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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고전 7:25-31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고전 7:25-31 / [종말을 눈앞에 둔 미혼 남녀들] 이제 나는 여러분이 질문한 것 중에서 또 다른 문제에 대해 대답하겠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결혼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 주께로부터 특별히 받은 명령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비롭게도 내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기쁘게 여러분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26) 우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결혼하지 않은 채 지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27) 그렇다고 해서 결혼한 사람들도 헤어져서 사는 게 좋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런 때에 서둘러서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8) 만일 그래도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남자들은 결혼하십시오. 똑같은 이유로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거든 결혼하십시오. 결혼이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결혼은 하고 나면 전에 없던 어려운 문제들이 생길 것이므로 그것을 근심해서 하는 말입니다. 29)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극히 짧고 주님의 일을 할 기회도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내가 있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서 가능한 한 자유로운 몸이 되십시오. 30) 행복이나 슬픔이나 재산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31) 이 세상 유혹에 접할 많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그 기회를 바르게 이용하고 거기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곧 지나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결혼 문제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처녀의 결혼을 다룹니다. 처녀의 결혼 문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진지한 물음 안에서 처녀의 결혼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처녀에 대하여는(25-28) 바울은 먼저 처녀의 결혼에 관해서는 하나님께 받은 계명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처녀의 결혼에 관한 바울의 견해는 “그냥 지내는 게 좋다.”입니다. 미혼자들은 결혼하지 않는 게 좋고, 기혼자들은 굳이 독신생활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결혼이 나쁜 일이거나 죄라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이고, 결혼한 사람에게는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종말에 있을 고난, 혹은 결혼 생활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처녀의 결혼에 대한 바울의 견해에서 핵심은 ‘결혼할 것이냐, 독신으로 있을 것이냐?’가 아닙니다. ‘날로 거세지는 로마제국의 핍박 안에서 어떻게 신앙을 잃지 않으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것인가?’입니다.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29-31) 결혼을 종말이란 때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바울은 결혼이란 일상의 일을 재림신앙, 종말신앙 안에서 폭넓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가 더 가까워졌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인 종말에는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종말이 되면 영원히 가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명확히 드러날 것입니다. 인생의 과제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영원히 가치 있는 일과 연결될 시간을 사는 일입니다. 성도는 주님을 만나 거듭났기에 영원히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고, 주님은 곧 오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젠가는 없어질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것,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초점은 결혼이나 독신이 아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까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거룩하게 쓰는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건강한 재림신앙, 종말신앙으로 살며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자리에서 그 부름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 때, 결혼은 세상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됩니다.
적용: 건강한 재림신앙, 종말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시선을 떼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겨야 합니다. 사라지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 설 교 >
종말론적 삶의 자세
고전 7:25-31 / 이종철목사
종말의식
일전에 연예인들의 뇌 구조를 그리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뇌 구조를 그린다면 어떨까요?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저는 ‘종말의식’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끝이 나고 주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 곳곳에 그런 의식이 잘 드러납니다.
26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종말 직전에 대대적인 환난이 있다는 것이 종말론의 과정입니다. 바울은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29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주님의 재림이 앞당겨졌다는 바울의 주관적 느낌입니다. 31절,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사라질 것이라는 태도로, 바울이 세상일이나 신분의 변화나 소유에 무관심한 이유입니다.
바울의 윤리적 권면은 이 종말 의식에서 나옵니다. 바울이 왜 독신을 권유합니까? 아무래도 가족이 있으면 고난이나 환난의 때에 옳은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가 되었지만, 가족이 위험하면 그런 선택이 꺼려지고 심지어 배교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28절,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기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다”라며 태도를 누그러뜨립니다.
곧 주님이 오시는데 가정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주님의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곧 주님이 오시는데 노예이건, 여성이건, 이방인이건 자기 신분을 바꾸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에너지와 열정을 주님의 일에 쏟아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온전한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곧 주님이 오시는데 땅의 소유에 힘쓰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다 불에 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예도, 권력도, 지식도 다 쓸데없습니다. 영원한 그리스도를 얻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이것을 종말의식이라고 합니다. 종말의 임박성은 사라졌지만, 이 세상의 외형은 사라지고 하늘나라의 것만이 영원하다는 생각은 기독교 윤리의 근간입니다. 종말의식 때문에 세상일에 무관심하고, 제도개선에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신앙인들이 철저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오히려 세상을 더 건강하고 평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역작 『신의 도성』은 신앙인의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이 책은 로마가 멸망해가는 와중에 쓴 책입니다. 로마인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민족의 침입에 의해서 쇠퇴해 가는 것에 불만을 표했습니다. 『신의 도성』은 이에 대한 변증입니다. 기독교의 목표는 이 땅의 도성의 건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로마인들은 돈을 모으고, 별장을 짓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이것을 하찮게 여깁니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자선을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삶이 진정한 삶입니다. 이 세상의 도성에서는 왕일지라도 천국에서는 하인에 불과합니다.
종말 의식이 있는 신앙인이라면 돈을 모으는데 관심하기보다는 그 돈을 어떻게 잘 사용할지를 더 고민합니다. 이 땅에 쌓은 양식은 녹 쓸고 덧없이 사라지지만, 자선이나 나눔은 하늘 창고에 쌓는 영원한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오히려 찬송을 부르고 환영합니다. 육신의 낡은 옷을 벗고 새옷을 덧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민족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종말의 윤리입니다. 불교는 생명의 소중함이나 비움과 자기부정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유교는 충효의 윤리를 제공했습니다. 한국기독교는 천국신앙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자비와 사랑과 용서와 포용과 섬김과 희생과 낮아짐의 길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고대 로마인들과 똑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부를 쌓고, 숫자를 늘리고, 화려한 건물을 세우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힘으로 굴복시키고, 차별하고 독선적입니다. 신의 도성이 아니라 땅의 도성을 세우기에 연연합니다.
디스토피아
신앙인들에게 천국은 매우 밝은 그림입니다. 그러나 실제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의 멸망이라는 끔찍한 재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만든 작품과 그 생명을 파괴해야 하는 매우 냉정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디스토피아 소설이나 드라마가 인기입니다. 인류 문명의 멸망과 그 이후 세계를 그립니다. 그런데 대부분 비극적입니다. 인류로 말미암아 인간 문명뿐만 아니라 이웃 생명 공동체까지 파괴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인간종의 이런 무자비함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사피엔스라는 인간종이 지배한 불과 1만 년 사이에 대부분의 종들이 사라졌습니다. 공룡이 지배하던 시대는 수백만, 수천만 년이 넘었지만 많은 종들이 생태계 균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인간과 인간이 필요한 가축종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닭 고양이 개나 소입니다. 최고로 많은 동물이 200억 마리의 닭인데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식용으로서 필요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 기후위기 상황을 보니 정말 인류에게 이런 디스토피아적 현실이 우리 생애에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듭니다. 탄소 배출량을 줄여 1.5℃로 억제하는 것이 목표인데, 인간의 소비욕구와 국가간 경쟁 때문에 도무지 줄일 수가 없습니다. 1.5℃ 억제가 십년 이내에 실패하고, 3℃ 붕괴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불과 1℃ 상승에 이 정도 기상 이상을 보이는데, 그 이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손 쓰실 필요 없이 인간 스스로 디스토피아를 만들어낼 것 같습니다.
삶의 자세
소유와 소비 욕구를 줄이기 위해서는 바울의 윤리가 적절합니다. 바울의 윤리는 33절과 34절의 ‘호스 메’의 자세입니다. 헬라어 ‘호스(-과 같이) 메(아니다)’는 마치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자세를 말합니다. 모두 다섯 번에 걸쳐 이 ‘호스 메’를 말합니다.
첫째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살라고 합니다.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실제 부부 생활에서도 필요합니다. 자기 일, 곧 가족에 매이지 말고 자기 인생을 가지라는,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일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살라고 합니다. 현실의 고난이나 문제 때문에 슬프지만, 이것은 지나갈 것입니다. 잃는 것 대신에 보이지 않는 다른 것을 얻게 될 것이고, 더 성숙해질 것이고, 결국 더 영원한 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살라고 합니다. 합격하고 승진하고, 취직하고 좋은 일이 있어 기쁩니다. 그렇지만 이 일 또한 곧 사라질 것입니다. 또 이 기쁜 일 때문에 우리는 매이고 바쁘게 될 것입니다. 기쁨은 만끽하되 우리는 다가올 근심을 대비해야 합니다.
넷째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살라고 합니다. 어떤 물건을 산 자는 그것을 마치 소유하지 않은 자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풍부와 배부름의 비결이라 부릅니다. 잘 사용하고 나누면 됩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살았습니다. 빈곤이나 고난이 그들을 좌절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궁핍과 비천과 배고픔의 비결이라고 부릅니다. 한 마디로 자족입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 욕구를 자극합니다. 이 소유와 소비의 쾌락을 끊지 못하면 기후 위기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다섯 번째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살라고 합니다. 어떤 물건이나 지위를 차지하면 다 쓰고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고 남기라는 뜻입니다. 후세를 위해서 남겨야 하고, 나중에 자기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위해서 남겨야 합니다. 지금 공기나 자원을 현세대가 다쓰려고 하니 환경문제나 기후위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근본적으로 매이지 않으면 됩니다. 나그네처럼 살면 됩니다. 나그네에게 많은 소유는 오히려 짐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남으면 놔두고, 모자라면 좀 빈곤하게 살면 됩니다. 그냥 눈 앞에 있는 것을 즐기면 됩니다. 남의 일 구경하듯 세상일을 바라보거나, 제3자적 태도로 개입하면 됩니다.
나그네에게는 본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망각하면 안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사랑입니다. 마음의 즐거움과 행복입니다. 사명과 일입니다. 이 은혜를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고전 7:25=31 / 박덕기목사
새해 첫 날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1월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지난 석 주 동안 아주 귀한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하는데, 새 해 첫 주일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말로 해석하면, “네가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가 될 수 있고, 또한 “네가 이 사람들 곧 부모나 남편이나 처자식이나 연인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도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로 해석하면, “네가 이것들 곧 재물이나 사업이나 직장이나 쾌락이나 인기나 명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시간 다시 한 번 우리 모두에게,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 곧 사람이든지 세상 것이든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혼이 먼저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주일에는 지난해에 전한 ‘결혼에 관한 교훈’에 이어, ‘이혼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결혼생활과 이혼에 대한 교훈은, 성경이 관념적인 사유나 먼 피안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들의 실제 삶과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 말씀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결혼한 부부에 대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상대방에 대한 성적인 의무를 다하고,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얼마동안 분방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일도 부부가 합의해서 할 것이며, 그 후에는 다시 합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인간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송정 중앙 교회 모든 부부들이 하나님이 주신 해 아래서 행복하게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꼭 꼭 꼭, 꼭 꼭?)
그리고 이혼에 대한 교훈으로는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는 원론적으로는 이혼을 금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가정과 결혼 제도가 인간의 고안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신성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이혼을 식은 죽 먹듯이 하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자신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의 인생이 찢겨진 종이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고, 말씀과 기도와 믿음으로 가정을 지켜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주일에는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억압하는 가장 잔인한 폭군인 마귀와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게 된 영원한 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보톰 목사님은 ♪만 왕의 왕께서 저 사로잡힌 자 다 구원하시고, 참 자유 주셨네.♪라고 찬송했으며,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시인인 메데슨은 “주여 나를 사로잡으소서. 그리하면 나는 자유로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말은, 주님께 사로잡혀서 참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 한 분께는 자유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식, 돈과 재물, 사업, 쾌락, 명예, 권세, 탐욕, 인기, 시기, 질투 등 모든 것들의 종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분 주님께만 종이 되고, 모든 것에서는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갈 5:1) 우리 모두가 주께 속한 참 자유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고린도인들은, 육체는 추하고 악하며, 영혼만이 순수한 것이라는 헬라의 이원론적인 철학 사상의 영향을 받아, 두 극단에 치우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쪽은 육체를 어떻게 사용해도 상관없고, 본능이나 육욕을 충분히 만족시켜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육체와 그 본능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억압하고, 육체의 본능과 욕망은 모두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자의 사람들은 음행과 방탕을 일삼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하면서, 결혼마저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결혼 문제에 대하여 혼란을 겪었고, 결국 사도 바울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 여부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질문에, 먼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했고,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처럼 독신을 권장한 것은, 그가 독신주의자나 금욕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결혼 제도를 부정하는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그 당시 팽배했던 임박한 종말 사상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을 환난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권면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라는 말은, 이전에 언급한 기혼자의 이혼 문제나, 결혼 생활에 대한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거나 해설하여 권면할 수 있었지만, 처녀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말씀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가지고 권면할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런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라고 하면서, 처녀의 결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26절에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했습니다. 임박한 환난이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미혼 남녀 청년들의 결혼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아직도 짝을 찾지 못한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때로는 “주님, 저들을 순결한 처녀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도록 하려고 혼자 살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기도할 때도 많습니다.
27절에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고난의 시기에 직면할 경우, 결혼한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즉 기혼자는 기혼자의 신분 가운데서 환난과 고난을 견뎌내야 하고, 미혼자는 또한 미혼자로서 그대로 환난과 고난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기혼자는 박해나 환난 때문에, 아내를 버리거나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되며, 미혼자는 환난과 고통의 때 결혼함으로써, 더 많은 고통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8절에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미혼자들이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 한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결코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림 전에 대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날에는 아이 벤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결혼한 이들이 대환난의 날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은, 환난 때에 주님을 위하여야 되느냐? 가족을 돌아보아야 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겪게 될 고난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러한 경우를 생각할 때, 처녀로 그냥 지내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므로 처녀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 라고 한 것은, 혼자 사는 것이 편리해서 좋으니까 혼자 산다는, 인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동기에서 하는 독신 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 가운데 오늘은 특별히 29-31절을 중심으로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29절에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하는 말씀이 있고, 31절에는 “이 세상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된 고린도서에는 많은 책망도 있고, 많은 간곡한 권면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한 책망, 그러한 권면이 주어진 배후에는,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은 사도 바울의 긴박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원어 헬라어에는 ‘때’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1)크로노스-χρονο? 2)카이로스-καιρο? 라는 단어입니다. 보통 그저 막연한 때를 말할 때에는 ‘크로노스’라고 하지만, 그러나 긴박한 시간, 어떤 결정적인 시간을 말할 때에는 ‘카이로스’라는 말을 씁니다. 본문의 ‘때’는 바로 이 같은 결정적이고 긴박한 시간을 말하는 ‘카이로스’를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결정적인 시간 곧 주님의 재림과 환난의 임박성 때문에,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라고 한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비록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정확히 모르고, 내 생애 최후의 순간을 확실히 모른다고 할지라도, 내 인생의 마지막 때가 점점 임박해 오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날마다 단축하여 갑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짧고 긴박한 일생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과연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살라
아내가 있는 자는, 아내가 없는 독신자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말로 바꾸면 남편이 있는 자는, 남편이 없는 자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부부라고 해서 너무 지나치게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부부 사이에 꼭 무슨 간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라고는 하지만, 각각 다 자기의 임박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한편은 하늘에, 한편은 땅에 그 거처를 달리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부의 단락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행복을 너무 믿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언젠가는 그림자 같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할 때에 불행한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비단 아내와 남편의 관계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있는 자는, 자녀가 없는 자같이 살아야 합니다. 자녀라고 해서 믿을 수 없는 것은, 저들이 꼭 불량해서가 아닙니다. 자녀들도 다 저들의 임박한 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있는 자녀들은, 부모가 없는 것 같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부모를 잃어버리고, 홀로 살아야 할지 모르는 허무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가 있고, 좋은 교역자가 있다고 해도 다 없는 것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제 교회가 문을 닫고 교역자도 없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는 불법의 사람 멸망의 자식이 스스로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리라고 하는 때가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가 없어지고 교역자가 없어졌다 할지라도, 스스로 자기의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평안할 때에 힘써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독립 정신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언제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독립적인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같이 살라
시편에 보면 세상을 가리켜 눈물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슬픈 일이 그치지 않을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혼으로 모든 희곡은 끝나고, 죽음으로 모든 비극은 끝난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죽어야만 끝난다는 뜻입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울며 와서, 울며 끝이 납니다. 더구나 세상에 올 때는 혼자 울면서 오지만, 갈 때에는 많은 사람들을 울리며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또 어느 나라의 격언을 보면 “어린아이는 엄마의 옷자락을 밟으나, 장성한 자녀는 엄마의 마음을 밟는다.”고 하였습니다. 자녀들 때문에 슬픈 눈물을 흘려야 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눈물도 슬픔도 잠간이요, 그것 역시 지나가는 형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면서, 환난 중에 참으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슬픔은 잠깐이요, 하늘의 축복과 기쁨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통곡할 수밖에 없는 슬픈 일이 많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울지 않는 자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같이 살라
여기의 기쁨은 영적인 신령한 기쁨이 아니라, 세상으로 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즉 세상의 성공과 형통함으로 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란,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오늘의 기쁨이 내일의 슬픔이 될지 모릅니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그 다음 날, 전속 이발사가 그의 머리를 깎으면서 눈물을 떨어뜨리자, 이박사가 하는 말이 “자네 울지 말게, 이것이 인생이라네.”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이 어떠한 것임을 안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비록 기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러한 날에 자고하지 말고 더욱 겸손하게 처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매매하는 자는 없는 자같이 살라
여기 매매하는 자란, 팔고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상인을 두고서 만 하는 말은 아닙니다. 팔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게 부유한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음 구절에 보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 했는데, 이 역시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물질이 넉넉하다고, 그것을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 물질을 선한데 쓰지 못하고, 자기만을 위하여 쓰는 자를,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 영감의 비유로 경고했습니다. 그는 부자인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의 재물로 선한 일에 봉사하지 못한 것이 어리석었던 것입니다. 그 부자는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으나, 그 모든 계획은 하룻밤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혹 재물이 좀 있다고 할지라도 없는 자같이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보물을 쌓고,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베풀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많은 물질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부요하지 못하면, 차라리 거지 나사로만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눅 16:25에 보면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난을 받느니라.”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없는 자같이, 가난한 자같이 살줄 알고, 주님을 위해서는 부유한 자같이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우리의 때는 점점 단축하여 갑니다. 그래서 부부가 아무리 한 몸일지라도 마침내는 갈라져야 합니다. 한 편은 하늘나라에, 한편은 땅에 서로 유명을 달리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살고, 남편이 있는 자들도 남편이 있을 때에, 오히려 없는 자같이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시인 조병화의 시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두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우리 가운데 슬퍼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한 분은 울지 않는 자같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슬픔은 잠시 잠간 그림자 같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울지 않는 자같이 살아야 합니다. 청년 여러분! 청년의 때에 노년의 날을 위하여 준비하고, 평안한 성도들은 환난의 날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기뻐하는 성도들은 기쁘지 않은 때가 올 것을 알아 준비하시고, 세상 물건을 넉넉히 쓸 수 있는 성도들은, 꼭 선한 일에 부요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고, 종말의 대환난이 멀지 않은 때, 그리고 내 생애 최후가 언제인지 모르는 고로 항상 단축한 때임을 자각하고 살아야 할 여러분! 우리 모두 다 같이 옷깃을 여미고 사도의 권면을 다시 한 번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언제 주님이 오시고, 언제 내 생애 최후가 찾아와도, 부끄럼 없이, 후회 없이, 두려움 없이 생을 마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너희를 아끼노라
고전 7:25-28 / 지용수목사
어떤 신학자가 '사람은 천사와 동물 사이에 있는 존재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사람이 노력하면 천사 비슷하게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얼굴도 천사같이 됩니다.
제가 목회자 세미나에 가서 목사님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천사가 충격을 받을 정도로, 천사가 질투할 정도로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아봅시다."
목사님들이 자신이 없는지, '아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인 우리도 천사같이 살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는 안 되어도 천사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 우리의 패션, 우리의 본능을 따라 가면 동물 비슷하게 되고, 동물이 못하는 일도 하게 됩니다. 욕 중에서 더러운 욕이 무슨 욕입니까? '소새끼, 말새끼, 개새끼' 같은 욕입니다. 미국에서도 제일 무서운 욕이 '개새끼'라는 욕입니다. 'son of a bitch(개자식, 개새끼)'라는 욕을 하면 이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개보다 더 더럽게 될 수 있습니다. 개도 하지 않는 짓을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개도 하지 않는 일을 했습니다. 고린도는 참으로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철이 든 사람들이 결혼을 했는데도 아예 '우리 부부는 딴 방을 쓰자. 육체적으로 접촉하지 말고 하나님만 거룩되이 섬기자.'라는 생각을 하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성경적이 아닙니다. 자기 감정이지 성령의 감동이 아닙니다. 또 아예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 섬기겠다는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잘 생긴 아가씨가 "하나님, 저는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 섬길게요."하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딱 드는 남자가 우리 교회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잘 생기고 착한 그 남자 청년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하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남자 청년도 아가씨를 보자 마음이 통해 서로 사랑을 주고 받았습니다. 사랑의 불이 끓어올랐지만 아가씨가 하나님께 서원했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어서 울었답니다.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2년 전에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서원보다 말씀이 더 중합니다. 청년들이 큰 은혜를 받으면 '저는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 섬길게요.'라는 서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서원을 한두 번 정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서원한 것을 회개하고 결혼해야 됩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 설교에 아가씨가 은혜를 받고 몇 주 후에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결혼 주례를 했는데 부부가 잘 살다가 발전을 해서 얼마 전에 잠시 이사를 갔습니다. 몇 년 후에는 다시 우리 교회로 오게 됩니다. 그 부부가 이사를 가면서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결혼하지 못하고 울면서 살았을 텐데, 그 말씀 때문에 결혼하여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을 살리고 말씀이 결혼도 하게 하고 사랑도 이루게 합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아내와 남편이 함께 살다가 은혜를 받고 나서 "이제 결혼 생활하지 말자."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성생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고 온 부인이 접근하는 남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한다면 그 부인은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에서 4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1절)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3절)
결혼하지 말고 좋은 것을 먹지 말라는 금욕주의의 가르침이 바로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결혼해서 아들딸을 낳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28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는 결혼하여 아이를 부지런히 낳아서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다 결혼하지 않고 은혜 받은 사람이 다 부부 생활하지 않으면 한 세대 두 세대가 지나면 이 세상은 우상 숭배자들만 가득하고 교인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 아닌 사람은 결혼하지 않을수록 이 세상이 복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아이를 많이 나을수록 세상이 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이를 많이 낳아야 됩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부부 생활을 하지 않기로 서원한 남편과 아내가 한 집에 살다보니 어쩌다 그만 자기들도 모르게 서원을 깨뜨립니다. 그러면 '아이구,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깼네.'하고 가슴을 치며 이왕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교회를 떠나버리는 경우가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남자마다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남편을 두어서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안전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번 실수했어도 씻고 다시 일어나야지 '이왕 버린 몸'하고 막 살면 마귀 밥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아야 됩니다.
유럽에 가보면, 특히 갑바도기아 같은 곳에 가보면 기어서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절벽에 홈을 파 놓고 거기에 들어가 경건 생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홈이 얼마나 작은지, 한 사람만 겨우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눕지도 못합니다. 거기에 들어가 '나는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서 하나님만 섬기겠다.'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무인도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라고 말씀하셨지, "너희는 산 속의 소금이라. 무인도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구름 위에 떠 있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집들과 집들 사이에, 마을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마을에 살면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 생활을 하면서, 자녀를 낳으면서 빛 되게 살아야 됩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사는 크리스천은 좋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사명을 버린 병든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충격적인 말씀을 합니다.
처녀들에게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께 받은 계명은 아니라고 전제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충성된 자로서의 의견을 고하자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 보면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한시적인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중에 너무 큰 환난과 핍박이 몰려올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바울이 죽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죽음을 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자에 갇혀 톱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썰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부인하지 않는 것은 천국을 잃지 않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에서 조금 일찍 죽어도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오래 살고 천국을 잃으면 무엇합니까?
하나님께서 핍박과 환난을 허락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것이 눈앞에 오는데 처녀가 시집가서 잉태하고 아기를 낳으면 어려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 19절에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환난이 와서 피난 가야 되는데 배가 부르면 피난 가기가 어렵고 또 아기가 있으면 부담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순교사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엄마와 어린 아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함께 순교를 당합니다. 엄마는 이쪽 기둥에, 아들은 저쪽 기둥에 묶여서 화형을 당합니다. 어린 아들이 뜨거운 가운데서도 엄마를 보며 견디고 있는데 연기가 너무 가득해져 엄마 얼굴이 가물거리며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 엄마 얼굴이 안 보여요."
"아들아, 엄마 얼굴을 보려 하지 말고 주님의 얼굴을 봐!"
그리고는 엄마와 아들이 같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혼자 순교했으면 덜 힘들었을 것입니다.
저희 아들 성찬이가 꿈을 꾸었는데, 자기와 자기 아버지인 제가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더랍니다. 지금 성찬이가 영국에서 구역장으로 충성하고 있는데, 매주 토요일 저녁에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고 나면 새벽 한 시가 된답니다.
성찬이에게 그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주여,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순교하면 상이 엄청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순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 순교하는 것은 좋지만, 성찬이와 함께 순교하게 되면 제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것을 아는 바울이 임박한 환난 때에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편하게 고통을 당하고 조금 편하게 순교하고, 환난이 끝나면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사랑이 불타거나 꼭 결혼해야 될 이유가 있으면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에게는 육체의 고난이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이태 전 제가 프랑스를 돌 때 위그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믿음 생활을 하던 위그노들이 핍박을 견디지 못해 피난을 가 숨어서 사는데, 그 눈이 그냥 공포 속에서…. 또 뒤에서 따라오는 적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머리카락과 치마를 폭풍에 날리며 막 뛰어가는 부인들의 모습도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가로 세로가 5cm인 아주 조그만 성경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핍박을 피해 피난을 가다 보면 도중에 조사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성경이 나오면 잡혀가 죽게 됩니다. 그러니 성경을 아주 작게 만들어서 부인들이 긴 머리를 땋아 핀을 꽂아 거기에 성경을 숨겨 가지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환난 때에 아기가 있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환난이 겨울에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름에는 피난을 가도 살 만하지만 겨울에는 정말 힘듭니다. 그러니 겨울에 환난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트남에서는 350개 교회가 문을 닫았고 목사님들이 다 잡혀갔습니다. 우리가 지금 편하게 성경을 읽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도 북한에게 지고 점령당하면 그렇게 됩니다.
"미군 물러가라! 미군 물러가라!"라고 하는 것은 철없는 아이들의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빠져나가면 우리 군대가 북한을 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쨌든 우리가 사는 우리 생애에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기를 기도합시다.
그런데 환난이나 핍박이 끝나면 이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에베소서 5:22-23)
교회 머리가 예수님이신 것처럼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똑똑하고 유능한 남편만 아내의 머리가 아닙니다. 바보 온달 같은 남편이라도 아내의 머리입니다. 남편의 지혜가, 의견이, 아이디어가 훌륭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스러워도 남편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내의 도리입니다.
또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에베소서 5:28)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환난 때가 아니면 서로 사랑하고 아기를 낳고 기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시대 상황에 맞게 믿음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 생활을 시대에 맞게 해야 됩니다.
제가 하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직선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제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준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말씀 속에 오늘 이 시대의 상황에 맞는 어떤 교훈이 있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본문 말씀이 어떤 의미와 교훈을 줍니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제가 설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도 내 환경과 내 삶의 수준에 맞게 해 나가야 됩니다. 환난 때에는 거기에 맞게 결혼도 미루어야 하고, 평화로울 때에는 결혼도 하고 자녀도 생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잘 되고 성공하면 그 때에 맞게 즐겁게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크게 바치면서 살아야 되고, 어렵고 가난할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신명기 28장 47절, 4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감사절에 감사하는데, 가난한 사람도 오만 원하고 병원 원장도 오만 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감사절 헌금을 가난한 사람이 십만 원 하는데 한 달에 몇 억 원씩 버는 사람이 십만 원 한다면 그것은 나쁜 죄입니다. 적어도 십억, 이십억을 버는 사람은 일억, 이억 정도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십만 원 하는데 부자도 십만 원 하면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됩니다. 부자는 부자에 맞게 천만 원도 드리고 일억 원도 드려야 하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대로 만 원 오천 원도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상황에 맞게, 형편에 맞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천만 원을 떼였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병이 왔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런 고난을 주셨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금식 기도도 하고 철야 기도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괜스레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조개 속에 모래가 들어오면 조개가 아프니 나타레라는 물질을 자꾸 만들어서 아프지 않게 모래를 감쌉니다. 그것이 진주가 됩니다. 조개가 편안하면 진주를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 일생 편안하면 간증거리도 없고 우리 자신도 보배롭게 되지 못합니다. 어려움이 올 때 회개하게 되고 교만이 겸손으로 바뀌게 되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일생 새벽기도 하지 않던 사람도 어려움이 오면 새벽기도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동서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을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부인이 죽었습니다. 그 가족들이 20억 원을 변상하라, 얼마를 변상하라 해서 검찰청에 불려 다니게 되었습니다. 갓 개업의인데….
길이 없으니 제 동서가 매일 새벽에 교회에 가서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3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던 일이 때가 되니 일억 오천 원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서가 그 동안 새벽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일이 해결되었어도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가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바쁜 병원 원장이 고등부 교사로 충성하고 있습니다. 지금 병원도 얼마나 잘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픈 사고를 통해 그 사람을 새벽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 줄로 믿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평생 새벽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고난을 주십니까? 우리를 진주처럼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평안과 풍요함을 주십니까? 즐거움과 기쁨으로 크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크신 뜻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호남 지방의 모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그 교회 목사님께 들은 간증입니다.
그 교회에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봉사관이 있었는데, 건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교회 건물 같지 않고 일반 건물 같았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남성 중창단 팀이 오셔서 그 건물에서 함께 차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을 지을 때 교회 관리 집사님이 큰 건설회사를 경영한 적이 있던 사장님이었답니다. 큰 회사를 경영하던 분이지만 부도가 나서 망하니 난로에 불도 피우고 청소도 하며 교회 관리 집사님으로 일하고 있었답니다. 어제까지는 사장님이었지만 오늘은 망했으니 형편에 맞게 산다며 교회 일을 열심히 했답니다.
그러다 교회에서 사회 봉사관을 짓게 되니 건설회사 사장님으로 건물을 많이 지어본 경험이 있는 그 집사님에게 일을 맡기셨답니다. 집사님이 착실하고 성실하게 일을 잘 해서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고 봉사관도 그렇게 아름답게 지었답니다.
그 소문이 퍼졌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큰 교회가 새로 교회를 짓게 되었을 때 관리 집사님을 찾아와 일을 해달라고 해서 2년간 일했던 관리 집사님 일을 그만두고 큰 공사를 맡아 떠났답니다. 하나님께서 분수에 맞게 성실히 사는 집사님에게 새 길을 열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깃발을 날리며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내일 그 깃발을 빼앗아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 때 혀를 깨물고 자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깃발을 빼앗아 가셨는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부잣집의 도련님이었습니다. 수많은 종들이 있는 집에서 총애를 받으며 산 귀공자였는데 형들의 미움을 받아 하루아침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어제까지 귀공자가 오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상황에 맞게 종으로 일했습니다. "주인님. 주인님."하고 섬기면서 화장실 청소도 했습니다. 그러니 보디발 장군의 신뢰를 받아 가정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잘 생긴 죄로 장군의 부인에게 미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지킵니다. 결국 장군의 부인이 요셉을 모함하여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남편에게 일러바칩니다. 영화를 보면 보디발이 요셉을 부릅니다.
"요셉, 너 마님에게 정말 그랬냐?"
"주인님, 아닙니다.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그러나 남의 눈이 있으니 네가 감옥에 들어가야겠다."
그리고는 장군이 자기 부인을 불러다가 개 패듯 팹니다.
"이 나쁜 여자…. 나는 요셉은 믿지만 너는 못 믿어."하며 막 때립니다. 부인이 도망가니 따라가면서 때립니다. 그때 제가 그 장면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셉의 운명이 기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왜 감옥에 집어넣으셨을까?'하며 죄수로서 또 적응합니다. 그 감옥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들어왔습니다. 그 관원장들이 궁궐 이야기만 했습니다. 제대한 사람은 군대 이야기만 하고 바람 피우는 남자는 바람 피우는 이야기만 하듯이 궁궐의 관원장들도 궁궐 이야기만 해서 요셉은 궁궐 이야기를 다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감옥이 요셉에게 정치 대학, 행정 대학이 된 것입니다. 얼마 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코스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된 것도 하나님의 코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네가 이렇게 잘 되는데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우리가 안 되었을 때도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십니다.
우리가 잘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잘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잘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못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안 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면 요셉처럼 우리를 세워 주십니다. 그러나 잘 안 되었다고 방탕하면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 여기에 주님의 뜻이 계십니다.
매주 제가 나가야 할 교회가 있지만 나가지 못합니다. 저는 양곡교회 목사로서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 우리 양곡교회를 맡겨 주셨으니 우리 교회에 충성해야지.'하며 시간을 아껴 이 교회 저 교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공부도 하고 싶고, 쉬고도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하나님, 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하며 날마다 엎드려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 상황은 자꾸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거기에 맞추어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처녀들아,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의 고난이 오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아끼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에 교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끓어올랐습니다. 처녀도 아끼고, 총각도 아끼고, 결혼한 사람도 아끼고, 모두를 아껴서 결혼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환난이 임박해서 교우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텐데, 교우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바울이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인들에게 하는 말은 꾸중하는 말이나 격려하는 말이나 그 모티브가 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끼는 것입니다.
담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죽고 못 살도록 담배를 피우는 한 분이 다이제스트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담배 속에 나쁜 물질이 수천 가지나 되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흡연자가 죽은 다음에도 그 나쁜 물질이 공중에 다니면서 후손들의 건강에 막대한 손실을 준다는 내용을 읽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깨운 뒤 말했습니다.
"얘들아, 이제 아빠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을 거다. 아빠가 담배를 피우면 아빠가 죽은 다음에도 너희에게 해롭대. 너희를 위해 이제 담배를 절대로 피우지 않을 거다."
그리고 담배를 딱 끊었다고 합니다. 자식을 아끼니 그토록 좋아하던 담배를 끊은 것입니다.
대제사장 옷의 가슴에 열두 보석이 달렸고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는 것은 대제사장이 백성을 안고 사랑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제 가슴에도 여러분의 이름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호통을 치든 격려를 하든 위로를 하든 여러분을 사랑해서 아끼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의 가슴에도 주님의 사랑이 가득해서 서로 아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를 아끼고 남편을 아끼며 삽시다. 아내의 잔소리가 남편에게는 힘들겠지만, 그 잔소리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아내가 잔소리하지 않으면 누가 내게 잔소리하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잔소리하면 기분 나빠 견딜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 때문에 하는 잔소리가 축복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울리기도 하는데, 그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네 살 먹은 한 아이가 책상 위에 올라가서 말했습니다.
"아빠, 나 뛰어내릴게 받아 줘."
"그래, 받아 줄게 뛰어내려라."
아이가 뛰어내렸는데 아빠가 받아주지 않아서 아이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아이가 으앙 하고 울었습니다. 옆에 있던 엄마가 "아니, 당신 미쳤어요? 아이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하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아이에게 교육한 거야.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빠가 아이에게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아빠도 믿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자기가 가장 믿고 신뢰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 주었는데, 그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자 자기 살길을 마련해 가지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니 보증을 서 주었던 아빠의 재산이 다 압류되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아빠가 아들에게 조심해서 살라고 교육한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연극을 한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아끼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아끼게 됩니다. 교회를 아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석구석 벽돌 한 장이라도 아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은 다 귀합니다.
어느 과학자도 자기 손으로 꽃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100억 원을 준다 해도 꽃 하나 만들 수 없습니다. 풀 한 포기 만들 수 없습니다.
매사추세츠 테크놀리지 연구소에서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바닷물을 만들었습니다. 연구소의 모든 과학자들이 달라붙어 바닷물을 만들었습니다. 바닷물과 똑같은 색깔, 맛, 염분 등 내용을 똑같게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를 발표하려는데 나이 드신 과학자 한 분이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아직은 발표할 때가 아닙니다. 실험을 해보아야 합니다. 24시간만 더 있다가 발표합시다."
그래서 인공 바닷물과 진짜 바닷물을 각각 시험관에 넣은 다음 물고기를 넣었습니다. 진짜 바닷물이 들어 있는 시험관의 물고기는 춤을 추는데, 인공 바닷물에 들어 있는 시험관의 물고기는 괴로워하며 어쩔 줄 모르다가 죽었습니다. 바닷물 만드는 일에 실패했지만 재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바닷물 1g을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바닷물도 귀하고 비 한 방울도 귀합니다. 한 방울 한 방울의 비가 생명입니다. 그러니 물 한 방울도 아껴야 됩니다. 산의 나무 한 그루도 아껴야 되고 풀 한 포기도 아껴야 됩니다.
그러나 가장 아껴야 될 것은 사람입니다. 겨레를 아끼고 세계 만민을 아껴야 됩니다.
네팔에 간 한 선교사님이 네팔 말을 잘 못하여 통역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일하다 온 근로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선교사님이 그 사람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나는 한국에서 온 선교사입니다. 나를 좀 도와 주세요."
선교사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사람이 선교사님에게 당장 죽여버리겠다며 쌍욕을 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한국의 공장에서 일할 때 너무 서러운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다가는 우리 자녀들이 해외 여행 갔다가 맞아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35만 명의 해외 근로자가 있는데, 사람 대접을 받는 근로자는 3만 명뿐이랍니다. 30만 명이 아주 서러운 대접을 받고 있나 봅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 조국에 돌아가 한국에 대해 이를 갈며 살다가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해를 가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그 나라에 갔다가 변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민족도 사랑하고 타민족도 사랑하는 마음, 사람을 아낄 수 있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 중의 최고의 사랑은 전도입니다.
내 남편을 사랑하면 목숨 걸고 전도하게 됩니다. 내 어머니는 물론 내 이웃도 사랑하면 목숨 걸고 사랑하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전도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구합니다.
한 가지는 '결혼하는 신랑 신부를 축복해 주세요.'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결혼식에 참석한 친척이나 내빈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가 예수님 자랑과 교회 자랑을 잘 하고 복음을 잘 전해서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게 해 주세요.'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이 제 전도의 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로 결혼식 주례를 하고 나면 많은 간증을 듣습니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이 "교회가 이렇게 좋은 곳인 줄을 몰랐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한답니다. 할렐루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됩니다.
다음 주일은 우리가 큰 전도의 날로 정한 날입니다.
여러분과 제 마음에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시고 아끼시니 예수님을 보내셔서 피를 흘리게 하시사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사랑은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을 해서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우리 가족과 이웃, 모든 겨레를 구원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전 7:25-31 / 박조준목사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오늘 본문 29절에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하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인류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것이 시간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예정 하신 마지막 날이 있는데 그때가 단축하여졌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때가 얼마 남지 않 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역사의 절정의 날인 그때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216 장 가운데 318번이 그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가 언제입니까? 그때가 언 제인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나 그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 니다. 성경은 그때를 마지막 날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겠다고 하였 습니다. 비꼬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사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요사이 많이 봅니다. 하나 님이 죽었다 고 합니다. 저 우주를 여행하여 보아도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다 고 합니다. 예 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조롱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웃어 넘깁니다. 농담으로 여깁니다. 왠지 압니까? 그들은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 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오셔서 그들의 생활을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평상시에 공부 안하고 시험 준비 안하고 놀기만 하는 학생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험 발표입니다. 아무 날부터 학기말 시험이다 하고 학교에서 발표하면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전에 한참 데모를 많이 할 때 이런 학생은 에라, 데모나 또 했으면 좋겠다 고 생 각합니다. 데모하면 시험 안치루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 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고 베드로 후서 3장 5절에 말씀했습니 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런 말씀으로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어떤 사람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 니다. 그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데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요란한 소 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이 불타 없어지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들이 드러날 것입니 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다가오는 심판의 그날을 말씀하고 있습니 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경 뿐만 아닙니다. 여러 역사가 과학자들도 입을 모아 지금 우리가 이 세상 끝에 서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 인류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관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내일 죽을는지 알 수 없으니 먹고 마시고 마음껏 즐기자 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결국 인간이 직면하는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것 을 해결할 신통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노아의 날과 같겠다 고 하였습니다. 노아의 홍수 전과 같겠다고 말입니다. 홍수 직전의 형편이 역사 속에 반복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노아의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창세기 4장, 5장, 6장을 읽어 보세요. 그때에는 여행이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우리 교회 2부, 3부 예배에는 매주일 수십명의 외국 손님들이 참석하 십니다. 세계가 하루면 어디나 갈 수 있습니다. 큰 비행장에서는 30초마다 비행기가 한 대씩 뜹니다. 그리고 그때는 지식이 더하겠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사실 요사이 매 십년 동안에 지식은 갑절이 됩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일찌기 지상에 살았던 모든 과학자의 수의 75%가 현재 살 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것을 컴퓨터(Computer)로 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1초 동안에 5천 5백만 건의 일을 해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지식의 발전입니까 ! 뿐만 아니라 그 때는 기술의 시대요, 소위 도시화의 시대요,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기는 오 락의 시대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물질적인 것에 관심 이 컸습니다. 육신적인 것을 만족시키면 그것으로 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 의 때에 일어났던 징조였습니다. 또 한 가지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세계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반항입니다. 곳곳에서 반항 과 무법상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민은 모든 권위에 반항합니다. 학생이 선생을 반항합니 다. 자녀가 부모를 반항합니다. 청년이 노년을 반항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반항 이 있습니다. 무법이 횡횡합니다. 이것도 그때가 얼마나 남지 않았다는 징조입니다. 그래서 유다서 11절에 보면 가인의 길에 행하는 자들이라 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노아 이전에 산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의 반항 과 무법은 노아의 날 홍수를 가져 오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 가인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생 아벨만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도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관념 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을 하고 나쁜 계획을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노아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겠다 고 하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반역의 자유를 주 셨습니다. 사람은 이 자유를 가지고 제 마음대로 제 길을 갔고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그 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사망의 그늘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이 노아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해서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물론 노아는 배를 짓는 사람들에게 높은 삯 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노아를 도와서 일하면서도 웃었습니다. 120년 동안 걸려서 방주를 만 들면서 노아는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심판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 으라 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웃고 조롱하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다 홍 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주 예수를 믿으라.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시며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 다. 하나님을 거스리고 사는 패역한 시대의 노아는 외로왔습니다. 고독하였습니다. 오늘도 믿지 않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외로운 일입니다. 남들은 우리를 조롱합니다. 비웃 읍니다. 그러나 노아는 굳건히 그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하시겠다는 하나님 의 선언에 논쟁하지도 않았습니다. 과학적인 근거를 대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순종하 여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1.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언젠들 기도하지 아니하리오마는 그때가 얼마 남지 않은 이때 우리 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겠습니다. 환란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개인이든 교회 든 민족이든 이 환란의 때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 다.
2.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마지막 때에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어집니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자꾸만 눈에 걸립니까? 내 마음 속 에 사랑이 없어서 그럽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곧 미움이 있는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 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 나의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은 것을 아는 사람이면 다른 사 람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 라. 여러분 ! 멀리 갈 것 없이 내 가족, 내 친구, 내 교인끼리 서로 사랑합시다.
3.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성결하라고 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11절에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 임하시기를 사모하라 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 면 회개해서 더럽혀진 옷을 다 깨끗이 씻으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구원받은 무리들을 보니까 다 흰 옷을 입었는데, 이 사람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 사람들인데 어린 양 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과연 어린 양 예수님의 피로 내 더 럽혀진 옷을 희게 성결하게 하였습니까? 흰 예복 준비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기다릴 수 있습니 까?
4. 그 날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히브리서 10장에 말씀하였습니다. 마지막 때의 현상 중에 하나는 신령한 것보다는 육신적인 것에 관심이 크기 때문에 주일날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보다는 수영장에 나가서 수영하고 보따리 짊어지고 등산하고, 가족끼리 차타고 드 라이브하고, 새벽부터 짐싸가지고 낚시질 가고 골프하러 가고 여러분 !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마귀의 작전입니다. 마귀들은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 저런 것으로 유혹해서 못 모이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모이면 이런 여름에는 졸음을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못듣게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되십시다. 서로 돌아보아 서로 격려합시다.
5. 히브리서 10장 36절, 37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 리니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으십시다. 주님 오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래 참을 것 없이 하루 하루 참으십시다. 아무리 힘이 든다고 한들 하루야 못참겠습니까? 정말 힘들면 한 시간씩 참아 봅시다.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 다.
6.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46절에 주인이 올 때에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복이 있으리라 하였습니 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는 것 을 안다고 하면 시간을 허비할 수 있습니까? 한가하게 농담하고 다른 사람 흉이나 보고 다닐 수 있습니까? 어거스틴(Augustine)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당하는 그 날을 우리 일 생의 마지막 날과 같이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오직 한 번만 이 세상을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도중에 친절을 베풀 일이나 누구를 도와줄 일이 있으면 그것을 연기하지도 않고, 등한히 하지도 않고 즉시 행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길을 다시 통과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남은 날이 얼마인지 셀 수 있는 지혜를 가집시다. 우리의 남은 날이 매일 매일 줄어듭니다. 사실 그 때 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리석게 살지 말고 지혜있게 사는 우리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가정의 우선순위
고전 7:25-34 / 김태복목사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가정입니다. 1863년 미국의 남북전쟁이 치열하던 때였습니다. 미국 스파트 실바니아 라는 곳에서 남군과 북군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투 중에 북군 군악대가 군인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성조기의 노래’를 연주하자, 남군은 ‘딕시의 노래’로 대항했습니다.
전쟁판이 난데없이 군가 싸움으로 변했습니다. 그때 북군의 밴드가 갑자기 그 유명한 ‘홈 스위트 홈’을 은은하게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남군의 군악대도 같은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양쪽 군사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24시간 휴전을 약속했습니다. ‘홈 스위트 홈’이란 노래가 모든 병사들의 마음을 가정으로 인도하고만 것입니다.
세상에서 교회 다음으로 가장 아름답고 신비스런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이야말로 참된 행복과 평안과 쉼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가정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별거율과 이혼율이 점점 증가하고 청소년의 가출은 물론이고 이제 아버지들의 가출도 점점 증가함으로 노숙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몇 달 전만 해도 목요일 아침 9시30분부터 12시까지 구걸하러 오는 분들에게 천 원씩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노숙자들이 얼마나 몰려오는지 나중에는 하루 200명이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가만 보면 한 참 일할 수 있는 분들도 상당수입니다. 할 수 없이 지금은 ‘컵 라면’을 드렸더니 인원이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왜 가정이 깨어집니까? 가정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세 가지입니다.
1. 가정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은 가정이 행복하려면, 뭐니 뭐니 해도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깨어지는 원인도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과거 가난할 때는 가정이 오히려 튼튼했습니다. 점점 잘 살게 되니까, 가정들이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 서부에서 가장 잘 사는 동네가 LA에 위치한 비버리힐스입니다. 집들이 대부분 으리으리한 호화주택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곳에 사는 갑부들은 대단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980년대 그 지역 위치한 정원내부장식회사에서 일하는 사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사원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어떻게 저렇게나 잘 살 수 있을까?”이고, 그 다음은 “어떻게 저런 부자 동네에서 건전한 가정이 하나도 없을까?”였습니다. 호모들, 개만 데리고 외롭게 사는 노인들, 20대 여자와 사는 남자 노인, 20대 남자와 사는 여자 노인 등, 정상적인 가정이 거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의 행복은 물질이나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정의 우선순위로 두고 사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부부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정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중심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 드린 대로 우리 인생의 목표가 결혼이나 가정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아도, 처녀들이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나 결혼하는 것이나 크게 중요하지 않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38절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지기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시집을 보내지 않고 혼자 편안히 사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좋은 신랑, 좋은 신부를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혼자 살던지, 결혼하여 살던지 주님을 섬기기에 편한 쪽을 택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혼자 살므로 시간이 많음에도 헌신하지 못한다면, 결혼하여 너무나 분주한 속에서 헌신하는 자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의 초점은 주님 중심으로 사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엡5:22부터 엡6:4까지에서 가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무엇입니까? ‘주안에서’입니다.
남편과 아내 관계에서도 주안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주 안에서, 자녀도 주안에서 양육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 많은 가정들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주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들 중심으로 가정을 꾸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 중심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l)주님만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부부들은 서로가 자기만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은 부모는 왜 자기들을 위해 주지 않느냐? 부모들도 자녀들이 자기들에게 너무나 등한히 한다고 불평이 대단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만 위해 달라고 합니다.
오늘 많은 가정들이 철저히 자기중심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부부의 행복은 서로만 바라보는데 있지 않고 함께 똑같은 곳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부가 서로만 바라보고 산다면 어느 날인가 서로에게서 많은 싫증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목표, 같은 미래를 바라볼 때 하나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함께 바라 볼 곳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부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바라볼 때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주님의 화목이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만 바라보는 시어머님과 며느리는 고부간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통해서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녀도 바라볼 때 모든 것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2)주님 중심이 된다는 의미는 서로의 허물의 짐을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다른 이의 허물을 대신 지시고 희생하러 오신 것입니다. 가정도 식구끼리 서로의 허물을 십자가 사랑으로 덮어주고 대신 져야 합니다. 왜 가정이 좋은 곳입니까? 어떠한 환자나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서로 덮어주고 감싸주며 씻겨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법정처럼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그 가정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주님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 섬김만 받으려 하지, 희생으로 섬기지 않는데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지지 않고 주님의 축복만 받으려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자기들만의 행복과 평안, 자기들만의 부함과 안일의 보금자리를 위해 살려고 애쓸 때 그 가정은 마침내 고인 물처럼 썩고야 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가정처럼, 고넬료나 루디아의 가정처럼 주님의 통로로써 살 때에 계속적으로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가정과 식구, 그리고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 유계준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믿기 전 23세 때 평양 깡패로 있으면서 마펫 선교사를 때리려고 둘러쌌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깡패그룹을 해산시키고 25세에 윤덕준 양과 결혼을 하여 6남 2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첫째 득남기념으로 미림교회를 건축하였고 45세 때에는 산정현 교회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기철 목사님이 옥중에 계실 때 매달 쌀 1가마를 주어 가족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6.25 전날 밤 괴뢰군에게 잡혀가서 대동강 언덕에서 순교 당하기까지 한 분으로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유계준 장로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육 간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자녀들을 보면, 아들 다섯과 딸 하나가 의사이고, 넷째 아들은 법학자로 서울법대 학장을 역임했고, 막내딸은 약사인데 그 남편이 바로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한빈 박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 장로님 후손이 106명인데 모두 출세하여 쟁쟁한 인물들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중심으로 충성한 자들에게 반드시 복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가정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보십시오. 결혼의 목적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두어 보십시오. 사업의 목표도 주님과 이웃을 위하는데 두어 보십시오. 그 때 가정에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와 복이 넘치게 하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가정의 우선순위는 청지기 정신에 두어야 합니다.
결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정하여 세운 제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결혼 하는 것보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임박한 환난 때문입니다.
26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나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는 시대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극심하던 때입니다. 굶주린 사자들의 굴 속에 집어넣어서 산 채로 사자 밥이 되게 하고, 불에 태워서 죽이고, 가장 잔인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러한 때에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처자식의 고통을 함께 당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처자식이 고통당하는 것을 함께 당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2)육신의 고난 때문입니다.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은 육신적인 외로움은 있지만 육신의 고난은 적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을 하게 되면 부양가족이 딸리게 되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딸린 식구들에 대한 심적, 정신적 부담을 담당해야 합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문제가 보통 고생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은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부부들이 맞벌이를 하는 가정도 점점 늘어갑니다. 그러나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독신 생활이 더 낫다고 한 것입니다.
(3)결혼하게 되면 그 마음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33-34절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도 늘 부족한데, 마음이 나뉘어서 주님을 섬기게 되면 더 부족한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독신 생활이 더 낫다고 해도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독신으로 살든, 결혼을 하던 주님을 잘 섬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부지런히 할 수 있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고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독신으로 살더라도 너무나 외롭거나 정욕을 절제할 수 없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결혼하여 부부가 함께 헌신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많은 짐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식구를 거느리게 됨으로 먹고 마시는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적 생활도 책임져야 하는 문제가 따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결혼한 이상, 자기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어느 분은 하나님 핑계나 교회 핑계대고 가정의 일, 즉 생계 문제나, 부부로서의 의무, 자녀 양육 문제, 부모 공경 문제를 소홀히 합니다. 아닙니다. 가정도 내게 맡겨주신 청지기 일입니다.
청지기 사상은, 우리의 생명과 시간, 우리의 가정과 재물, 우리의 직장이나 지위들 모두가 하나님이 임시 우리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게 하신다는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했으면 청지기 자세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을 낳았으면 영육 간에 잘 양육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죄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부가 하나님께 신앙생활을 힘써서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낫습니다. 자식을 낳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식을 신앙으로 올바르게 지도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자식을 낳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런데 어느 청년은 자기가 좋아서 결혼하고 나서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핑계 하면서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습니다.
또한 신앙이 좋았던 처녀는 시집을 온 뒤에 ‘자기는 속아서 결혼했다.’고 하면서 탄식하면서 가정을 등한히 하고 교회 일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마저도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잘못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조상이 바이킹이요, 해적이었던 유럽이 어떻게 기독교 사회가 된 줄 압니까? 당시의 해적들은 배를 타고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바다를 무대로 강도질을 일삼던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세계를 여행하고 다니면서 견문이 넓어지고 머리가 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방탕아나 창녀들처럼 성적으로 아주 문란하게 살므로 가정들이 엉망진창인 것을 보면서 저들은 결혼에 대해서 아주 신중을 기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하고 결혼할 여인은 한평생 깨끗해야 하고, 또 깨끗한 자녀로 키워야 하겠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해적들은 기독교 여자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기독교 여인들은 허구헌날 울고 지내면서 가정을 등한히 했습니까?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해적의 아내가 되었지만, 여기에 보내신 뜻이 있는 줄 알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남편을 잘 섬기고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했고, 지식적으로 잘 키웠습니다.
그러므로 해적들이 변해서 마침내 기독교인들이 되었고, 바로 저들이 개척정신과 신앙을 합쳐서 청교도, 퓨리탄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 여인들을 통해서 그 가정과 사회가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지금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식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이 그 가정에 선교사로 보내신 줄 알고 청지기 자세로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과 식구들이 되도록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가정의 우선순위는 순례자의 자세에 두어야 합니다.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본문에 보면 너무나 세상에 빠지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29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부부간의 사랑에 너무 빠져서 영적인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등한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살 때는 신앙생활에 대단히 열심이 있었는데, 결혼하고 나더니 신앙생활이 소홀해지고 열심이 식어집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반쪽으로 있다가 온전한 한 몸을 이루었으니까 더 열심을 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 30절에서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들은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슬픈 일을 만났어도 마냥 슬픔에 잠겨 있어서는 안 되며, 기쁜 일을 만났어도 마냥 기쁨에 들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자기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합니다. 자기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30하반절과 31절을 보면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 하는 자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많은 물질을 가졌어도 흥청거리며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많다면 자기를 위해서 흥청거리고 쓰면서 죄를 짓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그런 생활을 해야 합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종말이 임박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상 형적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가까운 줄 알 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인생을 즐기는 데 투자하고 혈안이 됩니다. 그런데서 인생의 낙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될 수 있는 한 육신의 생활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은 청지기 사명을 다 마치는 날은 순례자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는 지금 있는 곳에서 사명을 마치면 다시 하나님이 명하시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 날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생명이나 시간, 가정이나 재물, 직장이나 지위나 다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순례자는 사명을 다 마치고 떠날 때는 포기할 것은 포기라고 버릴 것은 버리고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잠깐이면 그림자처럼 지나가고, 아침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그런데 순례자는 이 세상에 대한 애착에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우는 일을 만나도 울지 않는 자같이 합니다.
기쁜 일을 만나고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고, 무슨 매매를 하든지, 무슨 물건을 소유하든지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밤 박진완 선교사님이 출국하는 것을 보면서 순례자 인생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박진완 선교사님 부부는 이집트에서 장기간 사역하기 위해서 떠나시는 것을 보니까 가방과 짐이 모두 일곱 개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동안 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남에게 주었습니다. 사모님이 시집오실 때 가지고 온 혼수품들, 이불이나 침대, 냉장고나 가전제품, 그릇들이나 온갖 가재도구들 다른 이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 때에 사모님이 얼마나 아까웠겠습니까? 목회자들이 제일 아끼는 것이 책입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대부분의 책들을 다 포기하고 성경 한 권만 들고 가다 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짐을 최대한 줄이고 줄이어도 7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짐이 상당히 초과되어 짐 값을 많이 물어야 했습니다. 만약에 자녀들이라도 있었다면 더 많이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훌훌 던지고 오직 선교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 순례자의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떠한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미래를 향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떠나는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뭉클한 감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가정의 우선순위를 식구들이나 무슨 재산에 두지 마시고 오직 주님 중심으로, 청지기와 순례자의 자세로 꾸리어 가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 넘치시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있어도 없는 것 같이
고전 7:29-31 / 김홍도목사
전에 제 형님이 공군 군목으로 있을 때 그 부대에서 제일 높은 지휘관 장군을 전도해서 예수 믿게 했더니, 세례 받는 날이 되니까 자기 스스로 양주병, 양담배 있던 것을 몽땅 쓰레기통에 집어넣더랍니다. 그리고 세례 받고 나서는 "내가 세례 교인이 되었으니 제가 봉사할 일거리를 맡겨 주십시오"하더랍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예배 순서지를 문간에서 나눠주라고 했더니, 장군이 정장을 하고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주보를 나눠주니까, 부하 장병들이 멋도 모르고 들어오다가, 가까이 쳐다보지도 못하던 장군이 인사를 하며 주보를 나눠주는 것을 받아들고 기절할 정도로 놀라더랍니다. 제일 높은 장군이 높아도 낮은 자 같이 부하장병들을 섬기는 자세로 봉사하니까, 그 부대전체가 예수 믿고 복음화 되더랍니다.
높은 계급이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섬길 때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나고 자기 자신도 더 존경받는 멋진 지휘관이 된 것입니다.
한국의 고전 작품 가운데 "성춘향"은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춘향이 금권과 관권에 굴복하지 않고 정조를 지키는 데에도 매력을 느끼지만, 더 우리를 신나게 하는 대목은 암행어사의 마패를 가진 이도령이 거지 행색을 하고 밥을 얻어먹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본래의 권세를 나타내 보이며 "암행어사 출두야"할 때 사또를 비롯해서 온 벼슬아치들이 사시나무 떨 듯이 벌벌 떨며 이도령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볼 때, 신나고 통쾌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벼슬이 있어도 없는 자 같이, 권세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겸손히 하는 것이 멋도 있고, 맛도 있고, 참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한 마디로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살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린도전서 7장 29-31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을 얻고 영원한 본향,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개와 같은, 뜬구름 같은 세상 부귀 영화에 너무 집착하거나 너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당해도 어차피 세상 버리고 천국에 갈건데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기쁜 일 수지맞는 일이 생겨도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소유했기 때문에 중심이 흔들릴 정도로 기뻐서 깡충깡충 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가구를 들여놓아도 주일 낮 예배 드리는 일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기분이 들뜨지 말고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혼해서 멋진 신랑이 생기고 예쁜 신부를 맞이해서 깨가 쏟아지고 꿀맛같이 좋아도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 쾌락에 속지 말고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의 부귀 영화는 믿을 것도 못 되고 의지할 것도 못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붙잡고 영원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요 참 믿음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언젠가는 되지 못하고도 된 줄로 아는 착각에 빠지게 되고 무서운 교만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풍선처럼 빵빵해지는 바람을 스스로 빼는 노력을 게으르게 하면 하나님께서 부끄럽게 하시거나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바람을 빼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자기를 비울 필요가 있습니다.
1. 권세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빌립보서 2장 6-7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 하나님보다 낮은 분이 아니신데, 그 권세와 영광을 다 비워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습니다. 영어에는 "He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but made himself nothing"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하는 우리 성도들도 날마다 자기를 비우고 높아도 낮은 자 같이 낮추며 살아야 합니다. 계급과 지위가 높아도 마음은 없었던 것처럼 낮은데 두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잔치 집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때 주님은 "너희는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높은 자리에 앉을 위치에 있어도 자신을 낮추어 아랫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에헴'하고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너보다 더 높은 자가 들어와서 주인이 "실례지만, 좀 내려앉으십시오"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고 하셨습니다. 도리어 강권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앉으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더 영광스럽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중요한 처세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치 그네 뛰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힘껏 낮추면서 상대편을 높여 주면, 상대편이 또 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이것이 위선이나 외식이 되면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진심으로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며, 높고 높은 보좌에 계신 분인데, 자기를 끝까지 낮추어 말구유에 탄생하시고, 마지막에는 만민의 죄를 대속 하시려고 강도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권세를 가진 분이신데,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의 주가 되고 선생이 되지만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처럼 너희도 이와 같이 남을 섬기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낮추기는커녕 100%, 200% 자꾸만 자기를 부풀리려고 하고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것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모든 면으로 봐서 권사 자격이 없는데 권사가 되려고 하고, 장로 자격이 없는데 자꾸 장로가 되려고 하면, 그 직분을 못 받으면 시험에 들어서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하는, 이런 것이 교회마다 큰 문제입니다.
또 장로가 되면 권사나 안수 집사 때와는 달라집니다. 안색이 변하고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목회자를 도와 줄 생각은 안 하고, 타고 누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도 망가지고 자신도 망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되는 신본주의 교회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이 제멋대로 운영하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사탄의 기원이 바로 자기의 위치보다 더 자리를 높이려다가 천사장 루시퍼가 저주받아 사탄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12절부터 보면 빌립보서 2장과 정반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아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즉 천사장 루시퍼가 하나님의 보좌보다 높아지려고 천상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저주받고 그와 그 부하들이 땅으로 내어 쫓겨 사탄과 마귀가 된 것입니다.
권세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지위가 높아도 낮은 자 같이 자기를 비우는 생활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기차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신문을 보는 장면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 '정말 멋있는 분이다'하는 인상을 가졌습니다. 대통령 전용 비행기나 대통령 리무진을 탈수도 있을 텐데, 대통령 의식을 깨끗이 비우고 기차표를 사려고 줄 서 있는 모습이 너무나 멋이 있고, 자가용 비행기를 탄 것 보다 더 존경스러워 보였습니다.
제가 어려서 시골에 놀러갔다가 식사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시어머니가 식사가 끝나가는데도 며느리가 미처 숭늉을 떠다 대령하지 못하니까 시어머니가 숟가락을 내던지며 며느리를 구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보다 먼저 일어나서 물을 떠다 마시고 며느리에게도 주며 며느리보고 "일어나지 마라"하시면 얼마나 존경스럽겠습니까? 우리도 쓸데없는 자존심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늘 편치 않고 화낼 일만 생기게 됩니다.
2. 물질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전에 북한에서 제 형님과 같이 의학을 공부하던 분이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했는데, 집사까지 하던 분인데 교회에 안 나오길래 형님이 가서 전도하면 핑계 대기를 "나, 병원 빌딩 하나 짓고 나갈께"하면서 안 나오고, 빌딩을 지었는데도 안 나오니까 "나, 박사학위 받은 다음에 나갈께"하고 계속 핑계만 대고 안 나오더니 어느 날 보니까 얼굴이 해쓱하니 병색이 돌더랍니다. "자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 어디 아픈가?" 했더니, "괜찮아. 소화가 좀 안 되서..."하더랍니다. 얼마 후에 급히 오라고 연락을 받고 가보니까, 간암 말기가 돼서 복수가 차서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더랍니다. 장례식 날 갔더니 관 앞에 의사 면허증, 박사 학위증, 별별 표창장, 감사패를 즐비하게 차려놨는데, 죽고 나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 부귀 영화에 속지 마세요.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영생 천국을 준비하지 못하면 천하를 다 얻은들 뭘 합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63층 빌딩을 가졌어도, 110층 짜리 빌딩을 가졌어도 하나님이 불어 버리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어느 의사의 간증을 읽어보니까, 그는 상당한 실력도 있고 많은 직원도 고용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또 명예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늘처럼 믿고 모든 재산과 명예를 맡겼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정신적인 쇼크를 견디지 못해서 마음의 병이 들었습니다. 우울증에 빠져 환자도 보기 싫고 돈 버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결국 자기가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족조차 만나기 싫어졌습니다. 몇 달을 병상에서 고생하다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의 조카딸이 찾아 전도하니까 그 전에는 들은 척도 안하고 냉대하던 사람이 조카딸이 갖다 준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침대 뒤에서 어느 분이 서서 자기 머리에다 "후"하고 숨을 내 쉬더랍니다. 순간적으로 뜨거운 기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가더니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일시에 사라져 버리더랍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도로 뛰어가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를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고, 세상의 모든 부귀, 공명, 영화, 친구 등은 일시적인 것이고 허무한 것이요,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부터 환자를 보며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병이 낫습니다"하고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물질, 명예 다 잠시 있다가 안개 같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여기고 기회 있는 대로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 하늘에 쌓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본문에 보면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린도전서 7장 30-31절)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재산 분배 문제로 형제가 싸우다가 예수님께 와서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이 사람아 나를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하고 책망하듯이 말씀하시고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말씀하셨습니다. 소유가 많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산이 많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이 하고 소유욕을 날마다 비워야 합니다. '무엇을 소유하느냐'(To have)하는 것 보다 '무엇이 되느냐'(To be)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고 소유의 형태에서 존재의 형태로 바꾸는 일을 날마다 해야 합니다. 세상 재물은 언젠가는 놓고 가야 되고,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3. 명예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해서 구제할 때에는 나팔을 불기 좋아하고, 금식할 때는 얼굴을 흉하게 하며 금식하는 티를 냈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하시면서 너희는 구제할 때에도 하지 않는 것처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금식할 때는 안 하는 것처럼 세수도 하고 머리에 기름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일을 하고 봉사하는 일을 해도 안 하는 것처럼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만일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3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바벨론 왕이 많은 예물과 더불어 축하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은혜를 간증하지 않고 자기를 뽐내며 축하 사절단에게 궁중에 있는 금고, 보물 창고, 무기 창고 할 것 없이 다 보여 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 괘씸히 여기사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보물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후에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칭찬 들을 일을 많이 할수록 자아도취에 빠지지 말고 그 명예 의식, 칭찬들은 것, 빨리 잊어버리고 없었던 것같이 잊어버리고 비워 버려야 합니다.
식물의 줄기도 무성해야 하고 햇빛도 잘 받아야 하지만, 뿌리까지 햇빛에 내보이면 그 식물은 죽고 맙니다. 신앙 생활에도 숨은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남 안 보는데서 하는 기도 생활, 자기만이 아는 구제와 봉사, 은밀한 중에 성경 읽는 생활이 없으면, 그 신앙 생활은 뿌리 깊은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덧없는 세월을 사는 지혜
고전 7:29-31 / 박봉수목사
오늘이 2002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2002년 신년주일을 지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송년주일입니다.
중국의 고사성어 가운데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눈 깜빡할 사이”입니다. 장자의 ‘지북유편’에 보면 사람이 한 생을 사는 것을 이 백구과극이라고 비유한 것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밖에서 흰 망아지가 달린다고 해서 문틈 사이로 보려니까 벌써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이 흰 망아지처럼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한 해를 어떻게 계획도 세워보고 제대로 뭐 좀 하려니까 어느덧 연말입니다. 이제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제대로 살아보려니까 백발입니다.
우리는 이 연말이면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인생 무상을 절절하게 체감하게 됩니다.
덧없는 세월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 허무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인생이 덧없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라면 인생 그 자체가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니냐!’ 탄식하며 삽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허무주의란 최고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요,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요,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중학교 선생님께 들은 말입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고 전과목이 거의 100점을 맞는 수재 학생이 있었답니다. 이 아이는 중학생 때 벌써 대학생들이 읽는 철학책에 심취해 있었답니다. 하루는 체육시간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도중에 달리다 말고 뒤돌아 걸어 나오더랍니다. 하도 기가막혀서 선생님이 물었답니다. 도대체 왜 그러냐? 그 아이 대답이 더 기가 막힙니다. “이렇게 땀흘려 달려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덧없는 세월을 살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허무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2. 애써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덧없는 세월에 허무감이 밀려들지만 어차피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즐겁게 즐기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황진이의 시구 가운데 이런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수여 간들 엇더리.
물론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세월이 저 심산유곡 시냇물처럼 빨리 흐르고,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니 골치 아프게 이 일 저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나와 이 밤을 즐기는 것이 어떻겠느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애써서 인생의 허무감을 도망치듯 피해버립니다. 그렇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3.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입니다. 덧없는 세월에 허무감이 밀려올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속에서 지혜롭게 극복해야 합니다. 허무감에 허덕이는 것, 그 허무감을 애써 피하는 것 모두가 성령이 주시는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지혜롭게 이 밀려드는 허무감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덧없는 세월을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요?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때가 단축하여 진 고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 만사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가 있고, 또 죽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우리 인생은 시작할 때가 있고 끝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혜롭게 이런 덧없는 인생을 극복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시 90편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90:6에 보면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들풀처럼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0:9에 보면 “우리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 샜습니다. 우리 인생이 정말 백구과극처럼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90:12절에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우나탕에 가보면 모래시계가 있습니다. 들어가서 뒤엎어놓고 나갈 시점을 판단하라고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모래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갑니다. 위 편에는 남은 모래가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마치 모세는 이 모래시계를 보듯이 인생의 시간이라는 모래의 양을 셀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의 양을 셀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인생이라는 모래 시계를 보면서 전체 모래의 양과 남은 양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인생이 유한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면 인생이 끝이 날 것임을 보면서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90:13입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인생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나서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여호와를 바라보고 그분 앞에 겸손하게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덧없음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는 교사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일생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배경도 좋았고, 학벌도 뛰어났고,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이였습니다. 그래서 목에 힘주고 살았고, 대단히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면서 달라졌습니다. 이름을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바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를 위해 봉사하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돌보심 없이 주님의 인도하심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또 깨닫기를 자신이 정말 주를 위해 무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를 위해 헌신 봉사하지만 그것이 주께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또 깨닫습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은 죄인인데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점점 더 깊이 깨달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겸손을 깊이 배워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월의 덧없음 앞에서 우리의 겸손을 더 키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덧없는 세월을 이기는 지혜입니다.
사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덧없는 세월에 허무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인생의 짧고 덧없음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큰 허무감은 그 짧은 인생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 존재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자신의 존재 이유 앞에서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비록 인생이 짧더라도 허무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등산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도로 내려올 것 뭐하러 산을 오르냐고 빈정댑니다. 그러나 죽음의 고비도 넘기고 남들 오르지 못했던 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산 사나이들은 산에 오르며 그 안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릎 쓰고 산에 오릅니다. 내려오면서 허무감을 느끼기보다는 큰 보람과 인생의 의미를 찾습니다.
빌 1:24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조만간 자기가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순교 이후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감격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새삼 찾게 됩니다. 바로 빌립보 교인들 때문입니다. 아직도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바울은 평생 한 번도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에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고,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그에게 허무가 찾아 들어올 마음의 빈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70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40이 넘은 딸을 그 품에 안고 통곡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 딸은 지체 부자유자였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모가 정말 한 평생 돌봐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노모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깊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나면 이 딸은 어떻게 될 것인가 때문에 안타까워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자기 딸이 자기를 필요로 하는데 자기는 점점 늙어가고 죽음이 다가오니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 할머니는 오늘도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에 성실하게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인생의 허무는 찾아들지 못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정말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가 그런 경험을 토대로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사명이 다하는 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명이 아직 남아있는 한 결코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허무주의에 빠져 인생을 허우적거리지 않습니다. 될 대로 되라며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덧없는 세월이라도 그 사명을 향해 치열한 삶을 살면서 보람과 의미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퇴직하시며 집에서 쉬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오늘은 뭐하고 보내나!’ 한숨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십니다. 이런 분은 하나님께서 바로 불러 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하루 하루를 지옥처럼 보내게 됩니다.
또 다른 퇴직하신 분이 계십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중보기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전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사회 봉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 홀가분하게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찾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것이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덧없는 세월에 허무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인생이 무로 끝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허무주의를 영어로는 니힐리즘 [nihilis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 무(無)라는 뜻의 'nihil'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있는 것 같으나 없는 것이라는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의 주장에서부터 이런 사조가 생겼습니다.
실제로 영웅호걸들의 무덤에 가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세상을 호령하고, 그 이름을 떨치고,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고 하나 지금 다 썩고 흙이 되고 나니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노년이 되어 자기 인생을 돌아볼 때 “도대체 나는 한 평생 뭐하고 살았나?”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그저 아등바등 먹고사느라고 자식 공부시키느라고 허리가 다 휘었지만 이제 와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 안타까운 회한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발달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나이 먹어 중년이 되면 한 차례 위기를 겪는답니다. 마치 사춘기 때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것처럼 중년기 때도 심각한 위기를 겪는답니다.
그동안 정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자리를 잡았고,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을 얻었습니다. 자식들도 키워 자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 자신을 보니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더랍니다. 어느덧 노년기가 문턱 앞에 찾아왔습니다.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써야하고, 폐경기가 와서 몸에도 변화가 옵니다. 자녀들이 바빠지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외롭고 허전하고... 그동안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 다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허무감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이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살전 2:19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전도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얻었고 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키웠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소망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장차 자기가 받을 면류관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 덧없는 세월을 보내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입니다. 자기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딤후 4: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바울은 자기가 주를 위해 달려갈 길을 다 달렸기 때문에 이 덧없는 인생을 마치는 날에 마치 마라톤 경기 후에 시상식에서 메달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를 위해 애쓰고 땀흘린 그 모든 것들은 물거품처럼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이 되어 장차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저 하나님 나라에게서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주를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주를 위해 땀 흘리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면류관이 되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결코 우리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무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분의 면류관이 저 하늘에 준비되고 있고, 장차 여러분의 더 큰 수고로 더 귀한 면류관들이 쌓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소망 중에 바라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겉으로 볼 때 우리 인생은 백구과극과 같아서 덧없이 무상하게 지나갑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더욱 그런 심정이 깊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롭게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덧없음 속에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참된 겸손을 배우며, 하나님 주시는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여 사명에 살며, 또한 우리의 수고가 면류관이 되어 우리를 기다림을 깨닫고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 기도 / 덧없는 세월 속에 겸손을 배우게 하옵소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하시고, 소망 중에 면류관을 보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형적
고전 7:29-40 / 지용수목사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고린도 교회를 아끼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낀다. 그래서 말하는데, 임박한 환난이 다가오니 처녀들(총각들도 포함됨)은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라. 또 아내를 잃은 사람도 다시 아내를 찾지 말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결혼하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니지만 이 때는 임박한 환난의 때이니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이것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다."
이 말씀을 낮 시간에 풀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오늘 밤에 이어지는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주님께 받은 계명이 아니고 하나님께 자비를 얻어서 충성된 자 된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하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 권면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작용해서 은혜가 되고 교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환난이 가까워온다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재림도 가까워온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바울을 비롯해서 모든 사도들과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온 것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성도들이 만나면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하늘에 번개만 쳐도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런가?" 하늘이 조금만 신비롭게 보여도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려나?"하며 살았습니다.
초대 교회 때뿐 아니라 계속해서 흘러오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보면 믿음이 뜨거울 때일수록 주님의 재림을 더 가깝게 기다렸습니다.
영국민도 신앙이 불같이 뜨거울 때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나 봅니다. 그런데 그때 영국이 세계를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뜨거우면 우리 나라도 부강한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영국이 신앙으로 한창 뜨거울 때 국회를 하는데 번개와 천둥이 치고 보통 때와 다르게 하늘이 진동했습니다. 그때 신앙 깊은 한 국회의원이 말했습니다.
"의장, 지금 하늘이 되어지는 것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국회를 중단하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합시다."
그 말을 듣고 모든 국회의원들이 "옳소. 국회를 중단하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합시다."라고 하는데, 한 국회의원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의장, 그것도 좋지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국회를 하다가 주님을 맞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따로 준비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회의를 잘 합시다."
그 국회의원은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이 들어보니 뒤에 말한 국회의원의 말이 더 옳았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계속했는데, 그날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믿음이 뜨거우면 '우리 주님께서 이제 오시려나?'하게 됩니다.
바울의 때부터 오늘까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데, 주님께서는 아직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더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왜 아직 오지 않으시나?'라고 하지만 하나님께는 이천 년이 이틀 같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Do not forget this one thing, dear friends;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re like a day."
크신 하나님께는 이천 년도 이틀 같습니다. 우리는 "우와! 이천 년."하지만, 주님께는 이틀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을 백성을 택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 택하신 백성을 구원해야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 그 날이 내일일지, 모레일지, 1년 뒤의 일일지, 5년 뒤의 일일지, 제가 죽은 다음의 일일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구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 모친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수 믿으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귓등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생각하니 예수를 믿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왔습니다."
참 오랜만에 맺힌 전도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분이 저를 "원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를 원장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사장님이라고 불러도, 회장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사실 저는 회장님입니다. 양곡교회 당회장이지 않습니까? 대구 어느 교회 목사님이 아들 학교에 갔다가 육성회장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모 교회당 회장님'이라고 소개하더랍니다. 어쨌든 저를 무어라 부르든 예수님만 믿으면 저는 기쁩니다.
그런데 만일 어제 주님께서 오셨으면 오늘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십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털고 가야 됩니다.
어릴 때 골목길에서 딱지 따먹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땅 따먹기도 하며 놀았습니다. 그렇게 놀다가도 어머니께서 오셔서 "용수야, 저녁 먹으로 오너라."라고 하시면 두 손을 털고 집으로 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천군 천사와 함께 영광스럽게 재림하셔서 "아무개야, 오너라."라고 하시면 회사 사장님도 회사를 두고 손을 털며 올라가야 됩니다. 병원 원장님도 병원의 환자들을 다 두고 손을 털고 올라가야 합니다. 은행장도 금고의 돈을 그냥 두고 올라가야 합니다. 슈퍼마켓 주인도 가게에 있는 슈퍼타이랑 오렌지 주스를 두고 그냥 올라가야 됩니다. 우리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지금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을 두고 손 털고 올라가야 됩니다. 신혼 여행가다가도 손 털고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니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것 같이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가 단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것 같이 지내라는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미 결혼해서 아내가 있어도 아내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그랬지만 아내에게 생명을 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뿐인 내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생명은 주님께만 걸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저를 위해 생명을 걸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은 고맙지만 제게 생명을 걸면 안 됩니다. 저를 배신하지만 않아도 저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생명은 주님께만 거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가 없는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다 털고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집착하면 행복이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 집착할수록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실망만 커지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 기대할수록 속만 상하게 됩니다.
언젠가 오만 원이 필요해서 아내에게 "여보, 오만 원 좀 줘요."라고 하니, 아내가 "벌써 돈을 다 썼어요?"하며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받지 못했습니다. 누가 번 돈인데 돈 오만 원도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저는 아내에게 기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나시스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 칼라스에게 반해서 '마리아 칼라스와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하다가 칼라스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8년이 되기 전에 권태가 나서 재클린에게 갔습니다. 케네디의 아내였던 재클린과 함께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았는데, 재클린과 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오나시스는 "내가 실수를 했다."하며 자기 가슴을 칩니다. 고민을 하다가 '파혼할 길이 없을까?' 하고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나 재클린이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하니 이혼도 못합니다. 재클린이 한 달에 14억 원이나 되는 돈을 펑펑 쓰니 오나시스는 화가 나서 혈압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아들마저 비행기 사고로 죽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도 죽습니다. "나는 인생을 헛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쓰레기로 만들고 간다."하며 그는 죽습니다.
천사처럼 노래를 부르는 칼라스와 살아도, 최고의 여자 재클린과 살아도 후회뿐입니다.
아내가 있는 자는 아내가 없는 자같이 하라는 말씀은 아내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남편 있는 자도 남편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내의 마음을 100% 만족하게 해 줄 남편은 없습니다. 아내의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채워 줄 남편은 없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아내의 마음을 채워 주지 못하는데, 누가 자기 아내의 마음을 다 채워 주겠습니까? 제가 도박을 합니까? 애인을 둡니까? 마약을 합니까? 술을 마십니까? 저같이 착실한 사람도 아내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는데 누가 자기 아내의 마음을 채워주겠습니까? 그래도 제 아내는 제게 점수는 많이 줍니다. 90점을 준답니다. 4년 전에는 98점을 준다고 하더니 며칠 전에는 90점을 준다고 했습니다. 점수가 자꾸 내려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막상 살아보면 별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길을 가다가 멋있는 남자나 여자를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귀고 결혼해서 살아보면 그 사람도 별 사람 아닙니다. 멋있는 남자도, 멋있는 여자도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신기루가 아닌 분, 우리에게 샘물을 솟아나게 해 주실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같이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노라면 울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울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아픈 일, 억울한 일, 슬픈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도 다 지나갑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생선을 사 가지고 갔더니 아버지께서는 복수가 찬 몸으로 힘들게 숨을 쉬시며 누워 계셨습니다. 그때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얼마나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는지 모릅니다. 제 평생 그렇게 속력을 내어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 액셀러레이터를 얼마나 세게 밟았는지 모릅니다. 경찰이 따라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특진을 신청했습니다. 특진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일반 진료를 받는 곳에는 줄이 너무 길게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암세포가 목까지 다 올라와서 많이 사셔도 3개월밖에 못 사십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술도 약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그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고 돌아오면서 자동차 안에서 제가 엉엉 울며 소리소리쳤습니다. 제가 제 아버지를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그런 아버지가 3개월 안에 돌아가신다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하나님! 내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세요."
정말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쳐 기도했습니다. 한 달간 거의 울며 병원을 왔다갔다했는데,
신비로운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께서 회복되셔서 잘 사시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 일도 다 지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다 지나간 일입니다.
휴가병들을 태운 자동차가 7m 절벽으로 떨어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군에 있는 아들이 휴가를 온다고 닭을 잡아 놓고 기다리던 아버지 어머니가 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도 지나갑니다. 세월과 함께 지나갑니다.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미치고 마는 것입니다.
나이 40이 넘어 쌍둥이 아들을 얻은 아저씨 한 분이 계셨습니다. 양손에 두 아들의 손을 잡고 다니며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쌍둥이 아들이 한날 한시에 자동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40이 넘어 얻은 쌍둥이 아들을 그렇게 좋아하며 행복해 하다가 동시에 잃었으니…. 아저씨가 아들 이름을 부르며 헛소리하고 다니다가 정신 이상자가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에게도 너무 집착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슬픈 일을 당하게 되는데,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것도 지나가는 것이니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기뻐도 내일은 기쁘지 않은 것이 인생입니다.
총리로 지명되어 환하고 희망차게 웃으며 인터뷰하던 사람이 어떤 일로 3일 뒤에 나래를 접는 것을 우리가 TV를 통해 보지 않았습니까?
기쁜 일도 잠깐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모두 "김영삼! 김영삼! "하며 얼마나 환영했습니까? 그러나 임기를 끝낼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김대중! 김대중!"하는 소리가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김대중 대통령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더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기쁜 일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잘 되고 남편이 잘 되어 "야!" 하는 것도 곧 없어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매매하는 자들은 매매하는 것이 없는 자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무역이 잘 되고 한 달 수입이 20억 원, 30억 원이 되어도 그것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매매하는 것이 없는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시 대통령의 집무실에는 운동 기구가 있습니다. 전용 비행기 안에도 러닝머신이 있습니다. 대통령 일이 바빠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대통령이 가는 곳에는 운동 기구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가면 없어집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대통령 전속 비행기도 타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150평 아파트에 온갖 편의 시설을 다 갖추어 놓고 살아도 그것도 지나갑니다. 편의 시설이라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설악산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그 교회 장로님이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갔는데 '24시 편의점'이라는 간판이 보였습니다. 그것을 보며 '저 집은 신앙이 참 좋은 집인가 보구나. 얼마나 신앙이 좋으면 24 시편의 집이라 했을까? 그런데 왜 23 시편의 집이라 하지 않고 24편의 집이라 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멍청합니까?
여러분, 2억 원을 주고 산 자동차도 곧 녹슬고 지나가고 맙니다.
오늘의 미스코리아도 내일 모레는 할머니가 됩니다. 다 지나갑니다.
여러분에게는 제가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제 눈에는 제가 소년같이 보였습니다. 저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지용수!"하며 거울 속의 저를 한참 바라봅니다. 그렇게 거울 앞에서 저를 바라보면 소년 같았는데 지금은 아무리 보아도 소년 같지 않습니다.
시편 90편 10절에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다 지나갑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합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갑니다.
따라 합시다.
"지나간다."
옆 사람을 보십시오. 언젠가는 없어집니다.
주님의 재림도 임박했지만, 우리 개인의 종말도 임박했습니다. 여기에서 천 년 만 년 살 수 없습니다.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영광 장수는 무엇하리오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 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인생은 그저 긴 꿈입니다.
제가 미국 뉴욕교회 집회를 마치고 나니 장로님들이 골프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골프를 잘 못한다고 해도 따라 하면 된다고 자꾸 가자고 해서 갔습니다. 장로님들이 다 골프를 좋아하셨는데 그 중 한 장로님은 뉴욕 챔피언입니다. 그 장로님이 골프는 좌우로 치우치면 안 되고 똑바로 가야 하니 가장 성경적인 운동이라고 해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공을 치기만 하면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는 바람에 공을 일곱 개나 잃어버렸습니다. 공 하나 값이 통닭 한 마리 값이라는데 그렇게 잃어버렸으니 제가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지금은 제가 저를 알기 때문에 지금 같았으면 골프하러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제가 저를 몰라서 따라 갔고, 그분들도 저를 몰라서 같이 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에 "주여,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참 미안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잤습니다. 그런데 제가 또 골프하러 가서 공을 잃어버렸습니다. 공을 찾으러 산 속을 헤매는데, 나무 밑에 골프 공이 30개나 있었습니다.
"야! 통닭 30마리!"
어제 잃은 것 일곱 개를 빼고도 스물 세 개입니다. 얼마나 좋던지 "야! 야!"하다 깨니 꿈이었습니다. 꿈에 골프 공을 30개나 주웠지만 꿈을 깨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꿈에서는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소용없습니다. 꿈에 암행어사가 되었는데 깨니 머슴 그대로입니다. 아주 멋진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깨니 꿈입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입니다.
그리고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홍안 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며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말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제쳐가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이것은 전도가입니다.
이는 '인생은 일장춘몽이구나. 다 지나가는 것이구나. 그래, 그냥 살자.'하며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하는 하숙생 노래나 부르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의욕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미국 한 곳에 백인들이 살았는데 그 동편과 서편에는 인디언들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양편의 인디언들이 친하게 지내다가 일 년 중 하루는 큰 싸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이 지나면 다시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또 일 년이 지나 그 날이 되면 활을 쏘고 창을 던지며 싸워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싸우다가도 해가 지면 서로 물러났다가 그 다음 날부터는 정답게 지냈습니다.
백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스포츠도 아니고 전쟁도 아닙니다. 그런데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백인들은 불쌍한 야만인인 인디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인디언들이 싸우는 그 날, 백인들이 양편의 인디언들에게 총을 쏘아 싸움을 막았습니다. 인디언들은 총이 무서워 싸우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그 다음 해에도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동편의 인디언들도 서편의 인디언들도 다 병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위해 약품과 의료진을 보내고 좋은 식품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죽는 인디언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인디언들이 그렇게 죽는 이유를 나중에 조사하니 그들이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일 년에 하루, 싸우는 날이 있을 때는 그 날을 위해 남자들이 의욕을 갖고 일 년 내내 활쏘기, 창던지기 연습을 했는데, 그 싸움이 없어지니 의욕을 잃어 병들고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의욕을 잃으면 죽습니다. 의욕에 불타기를 바랍니다. 삶의 의욕이 강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병들지 않고 강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지나가고 마는 삶에 무슨 의욕을 가지라는 것입니까?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처럼,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자처럼,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처럼, 매매하는 자는 매매하지 않는 자처럼, 물건을 쓰는 자는 물건을 쓰지 않는 자처럼 하면서 무슨 의욕을 가지라는 것입니까?
세상의 의욕을 갖지 말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느냐?'하는 의욕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결혼하라는 말씀도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도 따지고 보면, 그것입니다.
'여자가 혼자일 때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길까만 생각하는데, 남편이 있으면 남편도 섬겨야 하니 마음이 나뉘지 않겠느냐? 남자가 혼자 살면 하나님만 섬기면 되는데 아내를 얻으면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 마음이 나뉘지 않겠느냐? 그러니 임박한 때는 결혼하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물론 나중에는 바울의 마음이 바뀝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때는 교회와 주님이 함께 하는 것처럼 결혼 생활을 승화시킵니다. 그래서 교회가 주님께 복종하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몸 바치신 것처럼 남편은 아내에게 희생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서를 쓸 때까지는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바울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0)
바울의 의욕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교회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의욕에 불타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사는 것이 진짜입니다.
전도서 1장 2절에서 3절에 말씀하십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솔로몬은 미인들도 거느려 보고, 사업도 해 보고, 부귀영화도 누려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누려 보았지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전도서 12장 13절에 고백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할렐루야!
결국 하나님과 관계된 것만 영원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며, 교회에 충성하고, 또 전도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이런 희망을 품고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회 생각만 하면 기쁘고, 말씀을 들으면 흥분하고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집사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가슴이 너무 뜨거워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멘! 아멘!"하며 좋아했습니다. 구원의 말씀이 너무 좋다며, 속죄의 말씀이 너무 좋다며 야단하니 주위 사람들이 제발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해서 별명이 감집사님입니다.
그 감집사님의 교회에 새로 부임한 도지사님이 나오실 것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 감집사가 별나게 굴면 처음 오신 도지사님이 우리 교회를 별난 교회라 생각하고 떠날지 모르니 하루만이라도 감집사를 격리시켜야 되겠다.'
그래서 감집사님을 사무실에 있게 하고 성경 대신 지리책을 주었습니다. 혹 성경을 읽다가 "아멘!"하고 소리칠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본당에서 편한 마음으로 설교를 하는데, "할렐루야!"하는 소리와 함께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가 8,848m,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 높다. 할렐루야! 마리아나 해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의 깊이가 10,863m, 와!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 깊다. 할렐루야!"
얼마나 큰 소리로 외치는지 사무실에서 하는 말이 본당까지 들렸습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이 도지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별스러운 집사님이 계셔서 조금 소란스러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이 교회에 왔습니다. 특별히 이 교회에 감집사님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그분처럼 뜨거운 믿음 생활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분을 본 받고 싶어서 왔는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그래서 감집사님을 만나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의 믿음이 그렇게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을 생각만 해도 기쁜 것처럼, 교회만 생각해도 기쁘고 목사님만 생각해도 즐거운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아끼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아껴 주십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슬람교인들인 터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축복을 제일 많이 받은 나라가 미국이지만, 1917년도에는 영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제일 많이 받은 나라 영국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국이 '우리 주님께서 걸어다니신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며 알렌비 장군을 보내어 예루살렘을 탈환하게 했습니다. 알렌비 장군은 최신의 무기와 뛰어난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포탄을 퍼부으려던 장군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우리 주님께서 걸어다니신 예루살렘에 어떻게 폭탄을 퍼부을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 공격하지 못하고 영국 왕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폐하, 우리 주님께서 다니신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무기로 공격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 주십시오.'
왕이 회의를 소집했는데, 한 참모가 말했습니다.
"역사 이래로 예루살렘을 향해 활을 쏜 나라 중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무사한 나라가 없습니다. 알렌비 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공격하지 맙시다. 무기로는 공격하지 맙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왕이 알렌비 장군에게 명령했습니다.
"알렌비 장군, 무기로 공격하지 말고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특공대의 모든 군사들이 무기를 준비해 놓았지만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게 해 주세요."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습니다.
최고의 나라 영국 군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슬람교인들은 이제 자기들이 죽을 줄로 알았습니다. 영국 군인들이 공격 준비를 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공격해 오지 않으니 무서워 덜덜 떨다가 자기들의 비밀 통로로 다 빠져나갔습니다. 알렌비 장군은 너무 기뻐서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구나."하며 성가대를 조직했습니다. 총구는 다 밑으로 내리고 성가대가 찬양하며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교회를 아끼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든 경영을 하든 그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일을 아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