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김장을 하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대통령선거 개표 방송을 하기 전에,
모처럼 쇼파에 길게 누워 낮잠을 자는 백사가 깰세라
살그머니 장을 보러 나간 것이다.
유성 고속버스터미널 유료주차장에 차를 주차 시키고
큰 길을 건너면 장터라 그리고 갔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장터에서 이것저것
둘러 보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기에
생선을 파는 곳을 지나 촌로들이 나란히 앉아
작은 보따리들을 풀어 놓고 있는 곳도 구경하고
구수한 군고구마 냄새에 주위를 기웃거려 보기도 하며
채소들을 파는 곳을 가니 밭에서 막 뽑아 온듯한 배추들이
차에 가득 실려있다.
동네 슈퍼마켓보다 훨씬 좋은 물건이 아주 값이 싸다.
배추도 사고 알타리 무의 이파리가 제철처럼 하도 싱싱하길래
그것도 석 단을 샀다.
더 둘러 보려다 마음씨 좋아뵈는 부부가 마음에 들어서
갓이랑 쪽파 생강 그리고 잘 생긴 조선 무를 한포대를 샀다.
원래 무는 다섯개 정도만 사려고 하였으나 하나에 천원인데
한포대에는 만이천원이며 아저씨 말씀이 깍아 먹으면
웬만한 맛의 배 보다 훨씬 더 맛있다기에 덥썩 한 포대를 산 것이다.
생굴이야 은파님네서 주문했으니 이제 김장 준비는 다 된셈이기에
집으로 돌아오며 백사에게 짐을 올려다 줄 것을 부탁하는 전화를 하니
운동복 차림으로 아파트 주차장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한 농도로 소금 간을 하여 배추를 다듬어 절이고
무우도 씼어야 하고 쪽파 두 단도 다듬어야 하고,
생강도 껍질을 벗겨야 하고 그나마
마늘은 까 놓은 것을 샀으니 씻기만 하면 되고
갓도 잘 다듬어서 씼어야 하고 ....
그 모든 일은 저녁을 지어 먹고나서 하기로 하고...
그리고 텔레비젼 앞에 앉아 개표 방송을 보았다.
서울의 개표가 늦어 지는 걸 보고 이미 당락을 점치며
그저 별 감흥없이 김장준비만 하였다.
이미 대학 졸업반인 큰아이를 통해서 들었기에
서울의 젊은이들의 정서는 알고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고나 할까.
세상은 언제나 양과 극이 있으니.....그러려니 하며.....
모든 준비를 하고 나니 자정이 훨씬 넘었다.
이제 아침에 소금에 절여진 배추를 씻어 물기가 빠지도록 하고
무우채를 썰어 갖은 양념을 넣어
잘 버무리는 일만 남았기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일어나보니 백사가 어느새 운동을 다녀와서
무우 채를 다 썰어 놓았다....살다보니...이런 일이...ㅋㅋ
그런데 사실은 무우는 대여섯개만 채를 썰고
나머지는 배추 김치 사이사이에 석박지로 집어 넣으려고
많이 씻어 놓은건데 그 많은 걸 다 썰어 놓았다.
내가 힘들까봐 그렇게 해준 사람에게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냥 씨익 웃으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지만
오늘 하루 종일 커다란 그릇 가득 김치 양념 버무리느라
가녀린 내 팔이 빠질 뻔 했다.
기다리던 은파표 생굴이 도착하지 않아 한참을 쉬다 말다...
그렇게 버무려도 굴은 안오고 그래서 그냥 까나리 액젓만 넣고
배추김치랑 알타리 김치를 담았다.
배추 속대를 한접시 떼어 놓고 설겆이까지 마치니
그때서야 초인종이 울리고 생굴이 도착했다.
굴을 먹은 날 다음 날엔 손이 보드랍다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백사는 아마 가슴이 싸할테지...
오늘 저녁 우리집 식탁엔 굴요리가 잔뜩 올라올 것이다.
이미 김장을 한 사람들음 시어져서 고민이라는데
오늘은 이렇게 우리집 늦은 김장을 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