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양을나의 탐라왕국(耽羅王國)
1973년 발굴 조사된 제주 애월읍 어음리 유적에 의하면 탐라에서는 4만년전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살았습니다. 어음리 유적은 한국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으로 동물화석, 긁개, 토기 파편, 흠날 등 84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또 1987년 발견되어 조사된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유적에서는 찌르개, 긁개, 돌화살촉, 뚜르개 등 대량으로 유물이 출토되어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특히 돌화살촉 외에도 주목해야할 것은 구석기 후기에서 신석기 시대로 문화적 이행과정과 연대를 추정하게 하는 좀 돌날 석기와 섬유질 몸돌 석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섬유질 토기는 탐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토기입니다. 이 토기는 시베리아 일본 몽골 등에서 발견된 유물로 당시 탐라가 동북아시아의 문화 교류의 거점이었으며, 한반도 육지 보다 먼저 발달된 문화가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구려하에서 떠난 세 사람이 표류하여 깨어난 서기전 2373년 9월부터 한라산 북녘 넓은 땅 모흥혈(毛興穴)에서 살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아직 미개하였던 탐라에 발달된 홍산문화가 한반도 최초로 유입된 것입니다. 이것은 육지의 길보다 바다길이 문화전파가 빨랐기 때문이며, 지금으로부터 4,400여년전 일입니다.
그들은 얼굴 생김새가 비범하고 매우 크고 도량이 활달하여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이 세분께서는 탐라의 산야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여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수렵한 날 짐승과 바닷가의 생선을 주식으로 생활하여 왔으나 가정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동해 지금의 남제주 서연포 쪽을 바라보니까 자줏빛 안개가 통나무배를 감싸고 붉은 흙으로 뚜껑을 봉한 여러 나무상자가 바다에서 떠 내려와서 동쪽 해안에 머무르므로, 세 사람은 내려와 통나무배를 맞이하고 나무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배 위에는 자주 빛 옷에 붉은 관대(冠帶)를 한 사자(使者)와 푸른 옷을 입은 처녀가 셋 있었습니다. 나이는 십오륙 세쯤 되고 얼굴과 태도가 범속하지 않았고, 기품은 그윽하고 얌전한데, 각자 화장을 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또 하나의 옥(玉)으로 만든 둥근 상자가 있었고. 옥함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도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이다.’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사자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저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왕녀를 낳아 고이 키워 나이가 장성하였으나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탄식을 하며 여러 해를 보내던 중에 임금님께서 자소각(紫宵閣)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세분의 인간이 출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는지라 저에게 세 공주를 모시고 가게 하였으니, 마땅히 혼례를 치르시고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곧 바로 타고 온 통나무배를 타고 되돌아갔습니다.
세 분은 이에 제물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나이 차례대로 각기 세 공주와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혼례를 올렸으며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서 생활의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빛 구름 속에 통나무배가 도착한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연혼포(延婚浦)라 하며, 지금도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온평리 바닷가 ‘황루알’이라는 곳입니다. 또한 세 분이 목욕한 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神房窟)이라 하며 그 안에는 각기 3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습니다.
세 분은 물이 좋고 기름진 땅을 찾아 활쏘기로 거처할 땅을 점쳤는데 양을나(良乙那)의 지역을 제일도(第一徒: 史作都)라 하고, 고을나(高乙那)의 지역을 제이도(第二徒)라 하고, 부을나(夫乙那)의 지역을 제삼도(第三徒)라 하였습니다.
서기전 2369년에 양을나는 25세의 나이로 제일도에서 탐라왕국을 개국하였습니다. 그 후에 고을나의 제이도는 모라국(毛羅國)으로, 부을나의 제삼도는 탁라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후 각각 오곡(五穀)의 씨앗을 뿌리고 말과 소를 기르게 되니 백성이 날로 늘고 부유해져 갔습니다.
탐라왕국을 개국할 당시의 인도에서는 인더스문명이 전성기를 이루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도시국가가 발전하였으며, 이집트에서는 통일국가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대륙 황하(黃河)유역에서 한족(漢族)의 선조 도당씨(陶唐氏) 요제(堯帝)가 나라를 건국한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양씨(良氏)는 신라 6성(六姓) 이전에 이 땅에 자리 잡은 배달국의 탐라왕국 왕손(王孫)이며 가장 역사를 길게 갖습니다. 또한 양씨들 모두가 탐라왕국 삼성혈(三姓穴)의 양을나를 단일 시조(始祖)로 하는 동계혈족(同系血族) 입니다.
제주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삼성혈(三姓穴)이 양씨·고씨·부씨 시조가 출현하여 거주한 곳으로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장소라는 사실과 삼성(三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창성(創姓)한 최고의 성씨로 서기전 2373년의 창성년도와 출현년도를 한국기록원으로부터 2012년 3월20일 인증을 받았습니다.
1449년의 고려사(高麗史)와 1653년의 탐라지(耽羅志)에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의 삼성혈에서 세 시조의 출현하신 시기를 태초(太初)라고 기록하였는데 태초의 시기를 추정하면, 1449년 내지 1653년에 위 문헌이 완성할 때 이미“서기전 2333년의 단군신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태초라고 표기하였으므로 삼성혈의 세 시조가 탐라에 출현한 시기는 단군왕검이 탄생한 서기전 2371년 보다 앞서 서기전 2373년에 출현하였다고 고증(考證)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가 중국의 우(虞)나라 요임금 21년 무자년(戊子年)이었습니다.
양씨·고씨·부씨 시조의 출현이 서기전 2373년으로 단군왕검(檀君王儉) 탄생 서기전 2371년보다 2년 앞서 출현년도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 연도입니다. 박씨의 시조인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서기전 69년에 탄생 하였고,석씨의 시조인 신라의 석탈해왕(昔脫解王)은 서기전 19년 탄생 하였으며,김해김씨 시조인 대가야의 김수로왕(金首露王)은 42년에 탄생 하였습니다.
양씨는 한국양씨상세기요(韓國梁氏上世紀要)의〈탐라왕국제왕세기(耽羅國 帝王世紀 서기1970년 발행)〉에서 시조 양을나와 그 자손들이 108대에 걸쳐서 3,245년간 탐라왕국을 통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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