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와 함께한 장기려선생님
최 중 묵 (부산복음병원외과 동문회장·서면복음외과의원장)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실천인
나는 성산 장기려 선생님 문하생으로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외과학문과 외과수술을
전수하였다. 선생님은 진실한 기독교 신앙인이며, 진실한 교육자요 진실한 의사이며,
박애정신이 몸에 베인 의료선구자적 초인적인 일들을 성취하신 분이며, 지극히 겸손
하시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시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학문과 환자 진료와 성경공부
등으로 쉴 시간 없는 생활의 연속이셨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며, 사랑을 베푸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초인적인 실천으로 놀라움과 함께
부족한 나에게까지 감동을 일으켜 변화를 주신 분이라 하겠다.
매일 새벽, 어김 없이 어둠 속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셨으며 최신의학 공부를 지도하시고
회진(환자를 일일이 침대까지 가서 수술경과, 치료, 처치를 지시하는 시 간)시에 가난한
환자가 수술완치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이 퇴원치 못하는 걸 아시면
"당신온 완치되었으니 이제 자유입니다. 직접 걸어 나 가서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사십시오." 라 말씀하시며 퇴원을 종용하시었다.
이 때의 선생님 모습과 표정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이 진실하게 우러나는
거룩한 그것이었다. 선생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행정당국과 교섭하여 환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퇴원 길로 안내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선생님께 퇴원을 보고하면
"참, 잘된 일이야! 가난한 사람에게 우리가 베풀면 하나님께서 열 배 백 배로 갚아주실
것이야." 하시며 진지하게 희망을 심어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유료환자를 보시는 일보다도 무료로 가난한 환자들을 돌봐 주시고, 시술과
치료하는 일을 더 중요시하시며 기뻐하는 마음이셨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세우신 선생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일환책으로 동구 초량동에 분원을 설치하고 작은 외과병원을
운영하셨으며 이 조직이 바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운동을 싹트게하고 실천 발전시킨
모태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운영으로 많은 서민들에게 의료혜택을 주었으며, 돈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셨다. 따라서 청십자의료보험의 모델이 우리나라 전국민의료
보험으로 발전되어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의료시혜를 전국민이 단시일내에
누리게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게다. 장기려선생님의 희생과 봉사정신 그리고 의료
선구자적 역할은 그만큼 지대하다. (실지 수가책정이나 행정사무 등은 청 십자와는
무관함.) 어느 서울 유명 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들과 우리 외과 수련의사들이 모인 좌석
에서 "당신들은 장기려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이요,
행복한 의사들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더 중요한 것은 성산 장기려선생님이
부산에서 사시기에 부산시 전체가 존재하며 우리 한국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된다.
성경 말씀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역사하심을 회상하며 참 스승임을 감사드린다.
1951년 영도 제3교회 창고 천막에서 무료병원으로 시작, 1951년 송도복음병원 유료 및
무료병원, 1956년에서 1961년 부산의과대학외과 주임교수 및 학장과 부산복음병원장을
겸임하셨을 때 일이다.
나자로를 살리신 선생님
이 일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겠기에 여기 당시의 사실들을 말하고자 한다. 그때만 해도
6 ·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 경제로 의료 여건이 아주 미약한 상태였으므로
부산시 아미동 소재 화장막터 창고에는 죽음을 기다리며 버림받은 행려환자가 즐비했다.
수용소의 그 많은 환자를 장기려선생님은 바쁜 업무에도 시간을 마다 않고 찾아가 치료와
위안을 아끼지 않으셨다. 외과 수술을 요하는 환자는 송도복음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하셨다.
국가도 못하고 사회단체도 못하고 종교단체에서도 손을 못 댄(나자로 마을) 가난한
환자들에게 희생, 봉사하신 일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1969년 서구 장림동 소재 행려병자 수용소 근무를 한 경험이 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할 열악한 환경이고 인간적으로
완전 고립과 격리,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은사 장기려선생님께서는 신앙으로
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나자로들을 기쁨으로 치료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받은 인간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며 가난한 자, 먹을 것이 없는
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나 그들을 돌봐주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신 것으로 믿어진다. 1950년 이후 성산
장기려박사하면 무료 천막병원에서 수술로 병을 고치시는 명의사로 소문이 나기 시작
하여 송도복음병원, 서울대학병원, 카톨릭의대병원, 부산의과대학병원 등 정신없이
바쁘셨다. 한 달에 15일은 서울, 15일은 부산에서 특수 외과질환을 수술로 다스리는
의사로 맹활약을 하실때, 시중 사람들의 입에서는 "장기려박사가 못 고치면 사형선고야.
장기려박사는 행려환자까지 찾아가서 치료해주는 크리스찬 의사야." 하는 말들이 경향
각지에 퍼져 나갔다. 아프면 장박사를 찾아야 한다고 줄지어 모여들었던 것온 오직
장기려 박사가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에 환자가 믿고 자기 생명까지 맡긴 것으로
믿어진다. 진실은 바로 믿음이니까!
2O세기의 성자셨던 선생님
선생님은 20세기의 위대한 업적으로, 의료보험조합운동의 실천으로 모든 국민에게
시혜를 베푸시고 의학발전에 기여하셨으며, 후학도들에게는 자기의 지식을 송두리째
가르쳐 주시고 실습까지도 지도하여 주시는 참스승이셨니 진실한 의사이시며,
겸손하시고, 청빈, 무소유, 순결, 순명으로 하나님을 섬기신 신앙인이었다. 얼마나
겸손하신지 외과적 대수술 일만례 기념모임에서 말씀하시길 "내가 일만례 수술치료를
시행하였지만 이 중 한사람도 수술이 만족하게 시행됐다고 생각지 못했다."는 감회를
피력할 때 지극히 겸손된 그 내면을 헤아릴 수 있었다. 환자의 인격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로써 마음의
안정을 구하셨으리라 믿을 뿐이다. 나의 부족한 소견이지만 어느 의학자나, 의사나,
어느 종교 지도자나, 스님들보다도 고차원적 신앙으로 우리들의 모범과 이 시대의
빛과 소금으로 사시다 가신 성산 장기려 선생님을 후세에게 널리 알려야 할 일들이
우리들의 몫이어야 하겠다. 여기 기록은 사실대로 표현한 것 들이다. 성산 장기려선
생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며 여러 가지 종류의 봉사활동 등이 혜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는 것도 부언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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