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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 목 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빛돌
신선사졸(身先士卒)
몸이 병사들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전쟁터에서 장수가 병사보다 앞장서서
싸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솔선수범 한다는 말이다.
身 : 몸 신
先 : 먼저 선
士 : 선비 사
卒 : 군사 졸
출전 : 사기(史記) 회남항산 산열전(淮南衡山列傳)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은 한(漢) 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손자로서 세습하여 왕이 되었다.
회남왕 유안은 무례하게 행동하며,
때를 보아 반란을 일으키려고
태자인 아들인 천(遷)과 모의했다.
이때 회남왕의 서자(庶子) 불해(不害)의 아들 건(建)이
집안에서 대우를 안 해 주는 것에 불만을 품고
무제(武帝)에게 과거에 중앙에서 조사를 보낸
정위(廷尉; 형을 담당하는 관리)를 회남왕의 태자 천(遷)이
죽이려고 했다며 글을 올렸다.
무제는 신하들에게 철저히 조사하도록 했다.
이에 회남왕 유안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그의 신하 오피(伍被)에게 민심을 물어보니,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있다고 답했다.
회남왕 유안은 오피에게 또 이렇게 물었다.
“산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한나라는 반드시
대장군 위청(衛靑)을 장수로 삼아 산동을 제압하려 할 것이오.
공은 대장군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시오?
오피가 답했다.
“신이 잘 알고 있는 황의(黃義)가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공격한 적이 있는데,
돌아와 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장군은 사대부에게 예를 갖추고
병사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모두 그를 위해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또 그는 말을 타고 날듯이 산을
오르내리고 재주도 아주 뛰어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대장군의 능력이 이처럼 뛰어나고
여러 차례 장군으로 병사를 통솔하여
용병에도 능하니 대적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알자(謁者; 군주에게 소식을 전하는 전령) 조량(曹梁)이
장안(長安)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말하길,
‘대장군은 명령이 분명하고 적과 맞설 때에도
용감하여 늘 병사들보다 앞장서고
군영에서 쉴 때에도 우물을 완전히 파기 전에는
병사들이 모두 물을 다 마신 다음에야 물을 마시며
전투가 끝나고 강을 건널 때에도 병사들이
다 건넌 다음에야 비로소 강을 건너고
황태후가 내린 상금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눠줬다니,
옛날의 명장이라고 하더라도
위청 장군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회남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국지 권 51 오서(吳書) 종실 전(宗室傳)
손보(孫輔) 단락에도 이 성어가 나온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손책은 손 분과 손보 형제에게
8천 병사를 주어 유훈이 돌아가는 길에
거칠 팽택(彭澤)에서 그를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주유와 함께 직접 2만의 보병을 이끌고
유훈의 본거지를 기습하여,
유훈과 원술의 가족을 포함한 3만 명의
사람들을 포로로 붙잡았다.
유훈은 돌아오는 길에
손보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손보는 젊고 용맹한 장군이었으므로,
필승의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그는 유훈의 군대가 이미
매복 지역에 가까이 접근한 것을 알고,
휘하에 조용하게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훈의 군대가 나타나자,
손보는 공격 명령을 내리고,
병사들의 앞에 서서 지휘하였다.
수천 발의 화살이 날아가자
유훈의 군대는 삽시간에 궤멸되었다.
유훈은 겨우 10명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몸만 빠져나가
초강(楚江)에서 선양(尋陽)까지 도망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성이 손책에게 함락되고,
가족들마저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서, 조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에, 손책은 노강군을 차지하고, 유훈의 전선(戰船)
천 여척과 병사 2천 명을 포로로 차지하였다.
손책은 손보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오릉 태수로 임명하였다.
고대의 장수들은 군을 다스릴 때
‘신선사졸’을 매우 중시한다.
오늘날 우리가 자주 쓰는
‘모범의 역량은 무궁하다’는 말이나
‘앞장서서 이끄는 행동은
소리 없는 명령’이라는 말도 이런 이치에서 나왔다.
병사가 맹렬하면 장수도 맹렬하다.
장수가 ‘신선사졸’하는 것은
한 군대가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중요한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옮긴 글-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