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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왕 손사막(孫思邈, 581년∼682년)
손사막은 수문제(隋文帝) 개황(開皇) 원년(서기 581년)에 지금 섬서성(陝西省) 요현(耀縣) 손가원촌(孫家源村)의 일개 보통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때 요현은 화원(華原)이라고 불렀으며 경조부(京兆府)에 속해 있었다. 경조부내에 장안이 들어있으며 20개의 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황토 고원지대이며 도랑과 골짜기가 많이 있다. 계속해서 연결된 산들이 첩첩 쌓여있고 식수가 부족한 지역이다. 그러므로 식수는 움을 파서 빗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식수로 사용했다. 만일 가뭄이라도 들면 먼 곳에 가서 먹을 물을 길어다 마셔야 살 수 있는 지방이기 때문에 한원(旱塬)이라고도 불렀다. 즉 “가물동네” 란 뜻이다.
손사막은 어려서 부터 몸이 약한데다가 자연 환경이 좋지 않은 고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병을 앓았다. 그렇기 때문에 천금요방(千金要方) 자서(自序)에 보면 “유조풍냉(幼遭風冷), 누조의문(屢造醫門), 탕약지자(湯藥之資), 경진가산(罄盡家産)”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어려서 부터 풍냉을 만나 자주 의사를 찾아가 치료받고 약을 지어 먹는 돈 때문에 가산을 탕진했다.”는 뜻이다.
손사막은 유년 시절 가정이 빈한하였기 때문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에 걸려 신체가 여위고 허약하였다. 그는 질병의 고통과 시달림을 실증날 정도로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장기간 의사를 찾아가 치료받고 약을 지어 복용해야 만 되었다. 그런데 영세농인 부모님들이 자식의 치료비를 부담하기에 힘에 겨웠다. 논과 밭을 모두 팔아서 손사막의 치료비에 충당했다. 그 당시 돈이 없어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수문제(隋文帝) 개황(開皇) 12년(서기 592년) 장안 일대에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손사막의 집안에서도 여러 명이 유행전염병으로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처참한 광경을 손사막은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손사막은 중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고 의약으로 질병을 치료하여 중생을 구제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그 후 일생동안 그는 의학을 좋아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는 전심전력하여 한의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최종적으로 질병에 대한 약방(藥方)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고심했으며 정성과 성의를 다하였다.
손사막은 일곱 살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했다. 쉬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보통 아이들보다 총명하여 하루에 일 천자를 암송하였다. 구당서(舊唐書) 손사막전에 보면 “서위(西魏) 공제 때 어느 장관이 15세 소년 손사막의 재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손사막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손사막을 성동(聖童)이라고 칭찬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손사막은 18세 때부터 의학에 뜻을 두고 경방(經方)과 공혈(孔穴)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20세 때 노자(老子)와 장자(庄子) 및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을 모두 마쳤다. 아울러 유교경전과 도경(道經)과 불전(佛典) 등 각각의 학설에 정통하여 박학다식하였다. 그 당시 사회풍조는 경전을 읽고 열심히 연구한 후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부귀공명을 세워 이름을 세상에 날리고 이익과 관록을 추구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손사막은 부귀공명과 관록에는 뜻이 없었고 일편단심 백성들을 질병의 고통으로 부터 해방시키는 의사가 되는 꿈만이 있었다. 동네 노인들은 손사막이 보기 드문 청년이라고 칭찬했다.
편작은 화타와 함께 의학에 공헌한 바가 현저하게 뛰어났다. 그러나 손사막의 영예도 역시 만고(萬古)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손사막은 당대(唐代) 이전의 한의학을 전면 정리하고 수정하여 손사막이 70세 되던 해 당고종 영휘 2년(서기 651년)에 천금요방(千金要方) 30권을 편찬하였다.
그 후 30년 동안 손사막은 천금요방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더 새로운 지식을 첨가하여 천금익방(千金翼方) 30권을 당고종 영순(永淳) 원년(서기 681년)에 100세 때 편찬하였다.
이 책 두 권에 천금(千金)자를 부친 것은 사람의 생명은 천금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 이 책 속의 한 가지 약처방으로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책속에 들어있는 글자의 수는 일백만 자를 헤아리는데 손사막은 한자 한자 정성을 들여 붓으로 썼다. 손사막은 중국 의학사상 방대한 거작 천금요방 30권과 천금익방 30권을 저술하였다. 그의 학식은 깊고 넓을 뿐만 아니라 정밀하였다. 그는 보살의 마음씨를 소유하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환자의 질병치료에 자신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손사막은 선인의 경지에 도달되었으며 오대산에 은거하며 의학을 연구하였다. 그를 후세 사람들이 약왕이라고 존칭했으며 후에 사람들이 오대산을 약왕산이라고 명명하여 영원히 손사막을 기념하였다. 손사막이 후에 박학다식하다는 소문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수문제 양견(楊堅)의 귀속으로 들어갔다. 수문제는 손사막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의 자리를 주겠다고 말했다. 국자감박사는 그 당시 유교 교육의 최고기관인 국자감 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 손사막에게 일생에 단 한번 오기도 어려운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질병이 있다고 핑계대고 완곡한 말로 사절하였다.
후에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역시 손사막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그의 나이 86세 였다. 그러나 얼굴이 소년과 같았고 태종은 손사막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랬다. 당태종이 손사막에게 벼슬을 주겠다고 말했으나 손사막은 모두 사양했으며 하나의 좋은 평범한 의사로써 활동하고 싶은 종전의 포부는 변함이 없었다.
현경(顯慶) 4년(서기 659년) 당고종 이치(李治) 또한 손사막을 일차 조정으로 초청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의 관직을 주겠다고 말했다. 간의대부는 왕의 주치의사 관직이나 마찬가지 관직이었다. 그러나 손사막은 또 사양했다. 후에 장안에 풍부한 의학서적이 있으므로 책을 저술하는데 필요한 의약문헌들을 열람하기 위해서 승무랑(承務郞)의 직무를 맡아 16년 동안 근무하였다. 상원(上元) 원년(서기 674년) 손사막의 나이 93세 때였다. 손사막은 자료수집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당고종 이치에게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손사막은 요현 오대산 속으로 들어가 천금익방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손사막은 일생을 의학연구에 바쳤다. 당고조 무덕 원년(서기 618 년)에 명당침구도(明堂針灸圖)를 저술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책은 도중에 분실되고 말았다.
손사막은 양생학(養生學)에도 자못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상시 위생과 신체단련에 주의를 경주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신체가 허약하여 질병을 항상 지니고 살다시피 했지만 후에 양생학을 연구한 다음 계속 신체단련을 하여 건강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90 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보고 듣는 것이 젊었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안색이 좋았다.
손사막은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환자를 치료해야 된다는 일념 때문에 그는 환자를 친척과 같이 대했으며 항상 “의생응시병자여부형(醫生應視病者如父兄), 타문적통고취시자기적통고(他們的痛苦就是自己的痛苦), 이치병위중(以治病爲重), 배제일체곤란(排除一切困難), 진력창구(盡力抢救).”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의사는 환자를 자기 부모나 형제를 대하듯 해야 되며 환자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과 같이 생각해야 되고 병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일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모든 힘을 다하여 환자를 빨리 긴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내야 된다.”는 뜻이다.
환자를 구해내기 위하여 손사막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춥거나 덥거나 상관치 않고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함을 참고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이질이 걸려 설사를 해서 더럽고 불결하여 구린 냄새가 나서 참을 수 없는 환자라 할지라도 참고 치료를 해주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문등병 환자들은 보통 의사들은 치료하기를 두려워하여 피하지만 손사막은 문등병 환자들도 자기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전심전력을 다하여 치료해 주었다. 손사막의 의술이 고명하기 때문에 신기하게 질병이 잘 치료되었다. 그러므로 신기한 고사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음은 열선전(列仙傳)에 기재되어 있는 고사이다.
어느 날 손사막이 야외에 나가 한 마리의 작은 뱀이 목동(牧童)에게 맞아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을 보았다. 손사막은 자기의 하의를 벗어 그 뱀을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뱀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잘 치료해 준 후 수풀속에 놓아주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지 10여 일 후에 손사막은 교외로 놀러나갔다. 우연히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말에서 내린 후 손사막에게 절하며 “대단히 감사합니다. 도사님! 저의 동생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손사막은 누구를 구해 주었단 말인가? 한 번에 생각해내지 못했다. 백의(白衣) 소년은 또 “우리 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잘 아시게 될 것입니다.”고 말했다.
백의 소년은 손사막을 말위에 태우고 나는 듯이 빨리 달렸다. 어느 도시에 도착되었다. 꽃과 나무가 무성한 속에 눈부시게 화려한 건축물이 있었다. 왕과 제후의 저택과 같았다. 백의 소년은 손사막을 집안으로 모시었다. 집안에서 수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수령이 손사막을 영접하러 나타났다. 그리고 손사막을 향하여 “도장(道長)의 후은(厚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아이를 만나보게 해 주겠으니 서로 만나 보십시오.”하고 말했다.
수령은 저 멀리 서 있는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을 가리키며 “일전에 저 아이가 홀로 외출했었지요. 불행하게도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목동에게 얻어맞아 상처를 입었었지요, 그때 천만다행으로 도장을 만나 생명을 구했기 때문에 저 아이의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저 아이로 하여금 좀 더 빨리 도장께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도록 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고 말했다.
청의(靑衣) 소년은 즉시 손사막을 향하여 감사의 절을 하였다. 이때 손사막은 10일 전 목동에게 얻어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작은 푸른뱀(小靑蛇)을 집에서 치료해 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손사막은 은밀하게 옆에 있는 시종(侍從)에게 살그머니 “이곳이 어디 입니까?”하고 물었다. 시종은 “경양수부(涇陽水府)”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손사막은 이곳이 용궁이라는 것을 알았다. 용왕은 손사막을 위하여 기생과 노래와 춤을 동반한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다. 손사막은 용왕께 “저는 수도를 하기 때문에 곡식류는 피합니다. 오직 술만 마십니다.”고 말했다.
손사막은 이곳에 3일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용왕께 고별인사를 했다. 용왕은 금은보석을 손사막에게 증정하였으나 손사막은 극구 거절하였다. 그래서 용왕은 용궁기방(龍宮奇方) 30수首)를 손사막에게 주면서 “아마도 용궁기방 30수를 가지고 나가면 질병으로 고생하는 세상 사람들은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재차 사양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손사막에게 말했다. 그리고 용왕은 종들에게 말을 한 필 준비하여 손사막을 집으로 모셔다 주라고 명령하였다. 후에 손사막은 용궁기방 30수의 처방들을 시험하여 보았다. 약효가 모두 영험하였다. 이 30수 처방은 천금요방(千金翼方)에 실려 있다.
다음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 있었던 고사이다.
서기 756년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반란을 피해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로 피난을 떠났다. 현종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 꿈에 손사막이 나타나 현종에게 “무도산(武都山) 웅황이 필요합니다.”고 말했다. 손사막이 죽은 지 이미 74년이 지난 때였다. 당명황은 꿈에서 깨어난 후 즉시 사람을 파송하여 웅황 열 근을 아미산정(峨嵋山頂 : 3099m)에 은신하고 있을 손사막에게 보냈다. 아미산 중턱쯤 도달했을 때 수염과 눈섭이 눈과 같이 새하얀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의 양쪽에 푸른 옷을 입은 소동(小童) 두 명이 서 있었다. 노인은 약을 가져온 사람에게 가져 온 약을 큰 바위위에 놓으라고 말했다. 동시에 바위위에 감사하다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 노인은 사자에게 “내가 쓴 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제출하라”고 말했다. 노인은 백여 자의 큰 글자를 바위위에 썼다. 사자가 글자를 받아쓰는 즉시 사라져 없어졌다. 글씨를 다 쓰고 난 후 바위위에는 한 개의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돌연히 하얀 안개가 자욱하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노인은 물론 두 명의 청의 소동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또 하나의 고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도(成都)에 어느 화상(和尙)이 있었다. 그는 법화경(法華經)을 외우는데 만 정신을 집중하였다. 홀연히 어느 날 하인이 와서 화상에게 자기 집 주인에게 법화경을 낭송 해달라고 부탁했다. 화상은 그 종을 따라 산중으로 들어갔다. 연기와 안개가 자욱한 어느 초가집에 당도하였다. 노인종은 “우리집 주인은 노환 때문에 늦게 일어납니다. 대사(大師)님께서 먼저 법화경을 낭송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화상은 잠시 동안 좌선하고 나서 법화경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염과 눈썹이 눈과 같이 새하얀 백발노인이 화상앞에 나타났다. 노인은 시골 사람 차림의 옷을 입고 손에는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양쪽 귀는 양 어깨위에 까지 내려와 닿았다. 노인종은 얼굴에 넘칠듯한 웃음을 띠고 향불을 피우고 경 읽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화상 옆에 조용히 앉았다. 화상이 경읽기를 마친 후 노인종이 등나무로 만든 대형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왔다. 등나무 쟁반위에 고량(高梁) 밥 한 사발과 국기주(菊杞酒) 여러 병이 놓여 있었다. 화상을 정성껏 대접하였다. 화상은 짠 음식과 유제품은 가리지만 매우 감미롭게 음식을 들었다. 이제 고별인사를 하고 화상은 떠나가야 했다.
백발노인은 끈에 뀐 1000문(文)의 동전 꾸러미를 화상에게 주었다. 동시에 하인에게 화상을 모시고 산비탈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 하산하라고 명하였다. 화상은 하산하는 도중에 늙은 하인에게 물었다. 외람되지만 좀 여쭙겠습니다. “당신 주인의 성이 무엇입니까?” 늙은 하인은 “손(孫)씨 입니다.”고 대답했다.
화상은 또 “당신 집 주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늙은 하인은 잠깐 동안 대답이 없었다. 늙은 하인은 한참 동안 생각한 뒤 자기의 손바닥을 화상 앞에 내어밀며 손가락으로 “사막(思邈)”이라고 두 글자를 썼다. 화상은 깜짝 놀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늙은 하인은 사라지고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노인이 준 돈꾸러미 만 남아 있었다. 순금(純金)으로 만든 동전이었다. 이때 이후 화상의 몸은 가벼워지면서 무병하였고 노쇠하지 않았다. 송나라 진종(眞宗)때 이 화상의 나이는 2백세를 넘었다. 신체는 여전히 건강했다. 그러나 언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손사막에 대한 또 하나의 신기한 고사는 다음과 같다. 손사막이 종남산(終南山)에서 은거생활을 할 때 선율(宣律) 스님과 자주 왕래하였다. 둘이 서로 경전을 이야기하고 도道)를 논하였다. 그래서 우정이 매우 깊었다. 어느 해 매우 가물었다.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논과 밭은 거북이 등 모양으로 가라졌다. 볏모(禾苗)는 말라 비틀어졌다. 사람들이 서역 지방에 사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곤명호(昆明湖) 상에 단(壇)을 쌓아놓고 계속 7일간 기우제를 올렸다. 그러나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곤명호수의 물은 몇 자가 줄어 들었다.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서 선율화상에게 절하며 “나는 곤명의 용왕이오.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서역 지방에서 온 스님이 곤명호상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들의 생명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대사님께서 법을 써서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선율화상은 잠시 동안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의 법력으로는 당신들을 구해낼 수가 없소. 손사막을 찾아가 상의해 보십시오.” 라고 말했다.
노용왕은 선율화상의 말에 따라 종남산 석굴 속에 살고 있는 손사막을 찾아가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손사막은 노용왕의 설명을 들은 후 “내가 듣기에 곤명 용궁에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3천수(首)의 선방(仙方)이 있다고 하던데 당신이 그것을 모두 나에게 전해 줄 수 있지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들의 생명을 구해 보겠소.” 라고 말했다.
노용왕은 잠시 동안 생각한 후 “상제께서 그 선방만큼은 망령되이 아무에게나 전수하지 못하게 할 것이나 오늘같이 상황이 촉박한 정세하에 생각할 겨를이 없으므로 즉시 3천수 선방을 당신에게 건네주겠습니다.”고 말했다.
손사막 역시 즉시 법력을 써서 비를 내리게 하여 노용왕을 구해 주었다. 후에 용궁에서 얻은 3천수 선방을 손사막은 천금요방 속에 기입해 두었다. 이 처방들은 모두 신기한 약효를 갖고 있다. 운남성에 있는 곤명호는 둘레가 150km 이며 남북의 길이는 40km 이고 넓이는 300평방km나 되는 큰 호수이다.
이상의 고사는 비록 신화에 가깝지만 손사막을 숭배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천금요방이나 천금익방에 수록되어 있는 고사이다. 이 두 책의 한의학 거작은 손사막이 수 십 년간 의료봉사 활동을 하며 실제로 누적된 경험들의 총집결이다.
손사막은 중국 의학상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가 한의학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생리, 병리, 치료, 약물, 방제 등에 걸쳐 기초이론,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구급, 식료, 침구과, 기공, 안마를 비롯하여 총 232 문(門)으로써 5300 수의 방론(方論)이 천금요방에 수록되어 있으며 천금익방에 수록되어 있는 방제까지 합하면 모두 6500 개의 방제가 수록되어 있다. 질병을 소속 장부에 따라서 분류했는데 이는 현대 임상의학적 분류법과 유사하다. 장맥론(臟脈論), 침구지법(針灸之法), 맥증지변(脈證之辨), 식치지의(食治之宜), 부녀과(婦女科), 영아과(영兒科), 각기와 중풍, 옹저(癰疽)와 수종, 칠규지병(七竅之病), 오석지독(五石之毒), 비급지방(備急之方), 양생지술(養生之術) 등을 포함하여 도합 30 권이다. 천금익방은 천금요방의 속편으로써 30 년간 행의(行醫) 경험을 수록해 놓았으며 천금요방을 보충 설명한것으로 역시 30 권이며 손사막이 일생 동안 심혈을 경주하여 편찬한 주옥같은 보귀적(寶貴的)인 유산이다.
손사막은 일생 동안 권태를 모르고 꾸준히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자기 경험에 비추어 “독서삼년(讀書三年), 편위천하무병가치(便謂天下無病可治), 치병삼년(治病三年), 편위천하무방가용(便謂天下無方可用).” 이라고 항상 말했다. 다시 말하면 “한의학 책을 삼년 읽어도 치료할 만한 병이 없고 질병을 삼년 동안 치료해 봐도 쓸 만한 처방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만큼 한의학은 어려운 학문이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거만하고 자만심이 많은 의사들은 자기 스스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말하며 환자의 질병을 3년간 치료하고 나서도 자기가 쓸 만 방이 아주 적다는 것을 안다.
손사막은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습득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상 실험 효과를 중시했다. 그는 기존방식을 고집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했으며 그래서 새로운 많은 발견을 스스로 해낸 것이다.
그는 당뇨병 환자의 소변이 달다는 것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의사이다. 당뇨 환자에게 약물 복용 외에 닭고기와 우유와 돼지의 간을 먹으라고 말했는데 현대 과학적인 이론에 합당하다. 그는 소갈병 환자들은 대부분 피부에 농종이나 농양이 생기면 아니 되므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치료해야 된다고 말했다. 또 소갈병이 100일이 넘은 환자에게 피부에 상처를 주는 것은 피해야 되기 때문에 침구의 사용은 불가하다고 말했다. 소갈병 환자에 대해서 이와 같은 발견은 가치 있는 발견이었다.
손사막의 옹저(癰疽 : 급성화농성감염(急性化膿性感染))의 치료법은 다음과 같다.
“청호일담소작회(靑蒿一担燒作灰), 우죽통중임취즙(于竹筒中淋取汁), 이일이합화석회여면장(以一二合和石灰如面漿), 이침자창중지통(以針刺瘡中至痛), 즉점약삼편기근자발(卽点藥三遍其根自撥).”
다시 말하면 “청호(개 사철 쑥) 한 다발을 태워서 재를 만든다. 큰 대나무의 통속에서 즙을 한 홉 내지 두 홉을 취하여 청호재와 섞어 특특한 죽처럼 만든 후 환부에 침을 찔러 통증이 있으면 그때 약을 환부에 발라준다. 세 번만 치료하면 근이 빠져서 치료된다.”는 뜻이다.
손사막은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30여 명의 외과창절(外科瘡癤)을 치료하였다. 치유율은 100% 였다.
정관(貞觀) 4년 손사막 자신이 입 주위에 절자(癤子)가 생겼다. 절자는 안면 부위에 생기는 정창(疔瘡) 즉 종기를 말한다. 청호 고약을 10 일 동안 부착하여 치유되지 않았다. 그래서 손사막은 다시 연구한 끝에 “창이근경묘자소위회(蒼耳根莖苗子燒爲灰), 이초감정(以醋疳淀), 화니도상(和泥涂上), 수건수환(隨乾隨換), 불과십차(不過十次), 즉발근출(卽撥根出).” 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창이의 새로 올라오는 지하경과 싹을 잘라 태워서 재를 만들어 식초와 섞어 놓으면 앙금이 생기는데 죽처럼 생긴 앙금을 환부에 발라준다. 마르면 다시 새것으로 갈아 부친다. 열 차례 치료했더니 완치되었다.”는 뜻이다.
손사막은 후에 이 방법을 사용하여 단독(丹毒), 대상포진(帶狀疱疹)과 임파결핵과 음창(陰瘡)을 치료하였다. 음창엔 음건선(陰乾癬), 음습양(陰濕瘍), 음식창(陰蝕瘡), 투정창(妬精瘡), 음악창(陰惡瘡), 음감창(陰疳瘡) 등이 포함된다.
천금요방에 보면 외과와 골상과 질환의 치료방법도 적지 않게 기재되어 있다. 외과 난치병을 치료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녹근(鹿筋)을 침연(浸軟) 한 후 한쪽 끝을 실로 칭칭 감아 묶어 총알처럼 만든 후 목구멍으로 넘기면 식도와 인후부위에 있는 이물질을 제거시켜 준다. 또 파줄기의 한 쪽 끝을 잘라내어 구멍을 만들고 천천히 요도속으로 집어넣으면 요도가 뚫리면서 방광속에 축적되어 있던 소변이 파줄기를 통하여 흘러나온다.
또 구맥환(瞿麥丸)을 외과수술에 다음과 같이 사용했다.
쇠로 만든 화살촉이 살 속에 박혀 있을 때 구맥환을 복용하고 나면 화살촉이 박혀있는 부분의 근육이 줄어들어 화살촉이 밖으로 노출되기 시작한다. 그러면 집게로 잡아 뽑으면 화살촉이 나온다. 또 대마근(大麻根)의 지통작용을 이용하여 완골절(脘骨折) 손상을 치료했다.
폐결핵병을 비시(飛屍) 또는 귀주(鬼疰)라고 불렀다. 또 곽란(霍亂)은 옛날 사람들은 그 병의 원인을 몰랐었다. 인체의 어느 부위가 고장이 생겨 곽란이 일어나는 것인가를 몰랐다. 그래서 무의(巫醫)들은 귀신이 앙화를 입힌 것이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손사막은 비시병의 근원은 폐장(肺臟)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곽란은 음식물 전염이지 결코 귀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손사막은 또 광견병(狂犬病)에 걸린 개의 뇌장액(腦漿液)을 광견병 환자에게 발라줌으로써 광견병을 치료하였다. 또 야맹증(夜盲症) 치료에, 돼지의 간을 복용시켰다. 손사막은 다년간 임상 경험에 의하여 양간(羊肝)과 저간(猪肝)과 계간(鷄肝) 등을 비롯한 동물의 간이 야맹증을 치료해 준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했다. 그리고 행인(杏仁)과 우유와 백밀(白蜜)과 곡피(穀皮) 등으로 각기병이 치료된다는 것도 발견했다.
유럽 사람들이 각기병을 서기 1642 년에 발견하고 치료했는데 이는 손사막이 각기병을 발견하여 치료한 것보다 1000여 년 뒤의 일이었다.
손사막은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안과와 영양학과 기공과 양생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손사막은 안과 질병의 원인을 16가지로 구분했다. 그 중에 보면 “야독세서(夜讀細書), 월하간서(月下看書), 시지광도불구(是指光度不够), 자연노목이성근시(自然勞目而成近視).”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밤에 등잔불 밑에서 잔글씨를 읽거나 밤에 달빛 아래서 책을 읽으면 광도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이 쉽게 피로해져서 근시가 되기 쉽다.”는 뜻이다. 또 해를 직접 눈으로 쳐다보면 광도가 강해서 시력 손상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해조(海조)와 곤포(昆布 : 해대(海帶)와 양엽(羊엽)과 유수(柳須)는 대경포(大頸疱 : 갑상선)의 치료에 사용했으며 방기(防己)와 세신(細辛)과 서각(犀角)과 피마엽피(麻葉)과 방풍(防風)과 비타민 B1이 많이 함유된 곡피(穀皮) 등은 각기병의 치료에 사용했다. 치료효과가 신기했다.
세계의학 문헌상에 보면 이상과 같은 발견은 근세기에 발견된 것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은 1400여 년 전에 이미 손사막에 의하여 사용되었던 것 들이다. 1970년 현대 과학 실험에 의하여 버드나무 수염(柳須) 속에 요오드(沃度 : Iodine)의 함량이 많다고 증명되었다.
손사막은 “아무리 좋은 건강식품을 섭취해도 양생지도(養生之道)를 이해하지 못하면 장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사지관절을 움직여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사막은 정신조리에 유효한 방법은 소사(少思), 소념(少念), 소욕(少欲), 소사(少事), 소어(少語), 소소(少笑), 소수(少愁), 소희(少喜), 소노(少怒), 소호(少好). 소오(少惡) 등 열 한가지 소(少)를 실행하는 것이다 고 말했다. 소(少)란? 지나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손사막은 여러 가지 치료방법을 종합해서 질병치료를 하였다. 한약도 쓰고 침도 놓고 구법(灸法)도 사용했다. 손사막은 종합 치료 중에서 특별히 침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후에 명당침구도(明堂針灸圖)를 저술했다. 그 당시 대부분 의사들에게 탕약은 잘 알고 침구는 잘 모른다 던가 구법은 잘 알면서 침술은 잘 모른다든가 또는 한 가지 약방(藥方)으로 모든 병을 치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손사막은 종합 치료를 적극 장려하였기 때문에 “식료불유(食療不愈), 연후명약(然後命藥), 약(藥), 식(食), 양공(兩攻), 즉병무소도즉(則病無所逃), 탕약공기내(湯藥攻其內), 침구공기외(針灸攻其外), 즉병무소도의(則病無所逃矣).”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음식으로 치료해 봐서 병이 낫지 않으면 후에 약을 써라. 약과 음식으로 질병을 치료하면 질병은 도망 갈 곳이 없다. 탕약으로 안을 치료하고 침구로 밖을 치료하면 병은 도망 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손사막은 장기적 임상 실험과 남달리 주밀한 관찰력을 통하여 역대 명의들이 발견하지 못한 병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손사막은 질병의 예방을 강조하였다. 즉 : “상의치미병지병(上醫治未病之病), 중의치욕병지병(中醫治欲病之病), 하의치이병지병(下醫治已病之病)” 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상의는 병이 아직 들지 않았을 때 치료하고 중의는 질병이 더욱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 하의는 이미 들어있는 병만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미병지병(未病之病)과 욕병지병(欲病之病)은 질병 발생을 예방하고 질병 확산의 방지를 의미한다.
손사막은 고명한 의사는 반드시 “소미기지환(消未起之患), 치미병지질(治未病之疾), 의지어무사지전(醫之於無事之前)”해야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고명한 의사는 질병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치료해야 된다. 그리고 의술이란? 질병발생 전에 치료하는 것이다.”는 뜻이다.
그래서 손사막은 “질병 예방을 위해서 사람이 멀리 여행을 떠날 때는 상비약으로써 숙지황과 쑥, 비급환(備急丸), 심기약(心肌藥), 정종약(疔腫藥), 수은(水銀), 대황(大黃), 망초(芒草), 간강(干姜)과 독사와 벌과 전갈과 지네의 독을 없애주는 약을 준비하여 가지고 다녀야 된다.”고 말했다.
천금요방 중 제29권과 제30권 및 천금익방 중 제26권, 제27 권, 제28 권 모두 다섯 권은 침구와 관계된 책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다섯 권을 “손씨침구경(孫氏針灸經)” 이라고 부른다. 손사막은 침구에 대하여 남달리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중 손사막의 “동신촌취혈법(同身寸取穴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체 각 부위에 있는 침점의 절양법(折量法)은 남자는 왼손 여자는 오른손에서 취하는데 가운데 손가락 제일절의 길이가 그 사람의 일촌(一寸)이며 또는 대무지(大拇指)의 제일절의 가로의 길이가 그 사람의 일촌이다. 이것이 손사막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촌수이다. 기혈(奇穴)과 아시혈(阿是穴)도 손사막이 찾아 낸 신침점(新針點)이다.
손사막은 채색경락혈위도(彩色經絡穴位圖)를 창안해 냈다. 애석하게도 도중에 분실되고 말았지만 12경맥에 다섯 가지 색을 칠하여 표시했고 기경팔맥에는 녹색(綠色)을 칠하여 표시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분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외에 손사막은 “침구병시(針灸幷施), 침약병용(針藥幷用), 약침이불구(藥針而不灸), 구이불침(灸而不針), 개비양의야(皆非良醫也).”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침과 뜸을 함께 사용해라. 침과 약을 함께 써라. 만약 뜸이 없이 침만 사용하거나 침 없이 뜸만 사용하면 양의가 아니다.”는 뜻이다.
약물과 방제학 면에서도 손사막은 직접 산이나 들에 나가 손수 채약하여 임상 실험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손사막은 누구보다도 풍부한 채약경험과 제약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손사막을 약왕(藥王)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 있다. 손사막은 232종의 약물의 채집 계절에 대하여 수록해 놓았으며 약초의 꽃과 줄기와 잎과 뿌리와 열매들의 채집에 가장 좋은 시기를 설명해 놓았다. 약초는 적당한 채집시기를 놓치면 부당한 가공처리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즉 “도유약명(徒有藥名), 종무약실(終無藥實)”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약의 이름 뿐 실질이 따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손사막은 680여 개의 사용 약재를 소개했다. 특히 133개 주(州)에서 519종의 약재를 골라 약용가치를 설명해 놓았다. 각기 다른 지방에서 생산되는 약재의 특성도 아울러 설명해 놓았다. 손사막은 어떤 한약은 일정한 질병에 특수한 치료효과가 있음도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백두옹(白頭翁)과 고삼(苦蔘)과 황련(黃連)은 이질의 치료에 효과가 있고 상산(常山)과 촉칠(蜀漆)은 학질의 치료에 효과가 있으며 빈랑(檳랑)은 촌충(寸蟲), 회충(回蟲), 요충(蟯蟲)의 살충효과가 있으며 주사(朱砂)와 웅황(雄黃)은 해독, 살충에 효과가 있음을 손사막은 임상 실험을 통하여 스스로 발견하였다.
어느 날 다리가 몹시 아픈 환자가 손사막을 찾아와 치료를 청하였다. 손사막은 먼저 약을 복용시킨 후 침을 놓았는데 통증이 없어지지 않고 환자는 치료하기 전과 다름없이 계속하여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손사막은 기괴한 일도 다 있구나!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손사막은 기어코 그 원인을 찾아내기로 결심하였다. 아무래도 이 환자는 생리적으로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을까? 혹은 침점의 위치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손사막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선배들이 발견한 365 개의 침점 외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침점은 없단 말인가? 하고 생각해 봤다. 손사막은 환자의 신상에 지두(指頭)를 사용하여 전신 지압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자에게 손가락 끝으로 피부를 누를 때 마다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하나하나 물었다. 그런데 누를 때 마다 환자는 아프지 않다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래서 손사막은 “내가 누를 때 아프면 나에게 말해 주시오?”하고 환자에게 부탁했다. 동시에 손사막은 통점을 찾으려고 계속 노력하였다.
손사막의 손끝이 환자의 어느 부위를 누를 때 환자는 돌연히 아! 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손사막은 환자의 피부를 손가락으로 누를 때 환자가 아! 소리를 내는 점을 표시해 놓고 “아시혈(阿是穴)”이라고 명명하였다. 손사막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는 아시혈이다. 손사막이 발견한 아시혈에 다시 침을 놓고 나니 다리의 통증은 즉시 사라지고 말았다. 아시혈 침구법(鍼灸法)은 손사막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후세 의학가들이 질병 치료에 즐겨 사용하고 있다.
어느 날 손사막은 노상에서 널을 지게에 짊어지고 공동묘지로 가는 청년을 만났다. 손사막은 시체 속에서 흘러나온 피가 널 바깥으로 한 방울씩 뚝 뚝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손사막은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청년 앞으로 다가서서 길을 가로 막았다. 널을 손으로 붙잡고 가슴이 메어져 구슬피 울고 있는 할머니를 떼어 놓았다. 그리고 손사막은 할머니에게 죽은 사람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원래 죽은 사람은 할머니의 무남독녀 외딸이었다. 애를 낳다가 난산으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손사막은 할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에게 “할머니! 널을 지고 가는 저 젊은 사람에게 빨리 널을 열라고 말하십시오. 당신의 딸이 살아날 수 있는 기미가 엿보입니다.”고 말했다.
널을 짊어지고 가던 청년이 이 말을 듣더니 처음엔 널을 열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널을 열어보라고 말한 의사가 약왕 손사막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즉시 널을 열어 보였다.
손사막은 사자(死者)의 맥을 짚었다. 맥이 완전히 정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침자리를 찾아 침을 몇 개 시체위에 꽂았다. 잠시 후 죽었다던 임신부는 살아났다. 동시에 아기도 순산하였다. 손사막은 한 번에 두 사람을 살려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근 백성들은 이 사실을 알고 손사막을 활신선(活神仙)이라고 칭했다.
손사막이 90세 되던 해에 조정의 재상(宰相) 위징(魏徵)이 당태종의 명으로 제(齊) 나라와 양(梁) 나라와 진(陳) 나라와 주(周)나라와 수(隋) 나라의 오대(五代)역사책을 편찬하게 되었다. 위징은 역사책 편찬에 있어 오류(誤謬)가 있지나 않을까? 또는 누락된 역사적 사실이 있지나 않을까? 매우 염려하였다.
그래서 위징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손사막의 조언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위징은 손사막이 가장 좋아하는 술병을 손에 들고 손사막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적극적인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 당시 광경을 구당서(舊唐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손사막화주제간사(孫思邈話周齊間事), 역역여안견(歷歷如眼見).”
다시 말하면 “손사막은 주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처럼 설명했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위징은 사서 편찬을 전적으로 손사막에게 의지하였다. 왜냐하면 손사막이 박학다식하다는 소문은 온 세상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손사막은 위징의 적극적이고 끈질긴 요청에 못 이겨 진귀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어 역사책은 잘 편찬되었다.
손사막이 당태종 이세민의 처(妻) 이후낭낭(李后娘娘)의 병을 치료하던 중 황가의 예의와 태의들의 거듭되는 습관과 전통적 관념의 속박을 타파하였다. 손사막은 황후를 진맥할 때 황후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삼엄한 계율(戒律)을 대담하게 배척했다. 의사가 황후의 손목을 직접 자기 손으로 붙잡지 못하고 황후의 손목을 실로 묶어서 진맥하게 하고 비단 커튼으로 가리고 진맥하므로 황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니 진맥을 정확하게 할 수 없다고 대담하게 태종에게 아뢰었다.
손사막의 말을 듣고 당태종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손사막의 말대로 허락하였다. 궁녀가 얇은 비단으로 만든 커튼을 걷어 올리고 난 후 손사막은 한쪽에서 황후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그리고 손사막은 직접 자기의 손으로 황후의 손목을 꽉 붙잡고 진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부 태의들은 손사막의 의견에 극구 반대하였다. 당태종은 황후로 하여금 손사막이 처방한 소시호탕(小柴胡湯)을 복용하라고 권하였다.
소시호탕을 복용하고 난 후 황후의 병은 완치되었다.
이와 같은 일개 민간 전설은 손사막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후세 의가에서 손사막이 생명을 무릅쓰고 황가의 엄격한 규율과 전통적 관념을 타파시켰다는 것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 하나의 고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무더운 여름 날 뙤약볕이 불처럼 타올랐다. 어느 농민이 노새 등에 숯을 실어 나르는 비즈니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노새가 갑자기 흑한병(黑汗病)에 걸렸다. 노새는 길바닥에 쓰러져 뻐르적거리고 뒹굴며 일어나지 못한다. 노새 주인은 하늘을 쳐다보며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 마리밖에 없는 노새가 죽으면 살아 갈 길이 암담하기 때문이다. 노새 주인의 근심 걱정은 태산과 같았다. 마침 이때 손사막이 노새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노새 주인을 위안시키는 것은 뒤로 미루어 놓고 즉시 노새 주인에게 빨리 부근에 있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 굴뚝 속에 있는 검정재를 긁어서 퍼오라고 말했다. 손사막은 굴뚝 속에서 퍼온 검정재를 물에 풀어 노새에게 먹였다. 밤 12시 쯤 노새는 목이 말라 물을 꿀꺽 꿀꺽 마셨다. 노새의 병은 즉시 치유되었다. 노새 주인이 손사막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할 때 손사막은 표연히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손사막에 대한 수많은 전설과 신화와 고사 중에서 “침용폄호(針龍砭虎)”라고 부르는 고사 또한 유명하다.
청룡(靑龍)에게 치통(齒痛)이 생겼다.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았다. 청룡은 손사막을 찾아가 치료를 청하였다. 손사막은 청룡에게 병정을 물었다. 그러고 나서 손사막은 청룡에게 침을 놓아 치료해 주었다. 청룡은 손사막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손사막의 집이 있는 약왕산상(藥王山上)의 태현동 까지 40리가 되는 굴을 뚫어 주었다.
어느 날 손사막이 한약을 작은 당나귀 등에 잔뜩 싣고 왔다. 그런데 늙은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손사막의 작은 당나귀를 잡아먹었다. 당나귀의 뼈가 늙은 호랑이의 목에 걸려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호랑이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늙은 호랑이는 부득이 손사막에게 찾아가서 치료해 달라고 부착했다. 손사막은 약동(藥童)에게 의령(醫鈴)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의령은 가운데가 텅비어 있는 금속구(金屬球)를 일컫는다. 손사막은 의령을 늙은 화랑이의 입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사막은 자기 손을 늙은 호랑이의 목구멍 속에 집어넣어 목구멍에 걸려있는 당나귀의 뼈를 끄집어냈다. 늙은 호랑이는 손사막에 대하여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늙은 호랑이가 손사막의 작은 당나귀를 잡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손사막으로 부터 호랑이게 아무런 보복이 없었다.
늙은 호랑이는 손사막에게 “오늘 부터 당신의 작은 당나귀 대신 내가 약을 실어 나르겠습니다.”고 말했다. 늙은 호랑이는 당나귀 대신 일함으로써 손사막에게 조그마한 성의를 표시하고 싶었다. 오늘날 태현동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석방(石坊)의 서쪽에 “취호평(聚虎坪)” 이라고 부르는 들판이 있는데 이 들판은 “호랑이가 모여드는 들판”이란 곳으로써 이상과 같은 전설이 발생했던 곳이다.
석방이란? 돌로 문짝이 없이 아치형으로 만든 기념비를 일컫는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부터 손사막은 호랑이의 등을 타고 다니므로 매우 편리했다. 그러나 환자의 집안사람들이 손사막이 타고 다니는 늙은 호랑이를 쳐다보고 너무나 놀랐다. 그래서 아무도 손사막 앞에 감히 다가설 수 없었다. 손사막은 환자의 집안사람들에게 한약을 다려먹고 난 후 한약 찌꺼기를 대문 밖 길옆에 버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 늙은 호랑이는 한약 찌꺼기를 발견한 후 더 이상 나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후세 민간에서 한약을 다려먹고 난 후 꼭 한약 찌꺼기를 문전(問前) 노상(路上)에 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손사막은 37세부터 40년 동안 왕실내에 사고가 많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손사막은 노자와 장자 및 제자백가들의 학설에 심취하였다. 특히 노장(老庄)의 무위사상과 불교의 열반(涅槃)에 도취되어 염세사상(厭世思想)을 갖게 되었다. 즉 손사막은 현실도피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태백산 종남산 일대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손사막은 편작, 창공, 화타, 장중경, 왕숙화, 황보밀, 갈홍 등의 저서를 밤낮으로 읽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손사막이 은거 생활을 하고 있는 산속은 천연적인 약포(藥圃)였다. 또 민간 행의를 하며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산에 올라가서 직접 채약해 온 약초들로 처방을 만들고 그 처방에 대하여 직접 실험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풍부한 의약지식을 겸비하게 되었다.
무덕(武德) 년간에 손사막은 정명(淨明)이라고 부르는 비구니(比丘尼)의 위로 토하고 아래로 설사가 그치지 않는 병을 치료해 주어 완치되었다. 정관 초년(서기 626년)에 만성 소모성 질환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정관 9년(서기 634년)에 수종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영휘(永徽) 원년(서기 649년)에 근상(筋傷)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행의 수 십 년 동안 문등병 환자 600여 명을 치료했는데 그 중 60여 명이 완치되었다. 전간병 환자 일 천여 명을 치료하여 정상으로 회복시켰다. 손사막은 많은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어려운 질병도 치유했다.
위진(魏晉) 이래로 복석지풍(服石之風)이 크게 일어났다. 적지 않은 사대부(士大夫)들이 퇴폐적인 생각을 가지고 낭비하는 생활을 했다. 그들은 불로장생을 추구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단가(煉丹家)들을 통해서 유황(硫黃), 백석영(白石英), 자석영(紫石英), 석종유(石鐘乳), 적석지(赤石脂) 등 광물로 연제한 오석산(五石散) 분제(粉劑)를 복용하였다. 오석산을 복용한 후 그들은 전신에 조열(燥熱)이 발생하여 두터운 옷을 입지 못하고 더운 음식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이 모두 찬 것을 좋아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오석산을 한식산(寒食散)이라고 칭했다.
오석산의 약력 작용 때문에 드러누어 있어도 불편하고 정신은 미친 사람처럼 정상이 아니었다. 옷은 항상 벗고 살아야 하며 모자는 큰 것만 골라 써야 한다. 한가하게 빈둥거리며 이곳저곳 노닐고 돌아다닌다. 왜냐하면 속에서 열이 북바쳐 올라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활로 바뀌는 것이 보편적이다. 사실 복석의 폐단으로 부터 발생되는 증상은 예날 부터 매우 분명했다. 설근(舌根)이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혀가 짧아져서 말을 잘 할 수 없게 된다. 등에 옹창이 난 자리가 움푹 패어 들어간다. 그 결과 등쌀이 썩어 들어간다. 불구자가 되는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다.
진무제(晉武帝) 때 배수(裵秀)라는 사람은 오석을 복용하고 나서 전신에서 불덩이처럼 열이 나서 미칠 것 만 같았다. 집안 식구들이 찬물을 온 몸에 끼얹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또 북위(北魏)의 도무제(道武帝 : 서기 386년∼서기 409년) 역시 오석을 복용하고 나서 정신이상이 되었다.
진(晉) 나라 때 저명한 침구학가 황보밀(皇甫謐)은 복석 후 대병에 걸렸다. 하반신 불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육체적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자살을 기획하였었다. 손사막은 상층사회에 복석지풍(服石之風)이 유행하여 발생한 폐단을 눈을 뜨고 차마 볼 수 없어 원한과 증오가 극에 달한 나머지 상층사회 사람들을 호되게 비난하였다.
손사막은 침으로 그들의 통증을 없애주었으며 그들에게 “식이오석이구방중락(食餌五石以求房中樂), 차개병지근원(此皆病之根源)”이라고 갈파하였다. 다시 말하면 “달콤한 성행위를 추구하기 위하여 오석을 복용하는 것이 모든 병의 근원이다.”는 뜻이다.
손사막은 오석복용의 독부작용을 해독시키기 위하여 백시탕(白豉湯)과 감초탕(甘草湯)과 두중탕(杜仲湯)과 맥동탕(麥冬湯)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손사막은 오석을 복용하고 사경을 헤매던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
손사막은 지나친 성생활을 금하라고 반복 강조했다. 손사막은 “자방종기정욕(恣放縱其情欲), 즉명동조로야(則命同朝露也)”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과도한 성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생명은 아침 이슬과 같다.”는 뜻이다.
손사막은 또 “복약백이(服藥百裏), 불여독와(不如獨臥)”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보약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독면(獨眠)과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손사막의 박학다식함과 고명한 의술은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 당시 당초(唐初) 4대 시인 중 한 사람인 노조인(盧照隣)과 문학가이며 의약가인 맹선(孟詵)과 서법가(書法家) 송영문(宋令文)과 침구(針灸)의 태의령(太醫令) 사계경(謝季卿)과 견권(甄權)과 견입언(甄立言) 형제 등이 한 곳에 모여 서로 토론하고 함께 연구하여 각자 지식의 영역을 넓히고 피차의 학술 견해를 교류하였다.
손사막의 저서는 천금요방과 천금익방 외에 노자장자주(老子庄子註)와 복록론(福祿論)과 섭생진론(攝生眞論)과 단경요결(丹經要訣) 등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손사막의 천금요방을 의약보전(醫藥寶典)으로 귀하게 여기고 있다. 미국 MIT 공과대학의 어느 교수는 손사막의 단경요결을 입수하여 그중 연단적방자(煉丹的方子)의 화학과정을 분석 연구하여 정리했다. 그리고 손사막의 연단술은 현대 화학적으로도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긍정했다. 그 가치를 인정하여 단경요결은 일부 과학사(科學史) 전문서적임이 틀림없음은 물론 세계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손사막이 1400여 년 전에 발명한 화학분야의 공헌은 지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으로 부터 1400여 년 전에 발표한 화학논문이 21세기 저명한 화학박사에 의하여 인정받았으니 손사막은 1400년 전에 화학박사 학위를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손사막은 “담욕대이심욕세(膽欲大而心欲細), 지욕원이행욕방(智欲圓而行欲方)”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두개의 격언을 잘 알고 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 두개의 격언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담하면서도 세심해야 되고 지혜가 두루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행위는 바르게 해야 된다.”는 뜻이다.
당고종(唐高宗) 영순(永淳) 원년(서기 682년) 겨울 손사막이 어느 날 목욕을 깨끗이 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대청마루에 단정히 앉아 자손들에게 “나는 지금 어디로 가버릴 것이다.”고 말하자마자 기가 끊어져 버렸다. 죽은 지 일 개월 후 까지도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집안 식구들이 손사막을 대렴하여 입관시키려 할 때 보니 수의만 남아있고 시신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당시 전염병이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일대에 유행하여 무수한 생명을 앗아갔다. 길가에 버려진 시체를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질병에 걸려 있는 환자들이 손사막을 꼭 필요로 하는 때에 사방팔방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위대한 의약학자 손사막은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종년 102세 였다. 번잡한 장례식을 피하고 간단한 장례식을 거행했기 때문에 부장품도 없었고 가축을 잡아 장례식에 사용하지도 않았다. 섬서성 요현(陝西省 耀縣) 손가원(孫家源)에 손사막의 옛집이 있다. 그리고 약왕산에 지금도 약왕묘(藥王廟), 배진대(拜眞臺), 태현동(太玄洞), 천금보용비(千金寶要碑) 등 손사막과 관계된 많은 유적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