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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고전 7:10-24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고전 7:10-24 / 이제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충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11) 그러나 만일 남편과 헤어졌다면 그대로 혼자 지내든지 아니면 남편에게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 12) 여기서 나는 주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은 아니지만 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것을 몇 가지 덧붙여 말하겠습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아내와 살고 있을 때 그 아내가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한 그 아내를 쫓아 보내거나 이혼해서는 안됩니다. 13) 또 어떤 그리스도인 부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남편과 살고 있을 때 남편이 함께 살기를 원하는 한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14) 그리스도인이 아닌 남편이 그리스도인 아내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이 될지도 모르며, 또 그리스도인이 아닌 아내가 그리스도인 남편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가족이 뿔뿔이 헤어진다면 그 자녀들마저 주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맙니다. 가족이 한마음으로 뭉쳐 있다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자녀들도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15)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이 아닌 남편이나 아내가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헤어지도록 하십시오.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인인 남편이나 아내는 상대방을 억지로 붙들어 앉힐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16) 결국 그 아내가 그대로 같이 지낸다고 해서 남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보장이 없고 마찬가지로 그 남편이 그대로 같이 지낸다고 해서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17)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는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따르십시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세운 원칙입니다. 18)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미 유대고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그 일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이제 와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19)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중요한 점입니다. 20) 사람은 각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 살아가십시오. 21) 당신이 노예로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염려가 됩니까? 그러나 만일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자유인이 되십시오. 22) 만일 당신이 노예의 신분일 때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서운 죄의 세력에서 당신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자유인으로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면 지금 당신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3)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산 몸이므로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세상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24)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인이 되던 당시의 처지가 어떠하였든 부름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미혼자와 과부의 결혼에 대해 권면한 사도 바울은 결혼한 사람들의 이혼 문제를 다룹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를 다룬 원리를 크게 적용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삶을 언급합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10-11)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인끼리 결혼한 경우의 이혼 문제를 다룹니다. 앞의 조언(1-9)은 권면이었으나, 이 조언은 순종으로 따라야 하는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성도의 이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9:4-9; 막 10:9; 눅 16:18). 그리스도인끼리 한 결혼이라 해도 파국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성도의 이혼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매우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이혼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것을 금하셨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12-16) 다음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이혼 문제를 다룹니다. 신앙이 없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할 때는 이혼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인 남편과 아내를 통해 신앙이 없는 배우자가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앙이 없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을 때는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화평 중에 신중히 진행해야 합니다. 아직 이 관계 안에는 신앙이 없는 배우자를 구원할 가능성이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혼조차도 하나님이 성도에게 원하시는 삶의 가치인 거룩함의 추구여야 합니다.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24) 바울은 결혼과 이혼 문제를 다루던 영적 원리를 더 크게 적용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공동체와 고린도 시를 지탱하던 중요한 2가지 제도는 각각 할례와 노예제도였습니다. 이 2가지 제도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어 차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목과 하나 됨을 깨뜨린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일상에 들어와 있는 이 죄의 구조를 인식하고, 이에 맞서는 일이 성도의 삶이라 말합니다. 맞서는 방법은 개혁이나 혁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대로 지내는 일입니다(17, 20, 24). 성도가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 세우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됩니다. 그것이 참된 개혁과 혁명입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부르신 그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재능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신 것에 우리가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할 때 나의 숨어있는 재능은 나타나고 사용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나를 특별한 자로 여기신다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천국의 기쁨이며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으뜸이 되는 축복
고전 7:20-24 / 지용수목사
자유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들을 돌아보니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방송으로 늘 제 설교를 들으신다는 시각 장애자 한 분이 오늘 우리 교회에 오셔서 3부 예배를 드리고 가셨습니다. 먼 곳에서 사시지만 어떤 분의 도움을 받아 일부러 오셨답니다. 방송을 통해 말씀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며 제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싶었지만 손을 내밀어도 보지 못하실 것 같아 그분의 영혼을 위해 축복 기도만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눈을 뜨고 보고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지금도 구치소나 교도소에 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모두가 꼭 죄를 지어서만 들어간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억울하게 들어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아랫사람이 저질러 놓은 일을 책임지고 들어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담요 한 장을 갖고 찬 마루바닥에서 사는 그분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수용소 생활은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감옥보다 더 힘드는 곳이 수용소입니다. 감옥에서는 때를 따라 음식도 주고 사람 대접도 해줍니다. 스위스의 교도소는 음식도 아주 좋고 방마다 텔레비전과 전화도 있고 용돈도 50만 원씩 나온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 700불씩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교도소에서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러나 수용소에는 세수할 물도 없습니다. 수용소에서는 양식도 주다말다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어가는지 모릅니다.
독일의 한 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서 실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수용소에서 3년간이나 버티다가 자유롭게 나온 한 크리스천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년도 못 되어 죽는 그 수용소에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여성도가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종합 비타민 한 병을 구해서 몰래 갖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종합 비타민 큰 병을 하나, 어디에 숨겨 갔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숨겨 가지고 갔답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비타민이 생각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하며 숨겨 가지고 가서 매일 한 알씩 먹었답니다.
때때로 먹지 못하고 굶어서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그 때에도 종합 비타민을 한 알씩 복용한 그는 건강하게 버티다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수용소는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더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옛날의 사람들보다 더 힘겨운 생존경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농사를 지으며 살 때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피가 마르도록 경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 굴지 기업의 창업주는 모든 사원들에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라고 교육했습니다. 그러나 그 창업주의 대를 이어 회장이 된 그 아들은 “돌다리 아닌 나무다리라도 두드려 보지 말고 그냥 건너라.”라고 교육합니다.
왜입니까? ‘건너가도 될까?’ 하고 점검하는 시간에 다른 회사에서 새 브랜드를 내놓으면 자기 회사가 퇴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쟁하듯 사니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유치원생 때부터 유치원에 갔다 와서 미술학원에 가고, 태권도 학원에 가고…. 그렇게 다니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요즘에는 7세 아이가 요리 학원에도 간답니다. 제가 아내랑 살아보니 요리 학원에 가는 것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피아노 학원이다, 미술 학원이다, 요리 학원이다, 피아노 학원이다… 그 스트레스가 한이 없습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이 험한 세상에 왜 태어났니?’
이런 노래를 부를 만한 세상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성적 싸움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도, 고등학교에 들어가도 성적 싸움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해도 취직이 잘 안 되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시간이 없어 데이트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결혼할 때가 되어도 상대가 없어 결혼하지 못하니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세상입니까?
잘 생긴 제 큰아들이 공부만 하다보니 여자를 사귈 시간이 없어서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습니다. 고등고시에 합격하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고시에 합격해도 해야 될 공부가 또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있고, 결혼도 해야 되고, 산 넘어 산 강 건너 강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그 스트레스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30에도 지치고 병들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요즘 40대에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이 시간에도 정신 없이 막 뛰어올라왔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지금까지 교회에 있었는데도 이렇게 바쁩니다. 그러니 때로는 ‘천국에 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이 힘들고 어려워도, 때로는 수용소 생활처럼 힘들어도 그 힘든 수용소에서도 비타민을 먹으면 사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먹으면 우리는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을 살다 보면 맥이 빠지고 지칠 때가 있지만, 교회에 와서 말씀을 먹으면 힘이 납니다.
말씀은 힘입니다. 에너지입니다. 해독제입니다.
우리 모두 죄를 짓고 실수해서 괴로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목회를 하는 목사인 저도 후회할 때가 있고 아픈 일로 괴로워할 때가 있는데, 여러분은 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덮어 주시고 새롭게 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고맙습니까?
수용소에서도 종합 비타민을 먹으면 버틸 수 있는 것처럼 회사 생활이, 부부 생활이, 이웃과의 인간 관계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말씀을 먹으면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감사함으로 말씀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신분이란 것이 있습니다. 신분은 무서운 것입니다. 사장님의 아들하고 사원의 아들은 그 격차가 큽니다. 아무리 잘 생기고 실력이 있는 청년이라도 일등병은 한 번 보고 나면 두 번 볼 생각이 전혀 없는 참으로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라도 그가 대위이면 그에게 경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검찰청이나 법원에 가 보세요. 아들 같은 새파란 젊은이들에게 아버지 같은 분들이,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이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시에 합격하여 새파란 나이에 검사가 되고 판사가 되니 직원들이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신분의 격차는 무서운 것입니다.
같은 회의라도 대통령이 주도하면 장관들이 얼마나 조심하는지 모릅니다.
평등한 민주 사회에 살아도 이렇게 신분의 차이가 있는데, 바울 시대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 당시 신분은 주인과 종으로 분류되었는데, 주인과 종(노예)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격차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귀족 중의 귀족이었고 종은 물건과 같았습니다. 지금은 주인이 싫으면 내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지만 그 당시 종은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 매여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마음대로 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20년 전 제가 본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의자에 앉아서는 네 살 먹은 아이, 종의 아들의 배 위에 발을 얹어놓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했습니다. 주인이 편한 자세를 취하려고 종의 아들을 땅에 눕혀 놓고 그 아이의 배 위에 자기 발을 얹은 것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라 하지만,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배 위에 어떻게 발을 얹는단 말입니까?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종이라, 노예라 그런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래도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지금도 아버지가 판사이면 그 아들이 저절로 판사가 됩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아버지가 판사가 아니면 판사가 될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판사라야 아들이 판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더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주인이고, 노예의 아들은 노예였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주인도 예수님을 믿고 종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가니 주인과 종의 격이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종이나 주인이나 예수님을 믿으면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13)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의 뜻으로, 사회적 신분으로 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으십니다. 주인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는 주인과 한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함께 식사도 할 수 없고 주인을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하인이 교회에서는 주인과 똑같은 자리에 앉습니다. 교회의 자리는 임자가 따로 없고 늦게 오면 뒤에 앉아야 합니다. 성찬식을 할 때도 주인이나 하인이나 똑같은 떡을 먹습니다. 주인에게는 고급 떡을 주고 하인에게는 보리떡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나 하인이나 똑같은 떡을 먹고 똑같은 포도주를 마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자유자는 주인입니다.
교회에 오면 신분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교회에서는 주인과 종이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 다시 그 격차가 하늘과 땅입니다. 그러니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주인들에게 갈등이 있습니다.
‘저 종이 나랑 같은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니….’
또 종이 집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어 앞에서 기도하는데 주인은 새신자라 뒤에 앉아 있는 것도 갈등입니다.
이러한 갈등에 대해 바울이 성령으로 분명하게 선을 그어줍니다.
“형제들아,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부르심은 사람의 부름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말씀하십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부르심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자녀로 삼으시고 십자가의 피로 씻어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천국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종으로 부름 받았으면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집에 가서 종으로서 주인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교회에서 같은 교인이라고 집에 가서도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주인이 종을 교회에 보내려 하겠습니까? 그러니 집에 가면 오히려 주님께 하듯 주인을 더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으로 부름 받았으면 주인으로서 종을 조심해서 대하라고 하십니다.
에베소서 6장 9절에 말씀하십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이는 ‘네가 지금은 주인이라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지만, 네 위에도 하늘의 상전 하나님께서 계심을 알고 조심해서 종들을 대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장 8절에는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주인이나 종이나 행한 대로 받을 것이니 조심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종으로 부름 받았으면 종으로서 주인을 잘 섬기고 주인으로 부름 받았으면 하나님 앞에서 종을 잘 보살피며 교회 생활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에게는 자유할 기회가 있으면 차라리 자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악랄한 주인은 그렇지 않지만 선량한 주인은 대개 노예에게 ‘아침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 일과 저 일을 하라.’하며 일과를 주고 그 일이 끝나면 쉬게 합니다. 그러면 노예는 쉬는 시간에 다른 집에 가서 일을 해 주고 몇 푼씩 받습니다. 말하자면 부업,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입니다. 선량한 주인은 자기 노예가 그렇게 부업을 하는 것을 알지만 눈감아 줍니다. 노예가 그렇게 일해서 번 돈이 때가 되어 큰돈이 되면 그것을 신전으로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보고하고 바칩니다. 그러면 자유하게 되는데,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더 귀한 진리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설혹 돈이 없어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해도 사람의 종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예로 상전을 섬길 때도 주님의 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나는 노예고 저 사람은 상전’이니 그냥 섬겼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으니 상전의 명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명대로 ‘그래, 주님께서 상전을 주님께 하듯 하라고 했으니 내가 주님을 모시듯 상전을 모셔야지.’하며 모시니,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어 보람과 기쁨이 있고 스트레스가 없는 것입니다. 집을 청소할 때도 주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하니 집이 더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닿는 곳은 빗자루를 잡아도 아름답게 됩니다. 하나님께 닿으면 돌멩이도 금처럼 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하나님과 관계되면 갚진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이 주인을 섬길 때도 하나님의 일로 섬기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공부를 엄청 좋아했습니다. 제 취미가 방콕입니다. 한 달간 방에 박혀 있어도 기쁘고 좋습니다. 어릴 때도 방에 꼭 박혀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학교에 갔다오면 가끔 저의 숙부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용수야, 일 좀 도와 주라.”
“공부해야 되는데요.”
“그래도 타작하는 것 좀 도와 주라.”
숙부님께서 초등학교 5학년인 제게 도리깨질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없고 바쁜데 숙부님께서 일을 시키시니 스트레스가 되었지만 저는 ‘이것은 타작이 아니고 운동이다. 내 건강을 위해서 하는 운동이다.’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하나! 둘! 셋!…’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들에 나가 흙을 파는 일 같은 것도 가끔 했는데 그 때도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운동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래서 지금도 제가 이렇게 건강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네게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가 주어라.”
무슨 말씀입니까?
로마 병정이 짐을 갖고 가다가 유대인을 만나면 창 끝으로 가리킵니다.
“이 짐을 갖고 가!”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 병정이 짐을 갖고 가다가 식민지 백성 중 누구를 창 끝으로 가리키면 지적 당한 그 사람은 누구든지 그 짐을 지고 5리를 가야만 했습니다. 짐을 지고 5리를 가는 동안 그 가슴 속에 약소국민의 아픔, 분함, 억울함이 부글부글 막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5리만 가지 말고 10리를 가주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되어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길 때는 스트레스가 되지만 주인 뒤에 계신 주님을 섬기면 스트레스가 되지 않고 기쁨이 되니 그렇게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인들도 종 뒤에 주님께서 계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종 관계라도 그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주인도 복되고 종도 복될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자동차를 타고 두 시간 반 정도 달리면 아름다운 교회가 있습니다.
그 마을에 큰 농장을 경영하는 대지주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많은 머슴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머슴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머슴이 얼마나 성실한지, 감동을 받은 주인이 그를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얼마 후 머슴은 장로님이 되고 주인은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주인이 머슴에게 “장로님. 장로님.”하고 깍듯이 장로님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면 장로님이 머슴이 되어 집사님인 주인을 섬기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을 받은 주인이 머슴에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신학대학까지 보내어 목사님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교회를 지어 그 머슴을 목사님으로 모시고 교회를 섬겼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주인도 종도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면 그런 아름다운 결과가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 더 큰 교훈을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주인과 종, 상전과 하인은 엄청난 격이 있어서 아무래도 종보다는 상전이, 천민보다는 귀족이 복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24절에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가장 으뜸이 되고 최고가 되는 복은 상전이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자유자가 되고 종이 주인이 되는 것도 보통 복이 아니라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그것은 찰나적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종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는 주인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종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주인인 보디발이 복이 있습니까? 그 집의 종 요셉이 복이 있습니까? 보디발은 주인이고 요셉은 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요셉이 더 복 있습니다.
라반은 주인이고 야곱은 그 집의 머슴이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여러분, ‘바위고개’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하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머슴살이가 얼마나 서러우면 그런 노래가 있었겠습니까? 십 년간 머슴살이를 해도 서러운데 야곱은 20년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래도 야곱이 복이 있고 라반이 복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평민이고 아비멜렉은 왕이었지만 아비멜렉보다 이삭이 복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복은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땅에서도 에녹처럼 기쁘고 도움을 받으며 살고, 죽으면 천국에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세상에서도 외롭고 고달프고, 죽어서도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할렐루야!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만 누리는 복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으뜸이 되는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든든하고 좋고 또 하는 일도 잘 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제게는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셨네.’하고 감격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지만 언제나 활동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도록 우리가 해 드려야 활동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일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할 때 일하십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손을 펴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늘 일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있는 곳에서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께서 일하시면 모든 것이 잘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7, 8년 전 우리 교회의 어떤 분이 제가 생각하기에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을 자꾸 만났습니다. 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성공할 사람, 성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야 나도 성공하게 됩니다. 은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야 나도 은혜를 받습니다. 망한 사람, 망할 사람을 만나면 나도 망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미움 받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미운 오리 새끼가 됩니다. 사람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이 이웃 교회의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을 자꾸 만나더니 함께 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을 보기 전에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를 보기 전에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일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업을 할 때도 교회 수첩에 올리기 어려운 사업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목사님께 말하기 어려운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밥 먹고삽니다. 교회에 걱정을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수첩에 나와 있는 사업장이나 가게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도와 주어야 합니다. 조금 비싸도 될 수 있으면 교인 집에 가서 물건을 사고, 또 파는 사람은 알아서 잘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물건을 살 때 꼭 우리 교인들에게 가서 반드시 돈을 주고 삽니다.
한 번은 어느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가격을 물으니 7만 원이라고 해서 7만 원을 주었습니다. 주인이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제가 그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값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른 가게에 가니 그 물건값이 2만 5천 원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디 사기 칠 데가 없어서 목사에게 사기를 칩니까? 그런 가게가 되겠습니까? 가게가 잘 안 된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짓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든 정직하고 떳떳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수첩에 나와 있는 가게를 보고 교인들이 찾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게 주인이 교인들을 찾아가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특히 다단계 판매 같은 것은 아주 나쁜 장사입니다. 몇 사람을 소개해 주면 얼마의 이익이 생긴다고 교인들을 파고 드는 것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그런 일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혹 누가 전화를 하거나 찾아와서 그런 일로 부담을 주거든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해치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안수 집사님이든지 장로님이든지 상관없이 직분을 뗄 것입니다.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피곤하게 하는 사람은 직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돕고 교인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이용해서 잘 된 사람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들어 복 주실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김대용이라는 분이 하던 일에 실패하고 너무 어렵게 살다가 혹 교회에 다니면 무슨 수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회에 와서 보니 교인들이 다 멀리서 살아 4km, 2km 길을 걸어다녔습니다. 그분은 그것이 불편해 보여 봉고차 한 대를 구해서 새벽과 밤에 교인들을 태워 주었습니다. 등록한 지 얼마 안 되는 새신자인데 그렇게 봉사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살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부산에서 치킨점을 하는 형님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아! 닭 도매. 치킨점에 닭을 판매하는 일을 하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친척에게 1200만 원을 빌려 닭 도매를 시작했는데, 지금 체인점이 전국에 450개나 있고 중국에도 있답니다. 그 회사가 바로 ‘주식회사 치킨나라’입니다. 여러분도 그 닭을 많이 드셨을 것입니다.
‘교회를 도와야지. 우리 교인들을 수송해 주어야지.’하는 그 아름다운 마음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교회를 위해 하는 일은 없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주여, 복을 주세요. 복을 주세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야, 피곤하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종을 울리면 주님께서도 우리의 종을 울려 주십니다.
다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성령님,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손들어 복을 내려 주시고 활동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손들어 복을 내려주시면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면 안 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분은 별것 아닙니다. 내가 회장이냐 말단 사원이냐 내가 판사냐 수위냐 하는 것이 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는 판사는 마지막에 망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는 병원 원장도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수위도 성공하고 말단 머슴도 성공합니다. 땅에서도 성공하고 하늘에서도 성공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평가
고전 7:18-19 / 지용수목사
'사람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 사람의 값은 도대체 얼마일까? 사람의 귀중함은 도대체 무엇일까?'하고 고민하던 어떤 사람이 한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서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사람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의 가치는 무엇과 같습니까?"
그 스승은 진귀한 보석 한 개를 그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시가지로 나가 이 가게 저 가게에 다니면서 이 보석의 가치를 물어보아라.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을 주겠다 해도 팔지는 말고 그대로 갖고 오너라."
그는 제일 처음 과일 가게로 갔습니다. 가게 주인은 그 보석을 오렌지 두 개와 바꾸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그는 감자 가게에 가서 보석을 보여 주었습니다. 감자 가게 주인은 보석 값으로 감자 네 근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대장장이 아저씨를 찾아갔더니 돈 몇 푼을 내놓으며 보석 대신 그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도시에서 가장 큰 보석 상회에 갔더니 보석 상회 주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 보석은 돈으로 값을 매기기 어려운 극히 귀한 보석입니다. 이렇게 진귀한 보석을 어디에서 구했습니까?"
보석 상회 주인은 보석을 보며 거듭 감탄했습니다.
그가 돌아와 시가지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하니 스승이 말했습니다.
"보석의 가치와 사람의 가치는 같은 것이다. 오렌지 두 개에 자기 자신을 파는 사람도 있고 감자 네 근에 자기를 파는 사람도 있고 돈 몇 푼에 자기를 파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귀히 여기는 것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보석의 가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보석을 귀하게 평가하듯이, 사람의 가치를 가장 잘 아는 분이 사람을 높이 평가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의 부모님이 나를 더 귀하게 평가해 주십니다. 그리고 내 아내보다 내가 나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내 부모님이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나를 더 높이 평가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원숭이나 소나 돼지처럼 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곰이나 바다의 고래나 길의 개처럼 우리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우리에게 프린트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도장 찍혀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하가 엄청나게 귀하지만 우리의 가치를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고 피를 쏟게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실 만큼 여러분과 제게 큰 가치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Spirit)을 떼어 우리에게 성령으로 주셨습니다.
보석은 보석을 아는 사람 앞에 가야 진가가 나타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은 사람을 지으시고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미완성 보석 같은 단계에 있습니다.
바다 속의 진주 돌도 갈리고 닦여야 진주 보석이 되고, 다이아몬드도 원석 그대로는 사랑 받는 보석이 되지 못하고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져야 오색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자꾸 다듬어져야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자꾸 다듬어져 찬란한 보석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 낮마다, 주일 밤마다, 삼일마다, 새벽마다, 또 어떤 성회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보석에 먼지가 끼고 오물이 묻듯 우리가 세상에서 죄를 짓고 실수하게 되는데 주님 전에 나올 때 그 죄와 실수를 주님의 피로 씻어주시고 닦아주십니다. 그리고 말씀의 정으로, 성령의 망치로 우리를 다듬으셔서 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5년 다닌 사람과 50년 다닌 사람의 가치가 다릅니다. 50년 다니면 더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말씀으로 여러분과 저를 더 아름답게 빚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하고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과 말씀으로 나를 다듬어 가시는 것을 느끼고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이 그런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받는 것으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그 아기의 생식기, 고추 끝 부분의 피부를 자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성경은 여자를 밭으로 비유하고, 남자를 생명의 씨, 뿌리는 씨로 비유합니다. 여자의 밭에 남자의 생명의 씨가 뿌려져 새 생명이 나오는 것이 출생입니다.
남자의 생식기 끝 표피를 자르면 피를 흘리게 되는데, 이는 그 남자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것이요, 그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고 헌신한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제도나 어떤 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0절에서 11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혹 돈을 주고 외국인을 사왔어도 그 외국인의 표피를 자르면 그 외국인도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국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원할 때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타국 백성이라도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할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이어졌는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무덤에서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간 계시다가 승천하시고, 승천하셔서 약속대로 성령을 부어주시니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니 예루살렘 사람들이 갑자기 삼천 명, 오천 명, 만 명, 수만 명씩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사탄이 발악하여 교회를 심히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고 감옥에 끌려가니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교인들이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졌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디에 가든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으니 그곳에 또 교회를 세우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여기 저기에서, 로마에서, 고린도에서, 갈라디아에서, 에베소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어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들도 십자가 보배 피로 죄 씻음 받고 성령으로 인침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상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아브라함 때부터 그 때까지 할례 받은 사람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것인데,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야단이니 뭐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들도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할례도 받아야 된다고 가르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할례가 유대인들에게는 Have to, 의당히 해야 되는 것이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난 지 8일 만에는 피부를 잘라도 아프지 않답니다. 신비롭게 사람의 탯줄은 잘라도 아프지 않습니다. 엄마랑 아기랑 이어진 탯줄을 가위로 잘라도 아기도 울지 않고 엄마도 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프지 않게 하셨습니다. 손톱과 발톱도 우리의 몸인데 잘라도 아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솜씨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만일 손톱을 자를 때마다 피가 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머리카락을 자를 때마다 피가 솟아나고 아프다면 누가 이발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신비롭게도 잘라야 될 것은 아프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어떻게 우연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신비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비롭게 창조하셔서 태어난 지 8일까지는 표피를 잘라도 아프지 않고 다리를 잘라도 아프지 않답니다. 그러니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면 마취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탯줄을 자를 때처럼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을 자를 때처럼 아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할례를 받으면 굉장히 고생하게 됩니다. 요즘 포경수술이 할례인데, 초등학생이 포경수술을 받아도 어그적 어그적거리며 얼마나 고생합니까? 마취를 하고 의사 선생님이 잘 꿰매어 주고 약도 먹지만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는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마취 주사가 있었습니까? 날카로운 칼이 있었습니까? 꿰매는 의술이 있었습니까? 항생제가 있었습니까?
그러니 날카로운 돌로 그냥 잘라내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34장에 보면, 세겜 성 사람들이 야곱 집안과 사돈을 맺으려고, 그 재산을 자기들이 다 차지하려고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습니다. 마취제도 없고 마이신도 없는데 할례를 받았으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들이 할례를 받고는 누워서 꼼짝 못합니다. 그럴 때 야곱의 자녀들이 가서 칼로 이삭을 자르듯 그들을 죽여도 그들은 누워서 그냥 죽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할례를 어떻게 받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은데 할례를 받으라니, 70, 80된 노인들에게 얼마나 장애가 됩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베드로와 바울, 야고보 등 사도들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할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는 것인데, 이제 성령의 인침으로 할례는 끝났다. 예수 십자가의 피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 받고 성령 받은 사람은 할례가 이루어진 것이다.' 할렐루야!
즉 할례는 세례와 성령 받음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수많은 소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예배드림으로 용서받았지만, 그 소와 양의 피는 예수님 피의 예표, 십자가의 예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소나 양의 피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가 피를 흘려도 가치가 없고, 일천 마리의 소를 잡고 일만 마리의 양을 잡아 피 흘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이제는 예수님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며 예배드리는 그 곳을 돌아보십니다.
양의 피, 소의 피는 예수님 십자가의 예표에 불과합니다.
안식일도 원래는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토요일은 주일의 예표일 뿐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심으로 이제 토요일은 안식일의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주일이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토요일에 모여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일 예배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안식일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할례는 예수님의 세례와 성령의 인침의 하나의 예표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장 13절에도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할례로 인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치십니다.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 야고보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할례와 상관없이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들을 하나님을 백성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외칩니다.
"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다. 할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느냐? 무 할례자가 되려고 다시 외과 수술을 받아 할례 받지 아니한 것처럼 할 필요도 없고 할례 받지 않고 예수님을 믿었느냐? 할례 받을 필요도 없다. 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nothing),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여러분, 이 정통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렇게 결정하고 사도들이 그대로 가르쳤는데, 거짓 교사들이, 유대인들이 곳곳에 다니며 "그래도 구약의 가르침대로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어지럽혔습니다.
고린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 아무것도 아니라고 외친 것입니다. 화폐 개혁을 하면 옛날 돈은 종이쪽에 불과하고 새 돈만 돈인 것처럼 할례는 필요 없게 되었고 성령의 인침이 진짜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 생활을 잘 하려면 교회 중심, 강단 중심에서 말씀을 받아야 됩니다.
마태복음 24장 23절에서 26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무슨 말씀입니까?
말세가 되면 '여기 저기에 이적이 있다네. 기적이 있다네. 뭐가 있다네.' 라고 하지만 그런 데 가지 말고 교회 중심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중합니다.
고린도 교회 강단에서 복음이 전해졌지만,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래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하고 수군수군하니 바울이 다시 편지를 쓴 것입니다.
'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가지고 평가하신다.' 할렐루야!
Keeping God's commands is what counts. 하나님께서 계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과 저를 평가하시는 기준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쓰는가를 보십니다. 그것을 보시고 채점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며칠 전에 수능고사를 보았는데, 아이들을 보고 채점하지 않고 답안을 보고 채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답안을 보시는데, 우리의 생활,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얼마나 살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답안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생활 답안이 하나님 앞에 만점이 되는 좋은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우리를 평가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하나님 백성인 것을 세상에 증거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제가 마음으로 김영숙이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냥 있었으면 김영숙이 박용수에게 시집갔을 것입니다. 제가 마음으로 김영숙을 사랑한 것을 입으로 "I love you Kim Young Sook."하니 김영숙이도 "Me, too." 해서 결혼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해도 입으로 고백해야 사랑의 꽃이 피지, 고백하지 않으면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다고 말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도 받지 않고 입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듯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믿는 것을 우리의 생활로도 나타내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임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술좌석에서도 "아, 미안해요. 저는 크리스천이에요."하고 거절해야 그 자리에 예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담배 한 대 피우세요."라는 말을 들어도 "저는 크리스천이라 담배를 피지 않습니다."라고 해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생활이 달라야 '저 사람은 크리스천이구나.'하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family)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6절에서 5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한참 설교하시는데 한 사람이 와서 설교를 방해하며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선생님을 뵙자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화를 조금 내십니다. 설교를 방해하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십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화가 납니다. 설교 시간에 눈을 감고 조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설교 시간에 딴짓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가 납니다. 열 다섯 시간 스무 시간씩 준비한 말씀을 정성을 다해 전하는데, 기도해서 준비한 말씀을 정성을 다해 쏟는데 대수롭지 않게 받는 사람이 있으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사람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화내십니다. P도시의 어떤 교회에 예배 시간마다 떠드는 아기가 있어 그 아기 엄마에게 아기를 유아실로 데리고 가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아기 엄마는 고집을 부리며 언제나 아기와 함께 본당에 있었는데 예배 시간에 아기가 뛰어다녀도 그냥 두었답니다. 오히려 아기가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바라보았답니다. 거기에 더하여 어느 날에는 방울 신까지 사서 신겼답니다. 설교 시간에 방울 소리가 방울 방울 방울 방울 방울 방울…. 그 며칠 뒤, 그 아기가 젤리를 먹다가 목이 막혀 죽었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여기서 멀지 않는 곳의 한 교회 장로님은 성가대 찬양이 끝나면 손톱 깎기를 꺼내어 손톱을 깎았답니다. 설교가 시작되기만 하면 '똑 똑 똑'하고 손톱을 깎으니 목사님이 얼마나 신경 쓰였겠습니까? 8년 간이나 그렇게 깎았답니다. 어디 손톱 깎을 장소가 없어서 설교 시간에 손톱을 깎는단 말입니까? 그런데 결국 그 장로님이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명예도 초라하게 되고 자녀들도 초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손톱 깎는 사람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누가 손톱을 깎으면 그냥 두지 않습니다. 손톱 깎기를 압수하고 그래도 계속 깎으면 그 사람을 추방할 것입니다. 밧줄로 묶어서라도, 전쟁을 해서라도 쫓아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참 설교를 하시는데 한 사람이 와서 방해하니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들이냐?(Who is my mother, and who are my brother?)"
제자들을 가리키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때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마리아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왜입니까? 마리아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우리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신, 마리아 사위일체 하나님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를 찬양하고 마리아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마리아를 우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찾아보세요. 어디에도 어머니라 부른 곳이 없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자여'라는 말이 무시하는 말은 아니고 존경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으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낳아 기른 어머니라도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면 누구든지 주님의 가족(family)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언제 어디서나 말씀에 순종해서 '나는 하나님의 가족이다.'하는 것을 증거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생활만 보고도 세상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이네. 예수의 사람이네' 하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whoever has my commands and obeys them, he is the one who loves me.(내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지킬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에는 약속이 있어서 말씀을 읽고 순종할 때 희망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한 절 한 절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며 순종할 때, 월셋방에 살든 창고에 살든 어디에 살든 희망차게 소망차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카네기 자서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큰 감명을 받은 책이 아마 카네기 자서전일 것입니다.
카네기는 빈민가의 아들, 아주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셔츠가 하나 뿐이어서 잠잘 때 그의 어머니가 그것을 빨아 놓으면 아침에 그것을 입고 나갔습니다. 날마다 배가 고파 빵이 생기면 서로 많이 먹으려고 형제들이 다투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빨래도 하고 식당 종업원으로도 일했지만 얼마나 가난했던지, 그는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자 그는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끝내자. 아무리 애써도 안 되니 끝내자.'
정말 너무 힘들면 세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써도 결과가 좋지 않거나 너무 힘들면 끝내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견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끝낼 생각을 갖고 있던 카네기가 하루는 어떤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쓸쓸한 그림입니다. 썰물로 물이 다 빠져나간 모래사장에 나룻배 한 척이 걸려 있습니다. 거기에 노 하나가 척 걸려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 배는 초라한 배, 망한 배일뿐입니다. 배는 물 위에 있어야 하는데 모래에 걸려 있으니 아무 쓸모 없는 배입니다. 이제 그 배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그림 아래에 화가가 쓴 글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밀물이 밀려오리라. 그때 나는 바다로 나아가리라.'
그때 카네기가 깨달았습니다.
'옳구나! 오늘의 나는 모래 위에 걸려 있는 나룻배 같은 신세지만, 내 인생에도 밀물이 올 때가 있겠구나. 그때는 나도 축복의 바다로 나아가리라.'
그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20세기 랭킹 2위의 재벌이 되었습니다. 랭킹 1위 재벌인 록펠러 다음의 재벌 카네기가 되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도 '나야말로 모래 위에 척 걸린 나룻배 같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때가 되면 여러분에게도 축복의 밀물이 반드시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유행가를 부르지 않기로 결심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택시를 타도 비행기를 타도 귀에 들리는 것은 유행가뿐인데 제 머리가 나쁘지 않으니 아는 유행가가 몇 개는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제일 잘 아는 노래가 '쨍 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얼마나 시원한 노래입니까? 유행가라도 이런 노래는 부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희망을 갖고 살면 삶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갖추어 놓고 살아도 희망이 없으면 삶에 생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자리에서도 희망이 있으면 신바람 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약속이, 꿈이 신바람 나게 하는 것입니다.
코넬 헤럴드 산도스 씨는 63세에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니 몸에도 병이 왔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학력은 국졸이고 나이는 63세나 되었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병원 침대에 누워 '내 인생은 이제 여기서 접게 되는구나.'하며 낙심해 있는데 기쁨이 가득한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쪽 다리가 없어 나무 다리를 하고 있는 청소부 아저씨가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산도스 씨는 청소부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다리도 없는 사람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기쁘게 찬송을 부르고 있소?"
"어허, 모르시는 말씀. 이 세상은 참 세상이 아니오. 내가 사는 이 집도 참 내 집이 아니오. 내일 모레 가게 될 그 천국, 그 세계가 나의 참 세계이고 거기에 나의 참 집이 있는데 내가 왜 기뻐하지 않겠소? 이 세상에서 잠시 고생하고 나면 아름다운 천국에 가서 살게 되는데 내가 왜 기뻐하지 않겠소?"
청소부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산도스 씨가 교회에 나갔습니다.
'다리가 없는 사람도 저렇게 기쁘게 사는데 나는 다리도 있잖아.'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저는 이제 무엇을 할까요?'하고 기도하는데 수많은 닭이 파다다다닥 하고 날아가는 환상이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닭이 그렇게 나타난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하며 계속 기도하다가 '닭을 튀겨서 팔아라. 너는 그것을 잘 할 수 있지 않니?'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닭을 튀겨서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선전하며 자꾸 팔았더니 나중에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 지금은 세계 82개국에 체인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회사가 바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회사를 세우는 분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마땅한 일이 없으면 기도하고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면 병원에서도 길이 열리게 됩니다.
희망을 가지면 감옥에서도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면 이혼했어도 다시 출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면 대학에 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면 월셋방에서 살아도 다시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고 실천하면 언제나 희망차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능력이 흐릅니다.
"모세야, 네 손으로 홍해를 가리켜라!" 순종하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것은 모세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흐른 것입니다.
"여호수아야, 여리고를 돌아라." 여리고를 도니 철벽 성 여리고가 와르르르르르 무너졌습니다. 여리고가 무너진 것은 여호수아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여러분 가정에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게 됩니다. 여러분 사업장에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게 됩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자기 철학으로, 자기 노력으로, 자기 아이디어로 목회하면 갈팡질팡하게 되고 힘들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면 하나님의 능력이 목회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지 마시고 순종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에 축복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바로 축복입니다. 말씀 equal 축복입니다.
"베드로야, 그물을 깊은 데 던져라." 순종하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부도나지 않습니다. 그대로 하면 다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제가 호주 시드니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일생 기억할 만한 사랑과 대접을 받았습니다. 목사는 대접을 많이 받으니 괴롭습니다. 대접받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지런히 대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대접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호주 시드니에서 저와 제 아내가 정말 큰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혹 그분에게 누가 될까봐 그것을 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어느 책에 그분의 간증이 나와 있어서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997년, 그분이 25세의 나이로 이란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이란 국방부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죽게 되었답니다. 남의 땅, 남의 나라에서 일하다 죽게 되자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여러분, 죽게 될 지경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별 사람 없습니다. 살 만하면 까불고 죽게 되어야 하나님 앞에 손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살 만할 때 하나님 앞에 손드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분도 남의 나라 땅에서 죽게 되자 "하나님, 살려만 주시면 예수님만 위해 예수님만 위해 살겠습니다. 살려 주세요."하고 하나님만 찾았더니 살게 되었답니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그분은 호주에 가기를 원했지만, 호주에서 우리 나라 사람에게는 비자를 내주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그분은 날마다 호주 대사관에 가서 대사관 대문의 문고리를 잡고 기도했답니다. 3개월간 문고리를 잡고 기도하는 그분을 대사관의 보초병이 딱하게 여겨 호주 영사에게 보고를 했답니다. 영사가 그분을 만나 비자를 내주었답니다. 그분은 돈 500불과 가방 두 개를 들고 호주로 가서 "하나님, 저는 가난하게 살기 싫어요. 저를 부유하게 해 주세요. 교회도 많이 지을 테니 여기에서 십일조를 가장 많이 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답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학원을 경영하라는 아이디어를 주시더랍니다. 그래서 New College 학원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학생이 28명밖에 오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 100명을 보내어 주실 줄 믿습니다.'하고 100명이 온 것만큼 십일조를 드렸답니다. 다음 달에 정말 100명이 왔더랍니다. 그래서 또 '500명을 보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하고 또 500명이 온 것만큼 십일조를 미리 드렸더니 또 500명이 왔더랍니다.
그렇게 성장하여 지금은 3500명, 4000명이 모이는 학원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신비로운 은혜를 주셔서 그 학원 졸업생의 92%가 명문 대학에 들어간답니다. 그러니 서로 그 학원에 들어오려고 야단이랍니다.
학생들이 마지막 시험을 보기 전에는 학생들을 다 모아놓고 그분이 안수 기도를 해주신답니다. 지금 그분이 장로님이 되셨는데 십일조를 100만 불씩 드립니다. 학원을 경영하시면서 그렇게 많은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도 많이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차피 한판의 도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걸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생명도 거는데 그까짓 돈을 걸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한 판 크게 걸어보십시다.
따라 합시다.
"한판 크게 해보자."
흥해도 망해도 별것 아닙니다.
제가 늘 99세까지 살아야겠다고 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99세까지 살지 않아도 되겠다 싶습니다. 제가 살만큼 살았고 일할 만큼 일했다는 생각도 들고, 힘든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저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고 엄마를 고생시키지만, 세상에 나와 보면 엄마 뱃속보다 세상이 더 좋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암이 생기거나 어떤 병에 걸리면 죽지 않으려고 야단하지만 사실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나가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죽을 때가 되었으면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먼저 죽으면 새 장가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어렵게 살지 맙시다. 하나님께 맡기고 삽시다.
공중에서 뛰어내린 공수부대의 군인들이 자기 힘으로 그렇게 삽니까? 낙하산이 펴져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우리가 순종의 낙하산 버튼만 누르면 하나님 말씀의 낙하산이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건들 자가 절대로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면 편안합니다.
고속도로를 지정 속도대로 100km나 80km로 달리는 사람은 편안합니다. 무인 카메라가 있어도 없어도 편안합니다. 그러나 지정 속도가 100km인 도로를 140km로 달리다가 카메라를 보게 되면 간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게 됩니다.
"아이쿠, 어쩌지? 또 찍혔구나. 또 티켓이 날아오겠구나."
그런 일이 계속되면 간이 아프게 됩니다.
저는 언제나 지정 속도대로 달립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카메라에 찍혀 본 적도 없고 벌금을 내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정 속도대로 달리면 기름도 적게 닳습니다. 정해진 속도대로 달리면 놀랄 일도 없고 사고날 일도 없고 언제나 편안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생의 신호등입니다. 여기에도 속도 제한이 있습니다. 내 아내 내 남편만 사랑해야 합니다. 남의 아내, 남의 남편을 탐내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의 신호등인 말씀대로 살면 편안합니다. 또 의롭게 되어 빛이 납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아브라함이 자기 부인의 여종을 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이 자기 부하 장군의 아내를 슬쩍 끌어안고 잔 사건을 성경이 공개합니다. 유다가 자기 며느리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을 성경이 공개합니다.
성경은 의로워서 모든 것을 다 공개합니다.
이 의로운 성경대로 살면 우리가 의롭게 됩니다. 우리가 떳떳하게 됩니다.
조선 시대 유명한 문필가이자 해학자인 정수동 선생님이 어릴 때 글방에서 공부하다가 심히 졸았습니다. 훈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놈, 수동이! 정신이 어디 나갔냐? 종아리 걷어라."
훈장님이 수동이의 종아리를 무섭게 때렸습니다.
이튿날 훈장님이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훈장님, 왜 조십니까?"
"이놈아, 네 눈엔 내가 조는 것 같이 보이느냐? 나이가 드니 자꾸 잊어먹는 것이 있어서 잠시 공자 선생님을 만나고 왔느니라."
훈장님이 거짓말하는 것을 수동이가 몰랐겠습니까? 그 이튿날 수동이가 일부러 졸았습니다. 훈장님은 자기가 그 전날 존 것은 잊어버리고 또 수동이를 야단쳤습니다.
"이놈, 수동이! 또 조는구나. 종아리 걷어."
"훈장님 눈에는 제가 조는 것처럼 보입니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잠시 공자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훈장님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습니다.
"그래, 공자님은 만났더냐?"
"예, 만났습니다."
"뭐라 하시더냐?"
"'어제 우리 훈장님께서 다녀가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오지 않았다.'라고 하시던대요."
훈장님의 얼굴이 발개졌다고 합니다.
작은 거짓말을 하면 작은 난처함을 당합니다. 큰 죄를 지으면 큰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등불은 점점 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3절에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한경직 목사님을 생각하면 그 이미지가 환합니다. 주기철 목사님, 조만식 선생님의 이미지도 환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은 환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이 땅에서도 빛을 발하고, 천국에서도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증거와 전도가 되고 내게는 약속과 소망과 희망이 되고 능력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가 말씀을 얼마나 지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대로 지키는 것을 카운트하십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 시간 시간마다, 어디에서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증거와 전도지가 되고, 또 우리 모두는 희망과 축복 속에서 의롭게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각자 부르심 받은 대로
고전 7:17-24 / 김경호목사
야훼신앙은 본디 에집트의 노예민을 해방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었으며, 예수신앙 역시 로마가 천하를 통일하고 평화란 이름의 독재로 식민지 백성을 탄압하던 시대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곳, 즉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은 초대교회는 노예제도를 근간으로 유지되는 로마사회 내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형제 자매의 관계로 바꾸는 새롭고 혁명적인 공동체의 출현이었습니다. 이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대거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신분이 무너지고 모두가 한 상에서 식사를 하게 되니 교회가 로마에 직접 반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이 집단을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로마가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한 로마의 황제들은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운동은 로마 안에서 로마를 부정하는 운동이었고, 그들의 철저한 계급제도와 신분제도를 부정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을 받게 된 후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시대는 가고 순탄한 역사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와 함께 온갖 권력과 권위의 근원지가 된 기독교는 그 본질을 변질시켜 지배자의 종교, 힘의 종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굉장히 혁명적인 책이라 그들은 일반 민중이 성서를 읽는 것을 두려워하여 성서는 고대 언어인 라틴어로만 읽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소수의 귀족이 이 말씀을 독점하고 자기들 입맛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견강부회하려는 의도에서 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성서를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근대 천여 년 간에 대단한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그 역시 귀족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루터는 독일서 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거침없이 영주들 편을 들고 반란자 농민들을 죽이고 탄압하는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번역된 성서역시 역사적 한계를 가지고 태생했으며 자세히 보면 성서의 말씀 중 상당부분이 오랜 역사 속에 지배자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된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대표적으로 그러한 예의 본문입니다. 바울이 신분제에 대해 아주 타협적이거나 얼버무리거나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며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20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십시오.” 또는 “각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 하십시오” 등 이 본문은 거의 예외 없이 직업이나 신분, 사회적 위치에 그대로 머무르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노예로 부름받았으면 충실히 당신의 주인을 섬기고, 당신이 여성으로 부름받았으면 늘 그렀듯이 우리사회에서 중요하고 좋은 몫은 남성들이 차지하고 그 나머지 하위직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대로 머물러 있으시오.”라고 이해됩니다.
위 본문에서 “처지”나 “상태”로 번역된 말은 희랍어 클레시스(κλεσιs) 즉, calling 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calling은 “직업”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또는 “소명, 부르심”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직업으로 이해하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신의 사회적 신분(status)에 머무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calling을 문자 그대로 소명이나 부르심으로 번역하면 전혀 뜻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당신이 종이던 주인이던, 할례를 받았던 안 받았던 하나님의 해방하시는 그 사역, 주께서 부르시는 그 소명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대표적으로 지배자의 입장에서 왜곡시킨 예입니다. 원래 취지와는 정반대의 뜻으로 왜곡했습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함으로 왜곡한 예입니다. 왜 그렇게 보아야하는 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어의(語意)로 보아 그렇습니다.
본문의 클레시스는 히브리어 카라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이름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성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언급됩니다.
-바벨탑 사건 후에,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부른다 )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르실 때, “너는 내가 거기에서 일러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삼상16,3)
-다윗이 사울을 쳐죽인 사람을 대상으로 명령을 내릴 때, “다윗이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서() ‘가까이 가서 그를 쳐 죽여라’하고 명하였다(삼하 1,15)-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야곱아, 내가 불러낸() 이스라엘아(이사 48,12)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탯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이사 49,1)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일 때,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호세 11,1)
이러한 의미는 신약성서에 그대로 전이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κλεσιs)을 박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롬 8,28-30)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도 부르심(κλεσιs)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κλεσιs)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엡4,4).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벧전 2,9)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κλεσιs)으로 불러주셨습니다(딤후 1,9)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κλεσιs)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 자매 여러분...(히 3,1)
모두가 직접적으로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직업이나 신분이라는 의미로 대입했을 때는 뜻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원래 이름을 부르는 행위,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 자체가 큰 선택이고 그의 쓰임새를 자리매김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름을 부르시는 것은 큰 사명을 지워주시는 하나님의 선택이고 부르심과 소명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직업이라고 쓰이게 된 것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의 자리로 이해하는데서 유래된 근대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직업은 고사하고 신분, 계급,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 status에 까지 확장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몇 차례 의역하여 넘어간 결과는 지배자들의 입맛에 꼭 맞는 그리고,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인 뜻으로까지 왜곡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둘째, 본문의 문맥에서 보겠습니다.
짧은 본문에 17, 20, 24절 세 차례에 걸쳐 각자의 처지에 머물러 있으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는 바울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이용하십시오”라고 하며 23절은 더욱 분명하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정신 분열이라도 일으켰습니까? 어떻게 네 신분, 처지에 그대로 순종하고 있으라는 사람이 동시에 한 문단 안에서 전혀 다른 말을 한단 말입니까?
셋째는 전체 바울의 신학에서 보아야합니다.
바울의 신학의 특징은 이원론을 극복한 소마(σωμα, 몸)의 신학입니다. 그 당시 희랍철학은 인간을 이원적으로 분리하여 보았습니다. 몸은 고기요 정욕의 더러운 곳이요, 불의하고 유한한 것으로서 영혼을 가두는 감옥에 불과합니다. 반면 영은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이며 절대 자유한 이데아의 세계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죽음은 비로소 이 육체의 감옥에서 영이 자유함을 얻고 해방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을 소마라는 용어로 영과 육이 통전적으로 통합되는 존재로서의 ‘몸’을 말합니다. 그는 영과 육이 분리되는 희랍적 불멸에 대해 맞서서 고전 15장에서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부활은 영만의 부활이 아니고 몸의 부활인데, 그것은 썩지 않을 몸,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신령한 몸으로 거듭납니다(15,42절 이하). 그것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몸의 질적인 변화이고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으 질적인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을 신분에 머물러 있으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은 22절의 “주님 안에서 노예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라는 말씀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몸은 노예지만 영적으로 자유해라”라고 해석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갑자기 자신의 적인 이원론적 이단인 영지주의자가 되었습니까? 그의 전체 신학에 반하는 말을 왜 바울에 입에 담으려고 합니까? 22절의 말씀은 그러나 머물러 있으라가 아니고 “그러니 노예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이유로 논증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3절이 분명히 ”그러므로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라고 분명히 제시하지 않습니까?
넷째는, 유대교 신앙에 반합니다.
그 당시 로마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황제를 퀴리오스(κυριοσ, 주님)으로, 구원자(σωτηρ), 하나님(θεοσ)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의 변방에서나 통하였고 정작 중심부 로마에서는 저항을 받았습니다. 타키투스, 티베리우스, 필로등도 격렬히 이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변방에서는 오직 유대에서 강한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은 하나님 한분 외에는 아무라도 그를 주로 부를 수 없다는 신앙적 이유에서 였습니다. 이런 강한 신앙적 저항은 로마와의 전쟁으로 까지 이어졌고 패배한 유다는 주후 70년에 나라로서의 운명을 다해 패망했으며 예루살렘 안에 유다인이 머무를 수 없게 되는 조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 나가게 된 그들은 상대적으로 이런 종교적 자유를 인정받을 수 있는 중심부 로마로 스며들었습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은 그가 직접 개척한 교회들에 보내는 것이지만 로마서만큼은 이미 그가 개척 전에 존재하고 있는 교우들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그만큼 많은 유대인들이 이미 로마로 스며들어가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점이 “우리가 누구의 종인가?” 하는 것인데 유대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유대적 전통에 확고하게 서있는 바울이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고 한다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맞았을 것입니다.
다섯째 바울 자신의 행위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자기를 돕던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본래 그가 도망쳐 나왔던 원래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동봉하는 편지입니다. 마침 그의 주인은 옛날 바울에게 신세를 졌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당신의 종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니 “이제는 이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 한 형제로 대해 줄 것을 요구하며” 은근히 그 옛날 빌레몬이 빚 진 것을 묻지 않겠다고 하며 압박한다. 여기서 바울과 초대교회 운동의 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크리스천으로 철저히 신분을 뛰어넘어 형제 자매가 되게하는 운동으로 교회의 선교를 전파해 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다는 것은 그분께 이름을 불리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실 때에 사무엘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부르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사무엘은 주앞에 엎드려 대답합니다 “ 예, 말씀하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을 하셨는가는 다음 문제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께서 부르실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으로 초청되며 새로운 사명 가운데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부르실 때,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백성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내 백성은 누구입니까? 에집트에서 종노릇을 하는 노예들입니다. 그들을 해방 시키는 사명, 자유를 베푸는 사명 가운데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크리스천은 이 해방자의 사명을 부여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노예건, 주인이건, 할례를 받았건 안 받았었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주님 앞에 무엇을 둘러 댈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해방 시키는 사명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그 해방의 사명과 소명 안에 머물러 있으라(우리들을 그 처지와 신분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고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
고전 7:17-20 / 피종진목사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환난과 고난과 역경과 싸우면서 살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과 저는 전투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는 그런 특공대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됩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불신자와 구별된 생활을 해야 됨을 성경에 지적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먼저 신앙인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부르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씀이 두 곳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절)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이 말씀은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어떤 잔치집의 초대도 아니고, 또 어떤 동창회나 축하연의 초청도 아닌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반열에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반열에 불러주셨습니다(행 16:31). 예수 믿기 전의 우리는 멸망과 저주의 길에서 방황하고 지옥을 향하여 간 자들이었습니다(엡 2:3).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 참여하게 됨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성공 실패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과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 버는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또 지위와 명예와 권세를 좋아하는 분은 남보다도 높이 오르게 될 때에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스포츠맨들은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면 평생에 보장을 받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인생 최후에 구원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은 우리를 사명자로 불러주셨습니다(마 4:19).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신 것은 구원의 반열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것은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일거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런 락(樂)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편안히 사는 것이 성공한 것 같이 보여도 실제적으로 일거리가 없어지면 생명도 단축된다고 합니다. 마음의 외로움과 슬픔, 고독, 허무함, 허탈감이 따르게 됩니다. 하물며 영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있을 때 그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고, 감사와 축복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나, 또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신 말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생애를 바치기로 서원한 것 등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한 아름다운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주의 사명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심전력을 다해서 충성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갈 1:15).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④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 중에 부르셨습니다(고전 7:15). 하나님은 불안과 공포와 우수사려, 고난과 역경과 환난과 두려움, 저주와 멸시와 천대 속에 있는 우리를 화평 중에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참 평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참 평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요 14:27)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화평 중에 부르신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참 평안을 주실 줄 믿습니다.
⑤ 하나님이 우리를 소망 중에 부르셨습니다(엡 1:18). 얼마전 TV를 보다가 감명 깊은 장면을 보았습니다. 필리핀 여성이 우리나라 농촌 총각과 결혼해서 사는데 처음에 와서 기대가 너무나 어그러져 절망과 좌절 속에 있지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까 '내가 열심히 살면 반드시 잘 사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산다'고 했습니다.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다'는 이 말 한마디가 그 분의 모든 고난과 슬픔과 어려움을 이기고 살게 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가진 소망이 그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했던 것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슬프고 어려움이 있어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지상에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고, 내세에도 천국을 허락받은 선민들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이 참 소망을 가지고 산다면 매일 매일의 생활이 감사와 찬송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보면 거짓과 죽음과 위험이 난무해서 자기 스스로 살기가 너무 힘들어 자기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고, 심지어는 자살을 하거나 혹은 절망과 좌절 속에 타락하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참 소망을 절대로 잃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무궁토록 거짓과 변함이 없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이 세상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21절) 우리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죄악의 종, 사탄의 종, 물질의 종 등 세상 여러 가지 풍습에 얽매여서 세상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되신 예수 안에 있으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진리는 모든 결박을 풀어줍니다. 죄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멸망과 저주에서 해방시켜줍니다. 불안과 공포, 두려움을 물리쳐줍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이 자유는 마귀가 결박할 수 없고, 예수 안에 있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것들과 고난과 환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쇠는 연단을 받을수록 더 강한 강철이 되듯이 참된 신앙인은 연단과 환난과 고통이 있을수록 더 신앙이 강해지고 더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함께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성경은 왜 우리에게 세상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라고 했을까요? 욥기 7:1에 보면 '이 세상에 사는 인생에게는 누구에게나 전쟁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욥기 8:9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날이 그림자처럼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욥기 9:24에는 '악인의 손에 붙어 있는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7에는 '불 타 없어질 곳'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세상 일에 너무나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헛된 것에 시간을 투자하고 정욕과 지혜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이 세상을 위하여 너무나 많은 헌신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늙어가는 육체와 가까워지는 공동묘지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안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이 자유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을 우리가 소유한 그 평안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하늘과 땅에서 이어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하늘 나라에 간 성도들이 얼마나 더 많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의 세계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거기에 보면 '큰 무리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무리들'이라고 하신 말씀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예수 믿고 주님을 위해서 핍박과 환난을 받으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를 당하기도 하고 주의 사명에 충성하다가 하늘 나라에 간 무리들이 많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걸어서 예수 안에 있는 이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은혜 안에서 최후까지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세상에 대해서는 그 노력하고 기도했던 것들이 참 허무하게 지나가는 경우도 많지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지극히 작은 것 같아도 너무 너무 기쁘고 보람이 있고 감사하게 되는 이런 일이 신앙 안에서 있게 됩니다.
셋째,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거하다'는 말은 '머문다'는 뜻입니다. 머물고 있으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떤 친구가 너무 너무 삶이 어려워서 허덕이고 애쓰고 방황하고 있는 자에게 '마음 푹 놓고 내 집에 머물고 있으세요.'라는 말을 했다면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안에 머물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 책임을 져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고용되어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원하시는대로 행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5,7)
한 번 따라 해보십시오.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어떤 분은 '주님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고, 나의 모든 것도 나의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시편 34:18에 보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상한 마음이 위로를 받게 됩니다. 시편 73:28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고, 맡아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습니까?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합니까? 마음이 상하고 어려움이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 하나님은 반드시 곁에서 구경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의 손으로, 능치 못함이 없는 손으로 여러분을 치료해주시고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구원의 반열에 불러주시고 사명자와 은혜로 불러주시며, 화평과 소망 중에 불러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 세상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살며, 예수 안에 머물고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평생토록 보장을 받는 신앙인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께 속한 자유인
고전 7:17-24 / 박덕기목사
저는 1968년 1월 18일에 입대를 해서, 1970년 12월 제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대를 한지 43년이나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은 제대를 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어떤 때는 강제로 재 입대를 시키셔 크게 항의를 하는 그러한 꿈을 꿀 때가 더러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꿈은 평소의 잠재의식이 수면 중에 발로되는 것이라는 게 정설인데, 그렇다면 가끔 제대를 하지 못해서 애를 먹고,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는 것은, 그만큼 매인 것을 싫어하고 자유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스스로 꿈에 대한 해몽을 해보기도 합니다. 아마 제 해몽이 맞을 것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하나님께 4가지를 감사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희랍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노예가 아닌 자유시민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께 더욱 감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플라톤의 4가지 감사를 제게 적용해보면 1)이슬람 국가나 북한에 태어나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2)전제 군주나 봉건 시대에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태어나지 않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3)남자로 태어나서 목사가 된 것이 감사하고, 4)무엇보다도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된 시대에 태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실이 정말로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당시에는 노예 재도가 아주 발달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던 때인지라, 사회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귀족과, 자유 시민과, 노예 계급의 성도들이 뒤섞여 있었고, 또한 유대인 출신 성도들과 이방인 출신 성도들, 할례 받은 성도들과, 할례 받지 않은 성도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신분과 처지에 있는 성도들 간에 자연히 이질감이 형성되었고, 은연중에 반목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성도들 중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내세워, 사회 질서와 신분 제도를 무시하고 시민적 의무마저 회피하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삶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세속적 신분과 처지를 향상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데에 있음을 역설하며, 각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17절에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은 20절과 24절에서 동일하게 같은 말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곧 “성도는 현재 자신이 처한 지위와 형편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금 자기의 처지나 형편에 불만을 품고, 다른 것을 찾아 헤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도 혼란스러워지고, 사회도 혼란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든지 지금보다 더 좋은 직업, 더 좋은 신분을 원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그 형편이나 직업이 금세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직업에 충실하고, 현재 처한 사회적 신분에 감사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기 향상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때가 되었을 때, 성도에게 더 좋은 형편과 처지를 허락해줄 믿습니다.
18절에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권면을, 할례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 교훈합니다. 여기서 ‘할례자’란 유대인 출신 성도들을 가리키고, ‘무할레자’란 이방인 출신 성도를 가리킵니다. 초대 교회 당시 할레는 매우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 얻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출신 성도들에게도 할례를 강요하였고, 그에 따라 일부 이방인 출신 성도들 중에는 할례를 행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름 받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교훈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즉 “성도에게는 외적인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변화입니다. 즉 심령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중에는 예수를 믿으면 얻게 될 외적인 변화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범사에 잘되어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풍성하게 얻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그 심령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외적인변화만 추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외적인 물질의 축복이나 자신의 신분 상승보다, 성령으로 그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더 원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는 진정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1절에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노예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노예가 된 그 신분에 대해 너무 비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종 된 자들에게 평생을 종으로 지내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노예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국가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운다든가, 자기가 종으로 있는 가정에 큰 공을 세웠을 때, 그 종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셨지요? 그 영화의 주인공인 벤허가 노예로 팔려 전함의 노를 젓는 노예가 되었지만, 전투중 위기에 처한 해국 제독을 구해낸 공로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 받고 제독의 양자가 됩니다. 국가나 가정에 큰 공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종들에게는 또 다른 해방의 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인에게 돈을 주고 해방을 받는 길입니다. 즉 자기가 자기를 사는 것입니다. 종에게도 약간의 쉴 틈은 있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종은 한두 푼의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번 돈을 신전에 맡겨 놓습니다. 여러 해 동안 자기의 몸값이 될 만큼의 돈을 저축하고, 마침내 그 돈이 모아지면 종은 그 주인과 함께 신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신전의 제사장으로부터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종은 상징적으로 신의 소유물이 되고, 따라서 인간인 주인에 대해서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이런 풍습을 알고 있었기에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노예처럼 자신의 운명과 처해진 상황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해진 상황 곧 현재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욱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외적인 변화 또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2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세속 신분과 관계없이 영원한 자유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비록 육적인 신분이 종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이 세상 어떤 자유자가 누리는 자유보다 더 크고 복된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억압하는 가장 잔인한 폭군인 마귀와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에서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또 구원의 진리를 알고 천국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불행과 염려에서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유업을 받을 자이기에 때문입니다. 노예의 불행 중 하나는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세상의 종은 그저 종으로 일생을 마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영원한 나라와 기업을 유산으로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종이라도 자유인인 것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 봉사하는 사람이기에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종들도 주님을 믿기 전에는 억지로 주인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랑의 봉사를 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자원하여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원하여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종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일하는 사람은 종이 아닙니다. 자유인입니다. 세상에는 자유자 같아도 종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 같아도 자유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아무리 자유인일지라도, 그는 실상 종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비록 종 같은 자라도 실상은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자유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인으로서 책임감 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종과 같이 억지로 하지 말고, 자유인답게 기쁨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22절에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자는, 노예가 아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값 주고 사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유인이라도 주님을 알기 전에는, 모두가 사탄과 그 죄악 권세의 종이었습니다. 이런 마귀와 죄의 종들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제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종이 되고, 그리스도께 고용된 의의 군사들이 된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그리스도께 헌신 된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1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성도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존재들입니다. 성도들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이는 진정한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명하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의 종이라는 진정한 의식을 지니고 사는 성도들을 원하십니다. 물질의 종, 권력의 종, 불의의 종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행할 이들은 성도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도 드리고, 시간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것들은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교인은 많으나 참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앙의식을 지니고 사는 성도는 적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종 된 신분임을 잊지 말고,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라, 겸손과 사랑과 의와 진리를 행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절에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얼핏 보면 노예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언급해 온 신분 계층의 열등감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노예, 즉 종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한 자유인인데, 종 된 신분을 부끄러워하고 열등의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곧 사람에게 종노릇하는 일이 되는 것이므로, 성도들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같은 위치에 있음을 알고, 떳떳하게 이웃 성도를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짓 사도들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없는 동안 고린도 교회에는 일부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자칭 사도라 칭하며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온갖 횡포를 부렸습니다. 셋째로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뜻은, 불의한 사람들과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에게 굴복하거나 그 불의와 타협하면,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유명한 조류학자가 산에서 앵무새 새끼를 가져다가 집에서 길렀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새장 속에 넣어 예쁘게 기르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날 어미 앵무새가 와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여러 날 먹이를 줬는데 하루는 나가보니까 앵무새 새끼가 죽었습니다. 조류학자는 사인을 조사하다가 오싹 소름이 끼쳤습니다. 어미 새가 물어다 준 먹이는 독이 있는 과일이었습니다. 어미 새가 몰랐을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잃은 새끼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기에 독이 있는 과일을 먹여 죽인 것입니다. “너는 새장 안에 갇혀 자유를 잃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 어미 새의 판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유란 동물들도 이렇게 갈망하는 것입니다. 새장 안의 새도 자유를 추구하여 그토록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악독한 마귀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한 마리 새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롬 6:17에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죄의 종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종과 관련해서 인생을 네 종류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1)죄의 종으로 태어나서 독재국가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살다가 영혼까지 멸망하는 인생이 있고 2)죄의 종으로 태어나서 자유시민으로 살다가 영혼은 멸망으로 떨어지는 인생이 있고 3)죄의 종으로 태어나서 자유시민으로 살다가 영혼까지 구원받는 인생이 있고, 4)죄의 종으로 태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지만, 구약에서 자유를 얻게 된 종이 처자식과 주인을 사랑하여 귀를 뚫고 자원하여 종이 된 사람처럼,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억압하는 가장 잔인한 폭군인 마귀와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 왕의 왕께서 저 사로잡힌 자 다 구원하시고, 참 자유 주셨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주 말씀하시길 쇠사슬 끊겼네, 우리 자유 얻었네. 할렐루야!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시인인 메데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사로잡으소서. 그리하면 나는 자유로울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심히 모순된 말 같으나, 세상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말은, 주님을 알고 주님에게 사로잡혀서, 참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다음은 테레사 수녀의 기도입니다. “오! 사랑의 주님, 존경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사랑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칭찬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로워지려는 욕망으로부터, 찬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선택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기를 끌려는 욕망으로부터, 모멸 받는 두려움으로부터, 경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질책 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비난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지는 두려움으로부터, 오류를 범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우스꽝스러워지는 두려움으로부터, 의심받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소서.” 불신자는 하나님 한 분께는 자유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식, 돈과 물질, 사업, 쾌락, 명예, 권세, 탐욕, 인기, 시기, 질투 등 모든 것의 종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한 분 주님께만 종이 되고, 모든 것에서는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께 속한 참 자유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
고전 7:17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 첫 절인 17절에 보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인 24절에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사실상 같은 말로 시작하고 끝낸 것입니다. 그는 앞뒤로 같은 말 사이에 있는 오늘 본문을 통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을 삶의 변화라고 말합니다. 삶의 의미가 변하고 삶의 목적이 변하며 삶의 방식이 변하고 삶의 기쁨이 변하는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믿는다 하면서 믿기 전에 가졌던 삶의 의미, 목적, 방식, 기쁨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후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본문에서는 오히려 바꾸려 하지 말 것은 강조하는 듯한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합니다.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있게 하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믿음을 갖게 될 때에 있었던 그 삶의 자리에서 어떤 변화를 꾀하지 말로 들립니다. 18절에서는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합니다. 할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부르심을 받아 예수 믿게 된 시점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20절에서는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합니다. 그리고 24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도록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곧 모든 변화를 거부하라고 요구받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서 언급한 사도 바울 자신의 또 다른 말인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한 말과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말들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할례에 관한 그의 말을 생각해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그와 그의 모든 자손에게 당신의 택하심을 받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표징으로서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창17:1-13).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당신의 백성에서 끊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7:14).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억압과 이집트 백성으로부터의 차별을 받으며 사는 동안 할례를 잊고 지내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키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제히 다시 행하게 하신 것도 할례였습니다(수5:2-9).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중요한 결단과 변화의 상징 같은 것이 할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 시대에도 일부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던 것입니다(행15:1, 5).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할례와 관련된 일체의 변화를 금지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다시 봅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유대인 기독교도들처럼 할례를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 기독교도가 되었을 경우 굳이 유대교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할례 받지 않은 사람처럼 되려고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비유대교 세계에서 할례 때문에 유대인임이 드러나고 그래서 차별을 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할례의 흔적을 없애는 복원수술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9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할례를 받고 안 받고 하는 일의 의미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참으로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한 참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것이 뒤따르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할례를 받았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으며, 할례를 안 받았어도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표징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쓴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롬2:25-29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이렇게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무할례자가 할례자가 되려고 하지도 말고 할례자가 다시 무할례자로 돌아가려고 하지도 말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우리는 본문 20절의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20절의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한 말은 앞서는 18-19절에서 다룬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경우에 관하여 한 말의 요약이며 결론이기도 하지만 뒤따르는 21-22절에서 다룰 종과 자유인의 경우에 관하여 할 말의 요약이며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종의 신분으로 있는 모든 사람은 일단은 자유인이 되는 것을 갈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잘못된 것이라 말하지도 않습니다. 자유인이 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고 노력의 전부가 되며 자유인이 되지 못한다고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죄의 종으로 머물러 있는 것인데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 신분이 비록 종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인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을 이미 얻은 사람에게서 종이라는 외적인 신분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뜻으로 쓰기를 “염려하지 말라.” 한 것입니다. 즉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회적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얻는 변화를 꾀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종이 자유인 되는 일은 포기하라고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아는 사도 바울이기에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마다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의미를 오직 외적 신분의 변화에만 두는 것은 보다 중요한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은 사람에게는 합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반대로 사회적으로 자유인의 신분인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종이라는 말이 갖는 차원 다른 의미를 제시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종이든 자유인이든 본래 영적으로는 다 죄의 종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종인 사람이 자유인이 되려고 하는 갈망은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할 수도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종이 된 사람이 그 신분을 벗어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다시 세상적 욕망과 관심의 종이 되는 것이며 곧 죄의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면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우리인데 우리가 다시 세상의 욕망과 죄의 종으로 되돌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본문 23절의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한 것입니다.
이 모든 말을 다시 요약하고 정리하여 결론적으로 쓴 것이 본문 마지막 절의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한 말입니다. 이 말을 비롯해서 본문의 많은 말들이 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듯이 들리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의 참 뜻을 바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변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겉모양의 변화, 사회적 신분상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변화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속으로부터 진정 변화한 사람만이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사회적 신분의 상승을 싫어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또 기왕이면 사회적으로 그 위치가 더 중요해지고 무게 있고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려고 힘쓰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아니 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노력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부귀와 기쁨을 위해서 외적인 변화를 꾀하며 신분의 변화를 도모하는 데 전심전력하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믿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하던 일 다 내던지고 딴 일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지 않고 신앙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나 삶의 자리에 있었다면 과감하게 그런 일과 삶과 결별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에서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시고 머물게 하신 삶의 자리를 성실하게 지킬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본문 24절에서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에로 부르실 때 있었던 그 인간적, 사회적, 신앙적, 영적 상태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말고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힘써 신앙적, 영적 성장과 인격적, 정신적 성숙과 사회를 향한 선한 영향력의 증대를 끊임없이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지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부르심”이란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의 여덟 절 중 19절과 23절을 제외하고는 모든 절에서 “부르심”이란 말을 반복했습니다.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하시는 음성입니다. 세상의 종, 사람의 종, 나 자신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종에로의 근본적 신분의 변화입니다. 세상과 짝하여 사는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에로의 변화입니다.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식과 기쁨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변화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관심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에로의 변화입니다. 이 변화에로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그리고 온전히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