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양을나 탐라왕국 3307년
― 왜 3천년 탐라왕국 역사는 사라졌는가? ―
― 탐라왕국의 역사를 밝힌다. ―
양을나 종실 한라군 종부정공대종회
회 장 양 인
- 목 차 -
1. 들어가는 말 1
2. 환웅천황(桓雄天皇)의 배달국(倍達國) 4
3. 17세 환웅천황 황자(皇子)의 표류 5
4. 양을나의 탐라왕국(耽羅王國) 6
5. 부족연맹체 제1왕조 시대 9
6. 해상왕국 제2왕조 시대 10
7. 신라 복속국 제3왕조 시대 20
8. 탐라왕국 양을나 계보(耽羅王國 良乙那 系譜) 23
9. 맺는 말 27
1. 들어가는 말
한국역사 기록에는 거의 나타나지 있지 않지만 서기전 24세기부터 10세기까지 한반도 남쪽 거대한 섬 제주에는 하나의 독립국가가 존재 하였습니다. 단군왕검보다 36년 먼저 양을나 성왕이 개국하신 탐라왕국의 상고사도 이제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여기에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탐라왕국 이야기를 펼치려 합니다. 한반도와는 다른 삶의 모습과 역사를 가졌던 탐라사람들이 3307년의 세월 동안 거친바다를 헤치며 해양으로 나아가 부를 쌓고 삶의 터전을 다져갔던 해상왕국 탐라가 있었습니다.
양을나의 탐라왕국은 108분의 왕이 대대로 삼천년 넘게 이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게 역사적 우여곡절과 정치적 시련으로 인하여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 역사에서 탐라왕국의 역사가 사라졌을까요?
첫 번째는 권력 투쟁의 최종 승자 고씨들에 의한 삭제입니다.
양을나의 탐라왕국은 한반도 3국을 통일한 신라의 탐라 경략으로부터 큰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679년 2월에 있었던 신라의 경략으로 태자가 볼모로 육지에 끌려오자 탐라의 주도권은 고씨들의 대단한 위협이 시작되었고, 탐라왕국은 양씨들과 고씨들의 권력 투쟁에서 양을나의 실질적 지배권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912년에 108세을나가 늙었음을 한탄하며 왕위를 물러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신라의 복속국 지위에서 실제적으로 탐라왕의 권한은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더구나 왕족인 양씨들은 주 세력들이 육지로 진출하고 탐라도에 남아 있는 씨족들은 많이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모라부족(毛羅部族) 고씨들의 세력은 급성장하여 탐라국 전제에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순선양(堯舜禪讓)의 뜻에 따라 모라족(毛羅族) 족장의 아들 고자견(高自堅)에게 왕위를 선양하여야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 탐라는 고씨들이 실질적인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08대까지 삼천년 넘게 이어온 양을나의 탐라왕국은 사라졌고, 이전의 역사도 권력 투쟁의 최후 승자 기록이기 때문에 모두 고씨들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탐라 역사를 기록한 현존 역사서 중 가장 정사로 인정받는 영주지(瀛洲誌) 마저 고려 말엽에 간행하였기에 고씨들의 탐라성주를 중심으로 쓰여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양을나의 탐라왕국이 제주 역사에서 사라진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몽골제국 원나라에 의한 삭제입니다.
1225년부터 시작된 세계의 5분의 4를 정복한 몽골의 원나라와 고려가 28년간 7차에 걸쳐 피바다를 이룬 참혹한 대몽항쟁이었습니다. 탐라까지 밀려온 삼별초는 1273년 2월에 마지막 항전지인 항파두리가 점령되면서 3년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이후로 고려는 완전히 원나라의 식민지가 되었고, 탐라에는 원나라가 우수한 전투용 말을 보급하는 기지로 만들어 향후 전쟁이 대비하고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원나라가 멸망하는 1367년까지 100년 동안이나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때 원나라는 탐라를 완전히 원나라 기지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탐라왕국의 역사를 완전히 지우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세 번째는 원나라로부터 반환 받은 고려에 의한 삭제입니다.
탐라국은 1105년 고려 숙종 10년에 고려에 완전 복속되어 그 격이 강등되어 탐라군(耽羅郡)이 된 후, 1153년에 탐라현(耽羅縣)이 되었습니다. 고려는 1260년에 원나라의 침공으로 부마국이 되었습니다. 고려의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의 상례와 성종의 즉위식에 참여하였다가 원나라에 탐라를 되돌려 줄 것을 간청하여 되돌려 받으면서 1295년에 탐라현은 제주목(濟州牧)이 됩니다. 이는 고려가 탐라왕국의 역사를 깨끗이 지우고자 탐라가 확실히 고려의 땅이라고 선언하는 용어로 ‘저 물 건너 땅’제주(濟州)라고 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탐라는 100년 가까이 원나라와 고려의 양속지배(兩屬支配)를 받는 큰 시련을 당합니다. 고려는 탐라를 두고 원나라와 탐라·제주로 끈질기게 옥신각신하여 골머리를 앓게 되면서 탐라는 생각도 하기 싫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삼천년 넘는 양을나 탐라왕국 역사는 완전히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는 역성혁명 불참으로 보복한 조선에 의한 삭제입니다.
육지에 오른 양씨들은 후기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대단한 세력을 지닌 족벌(族閥)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성혁명으로 유교의 조선이 세워질 때 서해도원수 금성군(錦城君)양동재(梁棟材)가 최영 편에 서므로 동참하지 못하여 이방원 등에 의해 양씨들의 역사는 이 세상에서 제거되고 모두 불 태워졌습니다. 더구나 유학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은 근세조선의 사대사관은 대국 중국의 나라들과 같은 시기에 나라가 있었다는 말은 어불성설 이었으니, 어찌 내놓고 말하며 자료를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세조선 초·중기에는 살아남기 위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피신하여 은둔 생활을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전해 내려오던 족보마저 불태우고 이전의 자료는 없었던 것으로 숨겨야 했습니다. 조선 초·중기 역사 기록에는 양씨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조선 초기 동쪽 경주 양좌동(良佐洞양동마을)에서도 천년의 세거지를 외손인 달성손씨에게 통째로 버리고 화를 피하여 인근으로 흩어져야 했으며, 태자 한라군의 종실이었던 나의 16대조 할아버지께서도 1545년 을사사화 때 천년의 세거지 양과동 종실을 외손인 경주최씨에게 통째로 이양하고 화를 피하여 지금의 전남 영암에 은거하여 그 후세를 겨우 이어야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한 삭제입니다.
남의 땅에 어이없는 연고권을 주장하고 한반도 역사를 미개한 소국으로 폄하하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사람들에 의해 짓밟힌 식민사관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침략자들의 은혜를 입은 비굴하고 어리석게 친일을 하였던 매국노들과 이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그대로 받아들인 몇몇의 강단사학자들에 의해 양을나의 탐라왕국 역사는 슬퍼하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여섯 번째는 근대사의 소용돌이에 의한 삭제입니다.
한국전쟁과 제주 4·3사건 등을 거치면서 그 나머지마저 불태워졌습니다.
양을나의 탐라왕국 역사는 사라져 일천년이 묻혀 있었지만 분명하게 탐라왕국은 있었습니다. 탐라왕국 사람들은 섬과 바다를 하나로 여기면서 만들고 가꾸어 삶을 영위하여 왔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아온 터전은 육지만이 아니며, 더더욱 한반도라 불리는 터만은 아니었습니다. 소위 한반도와 만주일대, 그리고 바다와 대양 가운데 떠있는 탐라도 모두가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탐라왕국의 전성기에 이르러 탐라도의 섬에만 이르지 않고 육지의 진입 통로인 영산강 유역의 탐진(耽津; 지금의 강진)을 잇는 침미다례(浸彌多禮)와 둘러싸고 있는 넓은 바다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해상왕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 선조님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하물며 우리 종친들마저 처음 접한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배달국 후손의 나라로 탐라와 조선이 있었습니다. 한국사에서 말하는 삼국시대는 탐라·가야·고구려·백제·신라의 오국시대로 말하여야 당연합니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