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국민학교'는 아주 오래 전에 폐교되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하지만 과거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국민학교'는 확실히 일제의 잔재였다.
왜냐하면 그 명칭은 일제시대였던 1941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전엔 '소학교'와 '보통학교'라고 칭했다.
1941년부터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개명을 결정했던 1995년까지 계속 '국민학교'를 유지했다.
드디어 1996년 3월 1일부로 이름을 변경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란 명칭이 새롭게 등장했다.
늦었지만 현명한 조치였고 일제의 흔적을 지워 낸 산뜻한 출발이었다.
아무튼 나의 '초등학교'는 학생수 급감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안타깝고 가슴 아프지만 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벌써 20년도 넘었다.
다행스럽게도 '중학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내 모교는 1971년 3월에 개교했으니 벌써 50년이 넘었지만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폐교를 모면하고 있다.
1학년 13명, 2학교 10명, 3학년 12명, 전교생이 도합 35명 정도다.
슬프다.
여기에 교장을 비롯해 교직원이 총 16명이다.
학생 2명에 교직원 1명 꼴이다.
지난 주말에 사당에서 중학교 동문회 임원진 모임이 있었다.
신임 회장이 동문회 현황을 발표했고 24년도에 있을 각종 행사와 모교 지원방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폐교를 막기위해 나의 1년 후배인 '김영미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들, 동문들이 합심하여 자녀나 손주들을 모교에 입학시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금년도 입학 신입생은 16명이 되었다.
반가운 결과였다.
과거엔 한 반에 60-70명 정도가 와글거렸다.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 같았다.
그래도 시골학생들은 여건이나 환경에 상관 없이 늘 해맑고 순수하게 잘 자랐다.
남녀공학이었는데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남자애들은 공부보다는 들로 산으로 나가서 놀기 바빴다.
말썽꾸러기에 개구장이들이었다.
70년대 중,후반 우리가 중학생이었을 적엔 엄청 넓어 보였던 운동장이 지금 보면 마치 작은 손바닥 같다.
분명 같은 면적이겠지만 내가 살아온 세월 만큼이나 세상을 대하는 인식과 기준이 소싯적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는 얘기일 게다.
몇 동의 건물과 교정도 이제는 귀엽다 못해 그렇게 앙증맞을 수가 없다.
도도하게 흐르는 세태를 어찌 거스를 수 있겠는가.
결혼에 대한 생각도, 출산이나 양육에 대한 입장도 우리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요즘 MZ 세대들이다.
그들이 처한 환경과 시대의 상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힘겹고 치열한 세대다.
그래서 왕왕 짠하고 안스럽다.
아무튼 세상이 어찌 흘러가든 우리 동문들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치기로 했다.
과거 숱한 세월 동안에도 그리 했었지만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시간도 많고,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으니 더 큰 밑그림을 그리자고 했다.
반가운 일이며 바람직한 생각이다.
동향, 동문 그리고 모교.
이런 단어들엔 필설로 딱히 설명하기 힘든 '애틋함의 피'가 흐른다.
간절함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여름 내 무성했던 잎사귀들을 모두 떨궈낸 채 나목으로 추운 겨울을 나고 있는 고향의 팽나무 같다.
'대한'도 지났으니 곧 '입춘'이다.
계절의 변이도 변이지만 동문 선후배들의 온기와 합심으로 말미암아 거목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다시 연둣빛 새순들이 예쁘게 돋아날 것이다.
온갖 새들과 바람과 햇볕과 별들이 그 무성한 팽나무의 수많은 가지들 사이 사이에 실팍한 보금자리를 틀 것으로 믿는다.
사람 사는 세상.
역시 사람만이 최후의 자산이고 우리의 미래다.
마음이 따뜻하고, 동참과 헌신에 진심인 중학교 동문 선후배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갑진년 내내 건승하시고 평안하시길 빈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베우며.
첫댓글 모교에 대한 동문들의 사랑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응원합니다.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