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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년~1598년)
일본 센고쿠 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그의 사후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관백과 천하인의 지위에 올랐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그는 조선을 침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정권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것에 실패해 자신의 사후에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센코쿠 시대에 가장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서민 출신으로 태어나서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관백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일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입신출세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칭한 태합(타이코) 또한 최하층에서 시작하여 크게 출세한 인물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금태합(今太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따라서 전통적으로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뤄왔다. 최근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히데요시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 또한 나오기 시작했으며, NHK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을 대충으로나마 다루기 시작한 이래 일본 사극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점점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며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 내에서의 활약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등 그의 대한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이다. 일본 영상물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최고권력자에 오르기까지는 호방하고 대범하며 미천한 출신답게 재치있는 인물로 묘사하다가 말년에 타락, 노망드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게 한국 매체의 '그냥 나쁜 놈' 취급과의 차이점이다.
3. 호칭과 별명
다른 이름으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별명은 '대머리 쥐(禿げ鼠)', 원숭이.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이등박문으로도 부르는 것처럼 조선시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고유어 이름을 일본어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 한자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풍신수길로도 불린다.
만년에 간파쿠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퇴임한 셋쇼(섭정)나 간파쿠를 이르는 호칭인 '타이코(太閤:태합)'로도 많이 불린다. 사실 타이코라는 호칭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호칭은 아니지만, 이 호칭으로 불린 사람들 중 제일 인지도가 높아서 일본인들이 그냥 '타이코'라고만 지칭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이마타이코(今太閤: 오늘날의 태합)'인데, 히데요시처럼 밑바닥 출신에서 입신출세한 인물들의 별명으로 쓰이는 단어다. 정치계의 이토 히로부미나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 별명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외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주 겸 초대 회장도 이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하며, 일본의 연예 기획사 요시모토 흥업의 창업자인 요시모토 세이(吉本せい)는 '여자 이마타이코(女今太閤)'라고 불렸다.
본인의 주장으로는 일본 오와리국(尾張国, 아이치현 서부)에서 아시가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히데요시의 출생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단은 없다. 칸파쿠 취임 후에 자신의 모친이 주나곤의 딸로,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다 낙향한 후 자신을 낳았다고 선전한 적은 있으나, 부정적인 주장을 따르면 미천한 신분까지 고귀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그나마 부친이 아시가루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동생 히데나가와 아사히히메, 히데요시가 평생 효도한 어머니 오만도코로(이름은 '나카')를 제외하면 친가 쪽의 친척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아명은 고자루(小猿, 새끼 원숭이) 또는 히요시(日吉).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きのした とうきちろう)로 개명하였고, 오미 국을 평정한 뒤에는 노부나가로부터 지쿠젠노카미(筑前守)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개명하였다가 태정대신(太政大臣), 관백(關白)이 되면서 도요토미(豐臣)라는 성을 썼다. 더해서 후지와라 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 성도 있다. 또한, 당시 겐지(源氏) 씨족이었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시(平氏)계임을 자처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탓에 조선 측 기록을 비롯한 일부 문헌에선 '평수길(平秀吉, 다이라노 히데요시)'이라고도 불린다. 단, 위에 기록한 다이라, 후지와라, 도요토미는 '우지(氏)'이므로, 실제 사용한 성씨(苗字)는 계속 하시바였다는 주장도 있다.
5.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와 살았다가 집을 떠나 마츠시타 유키츠나(松下之綱)라는 자를 섬기다 얼마 안 가 그만두고, 18세 때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된다. 이후 기요스 성 수리 실무자와 주방 담당자 등을 담당하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데우려고 품 속에 품고 있자 노부나가가 크게 마음에 들어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실 이 일화는 명확한 사료가 있는 게 아니라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한다.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뭔가 사와야 할 게 있어서 가신들에게 시키면 비싸기만 하고 질이 엉망인 것만 잔뜩 가져오기 십상인데 히데요시는 가신들이 주고 산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더 싼 가격으로 구해오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중용했다고 한다. 1555년에는 하치스카 마사카쓰의 가신으로 들어갔다고도 하며, 하룻밤만에 성을 만들어내보인 것으로 유명한 스노마타 이치야 성(墨俣一夜城)의 일화도 이 시기(1561)의 것이지만, 이 일화도 후세에서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히데요시의 이름이 사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568년의 일인데, 간논지 성 공략 당시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교토 입성에 성공한 노부나가의 명으로, 아케치, 니와 등과 함께 교토의 정무를 담당하였다.
1570년의 가네가사키 전투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반으로 인해 급히 퇴각하는 노부나가의 후위(신가리)를 자청하여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살아나 큰 공을 세웠고, 1573년의 오다니 성 전투에서도 3천의 군세를 이끌고 아자이 격파에 일조하였다. 아자이 나가마사 사후 그의 옛 영지인 북 오우미 3개 군 18만 석을 영지로 받아 다이묘가 되었으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았는데, 이때 오다 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성으로부터 한 글자씩 따와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미 출신의 인재들을 발굴하는데 힘을 쏟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시다 미츠나리이다.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의 가신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아내 고다이인의 친인척들일 수밖에 없었고, 정식으로 가신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오우미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오미 계열 가신들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오와리 계열 가신들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1575년에는 나가시노 전투에 종군하였고, 이듬해에는 상락해오는 우에스기 겐신을 막기 위해 시바타 카츠이에와 연합전선을 펼쳤으나 쌍방의 견해 차이로 히데요시가 이탈, 오다 군이 대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데토리가와 전투). 이 일로 노부나가의 격분을 샀지만, 이후 용서받고 시키산성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공략하여 이를 멸하였다. 이후에는 주고쿠 지방 공략에 참가하여, 1579년까지 아카마쓰(赤松), 마츠바라(松原), 벳쇼(別所), 고데라(小寺), 우키타(宇喜多) 등을 항복시켰으나, 연달아 일어난 반란으로 모리 공략은 연기되었다.
1581년부터 재개된 모리 공략에서, 돗토리 성, 빗추 다카마쓰 성 등을 공략하였다. 특히 다카마쓰 성을 공략할 때 물줄기를 돌려 성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 '다카마쓰 수공'으로 히데요시의 전공 중 가장 유명한 일화이다.
이 빗추 다카마쓰 성을 포위할 때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당하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다카마쓰 성주인 시미즈 무네하루 한 명만 할복하고 더 이상의 진군을 멈추는 내용으로 모리 측과 즉시 화친하였다. 이후 황급히 교토로 향했는데, 이를 주고쿠 대회군(中国大返し)이라 한다. 현재 유력한 설을 따르자면, 6월 6일 오후에 다카마쓰를 출발하여 7일 밤에 히메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30시간 만에 70km를 주파했다는 기록만으로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어느 소설가가 이에 대해서 본인이 직접 육상선수들에게 요청해서 가상실험을 해봤는데, 몸에 번잡한 장비를 최소한으로 줄인, 그러니까 식량을 휴대하지 않은 경보병 정도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히데요시가 혼노지에서의 소식을 전해듣고 퇴각하기 전에 미리 발이 빠른 사람을 시켜 병사들이 지나게 될 길목에 위치한 마을마다 돈을 줘서 병사들이 도착하면 바로바로 식사 및 새 신발을 조달받을 수 있도록(즉 굳이 머물 필요 없이 식사와 헤진 신발만 해결하여 진군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해둔 뒤에 보급 없이 무장을 최소화한 병사들을 선발대로 보내는 방법으로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해석했다. 자신들과 같은 농민 출신의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와 같은 농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제 천하를 잡으러 간다. 우리와 같은 농민의 시대가 열린다!"며 축하하러 나온 백성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사실, 굳이 운동선수를 초빙해 실험할 것도 없는데, 매년 일본의 이웃나라에서 비슷한 사례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보병의 행군능력을 중시하는데, 그 극한이 천리행군이다. 일주일 간 400km를 이동하기 때문에 24시간 기준, 57km를 도보로 이동하며, 실질적 거리는 짧지만 역시 빡세고 빠른 무박 100km 훈련도 존재한다. 해당 훈련이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하시바군의 진군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이후 13일에 교토 근교인 야마자키에 도착하여 미츠히데와 회전(야마자키 전투), 이를 격파하고 교토에 입성하였다.
6.2. 오다 가문의 분열
6월 27일에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에서 부친 노부나가와 함께 자살하여 차남 오다 노부카츠와 삼남 오다 노부타카 파로 중신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장남 노부타다의 적자인 산보시(훗날의 오다 히데노부)를 지지하여 이를 옹립하였다. 이 일로 오다 노부타카 및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으로부터 탄핵장을 받았으나, 자신의 양자이자 노부나가의 4남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상주로 삼아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는 것으로 회피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폭설로 군을 움직일 수 없는 틈을 타서 기후 성의 오다 노부타카를 공격하여, 생모와 딸을 인질로 받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 봄에는 이세의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공격하여 3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2월 말에 출진한 시바타 카츠이에와 그에 동조하여 다시 거병한 오다 노부타카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마에다 토시이에의 배반과 신속한 반격으로 승리, 4월 24일에 시바타 가츠이에와 시즈가타케에서 일전을 벌이고 그 결과 가츠이에는 부인인 오이치와 함께 자살한다. 곧이어 5월 2일에는 오다 노부타카가 할복하였다.
오다 가문은 몇 파벌로 갈렸는데,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한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데려다 옹립한 상태였다. 오다 노부카츠는 도쿠가와의 편에 섰으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이후 영토와 영향력을 상실한다. 오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반란을 일으킨 종놈쯤으로 취급하고 공개적으로 대항했으나 패배한 게 어지간히 분했던지, 아주 섬뜩한 절명시를 남겼다. "예로부터 주인을 치는 곳이로구나.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
1584년에는 오다 노부카츠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기이 사이가 당, 조소카베 모토치카 등이 오다 군에 가담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세의 구키 요시타카 및 오다 노부카네, 미노의 이케다 츠네오키 등을 포섭하여 초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갔으나, 하구로, 나가쿠테 등에서 연패하였다. 이에 히데요시 본인이 직접 전선에 나서자, 오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강화에 응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투는 패배로 끝나 오다나 도쿠가와를 멸망시키는 데는 실패하지만, 이후 도요토미가 정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 서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히데요시에게 귀순하고, 오다 노부카츠는 소국의 다이묘로 쫓겨난다.
전쟁이 한창이던 10월 중순에 종오위하 사콘에노곤쇼쇼에 임명되었는데, 그로부터 약 한 달 만인 11월 22일에는 곤노다이나곤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관위로도 오다 가 필두가 되어, 명실 공히 히데요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해에 오사카 성을 쌓았고, 1585년 3월 10일에는 정이위 나이다이진에 서임, 임관되었다. 3월 21일에는 토도 타카토라로 하여금 키슈를 정벌하게 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또한, 시코쿠를 정벌하여 7월 25일에 이를 평정하였다.
히데요시가 쇼군이 아닌 관백을 칭한 이유는, 처음 성인 기노시타가 어머니 오만도코로의 친정 쪽 성일 정도로 평민 중의 평민이었다가 벼락출세한 인물이었기에, 아무리 노부나가의 빈틈을 파고들어 천하를 일통했다고 해도 정통과 권위가 한참 떨어졌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으로 막부를 열어 정이대장군이 되는 대신 관백에 직접 취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달에는 칸파쿠 상론의 종결을 위하여 후지와라 씨의 수장인 코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칸파쿠 직을 수여받았다. 관백이란 헤이안 시대에 등장한 율령 외 직위로써,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셋쇼), 관백(칸파쿠)를 장악한 셋칸 정치를 벌인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명예직에 불과한 공가의 직위였다. 유래는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모든 정사는 곽광에게 거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뢰었다.”는 글에서 나온 것이다.
이듬해에는 관백이 된 뒤 오오기마치 덴노로부터 씨(氏うじ)로서 도요토미를, 성(姓かばね)으로서 아손(朝臣あそん)을 하사받아 도요토미노 아손(豊とよ臣とみノ朝臣あそん)을 칭하게 되었고, 10월에는 총무사령을 선언하며, 다이묘끼리의 사사로운 전투를 금지시켰다. 12월 25일에는 타이죠다이신/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되었다. 태정대신은 조정 최고위 관직으로, 히데요시의 경우는 헤이안 말기의 다이라노 키요모리처럼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라 조정과 일본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독재자로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관직으로 봐야 한다.
간파쿠 취임에 대해 조금 더 서술하면, 당시 일본의 직위 체계는 조정의 권위 실추와 함께 개판이 되어 있었다. 막부 정치 이후 어차피 실권은 슈고 등의 막부 무가직에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오면 그것 또한 유명무실에 가까웠고, 다이묘들은 무가직 뿐만 아니라 조정의 관위 또한 뇌물을 주고 얻어내거나, 혹은 참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직인 간파쿠는 공가에서도 최고 명문이었던 후지와라 씨의 고셋케끼리 돌아가면서 취임하였는데, 혼노지 사건 직전 조정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정이대장군, 관백, 태정대신 중 원하는 관직을 주겠다고 한 바 있었으나 그 대답을 듣기 전에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게 된다. 이 부분은 소위 '삼관추임문제'라고 하여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끊이지 않는 논쟁이다.
히데요시는 무가 출신으로써는 최초로 간파쿠에 취임하였고, 게다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고셋케가 아닌 무가 출신의 새로운 가문이 간파쿠에 취임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일본의 성씨 제도는 우리의 성(姓)에 해당하는 씨(氏;우지)와 거기서 갈라져 나온 가문을 나타내는 묘지/묘자(苗字)가 구별되었는데, 히데요시는 고셋케의 일가인 후지와라(氏) 씨- 여기서 후지와라는 본성(本姓) - 코노에(묘지(苗字) 가의 일원으로 관백에 취임했으나,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氏;우지)를 하사받음으로써 새로운 가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막부가 아닌 조정의 일원으로써 율령체계에 입각한 통치를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이후로도 조정의 관직을 무사들에게 수여하고 조정의 실권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 정점인 간파쿠직을 도요토미 가가 세습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는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헤이안 시대의 셋켄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 직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물려주었고,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사사한 후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간파쿠 직을 내리지 않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장성을 기다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체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가문의 당주가 간파쿠가 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너무 어려서 히데요시 사망 직후 간파쿠가 되지 못했고 후견 세력도 마땅치 못하여 정권이 무너진다.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버텨야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방해라는 이유로 그 일파와 함께 모조리 숙청해버리면서 스스로 제 살을 깎아먹어버렸다.
세키가하라 전투로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파쿠 직을 다시 고셋케에 돌려주었고, 자신은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막부를 통한 통치로 돌아갔으며, 관직을 공가의 것과 무가의 것으로 엄격하게 나누게 된다. 후대 메이지 유신 시대에 히데요시의 이러한 정치체제 구상은 천황을 존중한 것으로 높게 평가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개창은 천황을 무시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어 히데요시는 충신으로, 이에야스는 역신으로 평가하여 천황의 권위 강화에 써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