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德壽宮)의 본명은
경운궁(慶運宮) 이다.
두산 ㆍ 이 병 준
사적 제 124호로 지정되어 있는 덕수궁
(德壽宮) 본래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궁이란 이름은 광해군 3년
(1611) 당시 시어소(時御所) 또는 정릉
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부르던 이곳에 처음으로 붙힌 궁궐 이름이다. 그때 흥경
궁(興慶宮)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흥경궁은 고려 때의 궁호라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한때 광해군의 계모 인목대비(仁穆大妃)
는 이곳에 유폐되었고 대비의 호는 삭탈
당하여 서궁(西宮)이라 속칭 되었다. 인목대비의 칭호 탓이기도 했지만 경운궁
의 위치가 서쪽에 있었던 때문에 이 궁궐
의 이름도 서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
나 이 이름은 궁궐의 공식 명칭은 아니며 짧은 기간 동안 사용되었다. 따라서 경운
궁이란 이름은 광해군 3년부터 고종이 양위할 때까지 297년 동안 사용되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직후에 잠시 동안 궁궐로 사용되다가 창덕궁 및 창경궁이 중건된 뒤에는 더 이상 왕의 거처로 쓰이
지 않았는데, 20세기 초에 와서 다시 중요
한 궁궐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경복궁 안에까지 일본인들이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한 사태에 처하게 되자, 당시 주변국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경운궁으로 왕실이 피신하기 위하여 대규모 건축 공사를 벌여 왕궁다운 궁궐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운궁은 전통적인 궁궐 제도에 입각한 배치 형식을 취하면
서도, 정전의 주변부에 서양식 궁전 건
물과 정원을 갖춘 독특한 궁궐 건축으로 만들어 졌다. 경운궁에 이르러 한국의 궁궐 건축은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
가 절충된 형식으로 급격히 변모하게 되었다.
이후 외세의 개입이 심화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한국의 건축도 일본
화, 서양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일본에 의하여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난 고종은 이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꾼 것으로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고유명사
가 아니며 왕위를 물려 준 상왕(上王)이 은거(隱居)하는 궁궐이란 뜻의 일반적인 이름이며 궁궐 고유의 이름은 아니다. 또한 일제 치하 때 주권을 지키려던 고종
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그의 주거를 경운궁에 제한하였으며 경운궁을 지금의
왜소한 모습으로 변형, 축소한 것은 순전
히 침략 세력의 작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와 같이 타율적
으로 결정되어 사용하는 <덕수궁>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곧 본래의 이름인 <경운궁>으로 바뀌어
야 옳다. 창경원(昌慶苑)이 창경궁이란 본래의 이름을 찾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9월 26일 개관 일반에 공개한 덕수궁 내의 돈덕전(惇德殿)은 석조전 서북쪽에 있었던 2층 양옥이다. 외국 사신의 알현
소 또는 연 회소로 사용되었다. 1901년 건축된 것이라 하며, 내부에 6개의 큰 원주가 있는 100평 넓이의 큰 방이었다. 순종이 여기서 1907년 8월 27일 즉위식
을 거행한 곳으로 석조전이 완공된 뒤 1920년 대에 철거된 것으로 이번에 100년 만에 재건돼 문을 열었다. 하지만 자료 부족 때문에 원형대로 지을 수 없게 되어 '복원'이 아닌 '재건'이란 말을 사용
했다.
《참고 문헌》
<덕수궁(경운궁)> 김순일, 대원사, 2013.
<한국의 궁궐> 이강근, 대원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