 터키풍의 음악을 오스트리아 사람이 연주하는게 나온
다 )
예니체리의 모습은 우선 모자는 흰색(모자색깔은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
의 영향을 받았다고 함)이고, 그중 고참은 머리위에 배 모양이나 특이한
모양의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실제로 그 당시 그림을 보면 행진하는 병
사중 가운데의 사람이 모자에 이상한걸 달고다니던 병사가 그려져 있죠.
특히 예니체리 총사령관은 고관치고는 아주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하고 다
녔습니다. 이것을 통해 예니체리의 대한 정부의 편애(?)를 알수있죠.
또한 각 병사는 15세기 말부터 "총"을 지급받고, 옆에 칼을 찹니다. 허리
엔 화약통과 예니체리의 상징이라 할수있는 수저를 달고 있습니다(외인부
대의 케피블랑하구 비슷)글구 각 소대는 식사용으로, 역시 예니체리의 상
징이 되버린 청동제 냄비를 1개씩 가지고 다니죠. 만약 예니체리 병사들
이 이 청동 그릇을 뒤집어 엎었을땐 국가에 대한 반역을 의미한다고 하는
군요.
예니체리는 "새로운 군대"란 뜻으로 무라드 1세가 직접 만든 부대이죠.
예니체리의 출신은 다 아시다시피 "발칸반도 같은 기독교동네"에서 훔쳐
온(?) 기독교도의 아이들로 구성되었는데, 초기엔 강제로 개종도 시키
고, 상당히 강압적이었지만 예니체리가 그 무지막지함을 인정 받고 대우
를 잘 받자, 일부 발칸반도의 주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스스로 아이들
을 예니체리로서 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개종은 기본이구요.
그리구 퇴역하거나 고급의 예니체리는 높은자리의 관직도 얻어 잘살수 있
었죠.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가 점점 빛을 잊을때, 어느 술탄인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그놈이 재미거리로 어릿광대와 가수들을 "예니체리"로 임명하는 바
람에(레판토 해전에서 투르크 함대를 이끌었던 자는 무아진muazzin-첨탑
에서 기도시간을 알리거나 코란구절을 말하는 사람, 한마디로 가수-출신
이었다. 그러니 질수밖에 없지..)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장교들이 반역
을 일으킵니다. 반역이 계속되고 일부 고급 예니체리가 정치에 눈독을 들
이자, 예니체리의 찬란했던 시기는 끝나고 결국 예니체리 계급은 구시대
의 모순으로 각인 찍히고(이들이 오스만의 쇠망과도 관련이 있다) 19세기
에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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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Q&A
예니체리..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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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1.1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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