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9 / 연못 가의 병든 사람들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 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소원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1.2절) 얼마 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근처에 기둥 다섯 개가 있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멀리 흩어져 열심히 살고 있던 형제, 자매, 친척들이 고향에 모여 부모님을 찾아뵙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장면이 가장 떠오를 것입니다.
설날이 되면 서로 덕담을 나누며 복을 빌어주고 즐거운 놀이를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한복을 곱게 입고 부리나케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며 세뱃돈을 받습니다.
유대인에게도 이처럼 명절이 돌아왔습니다.
유대인의 삼대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그들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말씀을 듣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며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명절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명절은 그야말로 주님을 위한 축제였습니다. 명절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 되어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또한 제자들과 즐거운 명절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어디로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명절에 성전으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데스다라는 하는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는 다섯 개의 정자가 있었었고, 다섯 개의 정자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많은 병자가 모여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명절에 이곳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그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의 선택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요 5:3) 이곳에는 병약한 사람, 앞 못 보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명절에도 병으로 인해 성전에조차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초라하였습니다.
실패자와 패배자라는 인식으로 소원마저 희미해진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것보다 여기서 뼈를 묻으며 죽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병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사회와 유사함을 느낍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류 역사상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잘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현재 육체적, 정신적, 또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였지만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묻지마 살인, 존속 범죄, 아동 성폭행, 성폭력, 사이버 테러 등 지금도 수많은 범죄와 사고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눈부신 문명의 혜택으로 인하여 어쩌면 모든 사람들 각자의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살아야 하는데 허무, 불평, 무의미, 원망, 부정적인 생각 등 영적인 병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좀 가난하기는 했어도, 인정이 넘치고, 예의와 염치를 아는, 평화로운 예전 시절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각자의 고질병을 안고 씨름하며 살아가는 고단하고 병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리하여 사람들은 가장 빨리 물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로서로 끊임없는 경쟁을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너를 이겨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돈이 삶의 의미이자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의 능력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외모, 학력,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남성 키 180 이하면 루저 (loser, 실패자)취급을 받는 세상입니다.
학력이 낮으면 또한 지방대를 나오면 패배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경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입시경쟁, 취직 경쟁, 승진 경쟁 심지어 외모 경쟁까지 삶의 모든 게 경쟁의 연속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예측불허의 사회입니다. 아쉽게도 천사는 병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매일매일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병자들에게 날짜를 알려주고 내려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고 없이 내려왔습니다. 예측불허인 상황에 병자들은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화장실을 가도 가는 게 아니요.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요. 밥을 먹어도 먹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하면서도 로또를 기대하듯 대박을 기대합니다.
(요 5:5) 거기에 38년 동안, 병을 앓아온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요 5:6) 예수님께서는 그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가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왜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첫째, 예수님을 통해 그에게 낫고자 하는 강한 소원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물이 움직일 때 물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으나 혼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관계로 항상 남에게 기회를 빼앗기는 안타까운 삶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도와주는 자도 물로 인도해 주는 자도 없었습니다. 무려 38년 동안 실패자로 살았습니다. 38년이면 강산이 거의 네 번 바뀔 정도로 엄청 오랜 시간입니다.
둘째, 예수님께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38년 병자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난입니까? 아님 진심이었습니까? 38년 동안 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병자에게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장난을 치기엔 이 병자의 인생이 얼마나 불쌍하고 초라하였습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병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관심사인 자신의 병의 치유를 바라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런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이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분만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만이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병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살다 보면 38년 병자와 같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앞이 컴컴한 어두운 통로를 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면 그 어두운 통로 속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앞을 향해 전진해야 하는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헛걸음질만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온갖 각종 복잡한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자는 문제, 공부하는 문제, 교통사고 화재 사고 가뭄 홍수 등 천재지변, 낳고 살고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 온통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땐 정말 앞이 캄캄하고 절망스럽습니다. 평생 패배자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누가계십니까? 주변에 누가 보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태 8:17)” 아멘.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내세적으로 해석하시는 분이 아니라, 문제를 직접 해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 책임자. 문제의 해결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만 아뢰지 말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그분께 맡겨서 우리의 미래가 꿈과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언제나 소원과 소망이 가득 차야 합니다. 아멘
(요 5:7)병든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제가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저보다 앞서서 물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의 물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병자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그는 원망과 절망으로 일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물속으로 먼저 들어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병이 나을 줄 알았으므로 자신을 부축해서 못 속으로 넣어 줄 자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천사가 간혹 내려와 베데스다 호수의 물을 요동치게 함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그 물속에 넣어 줄 자가 없다고 원망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원망과 불평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먼저 물속에 들어가 버린다고 절망을 토해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패배하고 깊은 패배주의에 물들었습니다.
그 못가에는 다섯 행각이 있었고, 그 행각 안에는 절름발이, 혈기마른 자, 맹인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가 정확하게 무슨 질병에 걸렸으며 몇 년 동안 그런 기회가 자신의 것이 되기를 기다려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기회를 상실하고 말것이라는 것입니다. 낫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못 속에 제일 먼저 넣어 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낫고 싶으면 YES 아니면 NO 라고 답해야 하는데 그는 답변 대신 오로지 주변 환경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의 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병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약한 존재인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진실로 필요한 예수님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데스다 연못 같은 다른 곳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의 말만 듣고, 소문만 듣고 예수님을 외면하며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경험을 중시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해결책은 바로 우리 앞에 계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도 위대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정말 승리한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요 5:8)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 (9) 그 즉시, 그 남자는 병이 나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그 병자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이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관자임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병자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이 들리자 그 병자는 즉시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한 말씀이 한 사람을 살립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병의 치료입니까? 그렇다면 왜 그곳에 있는 모든 병자를 치료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병 치료가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도 치료하실 수 있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분을 믿으면 루저(loser, 실패자)에서 위너(winner, 승리자)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진정한 베데스다 되신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