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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맨 오른쪽 끝에 있는 국립 국악원. 국악원을 알게 된 건 2004년 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딸내미 다솜이가 예술의전당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예비학교
오디션에 합격해 1년을 함께 다녔기 때문이다. 수원에서 학교수업 마치고, 일주일에 3회 발레레슨을 받으러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하였다. 한예종의 발레과 교수님들과 러시아 초빙교수가 언니 오빠들을 레슨하는 홀에서
하는 수업이라 아이들의 긴장감과 설렘과 열기는 땀냄새만큼이나 진하고 후끈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과정의 학생들 중, 초등학교 학생들의 엄마들은 거의 백프로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며 기다리며 수발하였다. 밖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저녁을 먹으며 떠드는 엄마들의 수다 속에도
은폐한 경쟁심과 정보수집노력의 불꽃은, 대낮처럼 훤한 형광등불 아래 반짝이는 아이들 눈빛만큼이나 번쩍
번쩍 날로 튀기만 했다. 3월 한 달을 이런 전혀 새로운 생활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난 이 생활이 적성과 취향에
맞지 않다는 판단이 들게 되었다. 수다떨고 돌아갈 때 머리는 지끈하고 마음이 답답해지는 게 스트레스까지
쌓여가는 것이었다. 나는 4월부터 아이를 내려주고 바깥에 적당히 차를 대고 차 안에서 자든지 책을 보든지
하거나, 우면산 대성사를 올라 법당에 앉아 묵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엄마가 끈질기게 나를 찾고 가만 놔두지를 않았다. 이 엄마도 나처럼 외동딸 하나인데, 딸 하나에 온
우주를 걸고 살고 있었다. 이 엄마는 모든 엄마가 같이 있건 없건 엄마들의 동태를 다 꿰고 있어야 하므로 나를
한 번이라도 못 보면 안달을 하고 만나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 하루는 나를 예술의전당 안에서 자판기 고급커피가
가장 맛있고 싼 곳을 알고 있다며 국악원 예악당 로비로 데려갔다. 정말 커피의 양도 많으면서 믹스커피가 덜 달고
맛있었고, 아메리카노도 좋았다. 로비 한 켠에 오픈 형태의 커피숍이 있었는데 손님이 뜸한 야심한 그 시간의
커피숍은 과자나 빵 한 조각만 사면 4백 원짜리 커피로 4천 원짜리 커피 마시는 행복을 누리게 해주었다. 커피를
마시고 예악당과 국악원 전체를 한 번 돌았는데, 그때 우리는 우리랑은 전혀 상관없는 국악악기, 사진, 프로그램
등을 건성으로 구경하고 무심히 지나쳤었다. 머릿속엔 오직 '발레'밖에 없었으니까.
다솜이는 6학년이 되어서는 서초동의 바가노바발레아카데미 한국분교로 옮겨 혹독한 수업을 받고 치열한
입시를 치러 예원학교 발레과에 합격하였다. 예원학교는 예술중학교이므로 각 과가 일년에 한 번씩 정기공연을
하는데, 발레과와 한국무용과는 예원무용제라 하여 매년 6월에 바로 이 국악원 예악당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다.
다시 예악당과의 인연이 연결된 것이다. 이때부터의 예악당은 나에게 일하고 기다리고 지침의 시간들이어서 그 뒤
별로 떠올리질 않고 살았다. 무용제 일정이 잡히면 정규수업 후 2개월 이상 학교에서 연습을 하고 국악원 예악당
으로 가서 리허설과 본공연 3회를 했다. 그 내내 엄마들은 조를 짜서 선생님과 아이들 식사와 간식을 준비하고
먹이고 기다리고, 또 준비하고 먹이고 기다렸다.
인생의 반 이상을 무대에서 산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이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인 것 같다'고 했다. 무대
뒤에서 시작을 기다리다 무대에 오르고 다음 순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다음날도 또 그렇게 기다리고. 그러니
발레 꿈나무들은 얼마나 연습하고, 얼마나 기다리고 하겠는가. 아이들은 기다리는 데 이미 익숙해져 지치지도
않았고, 이게 웬떡이냐 하며 평소 다이어트로 양껏 못 먹어보던 음식들을 잘도 먹었고, 삼삼오오 조잘조잘 알아
서 잘들 쉬고 놀았다.
무용과는 부전공도 함께 해야 해서 다솜이는 발레 전공에 한국무용을 부전공으로 했다. 이번에 동료 지은희
선생님이 <명무전> 공연에서 오프닝 군무를 춘다고 초대하며 다솜이도 꼭 데리고 오라 하였다. 다솜이도 선뜻
좋다고 하여 오랜만에 국악원을 찾게 된 것이다. 몸에 무리가 가 발레를 중학교까지로 끝내고 전공을 연극영화
과로 바꿔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지금은 쉬면서 연극영화과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다솜이는 예술의전당 앞 도로를
들어서자 내가 여길 오니까 말이 많아지려고 하네, 한다. 그리고 내려 국악원 예악당으로 들어서며 얼굴이 살살
살아나더니 생글생글 계속 웃고 에세이스트 선생님들께 인사도 넙죽넙죽 잘 하였다. 옛날 그대로인 로비, 익숙한
화장실을 다녀와 객석에 앉으니 내 가슴에도 어느덧 감회의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이제 이 예악당은 더는 소름
끼치는 긴장감도 없었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걱정도 없었다. 그야말로 편한 좌석에 편한 안방 같았다. 티켓
좌석번호상 다솜과 난 떨어져 있었으나 그 느낌만은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대커튼이 오르며 거문고 가락이 둥둥둥 튕겨 나왔다. 아, 진짜 열여섯 명! 그중 회색저고리라 했겠다. 군무로
무대에 선 내 아이 찾기 경력 십여 년에 그것만은 선수다. 찾았다. 왼쪽 가운데쯤 뒤로 앉아 거문고가 떨 때마다
어깨를 유난히 파르르 떠는 여인. 지은희다!,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일어나 보여준 얼굴이 아무래도 이상
하다. 잽싸게 앞모습들을 일별하니 오른쪽 뒷부분에서 활짝 미소짓고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는 여인, 그 여인이
지은희였다. 내 딸 다솜이가 서던 무대에 지금은 수필 쓰는 지은희가 섰다. 지금부터라도 놓지지 않음 된다하며
필사적으로 지은희만 따라다니며 함께 하던 내 힘 준 눈에 조금 힘을 빼려 할 때 팽팽한 거문고줄 하나 툭 끊어
지듯 '부채 거문고산조'는 정지해버렸다. 지은희도.
다솜이가 춤을 그만 추며, 다솜이나 나나 춤을 옛날만큼 찾아다니며 보지 않았다. 일부러 피한다기보다 앞으로
뮤지컬을 하겠다는 아이의 변화된 꿈에 맞춰 되도록 뮤지컬과 연극, 영화들을 많이 보러 다녔다. 그래서 참
오랜만에 편하게 본 춤이다. 그러나 난, 안다. 지은희 선생님이 몇 분짜리 작품을 위해, 몇 분간의 예술을 위해
몇 천분의 시간과 땀과 눈물을 쏟았을지를. 왜 눈물이냐고? 온몸이 땀에 찌들 때에는 눈에서도 땀이 난다. 연습
하며 공연하며 마음이 벅차면 눈물이 난다. 이럴 때 눈에서 나오는 것이 눈물이 아님 무엇인가. 다른 바쁜 일들,
그 중압감 속에서 시간을 내어 마음을 쏟아 단원들과 맞추어 연습하느라 그 안에서 기다리고 견디던 시간들 와중
에서의 지은희의 만감을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나이에 못 이룬 꿈을 찾아 그 길을 가며 느끼는 환희와 가슴
느꺼움.. 프로들 속에서 참새처럼 작은 아마추어 지은희가 흥겨운 날갯짓을 한 것에 박수를 정말 크게 길게 보냈다.
떨어져 있던 다솜이와 만났다. 그런데, 켜진 조명 아래 다솜의 볼이 뜨거울듯 발그레했다. 빙그레 웃으며, 내가
공연한 것 같네, 한다. 자기가 몸바쳐 추던 발레가 아니라 긴장은 덜하나 자기가 섰던 무대이고, 그 뒤 대기실과
분장실 그 모든 것이 떠올랐었나 보다.그때 그 친구들, 선생님들 그리고 초조, 경쟁, 질투, 칼날 같은 부딪침 등.
로비에 나온 그새 더 야윈 지은희 선생을 수고했다며 안아주었다. 열여섯 명 중에 지은희가 젤 야무지게 당당하게
잘하더라, 했더니 고맙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헤어져 김종완 선생님을 태우고 국악원을 빠져나오며 다솜인
여전히 수다스러웠다. 공연 끝내고 로비로 나와 가족이랑 사람들 만나는 거 그것도 힘든거야, 사진 빨리 찍고
빨리 들어가게 해줘야 해, 라고 자신의 경험 얘기도 선배같이 한다. 그러면서 글 쓰면서 춤도 춘다는 게 대단해
보인다고도 한다.
그렇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글 하나도 제대로 못 쓰고 사는 나를 되돌아 보았다. 부끄러웠고 아이
보기에도 민망했다. 그렇지만 난 엄마다. 아이에게 시침 뚝 떼고 말했다.
"그렇지? 지은희 선생님 대단해 보이지? 지은희 선생님이 어릴 때 발레를 했었대. 근데 발레를 계속 하지 못하고
아쉬운 채로 다른 전공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 길러놓고는, 춤을 추고 싶은 거야. 이제 나이에 맞는 한국
무용을 다시 배우기 시작하셨대. 그게 몇 년 전이고, 즐겁고 행복하게 배우고 연습해 이제 공연도 하고 만족과
보람도 느끼게 되셨지. 다솜이도 언제든 춤을 다시 추고 싶으면 지은희 선생님처럼 할 수 있어. 하고 싶은 건
언제든 하고 싶고, 그것은 언제든 하면 되는 거야."
* 걍, 그날의 단상을 짧게 적어보고 싶었는데,,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 감사! 합니다.
첫댓글 아휴~박옥경 선생님 글 잘 읽었어요.긴 글을 단숨에 읽을 수 있게 쭉 뽑아내다니 대단하네요. 저보다 선생님이그 순간을 온통 즐기신 것 같아요. 게다가 무대 뒤의 면면도 저보다 더 잘 알고 있고요.
다솜이는 온갖 에너지를 다 품고 있는 보석 같았어요. 앞으로 그 아름다운 열정이 정말 기대됩니다.
그날 저는, 무대에서 16분의 1이지만 주인공처럼 야무지게 춤을 추는 춤꾼 지은희를 보았지요. 지은희의 끼를.. 그 주체할 수 없는 끼가 결국 '아줌마'가 된 지은희를 무대에 오르게 했고, 앞으로 남은 삶도 춤과 함께 살게 하겠지요.
선생님이 다솜의 가슴속 깊은 곳의 에너지와 열정을 보셨다면, 그것은 비슷한 경험을 했었고 비슷한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 것 같아요. 아, 물론 선생님은 하나의 꿈에 발을 분명 들여놓으신 거고, 다솜인 그 하나의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요.^^
고생하셨고, 보람도 차셨지요? 늘 정진하시고, 발전하시길 빌어요.^^*
박옥경 선생님 .그의 따님 다솜이 그리고 지은희 선생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하이구, 저한테는 왜요 선생님. 저는 예술하는 사람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하는 사람만큼 힘들고 아픈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대에 오르면 아낌없이 지지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겁니다.^^
유성서 뵙고 그새 한 달이 되었어요. 송년회 때 건강히 뵈어요 선생님.^^*
두 분의 주고 받는 글들이 잔잔한 울림을 주는군요.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선생님, 본 지가 한 삼년은 된 거 같아유. 좀 나오시지요. 꼭 글공부가 아니더라도 금요반에 함 오시어 수업참관도 하시고, 막걸리도 한대포하며 회포좀 풀게.
선생님이 아름다운 맘 갖고 사시니까 다른 사람들도 아름다워 보이는 거지요. 고마워요~
담주쯤 사무실에 들러볼까 합니다. 그때 선생님 얼굴도 뵐 수 있으면 참 좋겠네요.^^
보석 같은 다솜이가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우리 평균년령을 확 낮춰줬어요. 김우종 교수님이 다송미에게 가장 감사해 하셨습니다.
그날의 우리의 평균연령을 가장 높일 김우종 선생님(83세)이, 오병미 박옥경(이상 40대) 땜에 조꼼 평균연령 낮아져 덜 미안^^했을텐데,, 다솜(19세)의 등장으로 확 낮아져 아마 많이 덜 미안해 하셨을 겁니다. 아니, 다솜한테 감사해 하셨을 겁니다. 다솜인 것도 모르고, 마냥 춤에만 빠져 있었구요.ㅎㅎㅎ
지은희 선생님의 춤 공연에, 박옥경 선생님의 해설을 곁들이니 느낌이 팍팍 전해 옵니다..
팍팍 이라는 선생님의 표현에 짝짝 에너지가 샘솟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께서 와주신 공연이라 지은희 선생님이 더 빛나고 힘이 났었을 겁니다.
담에,, 다솜이가 뮤지컬로 무대에 설 때도 오시어 기운 팍팍 짝짝 나게 해주실 거죠?~
다솜이는 먼 훗날 훌륭한 예술가가 될 것입니다.
본인이 원하고 노력해서 먼훗날 훌륭한 예술가가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고요,
저는 이제 다솜이가 편하게 스트레스 안 받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