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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에는 ‘프로스펙트 공원’이 있다.
뉴욕에서 준비하던 글이 있어서
‘뉴욕테마여행’ 시리즈의 하나로 올립니다.
제가 이번에 머물렀던 숙소는
브루클린(Brooklyn)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에 대해 더 알게 되고,
흔히 맨해튼(Manhattan)을
뉴욕(뉴욕시)의 전부로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서
약간의 반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에 올린 저의 이전 글
<‘뉴욕=맨해튼’일까?>에서
거론했다시피
현재의 통합된 뉴욕시는
1898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mskim566/222546287407)
그 이전에는 브루클린은
별도의 도시로서
나름 맨해튼과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 경쟁의 한 예로서
이번 글에서 브루클린의 대표적인 공원인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우선 공원 모습의 자료 사진을 한번 봅니다.
(출처: en.wikipedia.org)
많이 알려져 있듯이
맨해튼을 대표하는 공원은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입니다.
센트럴 파크의 특별한 한 면에 대해서
저는 이 블로그의 이전 글
<센트럴 파크 ‘문인의 길’(Literary Walk)>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mskim566/222551630911)
그리하여 이번 글은
저 스스로에게도 맨해튼과
브루클린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일이기도 합니다.
*프로스펙트 공원의 위치와 역사
먼저 이 공원의 위치를 지도로 살펴봅니다.
(Google 지도의 캡처후 편집;
이후 모든 지도는 이와 동일한 방식임)
이 공원은 현재의 브루클린에서는
중앙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하지만,
이 공원이 세워지기 얼마 전
19세기 중반의 브루클린에서는
남쪽 끝에 해당하는 위치였습니다.
이 공원의 역사를
브루클린의 성장과 관련시켜서 살펴봅니다.
1814년 맨해튼과 연결하는 증기선
‘풀턴 페리’(Fulton Ferry)의 개통으로
맨해튼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의 주거지로서
브루클린이 각광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1817년에는
‘브루클린 읍’(Village of Brooklyn)이
만들어지고,
1834년에는
이것이 ‘브루클린 시’(City of Brooklyn)로
승격됩니다.
1855년에는
기존 지역에 더해서
북부와 동부의 지역들
(Greenpoint, Williamsburg, Bushwick)이
편입되어 도시가 커집니다.
이 시점에 도시 재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대규모 공원의 설치도 논의됩니다.
1859년에는
‘프로스펙트 공원’ 설치 법령이 발표되고,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를 설계한
두 인물(Frederick Law Olmsted와
Calvert Vaux)이
프로스펙트 공원의 설계도 맡게 됩니다.
이리하여 1867년에
프로스펙트 공원은 일부가 개장되고,
1873년에 완성이 됩니다.
참고로 센트럴 파크는
이보다 10년 정도 앞선
1858년에 부분 개장되었고,
187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맨해튼에 대규모 공원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브루클린도 질 수 없다 싶어
프로스펙트 공원을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프로스펙트 공원의 개관
프로스펙트 공원의 크기는
526에이커(2.13평방킬로미터)인데,
센트럴 파크(843에이커;
3.41평방킬로미터)의 3분의 2 정도입니다.
센트럴 파크가
도시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더 많다면,
프로스펙트 공원은 더 전원적이고
더 자연친화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브루클린에는 프로스펙트 공원보다
더 넓은 ‘마린 공원’
(Marine Park)이라는 곳이 있지만,
이곳은 남쪽 해안에 위치해 있어
이용자수나 시설 모두 열세라고 여겨집니다.
이 공원 이름에 있는
‘Prospect’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고 넘어갑니다.
이 단어는 ‘가망, 가능성’ 등의
뜻으로 많이 쓰이지만
‘전망, 조망, 경치’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Prospect Park’라는 이름은
이곳 외에 다른 도시에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브루클린의 ‘Prospect Park’는
그 이름이 생긴 약간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브루클린 서쪽 지역은
대체로 평탄한데,
현재 이 공원의 오른쪽 위쪽에
‘Mount Prospect’라는
해발 61미터의 ‘꽤’(?) 높은
동산이 있어서
전쟁시에는 관측 기지로도
사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Prospect Park’는
이 ‘Mount Prospect’로 인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아래에 나오는
이 공원 주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Mount Prospect’는
현재는 이 ‘Prospect Park’에
속해 있지 않고
‘Mount Prospect Park’라는
자그마한 공원으로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공원 주위의 시설들을 일별해 봅니다.
지도의 최상단에 잘려서 나온
‘Grand Army Plaza’는
이 공원에 속한 지역입니다.
Grand Army Plaza의
바로 아래 오른쪽에는
프로스펙트 공원과는
대로(Flatbush Avenue)로 인해
단절된 여러 시설들이 있습니다.
시계 방향으로
‘브루클린 중앙도서관’
(Brooklyn Central Library),
‘마운트 프로스펙트 파크’
(Mount Prospect Park),
‘브루클린 박물관
’(Brooklyn Museum),
‘브루클린 식물원’
(Brooklyn Botanic Garden)이
펼쳐져 있습니다.
위 지도의 글자 표기상으로
‘프로스펙트 공원 동물원’
(Prospect Park Zoo)도
공원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동물원은 공원 내부에 있습니다.
이 공원은 센트럴 파크에 비해
전원적이고 자연적이라고
위에서 말했는데,
광활한 공터, 계곡, 호수,
거대한 나무 등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 몇 장을 보시겠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야구장 7개가 함께 있는
드넓은 공터로서 그 명칭은
‘Long Meadow Ballfields’입니다.
(이후 출처 표시가 없는 사진은
모두 필자가 촬영한 것임)
다음은 계곡 사진 2장입니다.
다음은 호수 사진 3장인데,
공원내에 호수 전체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 공원의 숲은 꽤 깊숙한 편인데,
다음과 같은 큰 나무도 있습니다.
이 나무는 ‘Camperdown Elm’
(우산 느릅나무)으로 분류되며
이 공원에는 1872년에 식재되었다고 합니다.
*프로스펙트 공원의 동상(기념물)들
지금까지 이 공원의
여러 면모를 살펴보았지만,
저의 궁극적인 관심은
센트럴 파크의 ‘문인의 길’처럼
이 공원에 있는 문인, 예술인의
동상들입니다.
프로스펙트 공원에도
동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그 장소의 이름은
‘콘서트 숲’(Concert Grove)입니다.
콘서트 숲은
1874년 개장되었고
처음에는 독일계 합창단이 주도한
야외 음악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주로 음악가들의
동상(흉상)이 모여 있는
조각 공원(sculpture garden)이
되었습니다.
센트럴 파크에는
‘Literary Walk’라는
‘직선 대로’(mall)에
동상들이 모여 있다면,
프로스펙트 공원에서는
‘정원’(garden)에 모여 있는 셈입니다.
우선 지도를 통해
어떤 동상들이 있는지 알아봅니다.
콘서트 숲 안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베버, 그리그까지
4명의 음악가,
토머스 무어라는 시인 겸 작사가,
그리고 아래쪽의 링컨까지
6개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숲 바깥의 큰길 너머에
작가 워싱턴 어빙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 아래에는
전쟁 기념비가 있는데,
이것까지 총 8개를
이 블로그에서 다룹니다.
<문인/음악가 동상>
1. Thomas Moore(1779~1852)
토마스 무어는
아일랜드의 시인, 작가, 작사가입니다.
이 동상은 1879년
이 시인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브루클린시 성 패트릭 협회’
(The St. Patrick Society
of the City of Brooklyn)가 기증했습니다.
다음은 이 시인의 초상화입니다.
(출처: en.wikipedia.org)
무어는 <아일랜드 멜로디>
(The Irish Melodies)라는 시집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유명한 'The Last Rose of Summer'(1805)의
가사도 이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센트럴 파크에도
토마스 무어의 동상이 있는데,
이는 저의 앞선 블로그에서도
다룬 바 있습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mskim566/222551630911)
프로스펙트 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은 센
트럴 파크의 동상보다 1년 앞섰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2. 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베토벤의 동상은
1894년에 설치되었는데,
이 공원 내의 음악가 동상의 선두격입니다.
동상에 새겨진 다음 구절은
뒤이어 나오는 모차르트의 동상과,
날짜, 장소를 제외하고는 동일합니다.
PRESENTED TO THE CITY OF BROOKLYN
BY THE UNITED GERMAN SINGERS OF THE CITY.
FIRST PRIZE AT THE 17TH NATIONAL SAENGERFEST,
HELD AT NEW YORK JUNE 22 ~ 26.
(브루클린시의 연합 독일 합창단에 의해
브루클린시에 기증됨.
6월 22~26일에
뉴욕에서 개최된
17회 전국 합창단 축제의 1등상.)
즉, 합창대회의 1등상으로 받은
베토벤의 흉상을 이 공원에 기증한 것입니다.
다음은 베토벤의 초상화입니다.
(출처: en.wikipedia.org)
베토벤은 독일의 고전주의 음악가로서,
9번 <합창> 교향곡 등
여러 유명 작품을 남겼습니다.
센트럴 파크에는
1884년에
그의 기념물이 설치되었습니다.
센트럴 파크의 동상은
위에서 토마스 무어와 관련해서 언급한
제 블로그에서 역시 다룬 바 있습니다.
3. 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음악가이지만
범독일권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위에도 언급된
브루클린 연합 독일 합창단이
합창대회 우승상으로 받은
모차르트의 흉상을
1897년 이 공원에 기증한 것입니다.
모차르트의 초상화를 한번 봅니다.
(출처: en.wikipedia.org)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음악가로서 높은 직위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가
요절했습니다.
모차르트의 대표작으로는
오페라 <돈 조바니>(Don Giovanni, 1787),
<마술피리>(The Magic Flute, 1791)가
꼽히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일시 가르친 적도 있다고 하는데,
이 공원에는 제자보다 늦게 모습을 보였습니다.
4. Carl Maria von Weber(1786~1826)
역시 독일 작곡가인 베버의 동상은
위에 언급된 합창대회 우승상으로서,
1909년에 이 공원에 설치되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초상화입니다.
(출처: en.wikipedia.org)
베버는 낭만주의 음악의
첫 번째 작곡가 반열에 들어가며
낭만주의 오페라인
<마탄의 사수>(魔彈의 射手,
Der Freischütz[=the freeshooter])가
대표작인데,
이 작품에 나오는 “사냥꾼의 합창”은
많이 알려져 있는 곡입니다.
5. Edvard Hagerup Grieg(1843~1907)
노르웨이 태생의 작곡가인
그리그의 동상은
1914년
‘브루클린 노르웨이인 협회’
(Norwegian Societies of Brooklyn)의
기증으로 설치되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en.wikipedia.org)
그리그는 독일에서 음악교육을 받고
후일 노르웨이 국민음악을 선도합니다.
동포 극작가 헨릭 입센
(Henrik Ibsen, 1828~1906)의
극작품에 붙인
두 편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orchestral suites)
<페르귄트>(Peer Gynt, 1876)가
그리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타 기념물들>
6. Abraham Lincoln(1809~1865)
링컨 동상은
브루클린의 단체들의 주관으로
미국내 첫 동상으로서
1869년
이 공원의 입구에 있는
Grand Army Plaza에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1896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어
음악가들의 동상 앞줄선에 서 있습니다.
다음은 링컨의 초상화입니다.
(출처: en.wikipedia.org)
링컨은 켄터키(Kentucky)주 북부의
‘Hodgenville’에서 태어났지만,
1817년 인디애나(Indiana)주 남부의
‘Spencer County’로 이주하여
주로 여기서 성장하였습니다.
1830년에는
서쪽의 일리노이(Illinois)주 중부의
‘Macon County’로 이주하였는데,
일리노이주는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됩니다.
1861년 3월 4일에
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865년 3월 4일에
재선 임기를 시작하였으나
곧 4월15일에 암살로 서거했습니다.
링컨과 뉴욕시와의 인연은
1860년 2월
대통령 선거 기간중에
뉴욕을 방문하여,
유명한 연설을 행해서
주목을 받은 것이
첫 인연이었다고 합니다.
7. Prospect Park War Memorial
위의 1~6번은
‘콘서트 숲’에 위치하고 있으며,
7번은 그보다 꽤 아래쪽에 있습니다.
프로스펙트 공원에는
그 외에도 여러 기념물들이 있지만,
전쟁 기념비들에 대한
필자의 특별한 관심 때문에
이 기념물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프로스펙트 공원 전쟁 기념비는
1921년 William H. Todd(1864~1932)라는
브루클린에 오래 거주한
조선 사업가이자 박애주의자가
1차대전 희생자들을 기려서 세운 것입니다.
중앙에 기념물 본체가 있고,
그 아래에 좌우로
브루클린 출신으로
1차대전에서 희생된
2,80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8. Washington Irving(1783~1859)
워싱턴 어빙의 동상은
콘서트 숲에서 오른쪽으로
다소 벗어난 곳에 있습니다.
1871년 제막된 이 동상은
이 지역의 사업가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Demas Barnes(1827~1888)가
기증했다고 합니다.
어빙의 초상화도 한번 보겠습니다.
(출처: en.wikipedia.org)
어빙은 맨해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0대 후반에 허드선강
(Hudson River)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태리타운(Tarrytown)에 살게 되고,
이리하여 인근의 슬리피 할로우
(Sleepy Hollow)의 전설에도
익숙하게 됩니다.
태리타운 인근의 위치(빨간색으로 표시)를
지도상으로 보겠습니다.
어빙의 첫 성공작인 <스케치북>
(The Sketchbook, 1819)에는
수필들과 더불어
'The Legend of Sleepy Hollow',
'Rip Van Winkle'과 같은
후일 유명해진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특히 앞의 것은
오늘날 태리타운과 슬리피 할로우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그는 외교관, 사업가 등으로
17년간 유럽에서 생활하다
1832년 귀국했습니다.
그는 태리타운 인근에
‘Sunnyside’라는
저택을 지어 거주하는데,
오늘날 어빙의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이 저택의 자료 사진입니다.
(출처: en.wikipedia.org)
그가 살던 동네는
현재 ‘어빙턴’(Irvington)으로 불리고,
그의 작품으로 인해 유명해진
태리타운의 북쪽 지역은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가
정식 지명이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번에 이 지역을
기차로 찾아보았는데,
시간 관계상 ‘Sunnyside’는
방문하지 못해서 유감이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 몇 장을 올립니다.
먼저 태리타운 기차역의 모습입니다.
슬리피 할로우 묘지
(Sleepy Hollow Cemetery)
근처에 있는 슬리피 할로우 전설 속의
‘머리 없는 기사(騎士)’
(headless horseman)의 조각상과
이 인물과 관련된 교량의 표지입니다.
다음은 슬리피 할로우 묘지에 있는
워싱턴 어빙의 가족 묘지와
어빙 개인의 묘지입니다.
이 묘지에는 대부호이자 박애주의자였던
앤드루 카네기
(Andrew Carnegie, 1835~1919),
윌리엄 록펠러
(William Rockefeller Jr, 1841~1922)와 같은
명사들의 무덤도 있는데,
시간 관계상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상으로 브루클린의 대표적인 공원인
‘프로스펙트 공원’에 대해,
특히 그 안에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맨해튼에 대해 덜 알려져 있는
브루클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울러, 이들이 오래전부터
공원이라는 도심 속의
공공적 휴식처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과,
그 안에 문화와 역사를
함께 담으려 했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저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측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