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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전 7:32-40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 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5)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37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39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전 7:32-40 / 나는 여러분이 근심을 모르고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는데 자기 시간을 바칠 수 있지만 33) 결혼한 남자는 아무래도 이 세상 일을 생각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것인가에 마음을 써야 하므로 34) 관심이 분산됩니다. 결혼한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자신의 됨됨이를 늘 살피며 매사에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여자는 집안일과 남편에게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합니다. 35)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지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여기저기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 섬기는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36) ㄱ) 누구든지 자기 열정을 자제하기가 어려워서 결혼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십시오.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니 그런 사람은 결혼하십시오. (ㄱ. 36-38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36:혼기가 지난 딸을 그냥 두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경우 딸을 시집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37:특별한 이유로 딸을 시집 보내지 않도록 결정을 내렸다면 그것도 잘한 일입니다. 38:그러므로 딸을 시집 보내는 것도 잘한 이유이지만 시집 보내지 않는 것은 더 잘한 일입니다') 37)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의지력이 있고 또 결혼할 필요도 없고 결혼을 원하지도 않는다면 그의 결심도 훌륭합니다. 38) 그러므로 결혼하는 사람도 잘하는 일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 잘하는 일입니다. 39) 아내는 남편이 살아있을 동안은 남편에게 매인 몸이지만 남편이 죽으면 다시 결혼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십시오. 40)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결혼을 건강한 재림신앙, 종말신앙 안에서 다룹니다. 바울의 권면을 요약하면 “결혼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묻기 이전에 “나는 지금 내 욕망을 섬기고 있는가,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를 물으라는 말입니다.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32-35) 본 단락에는 2가지 물음이 나옵니다. 하나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배우자를 기쁘게 할까?”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입니다. 2가지 물음 다 좋은 물음으로서 우리 삶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성도는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이 우선순위에 있고, 이 우선순위에 집중하는 삶을 살 때, 결혼은 언젠가는 사라질 세상일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거룩한 주의 일이 됩니다. 이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하면 영원을 잃습니다. 결혼이 우상 숭배가 됩니다. 바울은 지금 결혼보다 독신을 더 선호하고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흐트러진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짓는 것이 아니니(36-38) 혼기가 찬 딸을 둔 부모에 대한 권면입니다. 독신으로 지내게 해도 좋고, 결혼하게 해도 좋습니다. 결혼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독신으로 살면 배우자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 하나님께 헌신할 기회가 많으므로 독신으로 있는 것이 더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신으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헌신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사는가 입니다.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39-40) 남편과 사별한 과부의 결혼에 관한 권면입니다. 과부는 결혼할 수 있으나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미혼인 사람들에게 준 권면처럼(7:25, 28, 32-34) 과부도 할 수 있으면 독신으로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처녀들에게 권면했을 때와는 달리(7:25) 이번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자기에게 고린도 교회의 물음에 답하는데 필요한 지혜와 말씀을 주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당신 삶의 우선순위는 흐트러지지 않았는지요?
‘거룩하게 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자세로서 모든 성도들이 결혼을 했건 안 했건 간에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의 뜻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의 자세입니다. 기혼자든 미혼자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질서 속에서 주를 섬기는 일입니다. 성도는 창조 질서 속에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며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에 대한 평가 기준은 결혼을 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죄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순결한 삶을 지킨 성도는 잘하였다는 칭찬을 듣게 되며 그 칭찬은 결혼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지키며 하나님께 헌신한 자에게 더 크게 작용합니다(Calvin).
< 설 교 >
복음 안에 자유하라
고전 7:35-40
세상 사람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으로 자유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에게 자유할 뿐이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신을 진정으로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자유하게 할 수 없음을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나고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는 복음 안에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 세상 속에 기쁨이 아닌 복음 안에 참 기쁨과 생명의 능력을 경험한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옛 사람에서 복음으로 자유하지만 새 사람 된 새로운 피조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그의 노예로 살아가길 자원하고 자청한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엡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35절>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복음 안에는 무질서가 없다. 복음 안에는 혼돈이 없다. 그러나 복음 안에는 생명의 질서와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올무와 거침이 되지 않는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유익함이 있을 뿐이다. 복음 안에 가난해도 그것은 하늘의 부요를 낳는 길이다. 복음 안에 고난이 있어도 그것은 하늘의 영광을 경험하는 최고의 길이다. 복음은 모든 자를 그리스도 안에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 기혼자이든 미혼자이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복음 안에 만들어진 새로운 질서 속에서 주님을 온전히 섬기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 성도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신앙과 구원의 빛의 통로로 살아가도록 그리스도 안에 지속적으로 완전한 헌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36절)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처녀의 보호자 된 부모가 결혼 정년기에 접어든 딸의 결혼을 추진하고 자녀의 결혼을 권장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혼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결혼을 통해 부부가 서로에게 육적으로 매여서 이 땅을 위해 살아갈 때 그것이 바울 사도가 걱정하는 부분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음으로 내어주시고 죽음과 사망에서 생명과 구원과 하늘의 자녀로 살리신 놀라운 사건인데 자칫 결혼을 통해 육신의 연약함으로 복음에 관심이 없이 사는 세상화가 되는 것이 바울이 염려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 안에 결혼을 통해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구하고 그 나라를 열방과 민족에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확장해 나갈 때 그 결혼은 주님 안에 세워진 결혼이기에 처녀된 부모는 결혼 정년기에 있는 자녀를 출가 보내는 것은 잘 한 것이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37절)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 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부득이한 일은 결혼을 시켜야만 하는 부득이한 일>은 결혼 서약과 같은 대외적인 의무와 책임을 가리킨다. 이를 보아 결혼에 있어서 쌍방의 서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적인 인정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고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본문은 처녀를 가진 부모에 대한 권면으로 처녀가 결혼하길 원치 않을 경우에 시집보내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린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자유자이지만 하나님이 복음으로 만든 창조 질서 속에 결혼을 하던 결혼을 하지 않던 예수와 복음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주님의 나라를 구하며 자신을 성령으로 거룩함을 유지하고 세상과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대한 평가 기준은 결혼을 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과 죄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순결한 삶을 지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성도가 결혼하지 않고 복음 안에 자유자로 살며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한 순결한 삶을 지키며 하나님께 헌신한 자가 더 잘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홀로 살며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영광을 위해 살 자녀를 미리 예정하시고 그에게 홀로 살 수 있는 하늘의 은사를 주심을 믿어야 한다.
(눅 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절)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바울은 복음 안에 과부들의 재혼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원리는 앞 절에서 기록된 처녀들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들은 다시 결혼하든지 혼자 그냥지내든지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또 하나의 조건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주님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에게 어떤 인생과 목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복음으로 먼저 살펴야 한다.
이것은 세상 불신자들과 이미 결혼한 자들에게 <그대로 행하라>고 말한 것과(12, 13절) 달리 새로운 결정을 해야 되는 과부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임과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도록 요구한다. 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 세워진 가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의 것으로 여겼다.
(마 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마 19: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9: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40절)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 자신이 독신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것과 같이 너희도 그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결혼에 매이지 않는 자유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로서 독신으로 지내며 복음의 증거자로 살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지혜로 결혼에 대해 바울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결 론
복음 안에 자유자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이 주는 자유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존재하게 만들고 주님과 영혼을 십자가 사랑과 생명의 복음으로 섬기도록 주님의 종으로 살게 만든다. 복음은 세상에 거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복음은 주님의 나라와 열방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서 복음의 종으로 살게 할 뿐이다. 이것이 천국을 복음으로 이미 얻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다.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라
고전 7:25-40 / 조정의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경적인 교회와 이단적인 교회의 차이는 무엇인가?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극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참 복음은 방탕한 삶으로 치우치는 것과(쾌락주의) 욕구를 강제로 억압하는 것(금욕주의) 모두를 거부한다. 성경적인 교회는 성도에게 극단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전 재산을 바치라고 강요하거나, 가정과 직장을 내팽개치고 오직 교회에만 헌신할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교회는 지상대위임령에 따라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에 오직 충성한다(마 28:20).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분을 따르는 모든 제자에게 극단적이진 않지만 분명히 급진적인(radical) 삶을 요구하셨다. 그러한 급진적인(복음적인) 요청을 바울은 본문에서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라”라는 말로 명령했다(35절).
바울은 7장에서 고린도 성도가 결혼과 관련하여 “쓴 문제에 대하여” 복음의 급진적인 원칙에 따라 답했다. 독신, 기혼, 홀아비-과부, 비신자와의 결혼 등 성도가 처한 상황은 각각 다르고,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이 각각 있었지만, 원칙은 분명했다. 상황에 따라 흐트러지지 말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선적 목적을 가지고 주와 동행하라는 것이다. 이제 그들이 질문한 마지막 사례인 “처녀에 대”한 권면만 남았다(25절).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가장 급진적인 특성과 그 이유를 발견한다. 이 말씀이 우리 각 사람을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게 하고 교회가 복음의 분명한 원칙대로 굳게 함께 세워지길 원한다.
1. 복음의 원칙: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라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거하라, 지내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이전의 원칙이 처녀에 대한 권면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26b-7절).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 앞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일이 아니라 주의 일을 먼저 염려해야 한다. 어찌하여야 사람을 기쁘게 할까가 아니라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마 6:33). 성경은 이렇게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지 못한 반복음적인 마음을 가진 자를 가리켜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평가한다(약 1:8). 두 마음을 품은 자에게 성경은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명령한다(약 4:8). 주께 구별된 확정된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결혼에 관하여 생각하거나 결정할 때도, 먼저 갈라지지 않은 마음(정한 마음)이 필요하다. 결혼하든지 하지 않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32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32-34절).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급진적인 부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의도를 이렇게 분명히 밝힌다(35절):
35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성도에게 올무를 놓아 실족하게 하려는 자는 마귀와 세상이었다. 정욕을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좋다는 극단적인 교훈, 반대로 쾌락을 마음껏 즐겨도 좋다는 거짓 가르침이 그들을 복음의 부르심에서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바울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으로 인하여 성도가 유익을 풍성히 얻기를 원했다(롬 1:16). 그들이 바울이 권면한 복음의 이치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그들은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길 수 있게 될 것이다.
복음으로 신자는 모두 영생을 누린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불만이 생기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이 즐겁지 않다. 그분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분의 약속이 와닿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크게 보이고(남들보다 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작게 보인다. 복음의 급진적인 부르심의 방향이 뒤바뀐다. 어떤 상황에도 주를 기쁘시게 하고 섬기는 것을 추구하는 방향에서, 주가 나를 기쁘게 하고 섬겨야 할 것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이것은 정확히 흐트러짐 없는 마음에서 갈라진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에서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마음에서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의 변질이다. 회개하여 마음을 성결하게 하지 않으면, 겸손히 낮추지 않으면, 복음의 은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잠 3:34; 약 4:6).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우선순위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항상 간직해야 할 복음적인 원칙이다(마 6:33).
2. 복음의 약속: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바울이 본문에서 다룬 “처녀”는 문맥 안에서 약혼한 여자를 말한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독신의 경우를 다뤘기 때문에 불필요한 반복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1-2절), 또 이 특별한 단어는(파르떼노스) 성경에서 여러 번 약혼한 여자를 가리킬 때 사용됐다(“약혼녀”, 36-7절; 마 1:23, 마 25:1). 바울은 이들에 관하여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나의 의견을 말하노니”라고 답변을 시작했다(25절).
이것은 바울의 의견이 가진 권위를 결코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는 권면을 마무리하면서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라고 자기 의견에 실린 영적 권위를 성령 하나님께 둔다(40절). 다만 주님께 직접 전수받은 계명이 아니라는 점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복음에 충성스러운 자기 삶을 걸고 복음의 원칙대로 약혼한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해야 할지 권면하는데, 아주 분명한 이유를 들어 설득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26절). 임박한 환난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이들은 당시 고린도를 비롯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로마 지역 곳곳에 발생하기 시작한 박해를 가리킨다고 본다. 하지만 주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관점이 여기에 더 부합한다. 바울은 29절부터 임박한 환난의 때에 합당한 삶의 방식과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29-31절). 이 역설이 강조하는 교훈은 이 세상의 삶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영원한 것처럼 여기며 살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여러 예시는 예수님이 종말에 관하여 가르치실 때 말씀하신 것과 유사하다. 예수님은 세상 끝에 일어날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주님은 또한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 이야기를 들어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 중에 그 영원한 천국을 하찮게 여기며 거절했던 자들로 소와 밭을 매매하는 자들, 장가들어 아내가 있는 자들이 나온다(눅 14:15-24). 모두 은혜 밖에 있는 자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원칙대로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세상을 영원한 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 되고, 세상이 말하는 기쁘고 슬픈 일에 목을 맨다. 매매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 물건을 쓰는 것에 삶을 바친다. 그렇게 영원하지 않은 것에 온통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주가 임하실 때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자로 발견될 수도 있다. 종말은 복음의 약속이고(롬 8:30), 그래서 종말을 준비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자는 복음의 약속을 잊어버린 자, 최악의 경우 그 약속을 받지 못한 자다.
어떻게 독신이 결혼하지 않고 주를 섬기는 데 올인할 수 있나? 왜 홀로된 형제자매가 재혼하지 않고 남은 삶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인가? 세상이 말하는 슬픈 일을 만나도 감사할 수 있고, 기쁜 일을 만나도 그것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복음의 약속 때문이다. 누가 가난한 자 같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인가?(고후 6:10). 복음의 약속을 믿는 자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땅과 하늘도 새롭게 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 것만 영원히 남는다. 이 약속을 굳게 붙드는 자는 그래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다.
3. 결혼 관련 사례4: 약혼한 경우
자,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복음의 원칙과 복음의 약속을 가지고 마지막 결혼 관련 사례인 약혼한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복음의 급진적인 부르심 그 우선순위에 따른 첫 번째 권면은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이다(26절). 일정 기간 후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가장 급진적인 부르심이 분명하다(파혼). 물론 약혼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절). 바울은 약혼을 이행하여 결혼했을 때, 그들이 겪게 될 육신적인 어려움을 생각하여 그들을 아끼기 때문에 그냥 지내라고 권면했지만, 분명히 결혼하는 것도 죄가 아니라고 밝혔다. 38절에 보면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 분명 잘하는 것이다. 다만, 복음의 원칙과 약속을 생각하면 더 좋은 것이 있을 뿐.
구체적인 적용은 36-7절에 나온다(새번역이 더 이해하기 쉽다): 36어떤 이가 결혼을 단념하는 것이 자기의 약혼녀에게 온당하게 대하는 일이 못된다고 생각하면, 더구나 애정이 강렬하여 꼭 결혼을 해야겠으면, 그는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십시오. 결혼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니, 그런 사람들은 결혼하십시오. 37그러나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사람이, 부득이한 일도 없고, 또 자기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서, 자기 약혼녀를 처녀로 그대로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였으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두 가지 경우가 나온다. 약혼한 대로 결혼하는 것(36절) 그리고 약혼을 취소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37절). 두 가지 경우 모두 매우 세심한 조건들이 붙는다. 1) 결혼을 약속한 상대방의 유익, 2) 정욕을 절제할 수 있는 은사, 3) 본인의 뜻. 첫 번째 조건은 결혼한(할) 배우자에게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에 부합한다(3절). 두 번째 조건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는 명령에 부합한다(2, 9절).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7장 전체에서 바울이 개인에게 허용한 모든 명령에 부합한다. 결국 모든 권면에 순종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한번 상상해 보라. 어떤 청년이 1년 후 결혼하기로 했다고 고백하는데, 그 약속대로 결혼해도 잘하는 것이지만, 그 약속을 취소하고 혼자 사는 것은 더 잘하는 것이라고 권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본인이 원해서 결혼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배우자의 유익을 구하려는 사람을 축복하고 또 짝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복음의 원칙과 약속이 이 정도로 급진적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모두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결혼에 관하여 가르치실 때,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결혼은 사람이 결코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음행한 이유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만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마 19:10, 우리말 성경). 그들은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었다(마 16:24). 그러나 결혼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쁨,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온통 이루기 원한 것이다. 그걸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게 좋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어떠한가?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삶이라면 차라리 따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마음과 싸우고 있지 않은가? 당신에게 허락하신 환경과 상황 가운데 당신은 복음이 약속한 영원한 보상을 바라보며 잠시 주어진 것들에 인내하고 있는가? 감사하고 있는가? 주님과 함께 충만한 기쁨으로 거하고 있는가? 복음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원칙대로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잠시 독신으로 사셨지만, 영원한 교회의 신랑이 되셨다. 그분은 자녀가 없으셨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분은 가난하여 머리 둘 곳도 없으셨지만, 하늘에 속한 모든 보화를 영원히 우리와 나누시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천한 종처럼 사셨지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영원히 우리와 나누신다. 주가 이 땅에 계실 때 좁은 문을 향하여 좁은 길로 흐트러짐 없이 정진하셨다면, 그 뒤를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
바람직한 삶의 자세
고전 7:25-40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결정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결정에 앞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일의 모양새나 체면이나 그 밖의 목적을 가지고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겠느냐가 우리의 결정의 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 6: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로마서 14:7-8 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결정하든 그 목적은 <주의 영광>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고전 7:25-40절 말씀은 앞에서 전한 말씀과 같이 결혼에 대한 말씀을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결혼의 문제와 결혼한 후 혼자가 된 과부의 결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통해서 단순히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서서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없음을 알라(31절)
25절에 처녀의 결혼에 대한 문제를 말하면서 주의 자비하심 받아 충성된 자로 권면을 한다, 물론 여기서 처녀를 언급하고 있지만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녀 기독교인들에게 동시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26절 임박한 환난을 생각해서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합니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당하게 될 로마의 핍박이 얼마나 가혹할 것인지를 예견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수많은 박해가 있었고, 앞으로도 더 박해가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 상황속에서 가족이 함께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더욱더 힘들 것이고, 책임이 더 가중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임박한 환난을 생각해 결혼 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전제로 전하는 말씀입니다. 주님 재림 가까운 시기에 환난은 더욱 가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7절<아내에게 매였으냐> 이 말은 이미 결혼을 했느냐? 그렇다면 굳이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놓였으면 다시 결혼하려고 애쓰지도 말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아예 결혼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될 수 있으면 그냥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합니다.
28절에 <그러나 장가 가도, 시집가도 그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결혼을 통해서 오는 육신의 고통은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혼자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부부가, 가족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이 박해이자, 핍박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시대도 목회자들이 가장 힘든 것은 가족입니다. 독신이면 부양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마음껏 주의 일을 할 수 있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로 인해 정작 주의 일에 많은 제약이 따르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결혼한 사람은 그것에 놓이려고 애쓰지 말고, 또 이혼을 했다면 다시 결혼하기 위해 애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29절에 <아내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해라>, 30절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해라>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처럼 해라>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해라>
31절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쓰지 못하는 자처럼 해라>
이렇게 해야 되는 이유는 29절에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입니다. 사도바울이 생각할 때 핍박의 때, 환란의 때, 종말의 때가 곧 다가왔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의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즐기는 것들, 세상에서 자랑할만한 것들, 우리가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1절에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이 땅의 것들은 영원한 것이 없고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주님 재림의 때에는 그 형상조차도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 역시 이구동성으로 말세의 때가 가까이 왔다, 주님 재림의 때가 가까이 왔다 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종말을 살 듯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특별히 이 시대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서 말세의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24장에 나오는 말세의 표적들, sign들이 나타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의 것들에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이요, 영원하지 않는 것들을 가지고 그것에 집착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부부가 사랑하며 주의 일에 힘쓰며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만, 이런 부부 관계 역시 주님의 재림 때 형적은 사라질 것입니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그것에 매몰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이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지나치게 흥분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그보다 더 기쁜 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찾아올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물건에 대해 지니치게 집착할 필요없습니다. 검소하게 필요한 것들만 유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넘치게 더 많이 모으고, 물려주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 지나갈,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형적이란 유행, 외형적 현상과 상황들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유행, 이 세상의 외형적 모든 것, 그리고 그 상황들을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만이 영원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마라나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2. 분요함 없이(혼돈없이) 주를 섬기라(35절)
32절-35절까지는 결혼자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 말합니다. 결혼한 남자는 세상 염려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내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세상 염려를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주를 향한 헌신의 마음이 나누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주를 위해 헌신해야할 마음들이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나누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는 남자, 혹은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몸과 영을 거룩하게>하려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면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독신을 강조하고, 결혼하지 말 것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제도 혹은 가정제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혼란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35절에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말합니다. 오히려 너희에게 유익을 주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은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즉, 혼돈없이, 흩트러짐 없이 오직 주만을 섬기는 마음, 그런 헌신의 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결혼하게 되면 아무래도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그리고 자식들까지 생기게 되면 그 마음이 부양의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한 마음으로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흩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하고서도 얼마든지 부부가 힘을 합쳐 주를 위해 살 수 있다면, 온 가족이 주를 위해 헌신 할 수 있다면 결코 결혼 자체를 반대하거나 거부하거나 혐오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요함없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이 시대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한 마음입니다. 이 시대는 결혼의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분요하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울 시대는 박해와 핍박이 문제였지만, 이 시대는 박해와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뺏는 수많은 유혹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한 마음을 품어 주를 섬길 수 있다면, 분요함 없이 주를 섬길 수 있기를 위해 애쓰는 삶이 정말 필요합나다.
지난 세월 아무리 화려한 명성을 얻고 재물을 모으고 떵떵거리면서 잘 살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 잘 죽었다" 이런 소리 들으면 그 인생은 불쌍한 인생입니다. 젊을 때는 육체의 힘과 패기로 일을 하지만, 나이가 들어 힘이 빠지면 그때부터는 머리의 지혜과 영적 능력으로 일을 합니다. 영적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었을 때 틈나는 대로 기도하고 자신을 갈고 닦아서 지혜와 영적 능력을 차곡차곡 쌓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고 나도 언젠가는 나이를 먹고 임종을 맞이하게 되는 구나!" 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요함없이 끝까지 주를 사랑하고 주를 섬기는 사람, 갈수록 영혼이 깨끗해지고 맑고 투명하게 변해가는 사람입니다.
3. 주안에서만 하라
36절에 결혼하지 않은 처녀 딸에 대해 말하는데, 당시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오늘날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편하려고, 주를 위해서 살려고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속되기 싫어 편하게 살려고 결혼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지만, 이 당시에는 결혼 적령기가 되었음에도 결혼하지 않음이 부끄러움이 되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시키고자 한다면 결혼을 시켜라 결혼시키고자 한다고 해서 죄 짓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37절 <그러나 처녀 딸을 결혼시키지 않고 머물러 두기로 작정했다면 그것도 잘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38절 <시집 보내는 것도, 시집보내지 않는 것도 다 잘하는 것이다>말합니다.
그러나 39절, 40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과부된 자의 결혼, 곧 재혼에 대해 말합니다.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을 가라, 그러나 <주안에서만 하라>고 합니다.
주안에서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삶의 태도 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주안에서 해야 합니다. 결혼을 해도, 주안에서 해야 하고, 사업을 해도 주안에서 해야 하고, 공부를 해도 주안에서 해야하고, 직장을 다녀도 주안에서 다녀야 하고, 군대를 가도 힘들지만 주안에서 군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한다는 것은 먼저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 곧 묻고 답하고 이끄시는 대로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지나온 발자국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험난하고 힘들었던 여정이나 가파른 고개 길에는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혀 있고 평지와 낮은 구릉의 편안한 길에는 마치 나란히 걷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돌아다보며 항의하듯 물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주님! 왜 낮은 구릉과 평지에는 당신께서 저와 동행하여 주시고 거칠고 험난한 길에서는 제 혼자 걷게 버려 두셨는지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편안한 길에서까지 진실로 나를 신뢰하고 필요로 했다면 아마 그 길의 발자국도 하나 뿐이었을 것이야. 그러나 너는 힘들고 험난한 길에서만 나를 찾았고, 그 때마다 나는 너를 업어서 다녔단다. 그리고 험난한 길이 끝나면 너는 날 멀리했지. 그 때마다 나는 네 곁에서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란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 안에서 한다는 것은 행동의 목적이 주의 영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주님의 영광을 그리고 그 다음 타인의 유익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경주 사모는 "하나님이 하셨어요" 라는 그녀의 책에서,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역사와 도우심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당한 삶의 모든 순간은 사람이 행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는 내내 "하나님이 하셨어요" 라는 말을 쉬지 않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똑같은 도전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손에 삶을 온전히 맡기면 하나님이 모두 다 하실 것" 이라고 말입니다. 그녀가 대한항공 국제선 승무원 시절의 어느 날, 비행기가 일본 상공 위를 지날 즈음이었습니다. 갑자기 조종실에서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승객 여러분, 여객기 우편 날개 엔진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승무원과 승객 전원은 비상착륙 준비를 마치고 착석해 안전 벨트를 매 주십시오." 평소 그녀의 신앙을 못마땅해 하며 신은 없다고 떠들던 남자 승무원이 달려와 털썩 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애원합니다. "미스 정! 기도해줘요. 미스 정! 부탁이에요. 날 위해 기도해줘요." 그녀는 그와 함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아멘' 소리가 끝나자마자 안내방송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승객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여객기 우편 날개 엔진의 원인 모를 불이 저절로 꺼졌습니다. 곧 김포공항에 안전하게 도착하겠습니다." 승객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남자 승무원인 미스터 김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하며 함께 울었노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편 91:14-15)
무엇을 하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주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결혼에 관한 내용을 통해 오늘 본문은 결혼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보다 결혼에 대한 신앙적 태도, 결혼을 통해서 보는 더 큰 하나님의 뜻, 섭리를 말합니다. 첫째, 이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라. 둘째, 분요함 없이(혼란없이) 주를 섬기라. 셋째, 주안에서 모든 일을 하라....
우리의 삶에 있는 많은 것들이 영원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결혼도, 슬픔도, 기쁨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는 것들을 붙들고 살기에는 이 시대가 주님의 재림이 너무 가까운 시대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남편보다 아내보다 혼란없이, 분요함없이 주님만을 섬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기쁘시게 할 것입니까?
무엇을 하든 주안에서 해야 할 줄 압니다. 그것이 결혼이든, 재혼이든 사업이든, 자녀교육이든, 직장이든… 주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영광에 목적을 두고 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고전 7:32-40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보면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결실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마 13:22).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세상의 염려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신에 대한 유익함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고 온전히 생각할 수 있지만 결혼한 사람은 남편 또는 아내를 위해 세상 일을 염려하게 되기 때문에 마음이 갈라져서 온전히 주를 섬기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4절에서도 독신인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한다’라고 말씀합니다.
꼭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몸과 영이 다 거룩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라면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위해 기쁘게 할 것을 생각하게 되고 주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삶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기에 독신이 유익한 점이 크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반복하여 독신이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성도에게 훨씬 유익이 될 것으로 말씀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신앙인들이 독신으로 살라고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바울의 심정이 면허를 따고 운전대를 처음 잡는 자녀에게 차키를 주는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운전을 하지 않으면 사고도 없겠지만 어차피 운전을 해야 한다면 경각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사고의 위험을 미리 숙지하고 조심해서 운전하기를 당부하는 마음이겠습니다.
35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생각에 독신을 하는 것이 유익한 것은 분명하지만 강압적으로 따르도록 올무가 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성도에게 유익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이 원하신다면 지체하지 않고 주를 섬기는 일에 순종할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약혼을 한 경우와 과부에 대해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약혼은 곧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하였던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만일 정혼한 상태에서 마리아가 아이를 가진 것이 드러날 경우 간음의 죄로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혁한글 번역에서는 처녀를 시집보내는 주체를 처녀의 아버지로 번역하였습니다.
만일 딸이 주를 위해 독신을 원하고 정혼대로 결혼하지 않을 수 있다면 딸의 의견대로 파혼을 허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개역개정 번역에서는 결혼의 주체를 약혼녀를 둔 남자로 번역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해 독신을 서원한 남자가 약혼녀가 원하면 결혼으로 그 의무를 다하되 약혼녀와 그 집안이 이해하여 파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과부에 대해서는 남편에게서 자유하게 되어 주를 마음껏 섬기게 되었기에 그냥 지내는 것이 좋지만 만일 재혼하려 한다면 주 안에서만 즉 그리스도인과만 재혼하라고 권면합니다.
남편과 사별하여 얻은 복음의 자유가 재혼을 통해 다시 제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귀히 여기시고 자녀들을 믿음의 가정으로 이끌며 항상 주님을 맞이할 준비된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라
고전 7:32-35
고린도전서 7장에는 고린도 교회가 부딪히고 있었던 또 하나의 문제인 결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결혼문제는 아마 1절에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란 표현을 보면 고린도교회가 먼저 사도 바울에게 서면으로 질문을 했던 것을 답변한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전체를 통해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에게 질문한 내용을 보면 크게 3가지 문제입니다.
먼저는 부부간의 성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이혼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독신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답변을 통하여 기독인의 결혼관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정립하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복한 가정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부부간의 성문제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결혼에 대해서 극단적인 두 가지 정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금욕주의와 쾌락주의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는 영과 육을 분리하여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육체를 위한 결혼은 악한 것이며, 성은 추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금욕주의가 나타났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육체적인 욕망은 악한 것이므로 철저하게 성적인 욕망을 억제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결혼을 죄악시하며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경건한 삶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은 했지만 금욕주의 영향을 받아서 부부간에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올바른 부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음행의 빌미를 주었고, 이것이 비도덕적인 음행으로 발전하여 결혼의 고귀한 가치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7:3절에서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7:4절에서 결혼한 사람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에게 있음을 말씀하면서 배우자의 의무를 잘 감당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영혼과 육체가 별개이므로 육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영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육체적인 죄를 허용하는 쾌락주의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쾌락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성적인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쾌락주의자들에 대하여는 이미 6장에서 그 잘못을 지적하면서 결론적으로 6:19-20절 말씀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금욕주의자들을 향하여는 “한 남자마다 한 아내를 두고 한 여자마다 한 남자를 두라”고 했습니다. 금욕적인 삶이 표면적으로 볼 때는 무척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다 사단에게 틈을 주지 말고, 결혼하고,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잘 감당하라고 하였습니다.
2. 이혼의 문제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신앙 때문에 이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 당시로서는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가 된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10절 이하에서 이혼에 대해서 두 경우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남편과 아내 둘 다 신자인 경우입니다.
10-11절에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믿는 자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 5:32절에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하시면서 이혼을 금하셨습니다.
신앙을 가진 부부가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부정하는 큰 죄악입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믿지 않은 배우자를 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믿지 않는 배우자라도 일방적으로 먼저 이혼을 요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아내나 남편이 함께 살기를 원하거든 이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4절에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는 거룩하니라." 이 말은 믿지 않는 배우자를 위해 기도와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치 않고 이혼을 요구해 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우는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15절에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불신 배우자에게 반드시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화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는 이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혼에 대한 전체적인 결론을 7:27절에서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배우자가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이것을 이유로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고, 신앙 때문에 이혼을 당해서 혼자가 되었다면 또 다시 결혼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독신의 문제입니다.
독신생활의 문제는 8-9절, 그리고 25-38절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독신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않고 독신이 된 사람도 있고, 결혼했다가 이혼을 하거나 사별로 독신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이 말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경우나, 혹은 결혼을 하고 혼자 된 경우에도 할 수 있으면 그냥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독신으로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임박한 환난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7:25-26절 말씀에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임박한 환난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로 종말로 곧 예수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아 이루어짐으로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신학적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은 초기에는 ‘임박한 종말론’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고난 때문이라도 혼자 있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28절 말씀에 “그러나 자아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육신의 고난’을 ‘세상살이가 고달프기 때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재난이 임박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 로마 당국에 의해서 붙잡혀 갈지 모릅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몹시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결혼 안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자들은 거기에 따르는 시련을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여기서 ‘때가 단축하여 졌다’는 뜻은 우리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 인생의 종말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는 시 90:9-10절을 통하여 우리의 생애가 얼마나 짧은 것인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혼자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는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온전히 섬기는 삶을 위해서는 독신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 세상 일을 염려하게 되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 애쓰다 보면 마음이 나눠져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혼자 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주의 일을 위해, 전심전력하여 주님 주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혼자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내 몸을 내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무조건 혼자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본문 35절에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무조건 결혼을 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 된다는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부부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을 더욱 잘 섬기는 그러한 가정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을 하게 되면 마음이 아내와 남편에게로 나뉘어져서 주님을 섬기는데 지장을 받게 된다는 말은 결코 결혼을 하지 말라거나 아내나 남편보다는 오직 주님만 생각해야 된다는 그런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길 수 있기를 위해서 부부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워 주며, 모든 근심 걱정 없이 화평한 마음으로 지내게 되어질 때 더욱 주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가정이 믿음 안에서 넘치는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온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의 총 결론을 38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미혼이냐, 독신이냐, 기혼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면 독신도 무방하고 또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그 결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 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해서 잘 섬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고, 반대로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독신으로 있기를 원하면 그러면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삶이 우리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어떻게 더 잘 섬길 수가 있느냐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든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0: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었다고 칭찬과 상급과 영생복락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
고전 7:36-40 / 코너스톤교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갔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말세를 살아가는 미혼자 그리스도인들이 결혼하여 배우자에게 헌신하는 것보다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에 더욱 헌신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권면 했습니다. 허나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바울의 권면이었습니다. 바울도 이와 같은 권면을 한 이후 결혼하는 자들이 잘못하는 것도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바울은 ‘혼기가 찬 딸을 둔 부모에 대한 권면’을 주었습니다. 36절을 봅시다. “(고전 7: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36절은 다음과 같이 다르게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만일 자기의 처녀 딸을 시집 보내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더구나 그 처녀 딸이 혼기를 놓쳐서 마땅히 얼른 시집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결혼하게 하십시오.” 바울이 이와 같이 권면한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금욕주의자들이 말세에 딸을 결혼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딸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딸을 결혼시키는 것이 결코 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딸이 혼기가 지나도록 붙들어 두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고 결혼시키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며 “뭐 딸을 결혼시키는 문제 같은 것까지 고민하나?”하고 생각하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그 누구보다 진중한 태도로 머지 않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았기에 딸을 결혼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와 같은 고민을 하는 고린도교회를 무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들이 삶 가운데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말세에 대한 진중한 태도를 본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37절을 이어서 봅시다. “(고전 7:37)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 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부모가 그 딸을 꼭 결혼시켜야 할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결혼시키지 않는 것도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딸을 결혼시키지 않고 그대로 처녀로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였다고 해도 그 역시 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8절을 봅시다. “(고전 7: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 자, 여기서 바울은 혼기가 찬 딸을 시집 보내는 것도 잘하는 것이며, 시집 보내지 않는 것도 잘 하는 것인데 이 둘 중에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주장한 이유는 고린도전서 7장 32-34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전 7: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고전 7: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고전 7: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즉 바울은 미혼자 그리스도인들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남아 있다면,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데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딸을 시집 보내는 것도 잘하는 것이지만 시집 보내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이 독신이냐 결혼하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주신 은사에 따른 것이지 하나의 일관적인 결론으로 ‘무엇이 모든 사람에게 다 옳은 것인가?’하고 백과 흑으로 답을 낼 수는 없는 문제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독신으로 살던지 결혼하여 살던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더욱 나타낼 수 있는 방향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36-38절이 처녀의 결혼 문제를 다루었다면, 39절부터는 남편과 사별한 과부의 재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3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전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어떤 문화 속에서는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사람이 다시 재혼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이 사망할 경우 아내는 남편의 법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분명 과부의 재혼 여부에 있어 용인합니다만, 한 가지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39절을 보니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주 안에서만 하라”는 말은 과부가 재혼을 하더라도 불신자와는 하지 말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인 형제와 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성경은 남편을 잃은 아내가 재혼하는 것이 죄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0절을 봅시다. “(고전 7: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앞서 바울은 젊은이들이나 약혼자들이 가능하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는 과부에 대해서도 이를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과부들도 재혼하기 보다 임박한 종말을 염두 하여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본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마지막에 자신의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 어떤 인간적인 견해나 당시 사회의 관습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용인하시고 기뻐 받으실 만한 삶의 모습들을 가르친 것임을 권위 있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가르침은 한 가지 동일한 원리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어떤 결정을 하든지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지내든지 결혼을 하든지 둘다 가능합니다. 배우자를 잃은 자가 재혼을 하든지 그대로 홀로 지내든지 둘다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한 가지 경계선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주 안에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할 때 ‘주 안에서’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넘어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되 주님 안에서만 사용하고 누릴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행해지는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보호 안에 온전히 거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약혼의 파혼과 재혼
고전 7:36-40 / 김영규목사(정윤교회)
본문은 두 가지 주제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약혼자의 파혼의 문제입니다.(36-38절) 둘째는 재혼의 문제입니다.(39-40절)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원문 해석상의 문제를 한 가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36절에 “자기의 약혼녀”라고 번역된 부분입니다. 원문 상에는 “th;n parqevnon aujtou'”(his virgin)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의 처녀”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개역 성경처럼 “그의 처녀 딸”(his daughter)로 해석하는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AV, JB) 둘째는 개역 개정판처럼 “그의 약혼녀”(the virgin he is engaged)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새번역, 공동번역, NIV)
만일 “그의 처녀”를 약혼녀로 해석한다면 36-37절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어떤 사람이 욕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자기 약혼녀와 한 (순결)약속을 어겨야 할 경우, 그 약혼녀에 대해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어쩔 수 없을 때는 원하는 대로 결혼하십시오. 그래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고도 자기 생각을 다스릴 힘이 있어서 자기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공동번역)
“그의 처녀”를 딸로 해석한다면 36-37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딸이 있는데 혼기가 지나서 시집보내야 될 형편에 있고, 또 보내는 것이 상황에 맞는다면 당연히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 딸이 독신에 대한 의사가 있고, 부모의 마음도 확고하다면, 혼자 지내도록 하는 것도 좋습니다.”
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약혼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래 된 견해를 따라 딸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고대 중동이나 로마 사회에서 딸에 대한 아버지의 권한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본문의 첫 번째 주제는 파혼의 문제입니다. 약혼한 남녀가 파혼할 수 있는가? 권장 사항은 아니지만 파혼은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파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결혼하기로 약속한 것은 인생사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파혼의 정당한 이유를 오직 한 가지, 신앙을 위해 독신으로 살기를 원하는 경우입니다. 주님만을 섬기기 위해 독신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는 경우 파혼할 수 있습니다.
혼인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
자녀가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될 때에 부모는 어디까지 관여해야 할까요? 성경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자녀의 결혼 문제에 부모는 상당한 결정권이 있습니다. 성경에 몇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리브가를 시집 보낼 때에 리브가의 아버지인 브두엘과 오빠인 라반이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창24:50) 야곱이 아내를 맞을 때도 그 결혼 상대를 결정한 것은 이삭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창28:1-2) 라반 역시 자기의 딸들의 혼사를 임의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단순히 구약적 배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혼사에 개입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요, 동양적 전통입니다. 제가 터키에 갔을 때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면서 흥미로운 장면을 봤습니다. 가끔 가다 하나씩 붉은 기와집 지붕 꼭대기에 유리병이 꽂혀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물었더니, “우리 집에 시집 보낼 딸이 있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데려 가시오!” 하는 뜻이랍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나이든 딸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부모에게 대단히 불명예요 수치스런 일로 여겼습니다. 자녀의 결혼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가족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적 배경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날서양에서는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 부모는 거의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여전히 부모가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결혼을 단순한 두 사람의 문제로 보지 않고 가족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결혼에 개입하게 되는 또 다른 요인은 재정적 부담입니다. 자녀가 혼인에 임하게 될 때, 부모는 상당한 재정적 책임을 지게 됩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종이 신부측 가족에게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래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부인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창24:35-36)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삭의 부친 아브라함이 대단한 부자라는 점입니다.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둘째는 이삭이 바로 그 재산의 상속자라는 점입니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신부 측을 향한 설명의 초점은 신랑감이 재산상으로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설명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종은 신부 측에게 은금 패물을 전달합니다.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 오라비와 어미에게도 보물을 주니라”(창24:53)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부모는 자녀의 혼인에 상당한 재정을 부담하고 있습니다. 신랑 측은 최소한 월세 보증금이라도 마련해야만 합니다. 신부는 웬만한 살림살이를 다 장만해야 합니다. 그게 다 부모의 몫입니다. 구약 시대 중동 지방에서는 주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재물을 제공했습니다. 신부의 몸값이라기보다는 딸의 장래에 대한 일종의 보험금과 같은 성격의 돈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처지에 대비한 딸의 생활 보장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지 부모가 재정적인 후원을 하게 될 때, 자녀의 결혼 문제에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의 혼인에 개입하는 성경적인 이유는 재정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부모의 권위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상당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제5계명의 위치를 보면, 부모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간에 있습니다. 부모의 지위는 하나님 다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선택한 것이나, 이삭이 야곱의 아내를 선택하도록 결정한 것은 다 부모의 신앙적 권위에 따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자녀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복을 받는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모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배우자 선정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대부분이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자녀 된 사람은 결혼에 있어서 부모의 의견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이미 지나버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미혼인 사람들은 명심하세요. 특히 부모의 신앙적 판단을 존중하십시오.
둘째로, 부모는 자녀들의 혼인 문제에 있어서,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독신 생활에 대한 결정, 혹은 배우자 선정의 문제에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본인들의 의견입니다. 우리나라의 민법에 보면 만 18세 되면 결혼을 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807조) 단, 미성년자인 경우 반드시 부모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미성년자인 경우 생활력이나, 사리에 대한 판단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의 경우는 부모의 동의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결혼 문제에 있어서 당사자들의 의견을 법으로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자녀가 선택한 배우자가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갈라놓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좋다고 해서 자식의 맘에도 없는 사람을 억지로 결혼시킬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혼인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하게 될 때, 자녀들의 삶이 불행해집니다.
셋째로, 부모의 의견과 자녀의 의견을 조화시키는 일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의견이 다를 때가 문제입니다. 주석가 매튜 헨리는 이런 때에 필요한 것은 합법성이 아니라 적정성(fit to)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나 자식, 어느 일방이 합법을 내세워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자녀들은 자신의 처지를 잘 말씀드려서 서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합의해야 합니다. 결혼 생활에서 첫째는 당사자들의 행복입니다. 부모의 체면이나 집안의 이익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야곱은 배우자 선정 문제에 있어서 부모의 의견을 따랐지만, 에서는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물론 본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안 받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재혼의 문제
두 번째 주제는 재혼입니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남편을 잃었을 때 재혼할 수 있습니다. 세상 법도 마찬가집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혼인법에는 여성에게 6개월의 재혼 금지 기간이 있었습니다. 혹시 과거 배우자의 자녀를 임신했을 경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혼인법에는 이런 제한이 폐지되었습니다. 홀로 된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재혼할 수 있습니다.
재혼할 때에 먼저 생각할 것은 재혼의 동기입니다. 왜 재혼하는가? 일반적으로 서너 가지의 재혼의 사유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로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결혼을 시키셨습니다.(창2:18) 고독에 대한 처방으로써의 결혼은 재혼에도 적용됩니다. 옛날에는 대가족 제도 아래서 많은 자녀들, 형제들, 부모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고독의 문제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일인 가족 시대에 홀로 살아가는 것은 외로운 일입니다. 삶의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이제 평균 수명도 80세 이상입니다. 일찍 홀로된 사람들은 여생이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둘째는 性慾의 문제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연세가 들어서도 성생활을 지속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젊은 과부들에게 재혼하라고 권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교회가 돌봐줘야 될 과부의 명부를 만들되 몇 가지 조건에 따라 과부들을 선발토록 하라! 첫 번째 조건은 60세 이상 된 자로 할 것. 두 번째 조건은 두 번 이상 결혼하지 않았던 자로 할 것. 세 번째 조건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할 것.(딤전5:9-10) 바울은 젊은 과부들은 무조건 명부에서 제외하고 재혼하도록 권장합니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5:11,14) 그만큼 젊음의 성욕은 제어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경제적인 이유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결혼 생활 중에 남편이 죽었을 경우, 그 형제들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자녀를 낳고 돌보도록 했습니다. 이런 풍속은 오늘날에도 중동이나 아프리카 지역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형제가 자식 없이 죽은 경우, 형수를 맞아 낳은 첫 아이를 그 형제의 후사로 삼아 대를 잇는 것입니다.(창38:8) 그런 이유 못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여성이 홀로 목축이든 농사든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홀로 남은 여성이 가족의 일원으로 계속 살아가도록 형제들이 경제적 도움 뿐만 아니라, 성생활까지 책임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재혼의 중요한 이유로는 외로움, 성욕, 경제 문제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재혼 조건
그런데, 오늘 말씀은 재혼하는 자에게 한 가지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38절) 반드시 신자끼리 결혼하라! 이것은 이미 初婚者들에게 권면했던 내용이며 고린도전서 7장의 주제어이기도 합니다. 초혼자보다 재혼자에게는 신앙은 더욱 중요한 조건입니다. 초혼은 멋모르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혼은 이것저것 따지고 하는 결혼입니다. 기왕에 조건을 따지려면 첫 번째 조건은 신앙입니다. 첫 번째 배우자가 불신자였다면, 두 번째 배우자는 함께 천국까지 갈 사람이어야 합니다. 몸만 하나가 아니요, 마음도 하나요, 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부부입니다. 한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천국을 향하여, 하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때에 참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결혼하게 될 때에 불신 배우자보다 여러 가지 유익한 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익은 부부간의 신뢰입니다. 청춘에 만난 부부도 서로 믿지 못해서 티격태격 합니다. 하물며 中古品으로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고차 사보셨어요? 영 믿을 수 없는 게 중고품입니다. 새 차는 정이 들어서 고장 나도 닦고 조이고 기름 치지만 중고차는 여차하면 팔아버립니다. 중년에 만난 사람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신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신앙 안에서 부부가 된다면 서로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는 서로를 신뢰하기 위해서 구제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서로의 신뢰를 깨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격을 모독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언행을 삼가야 됩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싸움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신혼부부들에게 항상 같은 말로 권면합니다. 싸워도 권투 선수의 규칙을 지켜라! 권투 선수의 규칙이 뭡니까? 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겁니다. 권투 선수는 어떤 경우에도 링 밖으로 나가면 실격입니다. 부부 싸움도 최소한의 규칙은 지키면서 싸워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헤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집 나간다는 소리, 헤어지자는 소리는 가장 나쁜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합니다.(마19:6) 보따리를 쌀 경우에도 분명하게 돌아올 차비를 받아 가지고 가세요.
신뢰의 주체는 내 자신입니다. 상대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믿어주어야 합니다. 신뢰의 방향은 내게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상대를 믿지 않는데 상대가 나를 믿어주겠습니까?
예수님의 방법을 참고하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 참으로 난처한 질문입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사람이 무슨 낯으로 그렇다고 대답합니까? 주님은 그 베드로에게 자신이 목숨을 버리고 얻은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주께서 나를 목회자로 삼으실 때에 뭘 보고 맡기셨을까? 그냥 믿어주신 겁니다. 분명히 내 능력에 다 맡겨 놓는다면 양 무리를 다 까먹고도 모자랄 겁니다. 그러나 멀쩡하게 목회를 계속하는 것은 내가 부족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양 무리를 맡기신 것은 베드로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하든지 모든 책임을 주님께서 지시겠다는 뜻입니다. 나는 네가 약한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네게 모든 양을 맡긴다! 부족한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부부가 되었다는 것은 내 생애, 내 몸과 마음을 다 상대에게 맡겼다는 뜻입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배우자에게 어떻게 감히 내 생애를 맡길 생각을 했을까요? 배우자를 믿어서가 아니라, 배우자의 주인이신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부부 신뢰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피차 부족하지만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배우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배우자가 부족해도, 배우자의 보증인이신 예수님은 믿으세요. 참 신뢰의 근거입니다.
두 번째 유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결혼 제도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부부가 되도록 주선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가정에 복을 주실 유일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제하고 어떻게 가정이 복을 받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1-3)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128:1-6)
가장 행복한 결혼, 그것은 참 신앙 안에서 할 때에 얻을 수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세상일
고전 732-35 / 이근호목사
세상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결혼하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세상일의 일부라고 생각되는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고 세상일과 주의 일을 구분합니다. 세상일 따로 주의일 따로 구분을 해요. 그리고 세상일에 몰두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주의 일에 방해가 되고 주의 일에 몰두하게 되면 세상일에 대해서 마음 상한다든지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든지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따로 구분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일과 주의 일을 구분하는 자체가 일상의 생활로서는 부자연스런 구분이 되는 거지요. 자연스럽지를 못해요. 오늘 본문은 누가 봐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동의는 하지 않겠지만 이해는 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장가간 사람은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나눠져서 주의 일을 제대로 못하고 시집간 여자도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해서 주의 일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장가가서 아내를 기쁘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장가는 왜 가며 남편을 기쁘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시집은 왜 가는데요? 요즘 세상이야 시집가서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그 사람도 드물어요. 결혼해서 아내 혹은 남편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그렇게 고민하는 새댁이나 남편도 아마 찾기 힘들 거예요. 그런 새댁이나 신랑이 있다면 얼른 결혼하고 싶을 거예요. 부부가 서로를 기쁘게 하는 그것이 행복의 원천이라 해서 그 일에 매진하는 그것이 어떻게 주의일에 소홀함이 되느냐 하는 문제지요.
사도바울의 말에 대한 취지는 알겠는데 동의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중립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일에 분요해 있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일에 분요하다는 것은 이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한 몫을 해야 된다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뭔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겁니다. 결혼했으면 아내를 기쁘게 하고 남편을 기쁘게 해야 된다는 그런 것이 하나의 과제로서 우리에게 떠 맡겨져 있는 그것이 바로 사람 사는 일이다, 끝! 그게 세상일이고 그게 전부다.
그렇게들 생각하시는데 성경의 에덴동산을 보세요. 에덴동산의 특징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환경이 에덴동산입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우리는 그 세계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났으면 우리는 그 자체로 실패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실패자가 되는 그 입장에 있으면서 마치 아닌 것처럼, 실패자가 아닌 것처럼, ‘이 땅에서 그저 열심히 살면 되겠지.’ 하면 그것이 성공입니까? ‘열심히 살면 하나님께서 보상 주시겠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열심히 사는 자에게 보상을 주신다는 그런 원리를 겨냥해서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나오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열심히 하면 천국 가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평소에 세상일에 몰두하다 보니까 세상에서 버티는 그 원리들이 몸에 배겼어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천국은 그렇게 가는 곳이 아니에요. 열심히 한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에는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예수님 만날 때 그 두 분의 대화를 들어보세요. 마태복음 8장 9절에, 백부장이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할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최고다! “천국에 본 자손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은 다 쫓겨나고 너 같은 인간이 천국에 가는 거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마음껏 영생을 누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식도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들어가는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천국에 들어가는 원리와 방식이 우리가 평소에 현실을 읽고 있는 그 눈으로서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거부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지요. 열심히 일을 해서 천국에 간다면 천국 가서라도 “내가 열심히 했습니다.” 라고 뽐낼 수 있는 주체성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데 개나 소나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냥 집합되어 있으면 평소에 내가 나를 위하여, 나의 가치와 자존심을 위해서, 나를 빛내기 위해서 남 잘 때 잠도 안자고 열심히 일했던 이 모든 가치는 묵사발 되는 거잖아요. 완전히 다 짓밟히잖아요.
게다가 하나님에게 짓밟히면 우리가 참을 수가 있습니까? 참을 수가 없어요. “네가 뭔데 나를 짓밟아?”이런 식입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우리 몸의 모든 행위는 현재 우리가 현실이라고 할 때 이 세상이 현실의 전부거든요. 이 현실이 전부인데 이 세상에서 내가 내 고유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라는 그 문제에 몰두하는 이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실패자이기에 나오는 행동이라는 것을 우리가 놓치고 있어요.
서울 의존교회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분이 참석을 했어요. 다른 분이 제 강의를 듣고서 하는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사투리가 심하다.” 제가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가 상당히 마음에 확 닿았어요. “대안이 없다.” 그런 거예요. 대안이 없어야 돼요. 천국은 우리보고 대안을 요청하는 곳이 아닙니다. 있는 대안도 손 털기를 원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전혀 대안이라는 것은 주께서 용납을 하지 않아요. 만약에 대안이 있어버리면 주님의 대안과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안이 있다는 말은 내 의미를 챙길 수 있는 나의 구역, 나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내가 원하는 천국, 영생을 따내는 식으로 가겠다는 것이거든요.
그게 바로 정확하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일’이에요. 이 세상에서 스펀지처럼 푹 젖은 사고방식입니다. 일체 대안은 필요 없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 쓸데없는 자” 이거든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정립이 돼요. “아, 쓸데없는 자.”라는 것이 은혜가 임했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지는 내용입니다. 만약에 은혜가 오지 아니하면 나는 아직도 쓸데 있는 자가 되고 내가 계속해서 쓸데 있는 자로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하고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런 식으로 내 쪽에서 제시를 하게 돼요.
복음을 듣는 가운데 많은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제일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기도할 게 없네요.” 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를 잘할 수 있는데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다 빼버리니까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첫 번째 현상, “기도할게 없네요.” 두 번째는 뭐냐? “목사님, 기도 못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더 진전이 되면, “기도 안 해도 되네요.” 네 번째가 뭐냐? “내가 사는 것이 곧 주께서 일하시는 기도의 결과네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1,2,3,4 나오면 앞에 것은 다 잊어버렸어요. 1번부터 다시. “기도는 잘할 수 있는데, 방법만 가르쳐 주면 기도를 잘할 수 있겠는데 방법이 뭡니까?” 대안이 뭐냐는 그 말이지요. 그렇게 시작하다가 두 번째는 기도를 포기해요. “저 기도 못합니다.” 특히 오후예배 때가 그런 경우지요. 세 번째가 뭐냐? 무슨 똥배짱인지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에요. 네 번째는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이 나 말고 다른 분이 기도한 그 기도의 응답자체로 내가 여기 등장해서 살아간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산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코스인데요.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고 그냥 세상 일, 은혜와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냥 세상일에 그냥 종교인으로 살아버리면 기도가 뭐가 되냐 하면, 주문이 돼요. 랄라라라, 하면 되는 것. 주문(呪文)이 뭐냐 하면 주문(注文)입니다. “카푸치노 한 잔이요.” 이렇게 주문할 때가 있잖아요.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주문(呪文)을 외워서 주문(注文)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제가 되도 않는 썰렁한 개그를 한 거예요. 주문을 그렇게 해서 응답 받아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문하지 않더라도, 주술을 외우지 않더라도 그냥 은혜로 제공되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곳에서 살다가 쫓겨난 거예요. 따라서 그런 입장이 아니고 다른 방식으로 산다면 이미 우리는 “오늘도 실패다!” 우리는 실패자입니다. 이미 실패한 거예요. 따라서 성경 볼 때에 “이상하다. 사도바울의 말이 앞뒤고 안 맞는다. 결혼을 해놓고 아내나 남편을 기쁘게 하지 말라는 말인지. 앞뒤가 맞지가 않네.”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실패다! 네가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자체가 실패”에요.
실패자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도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오늘 본문을 두고 내린 결론이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은 결혼을 안했기 때문에 결혼의 행복을 몰라서 그런 사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사도바울은 그걸 알아요. 그런 소리가 나올 것을 다 아시고 “결혼 하더라도 실패자로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이 너에게 만족치 않더라도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라.” 하는 것이 사도바울이 요구하는 바에요. 결혼 해봐야 결혼을 알거든요. “결혼 했더라도, 그리고 제대로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이 땅에서 결혼하게 하신 하나님의 취지였다는 것, 실패자에게 합당한 실패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네가 수용하는 그것으로 제대로 내 말을 납득하고 이해했다.”는 겁니다.
실패자가 실패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지 실패자가 실패했다고 새삼스럽게 화를 낸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분수를 모른다는 겁니다. “결혼해도 실패고 안 해도 실패인데 결혼하고 싶은 것은 결혼 하고 실패하라는 코스이고 결혼 안하고 사는 것은 결혼 안하고 실패자인 것을 알아라.” 그 말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31절의 말씀처럼 흔적, 또는 형적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라서 그냥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31절을 보겠습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를 끄집어 낼 수 있어요.
하나는 역사의 종말, 또 하나는 세상의 종말, 두 가지가 나눠져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이라 하는 것은 시간의 종말, 시간이 스톱이 되는 그 순간, 흔히 말하는 하늘, 땅이 다 꺼져버리고 불심판 받는 그 순간이 역사의 종말, 시간의 종말이라면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은 뭐냐? 그런 시간의 종말을 야기 시킬 수밖에 없는 원인이 이 세상 한 가운데 이미 심겨져 있다는 것이 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마지막 때에 왔어요. 히브리서 1장 2절에 나오는 말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아들 간 것 알지? 너희들 내 아들 거기 있는 것 알지? 그러면 너희들 끝났어.” 아들이 도착하면 끝난 거예요. 이제 세상은 허물어지는 거예요. 아들이 옴으로써 아들을 위하여 세상은 껍데기로서 철거작업이 개시가 됩니다. 몸에 붙어 있는 것 다 털어내듯이 털어내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허물어지지요. 붕괴하는 겁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늦게 오신 분이 계셔서 배려해야 되니 다시 해야 돼요. 세상일과 주의 일을 대비하면서 구분했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전체 현실을 세상이라고 해요. 그런데 주님은 누구냐 하면, 어떤 아저씨라니까? 어떤 개인, 어떤 인격이에요. 이게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성경에서 비교하니까 비교 된다고 하지만 따져봅시다. 세상 전체, 산과 별, 팔공산도 세상이고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 호주의 시드니, 전부 다 세상에 포함됩니다. 중국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다 포함이 되잖아요.
세상에는 하늘, 별, 산, 들, 나무, 풀, 그 중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중 한 사람이 ‘주’라는 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현실관이고 세상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 전체와 예수님을 따로 빼내서 대비를 시켜야 이게 옳은 안목이고 옳은 관점이라는 겁니다. 성경이 뭐가 이렇게 어려워요? 주의일과 나머지 세상 전체, 통째의 일과 대비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에서 빠져서 세상의 일부가 되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은 대조가 되고, 충돌을 일으키고,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예수님을 안다는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되고 오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어요. “네가 뭔데 나를 알아?” 예수님 오신 것은 모르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전에는 그리스도를 육체로 알았다는 겁니다. 전에는 육체로 안 거예요. 지금은 영으로 안다는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육체로 알 때, 그 때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시도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 핍박할 때 “나는 예수를 전에 육체로 알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내가 아는 현실관, 내가 아는 세상관 속에서 당신은 그저 일개 아저씨에 불과해.”라는 식으로 예수를 알았던 거예요. 그 말이 뭐냐 하면, 뭔가 성령께서 외부에서 오시지 않는 한 우리가 아는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일종이고 대자연, 세상 현실의 일부로 속하지 이것이 대비되는 개념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했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여러 전공분야, 과학이라든지, 어떤 지식, 인문학이든지, 그 중에서 철학이든지, 고대근동역사든지, 신학이든지, 그런 전문가, 치과의사든지, 그런 전문분야의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치과 치료하는 이 일이 육체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안한다니까요? 목사한테 물어보세요. “저는 목회 열심히 합니다.” 이렇게 하지, “목회 열심히 하는 이것이 육체의 죄입니다.”라고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을 안 한다니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요. 왜 예수님을 모르냐 하면, 내가 나를 안다고 여기니까 예수님을 몰라요. 제가 하나 아이디어를 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찰관 복장을 하고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해요. 등에다 무슨 글자를 붙였느냐 하면, “나는 경찰관이 아닙니다.”라고 붙였어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체포합니까? 경찰관사칭명목으로 체포할거예요? 마그리트라는 화가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하고 써놓았어요. 그것은 뭐냐? ‘저거 파이프 맞네.’ 여기서 파이프는 담배 피울 때 쓰는 그 파이프를 말합니다. ‘파이프가 맞네.’라고 하는 그 사람의 주체를 화가가 작품을 통해서 지적 질하고 고발하는 그림이에요.
“네가 파이프를 알고 있지? 그러면 네가 잘못이네.” 그런 뜻이라니까요? 세상이 예수님을 건드리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복음 7장 7절의 말씀대로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세상이 악하다고 하지를 못해요. 왜? 자기 빼놓고 악하다고 하기에 그럴 자격이 안돼요. 다 같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이잖아요. 다 같이 실패자잖아요.
제가 오늘 설교에서 너무 많은 분량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여러분이 잘 감당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논리가 어렵지 않는데 문제가 뭐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가짜고 엉터리라는 그것을 제가 언급해드리는 거예요. “엉터리 아닌데요?” 자꾸 이렇게 해버리면, “결혼하셨습니까?” “예” 그러면 “남편 사랑하십니까?” “예” “그러면 주의 일을 소홀히 했네.” 지금 논리가 이런 논리라니까요. “목사님, 저는 남편 사랑하지 않고 남편에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게으른 여자네. 아내 값도 못하는 여자네.” “주의 일을 한다고 게을렀지요.” 주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일 하기 위해서 결혼을 안 해보세요. 그게 세상일인데.
지금 이 성경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못 지킨다는 이야기에요. 이야기하는 내가 답답타. 깔끔하게 이야기해 드릴게요. 지금 세상을 어떻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대안을 내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예수를 잘 섬기느냐,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집가지 말고 주를 섬기면 주의 일이 된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시집 안하고 주의 일 한다고 전도사 하다가 나이 50넘어서 돈 많은 남자 상처했다 하면 우르르 덤벼들어서 결혼하는 사례가 한 두 경우가 아니잖아요.
의존교회 강의할 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돈은 예수님의 피를 닮았다. 왜? 돈은 모든 것을 용서하기 때문에.” 나이, 체중, 병듦, 다 용서가 돼요. 못된 자식, 성질 더러운 자식, 다 용서가 돼요. 돈만 가져오면 다 용서가 돼요. 예수님과 세상을 대비시킬 때 세상 사람들은 자기 배후에서 자기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지배자를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한 인격으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응축이 되면서 사탄의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등장하게 되어 있어요. 불교에서는 세상에 중심부가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중심부가 있었어요. 이게 에덴동산을 치고 들어온 뱀이에요. 뱀.
뱀이 에덴에 들어와서 뱀과 더불어서 인간은 저주받은 상태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평화롭게 살게 되면 좋은 천국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만 그래요. 예수님이 하나의 인격으로,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전체가 예수님에게 달려듭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의 중심부로서 팽이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또 하나의 중심부에요. 따라서 이 세상은 중심과 중심의 싸움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싸움이라니까요.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 자연세계가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이에요. 아브라함의 육체, 이삭의 육체, 야곱의 육체가 우선이 아니고, 그것은 육체대로 그리스도를 아는 전제고 그 전에는 약속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이삭을 이삭 되게 하는 거예요. 자연세계보다 약속이 더 우선입니다. 약속이 자연세계를 창조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결혼한 사람은 몸과 영에서 심란해진다는데 여기서 몸은 우리가 알고 이 세상에 속하는 겁니다. 육신입니다. 그러면 영은 뭐냐? 영은 이 세상이 사탄의 활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외부에서 이미 알고 있는 안목이 영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살 몸인데 주변의 내 가족이 나를 쥐어뜯는구나. 내 육신을 위해서 엄마가 존재해야 해, 내 육신을 위해서 아빠가 존재해야 해, 이런 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그런 경우가 생겨버리면 우리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할 수밖에 없는 혼인생활을 한다. 그렇게 정신이 산란해지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도 차라리 한쪽을 택하라고 내가 너희에게 권면한다.” 이게 본문 내용이잖아요.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라고요.
그런 것은 세상을 볼 때 예수님을 중심부로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예수님과 세상을 대비한다는 말은 세상 자체가 하나의 덩어리고 살아 있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 살아 있다는 그 증거가 여러 군데 나오는데요, 제가 그것은 다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서 히브리인들이 출애굽을 하는데 거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 없습니까? 모세가 애굽의 바로 왕과 대화를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릴 때 누구한테만 내려야 하느냐 하면, 그 바로 왕과 그 집구석에만 벌을 내리면 돼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출애굽기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열 가지 재앙이 어디에 떨어집니까? 사적인 바로 왕궁에만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애굽나라 전체에 다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보는 이 현실, 이 나라가 하나의 인물로 응축이 되는 거예요. 배후에서 사탄이 조종하는 하나의 인물로 응축이 되고 모세 당시에는 바로 왕이라는 대표, 대변자로서 모세와 대결한 거예요.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표자고 저쪽은 뱀에 속한, 사탄의 세계, 사탄의 세계가지 갈 것도 없어요, 이 세상의 대표자로서 마중 나와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똑바로 하라.”가 아니라 “네가 이 세상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가 되어서 살아온 것이 바로 너 자신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지진이 일어나서 무덤이 열리고 하늘이 새까매졌지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흑암이 되었어요.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가 오후 세시 입니다. 체포되어서 재판할 때가 아침 여섯시고요. 재판 끝났을 때가 아침 아홉시고요. 아홉시부터 성문 밖으로 나와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난 뒤에 해질 무렵에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달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 안식일 입니다.요새 말로 하면 일요일 아침에 안식일에는 못 움직이다가 안식일 다음날 여자들이 무덤에 갔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공간과 시간의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주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이에요. 인간은 시간에 매여살고 공간에 매여 살지만 주님께서는 거기에 매여 살지를 않아요. 따라서 우리가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세계, 천국에 가려면 이 세상의 일부가 된 우리의 주체가 예수님의 주체로 바뀌어야 돼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주체로서 바뀌어서, 우리가 설친다고 영생,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거저 주시는 은혜로만 주어짐을 온 몸으로 만들게 되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할 게 없네요.” 하다가 “안 해도 되네요.” 왜? 주께서 시공간을 초월한 기도의 응답으로서 우리를 만들어 내시니까. 그러려면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면 돼요? 대안이 뭡니까? 내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 영광을 돌립니까?” 하는 이 여전히 살아 있는 나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서 함께 종말을 맞이해야 됩니다. 그 종말을 맞이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언제입니까, 묻지 마세요. 성령이 임할 때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의, 나의 종말은 끝까지 맛보게 됩니다.
시공간에 있을 때의 주체는 뭐냐? “나는 이런 일을 한다. 나는 이게 전공과목이다. 나는 직업이 교사다. 나는 교사 일을 한다.” 또는 “나는 점차 흙이 되어간다.” 이렇게 하다가 “내가 곧 흙이다. 내가 곧 생명이고 내가 진리다.” 왜? 그 ‘나’는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리기 때문에 예수님 진리를 위하여 나는 죽어줘야 될, 주께서 일으킨 종말 안에 나를 포함시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종말, 끝가지 가본 사람, 성령이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나의 마지막 모습을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결국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고, 하나님에게 범죄하고, 하나님에게 대들고, 사탄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80을 살고 90을 살아도 주를 대적할 수밖에 없는 주의 원수입니다.”라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고백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속의 나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무너져야 될 세상의 일부로서 내가 만들어졌습니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용한 인생, 주께서 허용한 공간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영웅 나오는 영화, 제가 그런 것 진짜 안 좋아해요. 007영화도 그런 건데 악당이 큰 전망 창밖으로 자기가 지배하는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내려다보면서 ‘저 빌딩들, 부동산 다 내거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웅이 나타나서 그걸 다 폭파시키고 부숴버립니다. 전망 창 정면을 통해서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향하여 정면으로 미사일이 날아드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네가 지금 보기는 뭘 한가하게 보느냐는 말이지요. “주여! 세상은 망해야 됩니다. 베리칩을 몸에 심다니요, 세상은 망해야 돼요.” 하는데 갑자기 망하게 하는 그 미사일이 나를 향하여 날라 온다니까요. 창을 뚫고 나를 폭파시켜 버려요. “육체로 아는 너는 끝났어. 너는 너 자신을 육체로 알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무엇이냐? 인간의 행동은 무엇이냐?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변하지 않는 행동이 있어요. 나와바리(구역) 챙기는 거예요.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잘 알지요. 개가 오줌 눠서 자기 영역 표시하지요. 청소년들이 사회에 나와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이 뭐냐? 상대방의 나와바리(구역)에 걸립니다. “오지 마. 내 자리야. 내 꺼야.” 이 부딪힘을 굉장히 힘들어해요. 강의하면서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최근에 본 인상 깊은 CF가 있어요. 자세히 안 보면 그냥 넘어갑니다.
고등학교 막 졸업한 소녀가 이제는 화장을 맘대로 할 수가 있거든요. 선하나 그었을 뿐인데 예뻐도 너무 예뻐서 자기가 놀라 나자빠질 정도에요. 화장술에 도취되어 있는 소녀를 향하여 “네가 네 화장술에 놀라지 말고 앞으로 돈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놀라라! 돈 버는 것은 삼송증권에 맡겨라.” 그렇게 흘러가는 CF에요. 백날 화장해서 예쁘면 뭐합니까? 세상에 나가면 예쁜 것은 다 지워지고 치사하게 돈을 버는데. 왜 돈 버는 게 힘든 줄 알아요? 세상 곳곳이 나와바리, 전부 남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나의 영역.
결국 성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나와바리를 따로 챙기는 것, 이게 사는 목적이고, 의미고, 자극이고, 도전이에요. “네 꿈을 펼쳐라.” 개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의 나와바리를 펼쳐라, 그거예요. “너의 영역을 확보하라.” 이게 꿈과 비전이라는 겁니다. 총신신학교에서 어떤 목사가 설교를 했던 모양입니다. 설교 제목이 가관입니다. “비전의 사람.” 그런데 그 설교 들은 신학생들이 기립박수를 치면서 울었다는 거예요. 보세요. 얼마나 육신적이고 육체적입니까? 세상에서 자기의 나와바리, 자기영역, 자기만의 세계, 그걸 확고히 하는 것에 전부를 바치는 것, 배후에 누가 그 짓을 하겠어요? 뱀이 그 짓 하는 거예요, 뱀이.
뱀 하니 생각납니다만 자기 영역, 자기 나와바리, 목사가 자기 교회 가지는 그것 말하고 있는 거예요. 어렵게 할 것도 없어요. “나는 내 교회 있다.” 그거 말하는 겁니다. 자기 나와바리, 자기 영역, 자기 오줌 누는 것, 개가 자기 영역 표시하듯이. 예수 믿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이 이거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무엇과 같으냐? 어떤 사람이 뱀술 담가 두었는데 다른 사람이 뱀 대신 그 안에 자기 허리띠를 집어넣어두고 뱀을 꺼내서 구워먹었어요. 나중에 주인이 와서 보니 뱀 인 것 같은데 뱀이 아닌 뱀이 거기 있거든요. 술을 마실 때마다 가죽냄새도 나는 것 같고 이상하기는 한데 비슷하지요.
사람이 예수 십자가를 믿는다고 우기고, 성령 받았다고 우기고, 복음 안다고 우기는데 보니 뱀이 아니고 뱀 같이 생긴 허리띠에요. 십자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끈 들어 있어요. 자기 나와바리라니까요. 복음 전해서 자기교회 챙기는 그것이 목표였고 그것 때문에 복음 외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흙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곧 흙이에요. 예수님 보시기에 예수님주체, 예수님의 인격에서 성경에 합당한 개념, 진짜 맞는 개념들이 우리에게 퍼부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주여, 흙을 만드신 것은 합당한 조치입니다. 저를 아무 쓸모없이 만든 것은 정말 하나님다운, 예수님에게 정말 부합되는, 십자가 사건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조치이십니다.”라고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 영역은 없어지고 나의 있는 그곳을 예수 안, 같은 말로 성령 안, 십자가 안으로 바꿔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무엇이관대 저를 이렇게 다루십니까? 새삼스러운 게 아니고 고마워서 하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열심히 한 것도 없는데 무상으로 영생을 주시고, 제가 일한 것도 없는데 공짜로 ‘오늘밤에 네가 낙원에 가게 될 것이다.’라고 이미 우리의 미래를 확정 시켜 주십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 안에 있는 그 주체 자, 그 주체 자를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나만 미움 받는 것이 아니고 너도 같이 미움 받는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리고 그 증거가 여러 가지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패배하게 만듭니다. 왜 패배하게 만드는가? 십자가가 마귀가 승리하는 순간이거든요. 예수님이 패배하고 유대인들이 승리하는 순간이 그게 십자가사건이에요. 마귀가 승리하는 그 순간부터 드디어 마귀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폭프로젝트’에요.
내가 설치면 설칠수록 점점 더 나의 본색이 드러나는 프로젝트, 이게 현대인의 하루하루의 일과입니다. 지난번에 어떤 분의 이야기를 언급했지요. 그 이야기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절절합니다. 늦은 밤에 서울역까지 운전해 주시면서 “목사님, 저는 휴거되기 보다는 메르스에 걸리기를 원합니다.” 그 짧은 멘트가 얼마나 와 닿았는지. 이 땅에서 실패자기 때문에 마땅히 실패해야 되는데 자꾸 마귀가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눈치 안채게 하려고, “성공해야지. 야망을 가져라. 꿈을 키워라. 뭔가 기대하면 기대한대로 주어진다. 기도한대로 응답받는다. ‘기도와 금식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다.’고!” 어떤 유? 망하는 유.
망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은 주 안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주여, 메르스 걸리게 하옵소서, 메르스 걸리게 하옵소서.” 세상에 이런 기도가 어떻게 자기 입으로 나옵니까? “확진판정입니다. 격리되겠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세상에, 이걸 비전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 평소에 살아왔던 그 세상 원리가 스펀지처럼 그냥 우리 속에 들어왔어요. 그것은 나의 나와바리, 나의 영역, 내 것 챙기는 것, 실패 안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적으로서, 예수님의 적으로서 아직도 우리가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이 우리가 예수님을 영으로 아는 순간이에요. ‘이왕 적이 되는 거 시집이나 가야지.’ 이렇게 시집가시면 되는 거예요. 이왕 적인 것, 이왕 실패한 것, 결혼 해보고 실패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께서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새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실패의 갖가지 경우를 베풀어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혹시나 남편이 오해하기를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군요.” 할 때 속으로만 이야기하세요. “네 눈에는 그게 사랑으로 보이나?” 속으로만 하세요. 괜히 복음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해서 갑자기 선물 취소되면 곤란하니까. (속으로)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으로 보이나? 나를 실패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를 유혹하는 하나의 유혹이다.”
모든 것이 실패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감사할 것뿐이지요. 범사에 감사할 것뿐이지요. 그리고 “주께서 준비해 놓은 그 나라, 주의 얼굴 어서 뵈옵기를 원합니다. 제가 뭔데 공짜로 주십니까? 한 시간 일하게 해놓고 하루 품삯을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라는 그것, 물을 필요도 없어요. 천국가면 다 알게 될 거예요.
이 세상은 이미 붕괴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하는 모든 짓거리는 스스로 자기를 망치는 짓을 하고 있어요. “검찰에 가서 다 말하겠습니다.” 그런 것이 다 자기를 망치는 짓이에요. “찍지 마세요. 검찰에서 성실하게 답변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하여 살아온 모든 인생 자체가 자기를 망치는 짓입니다. 왜? 자신의 구역 챙기기에 성공하겠다는 그것, 번지수를 잘못 봤어요.
세상을 내 육체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흔적도 지금 쓸려 내려가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쓸려 내려가는 흔적을 동전으로 긁어버리면 안에서 당첨권 나와요. 우리의 세상살이란 뭐냐? 주께서 우리의 껍데기를 날마다 긁어서 안에 진짜 천국이 들어 있다는 것, 그걸 보여줍니다. 물론 긁으면 꽝, 나오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런데 우리는 긁어보니까 “한 병 더” 이런 게 나와요. 우리가 어떻게 망가지든 관계없이 우리 배후에는 “한 병 더!” 그게 있어요. 그걸 가끔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우리의 마지막 때를 미리 당겨서 아는 것이고 그 십자가 지신 분이 부활함으로서 만들어진 세계, 거기에 속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위치와 새로운 영역을 부여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몸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이 쏟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치에 합당한 결정
고전 7:35-40 / 김좌근목사
서론: 지난 주일에는 고전 7:25-34을 본문으로 해서 ‘나누어진 관심’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질문한 문제 중에 처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한 질문에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인간인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일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괜히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모르는 것을 아는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단축된 때를 고려할 때 처녀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데 결혼한 사람은 그 관심이 나누어집니다. 말세를 만난 우리 성도님들은 이 세상의 없어질 것들에 관심이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고전 7:35-40입니다. 처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한 답변을 마무리하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치에 합당한 결정을 하기 바랐습니다. 바울의 의견을 듣고 괜히 시험에 빠져 고민하지 말고 모든 일들을 결정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사용해 성경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일들을 결정하는데 좋은 교훈을 주길 바랍니다.
1) 이치에 합당한 결정 (35): 35절은 원래 앞 단락에 연결되어야 하는데 제가 문단을 잘못 나누어 오늘 따로 상고하게 됩니다. 성경에 확실히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은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을 전하라, 형제를 사랑하라 등의 말씀은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어떨 때는 성경의 말씀이 현재 세상의 습관이나 법과 다를 때도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명령은 현재의 법과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원리는 신약에서 나타난 사랑의 원리 때문에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성경에 확실히 나타나지 않은 문제들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처녀들의 결혼 같은 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는 아디아포라 라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실 주일 성수 문제나 십일조 문제도 신약 성경에는 확실히 나오지 않는 아디아포라의 문제입니다. 요즘 목사님들이 지어낸 거짓말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처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했는데 그 말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올무가 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마치 결혼하는 것이 죄인 것처럼 인상을 받지 않았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은 결혼을 하느냐 안하는냐의 문제 보다는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성경에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성을 사용해 이치에 합당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흔히 요즘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성적인 결정은 신앙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를 샤마니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내에 점쟁이들이 많이 있습디다. 그런 분들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준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 표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35절에서 얻는 교훈입니다.
2) 약혼녀 혹은 처녀 딸 (36-38): 이 단락은 성경을 번역하는데 관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번역 성경에는 처녀 딸이라고 번역되었던 단어가 이번 새 번역에는 약혼녀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어 에는 처녀 딸인지 약혼녀인지 명시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처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처녀 딸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 같은데 이번 번역은 영어본 NIV를 따라 약혼녀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만약 처녀 딸로 번역했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36. 어떤 사람에게 처녀 딸이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을 알고도 이성적으로 생각 못하고, 또 딸이 시집갈 나이가 지나서 결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딸과 사위될 사람을 결혼시켜도 죄짓는 것이 아니니 결혼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37. 그러나 아버지가 마음을 정했고, 꼭 결혼시켜야 할 이유도 없고, 또 아버지가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다면 처녀 딸을 결혼 시키지 않아도 잘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가부장 제도하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38. 그러니 결혼 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 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여기서 처녀를 약혼녀라고 번역한다면 새 성경 번역대로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3) 주 안에서 (39-40): 39. 여기서는 결혼해서 살다가 배우자가 죽었을 때에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문제 입니다. 한 아내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으로 매여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결혼하면 안되는데 남편이 죽으면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좋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가지 조건은 주님 안에서 결혼하라고 합니다. 40. 바울은 또 독신으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독신주의를 주장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도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냥 함부로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서 확실하게 나타나 있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사용해 이치와 현실에 합당한 결정들을 내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확한 판단력을 주셔서 이치에 합당한 결정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