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산책] 빅토르 위고
파리―빅토르 위고와 '레미제라블'의 자취를 찾아서
사랑과 필력이 모두 왕성했던 "빅토르 위고"의 집엔
'혁명'의 바리케이드 놓여 있던 그곳… 지금은 청바지 가게
"내일이 오면 신의 뜻한 바를 알게 되리라. …내일은, 내일로!"
현재 서울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레미제라블'중 1막 마지막 부분에서 시위대가 부르는 노래다. 1862년 세상에 나온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Hugo·1802~1885)의 소설 '레미제라블'이 154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위고와 '레미제라블'의 주요 무대는 프랑스 파리. 파리에 거주하는 번역가 이재형씨의 도움으로 그 자취를 따라갔다.
취재=파리 유석재 기자, 편집=뉴스큐레이션팀
프랑스 파리 시테 섬 북쪽의 샹주 다리.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경찰관 자베르가 투신자살한 곳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프랑스 혁명 당시 감옥으로 쓰였던 콩시에르주리. / 파리=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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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 동네서 탄생한 '레미제라블'
파리 지하철 바스티유 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생 폴(St-Paul) 역에 내리면 생 폴 생 루이 성당이 나온다. 1641년 루이 13세가 예수회 수도원 부속 교회로 건립했으며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1833년 장발장의 양녀 코제트가 마리우스와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묘사된 장소다. 이곳에선 1843년 위고의 큰딸 레오폴딘이 실제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위고가 성당에 기증한 구불구불한 외양의 성수반(聖水盤·성당 입구에 놓아두는 성수를 담은 그릇) 두 개가 아직도 벽에 붙어 있어 진한 부정(父情)을 전한다.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결혼식을 올린 파리의 생 폴 성당.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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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보주(Voges) 광장이 나온다. 17세기 초 앙리 4세가 만든 '왕가의 광장'이었으며, 북쪽에는 귀족들이 대저택을 지어 살았다. 지금도 정치인, 배우, 방송국 앵커 같은 유명인들이 거주한다고 한다. 광장 남동쪽 건물 3층에 빅토르 위고의 집이 있다.
위고는 '레미제라블'에 나온 1832년 6월 혁명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보주 광장 6번지의 이 집으로 이사했고 1845년부터 17년 동안 여기서 '레미제라블'을 집필했다. '비참한 사람들'의 지역이 아니라 부유층이 사는 동네에서 '레미제라블'이 쓰여졌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복원된 위고의 서재와 응접실, 침실, 가족 초상화를 볼 수 있다. 로댕이 만든 위고의 흉상은 힘이 넘친다. 근처 카르나발레 박물관(파리역사박물관)에선 1830년 7월 혁명의 자료를 통해 2년 뒤 일어난 '레미제라블' 속 '혁명'의 열기를 유추해볼 수 있다.
빅토르 위고의 집 내부. 위고의 초상화와 흉상(로댕 작품)이 보인다. ‘레미제라블’을 쓴 곳이다.
파리 빅토르 위고의 집 내부.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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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케이드 자리엔 신발·청바지 가게
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파리역사도서관의 오른쪽 벽면은 예전 라 포르스(La Force) 감옥의 외벽이 있었던 곳이다. 이 감옥은 코제트의 후견인으로 행세하던 '레미제라블'의 악역 테나르디에가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돼 갇혀 있다가 탈출한 곳이다.
근처에 장발장과 코제트가 살았던 것으로 설정된 레 자르시브가 40번지가 있다. 장발장은 경찰 자베르의 추적을 피해 집 세 채를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그중 한 곳이다. 지금은 유치원(école mater nelle)이 들어선 4층 석조 건물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과 코제트가 살았다고 묘사된 집.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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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 지구에서 퐁피두 센터를 지나 서쪽으로 가면 '레미제라블'의 주요 배경인 빈민가가 있던 보부르(Beaubourg) 지구가 나온다. 생 드니(Saint-Denis)가는 프랑스 역대 왕이 전쟁하러 떠날 때 지나가던 길이며, 현재 환승 지하철역이 있는 레 알(Les Halles) 일대에는 1970년대까지 큰 시장이 있었다.
'레미제라블'의 시대인 19세기 전반기엔 이 일대 좁은 골목마다 다양한 직업을 지닌 빈민들이 살았다. 이 빈민가의 길은 마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배설물이 흐르는 길가 구석마다 창밖으로 내던진 쓰레기가 쌓였다고 한다.
'레미제라블'에서 '혁명' 주도 세력의 모임 장소인 코랭트 술집도 이 일대에 있었다. 소설 속에서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치했던 길에는 지금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신발 가게(닥터 마틴)와 청바지 가게(리바이스)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좁았을 길에 쌓인 바리케이드는 영화나 뮤지컬에 등장하는 장대한 규모일 리가 없다.
파리 퐁피두 센터 서쪽 보부르 지구 레알 전철역 인근 거리는 ‘레미제라블’에서 혁명군이 바리케이드를 쳤던 골목이 있던 장소다. 당시엔 신발 가게와 청바지 가게 사이쯤으로 길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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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베르는 다리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오랜 세월 도망자 장발장을 추격하던 경찰관 자베르는 '혁명'의 와중에서 도리어 장발장이 그의 목숨을 구해 준 뒤 자책감에 빠진다. 그는 센강의 한 다리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작품에는 이 다리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소설의 정황상 시테 섬 북쪽의 샹주 다리(Pont au Change)인 것으로 보고 있다.
파리의 주요 공연장인 테아트르 드 라 빌, 샤틀레 극장과 인접한 곳이다. 자베르는 이 다리 북동쪽 난간에서 센강으로 몸을 날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아래 강물 대신 자동차 도로가 놓여 있고 강 건너편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감된 감옥이었던 콩시에르주리가 보인다. 평생 엄정한 법의 집행자를 자부했던 자베르는 마지막 순간 '법 집행'의 상징과도 같은 그 건물을 보며 회의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강 건네 시테 섬에는 빅토르 위고의 또 다른 대표작 '파리의 노트르담'의 무대였던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창고나 야전병원으로 쓰일 정도로 격하됐던 이 성당은 1831년 위고의 소설이 나온 이후 옛 위상을 되찾게 됐다. 위고야말로 '노트르담의 은인'이었던 셈이다.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가 코제트를 처음 만난 파리 뤽상부르 공원의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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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하철 국철 구간으로 한 정거장 떨어진 뤽상부르 공원은 마리우스가 코제트를 처음 만난 것으로 묘사된 장소다. 정원 북쪽 궁전 정면의 오른쪽에 있는 돌벤치에 장발장과 코제트가 앉아 있었고, 마리우스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장발장은 쓰러진 마리우스를 구출한 뒤 하수도를 통해 필사적으로 도주하는데, 그 옛 하수도의 자취를 볼 수 있는 곳은 에펠탑과 가까운 지하철 퐁 드랄마(Pont de l'Al ma) 역 근처 파리 하수구 박물관(Des égouts de Paris)이다. 지금까지의 장소 중 유일하게 관람료(4.4유로)를 받는다.
위고, 희곡 쓰다 총성 듣고 현장으로… '6월 봉기' 재조명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혁명'이란 언제 일어난 무슨 사건이었을까? 일부에선 '프랑스 대혁명'(1789)이나 '7월 혁명'(1830)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1832년 6월에 파리 시내에서 일어난 '6월 봉기' 또는 '파리 봉기'를 말한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이 무너진 뒤 나폴레옹의 제정(帝政)과 왕정 복고가 이어졌고, 7월 혁명의 결과 루이 필리프의 입헌군주제 왕정이 들어섰다. 공화주의자들은 '피는 우리가 흘려 놓고 혁명의 열매를 빼앗겼다'는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1832년 4월 콜레라가 일어난 데다 경제 위기가 겹쳐 민심이 흔들렸고,
6월 1일에는 공화주의자의 존경을 받던 자유주의 정치가 라마르크가 사망했다. 공화주의자들은 6월 5일 라마르크의 시민장 도중 장례 행렬을 바스티유 광장으로 이끌면서 '거사'를 일으켰다. 봉기 참가자의 3분의 2는 노동자 계층이었다. 이들은 하룻밤 만에 파리 동쪽 지구를 장악했으나 투입된 정규군 2만5000명과 맞서게 됐고, 군인 73명과 시위대 93명이 사망하면서 봉기는 진압됐다.
역사 속에 묻힐 뻔했던 이 '6월 봉기'를 재조명한 사람이 바로 빅토르 위고였다. 위고는 사건 당시 튈르리 정원에서 희곡을 쓰던 중 총성을 듣고 현장으로 가다가 바리케이드에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됐고, 기둥 사이로 간신히 몸을 피했다. 이후 '레미제라블'을 통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1833년에 이르는 많은 인물의 장대한 이야기를 썼다. 소설 속 가상의 결사체 'ABC의 친구들'과 그 지도자 앙졸라는 문학이 형상화한 혁명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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