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 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