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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고전 8:1-13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고전 8:1-13 /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 여러분의 다음 질문은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엇이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사람살이에 참으로 필요할 것은 사랑입니다. 2) 만일 어떤 질문에든 다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4) 그러면 이제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모두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5) 어떤 사람은 하늘과 땅에 위대한 신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6) 우리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그분의 것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또 우리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며 그분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7)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을 살아 있는 신으로 알고서 그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게 되면 마음에 걸리고 약한 양심이 상처를 받습니다. 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것을 먹든 먹지 않든 상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나빠지는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도 없습니다. 9) 다만 여러분은 아무리 그것을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보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일은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10) 가령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은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러분이 신전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칩시다. 그때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여전히 속으로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담해져서 결국 그것을 먹게 될 것입니다. 11)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자유스런 행위가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12)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형제가 여러분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그런 행동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 형제에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도 죄를 짓는 셈이 됩니다. 13) 만일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먹는 것 때문에 형제에게 죄를 짓게 한다면 나는 차라리 일생동안 그것을 먹지 않겠습니다. 형제를 죄에 빠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 장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제기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6) 고린도 교회 안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갈등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서로 다른 지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식이 교만하게 하여 갈등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참된 지식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사랑 안에서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고 타인의 유익을 추구합니다(고전 13).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덕을 세우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헛되며 다툼과 분열과 갈등을 초래합니다. 우상은 인격적 실체도 아니며 아무런 능력도 없는 허망한 것입니다(시 115:4, 8; 사 41:24; 44:8, 9; 렘 10:14). 성도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 자유합니다(행 10:9-16; 딤전 4:3-5).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7-13) 바울은 성숙한 믿음과 영적 지식을 지닌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배려해 주는 사랑의 정신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책임의식을 전제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하고 편리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웃에게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절제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롬 14:13-23). 자유가 방종이 되어서는 안 되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실족 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언행심사를 성령 안에서 살피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자유는 형제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바울은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적용: 성도는 다른 사람의 믿음에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음으로 형제와 공동체에 덕을 세운 경험을 나눠봅시다.
믿음이 성숙한 신자는 장소와 음식의 출처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며 정확한 이해 가운데서 자유롭게 행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약한 자는 우상의 집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그 우상과 교제하며 경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Calvin). 결국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로운 행동은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한 신자들을 좇아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경우 강한 신자들과는 달리 양심에 거리낌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의 증표가 되지만 그것이 남용될 때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빌미가 됩니다.
< 설 교 >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고전 8장 / 이동원목사
오늘은 고린도전서 8장을 함께 같이 공부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8장 내용은 사실상 우상의 제물을 둘러싼 논쟁, 그 제물을 먹어도 좋은가, 그리스도 인들이 먹지 말아야 하느냐, 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더 크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장 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일을 해도 좋은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성경의 확실한 가이드가 없는 그러한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술을 마셔도 좋은지 마시지 말아야 하는지, 맥주 한잔쯤은 괜찮은지 아니면 그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담배, 담배 피워도 좋은지 피우지 말아야 하는지, 고상한 분위기에서, 고상한 자리에서 사교춤 정도는 추어도 될지, 추지 말아야 할지, 미국에서는 결혼식을 할 때요 결혼식이 끝나면은 댄서 파티가 있어요. 제가 미국 목회 할 때 우리 교인들 에게 많이 받은 질문중의 하나가 참 자기 자녀들 결혼하고 미국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 드린 그런 풍습인데 그때도 추지 말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뭐 극장 가는 것 갖고는 뭐 그렇게 의의 가 없겠죠? 그런데 극장의 야한 프로는 봐도 좋을지 보지 말아야 할지, 골프 치는 것 가지고 문제가 있습니까? 요즘 많이 나아졌죠? 네, 그러나 주일날 골프, 해도 좋은지 안 해도 좋은지, 이런 질문들, 또 섰다 앉았다, 해도 좋은지 안 해도 좋은지, 경마 같은 것도 하시는 분들이 있드라구요. 경마해도 좋은지 않해도 좋은지, 우선 이런 문제들은 성경에 명확한 교훈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에서는 이런 것을 소위 회색지대에 속한문제다. 소위 드레이에어리아, 드레이에어리아 란 말은 회색지대다. 이것은 까만 것 도 아니고 하얀 것 도 아니고, 소위 흑백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해도 좋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는, 대답 할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적지 않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자유의 영역에 속한 문제 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개개인의 자유로운 결단이 필요한 영역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리는 어떤 결정, 이런 일에 대한 우리들의 행동의 결단은,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가 있고, 이웃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가 있고,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 사회속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은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초대 교회당시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든 이런 유형에 속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상의 제물, 우상에게 제사를 위해서 바쳐진 후에 그 고기, 그 고기를 사서 먹어도 좋은가,. 먹지 말아야 하느냐, 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우리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열쇠의 단어를 본문에서 세가지 중요한 단어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세가지 단어가 이런 소위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 문제들에 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 가이드 라인을 제공 할 수 있는 중요한 세가지 단어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8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중요한 단어 두 가지 단어가 나오는데요, 하나는 지식이라는 단어 입니다. “지식” 그 단어를 잘 기억해 주시고요 지식, 그 다음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사랑, 지식,사랑,
8장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그기 양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양심, 세가지 원리가 있는데요 지식의 원리, 사랑의 원리, 양심의 원리,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의 그 자유의 영역에 속한 문제들에 관해서 우리들의 행동을 결정할 때, 태도를 결정할 때, 이 세가지 원리를 꼭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지식의 원리, 둘째는 사랑의 원리, 세번째는 양심의 원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원리, 지식의 원리는 무어냐? 먼저 우리가 참된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행동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 참된 지식을 알고 자유할 필요가 있어요. 참된 지식을 알고 자유 하십시요. 이것이 먼저 중요한 첫번째 가이드라인 입니다. 참된 지식을 알고 자유 하십시요. 이것이 지식의 원리구요 무슨 얘기냐?
4절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본문의 8장 4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그 실상이 뭐냐, 진상이 뭐냐, 사실이 뭐냐, 팩트가 뭐냐? 그래서 사실을 알아야 되요. 진상을 알아야 합니다. 자, 우상의 제물, 우상이 존재 합니까? 존재 하지 않습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헛된 것, 헛된 것을 신처럼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고 사실상 가상의 것이고 허상의 것이고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존재 하시고 살아계신다. 이게 팩트 입니다 이게 사실 입니다 이것이 진상 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은 어떻게 되요? 자유하게 되죠. 자유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의 말씀처럼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자유가 와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지고 불안해 집니다. 진리를 알면 우리가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좀더 배경을 설명해 드리면 그 당시 고린도 라는 도시 안에서는 사람들이 고기가 먹고 싶어요. 개기가 먹고 싶다, 고기가 먹고싶다, 그러면 고기를 살수 있는 곳이 두 장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디냐 하면 시장에 가서 삽니다 시장, 당연한 일입니다. 시장에 가서 삽니다. 그러고 또 하나 고기를 살수 있는 곳이 있었어요 그기가 어디냐 하면 신전 입니다. 신전, 우상의 신들을 섬기는 신전, 아프로디테 신전, 지금도 그 신전 터가 고린도 도시에 거창하게 남아 있습니다. 고린도 도시 전체를 내려다 보고있는, 굽어 보고 있는 아주 정상의 산 위에 아주 거대한 신전 터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미의 여신, 아프레디테를 섬기든 그 신전, 그런데 신전에서 이제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면 그 짐승들을 가지고 죽여서 제사를 드리고 나면 그 고기를 신전에서 팔았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시장으로 갈까요? 시장으로 갈까요? 신전으로 갈까요? 많은 사람들이 신전으로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잘 아시네, 깍아봐 가지고 잘 아시네, 녜, 싸요, 싸. 그기 가면 싸요. 시장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그 제사용으로 썼든 제물로서의 고기를 살 수가 있었든 거죠. 그런데 믿음이 강한 사람, 또 믿음이 장성한 사람, 성숙한 사람, 성경을 상당히 알고있는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상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상에게 저 제물을 바쳤지만 저 제물은 단순히 음식일 뿐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아요. 그러므로 사자, 먹자, 담대하게 먹자 그래서 그것을 먹었어요.
그런데 신앙이 그다지 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직 성경을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편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 했어요. 아, 그래도 귀신에게 바친 그런 음식인데 어떻게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느냐, 그것도 맞는 것 같습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어요? 녜 일리가 있어 보이죠. 그래서 신앙이 좋은 줄 알았든 사람들이 귀신에게 바친 음식을 막 갖다가 담대하게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시험에 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것이 문제가 된것입니다.
자,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교훈을, 대답을, 고린도전서 8장에서 하면서 제일 첫 구절에 먼저 이런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이 지식을 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지식을 어떻게 할 수가 있다고 했습니까? 교만하게 할 수 있다. 뭐냐 하면 그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는 사람들을 고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다. 야! 그것 가지고 신경 쓰지 마라, 아무것도 아냐, 응? 성경에 보면 우상이라는 것은 헛된 것 이야,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 자유하라! 아무것도 아니야, 병신들, 그것 가지고 뭐 그렇게, 그게 뭐 그 음식 가지고 시험 들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견해가 절대로 틀린 것은 아니에요. 그들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 지식이 무슨 지식이라고 말합니까? 교만한 지식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이웃들을 고려 하지 않은 지식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예컨데 우리 주변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이사 갈 때 혹은 자녀들의 결혼 날짜를 선택 할 때 교회에 나오면서도 주변에 압력에 못 이겨서 손이 없는 날짜을 선택해서 이사도 가시고 또 자녀의 결혼 날짜를 정하는 일들도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 있습니까? 난 모르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러분은 반응을 보이십니까? 병신 같은 이, 뭐 손이 어디 있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성경에 보면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날은 주님이 정하신 날이다. 있어요? 없어요?그런 말이, 녜, 로마서에 보면은 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은 모든 날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다. 무슨 뭐 손이 있는 날이 있고, 없고, 귀신이 역사하는 날이 있고, 없는 날이 있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자유하라, 자유하라, 그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아요.
그런데 그것을 계속 꺼리는 사람이 있는 거에요. 마음에 그래 맞아,.맞아,그러면서도 .마음에 부담이 되어요. 부담이 되어요, 이 부담이 되는 목장원들을 향해서, 목자가 담대해요,담대! 때려치워요 그냥, 그리고 해요, 그냥 무슨 손은 손이에요, 그게 맞는 얘기에요? 맞는 얘기 이지만 그러나 그런 접근 방법은 뭐에요? 사랑이 없는 접근 방법이에요.그래서 자기 확신이 없이 목장원이 자기 확신이 없이 목자에게 밀려가지고 목자의 거룩한 권위와 그리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눌려 가지고 강행을 했어요. 그 날짜로 딱 강행을 했어요. 손이 있다고 생각되는 날짜에 강행을 했어요. 두렵고 아프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래서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이 아직 신앙이 없으니까 무슨 생각을 할까요 신앙이 약하니까, 맞아, 그때에 손이 있는 날에 강행을 해서 그 일이 일어난거야 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죠. 바람직하지 못하죠.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충분히 말씀을 나누고 설득해서 본인이 스스로 뭐에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자유다 이렇게 되는 것이 제일 뭐에요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해요.
그러나 그기까지 오지 못한 성도들을 우리가 어떻게 안내 할 수가 있느냐, 바로 이것이 문제에요. 그래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첫번째 원리 지식의 원리 입니다. 지식은 알아야 됩니다..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되요. 가르쳐 줘야 되요.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드리고 그 사람이 확신에 도달 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요.그렇죠? 그러니까 첫번째 원리 지식의 원리 참된 지식을 알고 자유하게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두번째 원리가 있어요 사랑의 원리에요. 두번째, 사랑이라는 것은 그 지식을 참된 지식을 사랑 안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참된 지식을 사랑 안에서 사용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다같이 따라서 하세요. “오직,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 녜,우리가 행하는 일, 진리의 일, 참된 일, 거룩한 일도 어디 안에서 하라구요? 사랑 안에서 하라 그랬습니다. 올바른 일도, 올바른 일도 사랑 안에서 하라!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그들이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올바른 일을, 사랑 안에서 행하지 못하고 있었든 사람들이 있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바올은 이 두번째 중요한 원리을 강조합니다. 사랑의 원리, 그 지식을 사랑 안에서 사용 할 수가 있어야 한다. 예컨데 지금은 그런 일이 별로 없읍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화장실이 바깥에 있었든 계절 한국 역사의 한때 그런 때가 있었든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화장실이 집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었든 때, 꼬마들이 제일 힘들었든 일이 무얼까요? 밤중에 밴소(변소) 가는일, 밤중에 화장실, 변소 가는 일 가는 일, 그렇게도 무섭고 떨렸든 기억이 저에게도 있어요. 왜 그랬을까요? 밤중에 뒷간에는 특별히 뭐가 출현합니까? 귀신들이, 유령들이 나온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 입력된 인포메이션이 우리에게 있었어요. 밤중에 귀신은 반드시 출현한다, 자 그렇게 믿고 있는 꼬마를 붙들고 신앙이 강력한 그리스도인 부모가 훈계를 합니다. 이놈아 너 주일 학교에 다니잖아, 너 아직도 그런 엉터리를 믿고 있니? 귀신이란 것은 없어, 존재 하지 않아, 또 귀신이 존재해도 사람들이 말하는 귀신, 그런 것들은 존재 하지 않아, 물론 귀신이 성경에 있긴 하지마는, 그리고 귀신이 존재 한다고 할찌라도 그런 귀신을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은 네 편에 계셔, 두려워 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니라. 그러면서 갔다와, 갔다와! 두려워 하지 말라. 갔다와라,사실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라! 그리고는 보냈어요.
그건 지식을 따른 충고입니까 사랑을 따른 충고입니까? 지식을 따른 충고에요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따른 충고는 아닙니다. 사랑을 따른 충고는 아닙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맞는 말이지만 부모의 말이 그것이 아직 이 꼬마에게는 뭐가 되지 못햇어요. 자기 확신이 되지 못했어요 자기 확신,우리가 이웃 사람들과 진리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또 진리를 설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 진리가 자기 확신이 될 때까지 우리가 뭐할 필요가 있어요? 기다려 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진리를 따라 자기가 행동할 수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억지로 보낸단 말이죠. 갔다와! 나중에 안가니까 이 병신 같은.이 라고 말이지, 너 아직도 그런 엉터리 같은 것을 믿고 있니? 그러나 그때 부모 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면서 어둠 속을 향해서 가면서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면서 아, 엄마는 이렇게 나를 보내 나를 이해 하지 못해, 차라리 그때 손을 같이 잡고 가면서 두려워 하지 말라, 아빠가 함께 함이니라, 귀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느니라, 화장실 앞에서 지켜 주면서 볼일 보고 나오거라, 담대하게 보고 나오너라,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일이 에요? 봐, 안 왔잖아, 귀신 안 왔잖아, 아무도 안왔어, 잉 아빠가 있으니까 안 왔지,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가르쳐 주고 그래서 자기 확신이 될 때 까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말이죠.
고린도 교인들은 불행하게도 이런 이웃을 고려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을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이 교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이다. 그래서 교만에 대한 얘기가 고린도 전서에 많이 나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어떤 교인들이 이 교만의 경향을 가지고 살고 있었든 것을 바울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교만한 것이 아니다 지식, 가지고 교만 할려면 차라리 지식이 적어도 사랑의 삶을 선택 하라, 이것이 바울의 교훈 입니다. 물론 지식과 사랑이 함께 있으면 더 좋죠. 지식이 없는 사랑은, 지식이 없이 사랑하는 것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그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나중에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다시 다루게 되겠습니다 마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확한 지식이, 진리의 지식이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수가 없어요. 이웃들을 도와 줄 수도 없어요. 오히려 이웃들에게 아픔을 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중요한 이 두번째 원리가 사랑의 원리 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지식은 어디 안에서? 사랑 안에서 사용 하십시요. 이것이 사랑의 원리 입니다.
세번째 원리, 양심의 원리 입니다. 양심의 원리, 무슨 말이냐, 다시 말하면 특별히 약한 양심을 가진 성도들을 배려 하십시요. 약한 양심을 가진 이웃들이나 성도들을 배려 해주십시요. 양심이란 말은 본래 두가지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무엇 무엇과 함께, 그 다음에 두번째는 동사로서 안다, 함께 안다, 더불어 안다, 이것이 양심이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입니다. 영어로도 칸-션서, 칸이 함께, 더불어, 안다, 더불어 안다. 누구와 더불어 아느냐, 하나님과 더불어 안다 그런 뜻입니다. 양심의 소스는, 근원은 하나님이 십니다. 그래서 양심이란 것은 하나님께 대한지식, 또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의 대한 지식과 함께 양심은 자라가는 것입니다. 양심은 가만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에 대하여 알아갈수록 우리의 양심은 강해지고, 양심은 더 담대 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모를 때 우리의 양심은 약해요 약해질 수가 있어요. 또 양심은 상처 받을 수 있어요. 또 양심은 더럽혀질 수도 있습니다.
7절, 자 본문의 7절, 고린도 전서 8장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웠느니라” 이지식 참된 지식 진리의 지식 을 어떤 사람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 딱 그러면 아, 이것은 귀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다 이런 생각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식물일 따름이다 혹은 이것은 고기일 따름이다 개기일 따름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맞는 거죠? 그러나 어떤 사람들 신앙이 성숙되지 못한 약한 사람들은 과거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서 딱 보는 순간 아,이건 귀신에게 바쳐졌든 것인데 그런데 먹으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먹으니까, 먹는 고로 양심이 어떻게 된다고 그랬어요? 약하여진다, 그래서 양심이 더 약해집니다. 심지어는 어떻다 그랬어요 더렵혀 진다
......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이같이 너희에게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어떻게 한다? 상처낼 수가 있다 상하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의 원리 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이런 양심이 약한 이웃들을, 혹은 성도들을 배려하면서, 고려하면서 행동해야 된다 이게 양심의 원리 입니다.
결론적으로 13절 말씀, 13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녜,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가 먹는 이 고기가 내 형제를 어떻게 한다면, 실족케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 내 형제를 실족 하지 않게 하겠다. 사실 생각 해보면 맥주를 음료수처럼 생각하는 나라에서는 맥주 한잔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어요 죄다! 그리고 흥분할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에요. 그냥 음료수일 따름이에요.그런데 내가, 제가 어떤 식당에 가서 맥주를 시켜놓고 먹는 것을 여러분들이 봤다고 하십시다. 두가지 반응이 나올 꺼에요. 어떤 사람은 뭐에요? 우리 목사님 자유인이구나, 이런 사람은 신앙이 뭐에요? 성경에는 신앙이 성숙한 사람, 강한 사람, 그러나 오, 이 목사님이 맥주해 맥주, 시험에 들었어요.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신앙이 약한 사람, .성경에 보면 그것의 표현 이에요 그것이, 그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내가,. 녜, 그것을 알았어요. 한번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하십시다 가정이에요 가정, 경우가 있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뭐에요? 내가 해야되요? 안해야 되요? 이런 약한 성도들이 있는 한, 나는 안하겠다. 약한 성도들이 있는 한,
전 제가 좀 몸이 조금 약하니까 뭐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제가 받는 프레시어 중의 하나가 목사님 이제는 시대가 괜찮으니까 골프를 하십시요. 실제로 그런 충고를 많이 받아요. 어떤 사람은 골프채를 갖다 드릴까요? 이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가 해도 될까요?안될까요? 하하.. 그러면 저가 할거 같아요 안할거 같아요?하하.. 저가 안 하는 이유가 뭐 같에요? 녜, 혹시 실족할 사람들이 있을까봐 우리 교인들 가운데 한 두 사람 이라도 그것 때문에 실족할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하지 않겠다 실제로 그래요 저는, 녜, 한 사람만 아멘, 했습니다마는 녜,그렇습니다. 그게 바울의 심정이에요.바울의 심정,
자, 실제로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 자체가 무슨 굉장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14장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똑 같은 가이드라인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인데 로마서 14장 23절, 로마스14장, 시간이 있으면 이 14장 전체를 읽어 보시면 오늘 고린도 전서 8장과 거의 같은 맥락의 교훈이 로마서 14장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4장 1절부터 보시면 믿음이 연약한 자 를 너희가 받아 드리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뭐에요? 비판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먹을만한 사람이,약한 사람이다? 강한 사람이다? 강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막 가려서 못 먹는 사람이 사실은 약한 사람이다 이상한 얘기죠?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로 시작 되는 이 말이 마지막에 가서 어떤 결론을 내리느냐 하면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로마서 14장 23절 같이 읽겠습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 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그러니까 아까 귀신에게 바쳐진 제물, 아 이건 귀신에게 바쳤다 그러니까 이건 귀신의 음식이다 하나님의 음식이 아니라 귀신의 음식이다. 꺼림직하게 의심하고 먹는 사람, 내가 먹지 말아야 되는데 이걸 먹는 거지? 먹지 말아야 되는데 먹는 거지? 하고 먹었으면 이 사람은 자기 양심을 뭐에요? 어긴 거에요 죄입니까? 아닙니까? 그에게는 죄에요. 또 어떤 사람이 나는 이건 완전히 자유다 이것은 뭐 하나님의 음식이다. 본래가 뭐 나는 완전히 하나님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먹었어요 이 사람에게는 죄에요?죄가 아니에요? 죄가 아닙니다. 죄가 아니지만 이 사람의 행동이 이웃들에게 뭐가 될 수 있어요? 덕이 되지 못할 수는 있어요. 부담이 될 수는 있어요. 그렇다면 뭐에요 자기의 자유를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유의 문제 입니다만 이 전체가, 그럴 경우에 자유의 제한이 필요하다. 스스로 자유를 절제할 줄 알아야 된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런 소위 회색 지대에 속한 문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교 윤리에서 있어서 그러나 이 행동의 가이드라인이 뭐냐? 첫째는 뭡니까?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참된 지식, 정말 진정한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사용할 때, 지식을 남들에게 가르칠 때, 지식을 권유할 때, 어디 안에서 해야 된다구요?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 입니다. 특별이 내가 그것을 행동할 때 양심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양심에 원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주변 사람들의 약한 양심의 사람들을 배려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맥주 문제로 돌아 오겠습니다. 맥주, 자, 맥주 마시는 것 죄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 자체를 죄라고 말해서는 안되요. 그게 뭐 음료수 일 따름 이에요 절대로 그 자체는 죄가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것이 지식 입니다. 그러나 내가 맥주를 마실 때는, 두번째로 고려해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에요 사랑, 내가 주변 내 이웃들을 사랑한다 내행동의 영향을 생각하는가, 그 다음 세번째로 중요한 원리가 뭐냐? 양심의 원리, 특별히 약한 양심, 약한 믿음을 가진 성도 들을 배려 해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마시는 것이 이웃들에게 부담이 되고, 또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어떻게? 내가 하지 않겠다. 하지 않겠다.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을 따라, 또 약한 믿음이나 양심을 가진 성도들을 배려하는, 그 배려 안에서 자유가 행사되어야 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은 아닙니다 그 자유는 한계를 가진 자유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사랑을 따라 사용될 때, 우리의 자유는 이웃들을 세워주고,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자유가 지식을 따라 행동하지만, 사랑이 배려 되지 않을 때, 그것은 이웃들에게 오히려 불편함과 또 상처와, 혹은 심지어 회의까지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사랑 안에서 덕스럽게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사와 술
고전 8장 / 최영기목사
타종교를 믿던지 종교를 갖고 있지 않던 분이 예수를 믿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이 제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전통적으로 지내오는 제사를 그만 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안 어른이 생존해 계시면 더 어렵습니다. 또 많지는 않지만 예수를 믿게 되면 술을 못 마시게 된다고 생각해서 예수 믿기를 주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제사와 음주 문제에 관하여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제사와 비슷한 문제를 고린도 교인들도 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수호신은 아프로디테입니다. 이들이 성전에 가면 제사를 지냅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내면 일부는 제사 목적으로 바치고 나머지는 성전에서 제사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가서 제사 지낸다는 것은 종교적인 면 못지 않게 사교적인 면이 짙었습니다. 좋은 고기도 먹고 이웃과 더불어 친교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제사와 아주 흡사합니다. 제삿날은 조상신을 섬기는 의미와 더불어 친척들이 모여서 서로 얼굴도 보고 제사 음식을 같이 나누는 친교적인 면도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크리스천이 성전에 가서 이러한 제사 음식상에서 먹는 것이 타당한가 안 한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제사를 지난 후에 음복(飮福) 즉 복을 먹는다고 하여서 제사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음복을 해도 되냐 안되냐가 문제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그러한 모임에 가서 제사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제사 음식을 같이 먹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세상의 신은 다 만들어낸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다(4절하)." 이 말을 맞습니다.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을 섬기지만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음식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더럽게 하는 것도 아니다(8절상)." 이 말도 맞습니다. 예수님도 음식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막 7:15, 19). 그래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이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제사상에서 음식 먹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결핍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프로디테 신을 일생동안 섬기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믿던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어렵습니다(7, 10-11절). 또 믿음이 좋은 사람은 음식에 지나지 않는 제사상의 음식도 평소에 먹는 음식과 다름없게 먹을 수 있지만, 제사상에 오른 음식을 먹음으로 신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일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생각이 이렇게 변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궁합이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과 결혼 말이 있을 때에 누군가 궁합을 보고 와서 궁합이 안 좋다고 하면 기분이 께름직해서 자신도 모르게 결혼을 피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 괜찮다고 해서, 성전에도 가고 제사에 사용한 음식을 성전 식탁에서 먹게 될 때에 새로 시작한 기독교 신앙과 전래의 신앙으로 인한 갈등을 느끼게 되고 이 갈등에 못 이겨 옛 종교와 옛 생활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자신의 자유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Ⅰ. 크리스천은 제사에 참여하면 안 된다
크리스천이 제사에 참여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관하여서도 여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랫동안 토속 신앙이나 다른 종교에 빠져있던 분들은 그런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사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사가 신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고 제사 음식이 한갓 음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머리 속으로는 알지만 오랫동안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에 감각적으로는 께름직합니다. 신앙에 갈등을 일으키고 잘못하면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또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제사 음식을 먹지 말아야할 이유는 사실은 제사를 조상신에게 드리지만 악한 영이 제사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10장 20절에서 아프로디테라는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프로디테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아프로디테 흉내를 내는 귀신이 제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사를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사상을 차렸을 때에 조상신이 와서 음식을 받는다면 기독교인들이 남들보다 앞장서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상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영이 허공을 떠다니는 것도 아니고, 부른다고 오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상신이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제사를 받을까요? 귀신 즉 악한 영들입니다. 이 세상을 떠다니는 것은 조상들의 영혼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 즉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10장 20절에서 말한 것처럼 귀신과 교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제사상에 절하는 것도 거부하고 참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친척들이 다 모여서 음식을 장만하고 추도 예배를 드리며 진정으로 부모님을 기리고 더불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Ⅱ. 술을 마시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끊는 것이 더 좋다
크리스천이 술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이러한 질문에 관한 대답도 같은 원칙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술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맥주나 포도주가 음료수입니다. 물이 나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포도주와 맥주 제조하는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래서 불란서에 가면 음식에 포도주를 곁들여야 음식 맛이 나고 독일에 가면 맥주를 곁들여야 음식 맛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취하기 위하여 술을 마십니다. 서양에서는 음식 맛을 돋구기 위하여 맥주나 포도주를 곁들이지만 한국에서는 술맛을 돋구기 위하여 음식을 안주라고 불러서 곁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실수와 범죄가 술과 더불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문화에 젖어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술을 딱 끊지 않으면 믿음 생활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술이라는 연결 고리를 남겨 두면 세상으로 다시 빠져들기가 대단히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 믿는 분들은 단호하게 술을 끊어야합니다. 믿음이 자라고 술 문화에 빠져들지 않을 때까지 적어도 7-8년은 맥주나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하셔서 세상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진 분들에게이 맥주나 포도주를 마실지 안 마실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술을 통제할 수 없을 때입니다. 한국에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술을 상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죄라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러는데 이분들이 잊고 있는 것은 성경은 술에 취하는 것은 강하게 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도 술 취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4:3). 바울은 술 취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6:10). 여기에서 취한다는 것은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집사 자격을 말할 때에 술에 탐닉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딤전 3:8). 일년에 몇 번 정도 적당한 계제에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정도가 아니고 매주 한번 이상 마셔야하면 술 중독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분들은 처음 믿는 분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술을 끊고 가끔이라도 입에 대면 안 됩니다.
둘째는 남에게 덕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술로 인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4:21). 우리 나라 사람들의 70%가 실질적인 술 중독자라는 연구 결과가 나와있습니다. 술로 인한 방탕, 물질적인 피해, 건강 손상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술을 끊을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보이면 새로 믿는 사람이 술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산호제에 있을 때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믿음 좋은 장년 주일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결혼식이 있었는데 신랑 신부는 교인이었는데 부모님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피로연에서 포도주가 나왔는데 이분은 크리스천은 술 문제에 자유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분 좋게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얼마 후 어떤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술로 인하여 건강을 상한 남편을 간신히 교회로 인도해왔는데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하면 그 교사의 예를 들면서 그 분도 술을 마시는데 왜 나는 마시면 안 되느냐고 한다고 울상이 되어서 말을 하였습니다. 이 때에 생각난 것이 믿음이 약한 자를 실족케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물속에 빠지는 것이 났다는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막 9:42).
어떤 분은 전도를 하기 위하여서는 분위기를 맞추어주기 위하여 같이 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큰 착각입니다. 술친구가 되어서 예수를 믿게 만든 예를 보지고 못했고 그렇게 해서 교회에 데리고 나온다고 해도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힘듭니다. 안 믿는 사람은 오히려 평소에 술 담배를 같이 하던 사람이 끊는 모습을 볼 때에 예수를 믿을 확률이 커집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은 술담배를 끊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압니다. 그런데 술 담배를 끊으면 교회는 무언가 다르구나, 예수님라는 분은 정말 힘이 있구나. 이런 생각에서 예수 믿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술에 중독될 염려가 없는, 믿음이 좋은 분들이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는 본인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이나 새로 믿는 사람 앞에서는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이것이 위선으로 생각되면 아예 술을 입에도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Ⅲ. 크리스천의 윤리는 지식보다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성경에는 회색 지대가 많습니다. 이러할 때에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는 지식에 의거하지 말고 사랑에 의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나 영적 체험이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다쳐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 믿는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 분들이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안다는 분입니다. 신앙 생활에 자부심이 있으니까 새로 믿는 분들을 배려 않고 확신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찢는 분들도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성경 지식이 많은 분들입니다. 확신이 있으니까 투쟁을 마다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사랑이 덕을 세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절).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데에 틀릴 수가 있습니다. 잘 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르는 사람입니다(2절). 하나님처럼 크신 분의 의도를 우리가 어떻게 100% 자신을 갖고 알 수가 있습니까? 참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사랑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랑으로 결말 짖는 지식을 하나님은 참된 사랑이라고 인정해주십니다(3절).
우리들은 특히 안 믿는 분이나 새로 믿는 분들을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믿음에 지장 되는 일을 삼가야합니다. 특별히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사명을 감당하고자 노력하는 우리 교회 교인들은 영혼 구원에 지장을 주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서 부엌 사역을 담당하시는 분들은 말에 신경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서너달 만에 돌아오는 목장 봉사이기 때문에 봉사 목장 식구들이 일에 익숙하지 않고 서투를 것입니다. 그래서 지시도 해야하고 가르치기도 해야하겠지만 언어나 표정 관리를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봉사하는 분들 가운데에는 아직 예수 영접을 하지 않는 분이라 새로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언성을 높이고 야단을 치면 "교회에서 사랑하라고 하는데 군대 식으로 하는구나!" 하고 교회나 목장을 안 나올 수 가 있습니다.
우리가 점점 믿음 안에 자라면서 이제는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단계를 벗어나야합니다. 또 내 믿음 생활에 지장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단계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내 행동이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사역에 지장을 주느냐 아니면 도움을 주느냐는 차원에서 결정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13절). 그리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를 처음 믿게 되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되기를 소원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신 18:15-20, 막 1:21-28, 고전 8:1-13 / 김흥규목사(내리교회)
<사랑 때문에 제한되는 자유>
오늘은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일의 성서정과 중에서 먼저 고전 8: 1-13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본문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오늘로 말한다면 기독교인이 고사 지낸 고기나 떡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뒤 기독교는 크게 유대계 기독교와 이방계 기독교로 나뉘어져 발전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구약의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다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방계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만 알았지 유대교의 율법은 잘 몰랐기 때문에 양 계파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크게 세 가지 문제에 있어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할례 문제와 식사 규례, 그리고 안식일을 비롯한 유대교 성일을 지키는 문제였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 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음식 문제로 홍역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4-6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허상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하신 참 신(神)이므로 우상은 허깨비이고 이 허깨비에 바친 음식을 먹는 것 역시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8절을 봅시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 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니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에 어떤 음식을 먹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음식도 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요, 또한 예수님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바울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하나 달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다시 말해 우상이 참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하등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지식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을 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신학적 지식을 갖지 않은 채 오랫동안 우상을 섬기던 습관에 젖어 그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의 것인 줄로 여기고 먹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아직 건전한 신학적 지식을 갖지 못한 채,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으면 더럽혀진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이든 어떤 음식이든지 간에 음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음식도 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지식을 가진 이들의 처신이 문제입니다.
9-11절을 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 말씀을 우리 시대의 비유로 아주 쉽게 풀어본다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이 우리의 구원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가진 이가 아직 그런 지식이 없고 믿음도 약해서 술 담배를 하면 크게 잘못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 앞에서 술 담배를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면 아직 초신자 앞에서 집사님이나 권사님이 공석에서 아무 거리낌이 없이 술 담배를 자유롭게 할 경우, 그 초신자가 “아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구나!” 하면서 주초(酒草) 문제를 따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이런 논리를 따라가면 11절의 말씀 그대로 주초 문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람의 지식 때문에 아직 믿음이 약한 자를 망하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형제자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지요.
결국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참 아름답고도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자유로 인해서 아직 믿음이 연약한 형제자매가 상처를 입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자유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상은 참 신이 아니므로 우상 앞에 바친 제물고기 역시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 거리낌이 없이 고사나 제사를 지낸 다음 나온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아직 그런 지식이 없습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 몸과 마음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아직 지식도 없고, 믿음과 양심도 연약한 형제자매가 나의 자유로운 행위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그 형제자매를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자유의 포기 선언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1절 말씀 그대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형제자매가 어떤 상처를 받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대로만 행동한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한없이 교만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때로 바른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그 지식에 의거한 행위 때문에 누군가 오해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면,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지식과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고자 할 때 덕이 세워집니다.
<자유인이나 종이며>
바울 사도는 갈 5: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신신당부합니다. 하지만 같은 장 13절에서 또한 이 자유에 대해 분명한 한계를 그어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마르틴 루터 역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굴복 당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한 만유의 주인이지만, 이와 동시에 모든 이에게 굴복 당하고 절대적으로 만인을 섬겨야 할 종”(a perfectly free lord of all, subject to none…[and] a perfectly dutiful servant of all, subject to all)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담배도 피울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고, 카드놀이나 화투도 칠 수 있고, 노래나 춤도 출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가 내 이웃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순전히 그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정신으로 내 자유에 제한을 가하겠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도서관에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알려진 칼 바르트가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바르트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아버지요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었는데 그런 분도 담배를 피우는데 우리라고 해서 못 피울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신학생들 가운데는 음주나 흡연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창 믿음이 순수한 신입생 후배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서는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선배들을 따라하다가 물든 이들도 많았고, 또 크게 실망해서 아예 신학교를 떠나는 이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전 세계에서 유난히 주초 문제에 대해서 엄격한 곳이 한국 교회입니다. 서양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렵게 된 것이 다 술 담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교회를 나오려면 이것부터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둘째 치고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주초문제에 엄격한 것이 한국 개신교회의 불문율이요 전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지식 하나 때문에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음주를 하고 끽연(喫煙)을 한다면 상처받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지만 오직 사랑의 정신에서 그 자유를 때로 기꺼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더러운 영을 깨끗케 하신 주님>
이제 복음서로 돌아옵니다. 오늘 봉독한 막 1: 21-28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먼저 21-2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서기관들, 즉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주제가 예수님의 authority, 즉 권위입니다. 예수님의 이 권위 때문에 악한 귀신도 쫓겨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놓쳐서 안 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23-26절을 봅시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복음서 기자는 귀신 들린 사람이 누구인지 전현 관심이 없습니다.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예수님이 거룩한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말씀 한 마디로 쫓아냈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거룩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 결과를 27절에서 이렇게 보도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더러운 귀신이 쫓겨 나간 사건 역시 예수님의 권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먼저 교회는 예수님의 권세가 가득해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 악한 영들이 쫓겨나가는 이유는 사람이나 제도 때문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권세가 충만할 때 그렇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거룩한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 회당, 즉 교회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감히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을 자리이냐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썩은 사과 하나가 사과 상자 전체를 썩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교 율법이 바로 이런 정신을 가졌지요. 더럽고 부정한 사람이나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하면 곧바로 더럽고 부정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을 더럽힌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방향을 바꾸셨습니다.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율법에서 복음으로 방향이 바뀌는 과정은 ‘오염’에서 ‘치유’라는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으로의 방향선회입니다.
혹시 오늘 우리도 여기 거룩한 교회에 와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와야 할까요? 당연한 대답은 “누구나 다!”입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한다면 누구나 다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는 여러분이 백화점이나 상가에서 한 십분 동안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왔으면 좋을까? 열심히 관찰하다보면 우리 교회에 안 왔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 것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옷을 잘 차려입고 예절 바르고 교양도 있고 돈도 좀 있어 보이고, 교육도 제대로 받은 사람은 괜찮은데, 아무데나 침을 탁탁 뱉고 무례하고 술에 찌들려 있고 옷도 허름하게 입은 사람들은 별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마약을 거래하는 상인들, 몸 파는 창기, 동성연애자, 조폭 등등은 우리가 꺼려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이들도 꺼려할 수 있겠지요. 불결하다는 생각에, 또 여기 거룩한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편견 때문에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는 분이기 때문에 어떤 더러운 귀신도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교회는 깨끗한 사람들만 오는 곳이 아닙니다. 더러운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권세로 깨끗케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교회 역시 지식만 가지면 언제나 교만해지겠지만 사랑의 정신을 가지면 항상 덕을 세울 수 있는 곳입니다!
<권위냐? 우상이냐?>
이제 신 18: 15-20절로 오늘 말씀의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두고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작별 인사요, 고별 설교입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15절). 그 선지자의 입에 모세의 말을 담아 줄 것이므로 그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은 곧 모세의 말을 듣는 것이고, 듣지 않는 것은 곧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18-19절). 이렇게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 말씀을 선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권위 있고 존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와 같이 선지자들의 권위를 부인하는 백성들도 문제이지만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정작 선지자들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20절을 봅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든지, 아니면 설령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신들의 이름을 빌려 말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만 선포해야지 시류에 영합하고 교인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加減) 없이 온전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교회는 주님의 입이 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탁받아 참 권위를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꼭 전하라고 하신 말씀만 전하면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온갖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의 권세로 쫓겨나가는 역사가 오늘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교회
고전 8:1-13 / 이수영목사
옛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이 믿는 신들에게 정기적으로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고기를 나누어 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들의 신전에는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도 여러 신들과 로마의 황제들을 위한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옛 고린도 시의 터에서 여러 식사공간을 가진 신전을 두 개나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 신전에 딸린 식사장소는 종교행사뿐 아니라 사교적 행사에도 사용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은 아니지만 이교도 친구의 초청으로 그 식사자리에 와 앉아 있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그 그리스도인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의 고기를 먹는 자리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다가 신전식당에서 소비되고 남는 고기는 시장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실제로 고린도의 시장에서 팔리는 고기의 대부분은 이교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짐승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도 그런 고기를 먹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또 어떤 조건에서는 되고 안 되는지 하는 문제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곤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 가운데는 우상숭배관행에 예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은 옛 우상숭배에로 되돌아가는 것이거나 조금이라도 우상숭배에 관여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이 아니냐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신자들이 그런 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을 보며 시험에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된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본문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안다”고 합니다. 원론적인 대답이 무엇인지는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 원론적인 지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그는 본문 4-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우리가 믿는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이라 여기며 만들어 놓은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우상에게 제물이라고 바쳐졌던 고기를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인지 아닌지 물을 필요 없이 먹으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지식을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신자들은 옛날에 우상을 숭배하던 때 행하던 대로 고기를 먹을 때는 그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으로 여기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우상을 섬기는 신앙행위의 일환으로 여전히 생각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행위인 줄 알면서도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으면 그것은 양심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양심을 더럽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어떤 신자들은 자기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이 자기의 신앙양심을 더럽히는 일이라 여겨져 먹지 않는데 다른 교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런 고기를 먹는 것을 보면 그들을 의심하거나 경멸하는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고기는 먹고 싶고 신앙이 더 깊은 것 같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고기를 먹기도 하니까 먹어도 괜찮나 보다 하면서 따라서 먹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우상숭배행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 그것은 자기의 양심을 속이고 마비시키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으므로 시험에 드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지식도 좋고 자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지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교만하게 한다는 것은 아직도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을 우상숭배행위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신앙이 부족해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깔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스스로 지식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사실은 정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 자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한 것입니다. 즉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쓰기를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합니다. 이 말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은 같은 신앙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자기의 신앙지식에 대한 확신과 그 위에서 행하는 자유로운 행동 때문에 그 누구도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자기를 절제하고 필요하면 자기의 지식을 내세우지 않기도 하며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인을 사랑하고 교회의 덕 세우기를 힘쓰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확고한 기본적 입장에서 나온 말이 본문 8절의 말입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고 하는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행동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은 신앙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자유롭게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더 잘 사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그런 음식을 먹어도 신앙양심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지만 그런 음식 먹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먹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잘 못사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한 지식과 그 지식에 기초한 행동의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중요히 여기시고 귀하게 인정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 간에 신앙공동체 안의 모든 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배려가 없어서 교회 안의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가 시험에 들고 실족하는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고 사도 바울은 반문합니다. 본문 9-10절을 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이란 말은 바로 같은 교회의 신자가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 딸린 식사공간에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앉아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른 교인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용기를 얻어서 자기도 그 고기를 먹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물을 먹는 행위는 제사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남을 따라 먹기는 먹으면서도 그렇게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를 실제로 죄 짓게 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대신 죽으심으로 구속하신 믿음의 형제를 망하게 하는 것이며, 바로 주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렇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 형제나 자매를 실족하게 하여 결국 주님께 죄를 짓게 만들 것이라면 차라리 그 문제에 관한 지식과 자유를 다 포기하고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는 영원히 먹지 않는 편을 택하여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결론을 내립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교회 안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는 그때 그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의 교인들 사이에서도 제사상에 차려졌던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상에 차려졌던 음식을 먹는 문제만이 아니고 더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이 음주흡연의 문제입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음주흡연의 문제에 관하여 아주 관대하고 자유로운 의견을 갖고 있고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압니다. 음주흡연의 문제는 신앙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음주흡연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도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교회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사고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가능한 한 최고로 건강하게 관리하고 유지하여 하나님의 일에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은 결코 신앙과 무관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한국교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음주흡연을 하는 것은 비신앙적이라고 여기며 그런 신자들 때문에 근심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을 배려해서 음주흡연을 삼가는 것이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한 바른 신앙의 자세이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이며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신앙과 무관한 일일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비단 무엇을 먹고 마시고 피우는 일에 관한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최우선적인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전문지식이나 경험을 내세우며 매사가 자기의 주장대로 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금방 화를 내고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는 오직 자신의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행동한다 하며 남의 말에는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령 그런 이들의 지식과 주장과 행동이 다 옳거나 틀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남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결여된 언행은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 사람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힘쓰는 사람이며, 그러기 위해 자신의 지식, 주장과 자유로운 행동 때문에 상처받거나 시험들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교회 이루어갈 수 있기를 빕니다.
음식이 형제를 실족케 하면
고전 8:1-13 / 박덕기목사
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의 무덤에 지내는 제사를 가리켜 시제(時祭)라 하고, 이 시제를 전라도 사투리로 새앙이라고 합니다. 이 새앙에 관한 어린 시절의 가슴시린 추억이 있습니다. 해마다 각 문중에서는 대대적으로 새앙을 지내는데, 아이들은 그 새앙 지내는 날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먹을 것이 너무도 귀하던 그 시절에, 새앙을 지내는 날에는 푸짐하게 차려놓았던 제사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생밤 한 알, 대추 한 개가 얼마나 귀하고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그걸 얻어먹으려고 산에서 몇 시간씩 추위에 덜덜 떨며 기다렸다가 밤, 대추, 곳감 한두 개, 거기다 비린내 나는 생선, 돼지고기, 떡까지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그러한 음식들이 얼마나 귀하고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모태신앙인이고 유아세례까지 받은 주일학생이었지만, 제사음식에 대하여 교회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았던 기억도 없고, 또 그 때는 제사음식을 가릴 처지도 아니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제사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또는 먹어서는 절대 안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로 인한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 대하여, 자상하면서도 고상한 가르침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고린도는 당시의 헬라의 여러 도시들처럼, 우상 숭배가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고대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제물에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두 종류가 있었는데, 어느 경우에서나 동물을 모조리 제단 위에서 태우는 경우는 없었고, 제물이 되는 동물의 머리털을 몇 개 뽑아서 그것만을 태우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사적인 제물-사적인 제물이란 개인이 드리는 제물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경우 표식밖에 안될 정도의 지극히 적은 부분을 제단에서 태우고, 제사장은 갈비, 다리, 머리의 왼편 반쪽을 차지하고, 제물을 바친 사람은 그 남은 고기를 갖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고기를 가지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특히 결혼 잔치를 베푸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파피러스에 쓰인 이런 초대장이 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안토니우스는 귀하를 우리 주 세라피스의 식탁에서 베푸는 만찬회에 초대하나이다.” 세라피스란 그가 제물을 바친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이렇게 잔치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집에서 베푸는 수도 있지만, 희생 제물을 바친 신전에서 베푸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같은 우상 숭배 사회에서 살며, 또 불신 친척과 친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전 초대에 응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신자들 앞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2)공적인 제물-공적인 제물이란 국가가 바치는 제물을 말합니다. 이러한 공적인 제물의 경우는 약간의 고기만 상징적으로 태워지고, 제사장들이 몫을 차지하고 나면, 남은 고기는 관리나 그 밖의 사람들이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가져간 고기는 상점이나 시장에 내어다 팔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푸줏간에서 고기를 사도, 그 고기가 이미 우상이나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그 고기를 먹어도 좋은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오늘의 우리들하고는 거리가 먼 얘기일는지 모르지만, 당시의 고린도나 기타 헬라의 도시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빠른 해답이 요구되는 중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은 이 같은 우상의 제물 문제 전반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1-3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느니라.”고 했습니다. 헬라의 도시에 살다 보면, 우상이나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매일 매일 부딪히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대로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직접 언급하기 전, 근본적 원칙을 밝힙니다. 그것은 지식보다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같은 기본 태도가 분명해지면, 우상의 제물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의 여타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의 말씀을 깊이 새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우상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지식이란 4-6의 말씀과 같은 지식을 말합니다. 곧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는 지식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 어떤 신자들은 이렇게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갖고, 얼마든지 제물을 먹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식적으로 말하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천지 만물의 창조자는 한 분 하나님뿐이시니, 우리가 무슨 음식이든지 하나님이 내신 것인 줄 알고,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물질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곧 지식보다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지식에만 기초하여 행동하고, 사랑과 덕이 없다면 교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지식 문제로 시험을 받아 교만하여졌으며, 결국 범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아담더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시험하기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미혹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도록 유혹함이었습니다. 곧 지식으로 하나님 노릇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이 지식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습니다. 이렇듯 범죄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하와처럼 지식에 절제할 줄 모르고, 곧잘 하나님처럼 알려고 하는 죄를 범합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혹은 진리에 대하여 다 이해해버리려 하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평가 해버리려고 합니다. 또한 자기가 친히 체험하여 알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현재의 지식이 용납하지 않는 것들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서푼어치도 안 되는 지식으로 교만을 떨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지식의 필요성을 무시합니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다만 참된 지식이라면, 반드시 사랑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덕이 없는 지식은 무익하고 교만하게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많이 알아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지식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갖고서 교만하면, 그는 지식을 선용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메튜헨리는 말하기를 “교만한 지식, 자랑하는 지식보다 더한 무지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무지와 인간 지식의 불완전함을 아는 것입니다.
3절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이러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메튜헨리는 “사랑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이 지식보다, 사랑과 덕을 강조합니까?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확신과 지식을 갖고, 우상의 제물 문제에 담대하게 대처해 나가는 강한 신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7절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우상에 대한 습관’이란 우상을 섬기던 옛 습관을 말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못한 신자들은, 개종한 후에도 우상의 제물이라면 더럽혀진 줄 알고,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이 강한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나약한 신앙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에 거리낌을 느끼며 의심하면서 먹게 됨으로,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상 종교에서 개종한 신자가, 어떤 경우에든지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음이 옳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제물을 먹는 경우,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면서도, 제물을 먹는 신자들이 있게 되었습니까? 10절에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우상의 집’이란 사신 우상의 신당을 말합니다. 믿음이 강한 어떤 신자들은 불신자들과의 이러저러한 관계에 끌리어 신당에까지 가게 되고, 거기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제물까지 먹은 모양입니다. 그것을 보고 약한 자들, 곧 진리 지식에 확신이 없었던 신자들까지 외식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양심이 더러워지고 결국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했습니다. 여기 ‘멸망하나니’라는 말은 구원에서 완전히 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반 절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구원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멸망이라는 의미는, 양심이 약하여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치명적으로 위태한 일이므로, 멸망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죄짓는데 이름을 뜻합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믿음이 강한 성도가 범죄하게 만든 약한 성도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산 귀중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같은 큰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이렇게 본의 아닌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곧 9절에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가 자신의 바른 판단을 좇아,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자유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유나 권리가 약한 형제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실족케 하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총회 헌법에도 범죄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인, 직원, 치리회를 불문하고, 교훈과 심술과 행위가, 성경에 위반되는 것이나, 혹 사정이 악하지 아니할지라도, 다른 사람으로 범죄케 한 것이나, 덕을 세움에 방해되게 하는 것이 역시 범죄이다.”
에반스는 “너희 모토를 자제에 두고, 특권에 두지 말고, 너의 표어를 사랑으로 하고, 지식으로 하지 말라. 결코 너의 지식을 과시하지 말고, 도무지 너의 특권을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같은 의미로 13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영어 성경에는 “I Will Never Eat Flesh As Long As I Live, Never”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살아 있는 한, 결코 고기를 먹지 아니하리라. 결코”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중 부정으로, 강력한 부정을 뜻합니다. 이 강한 결심은 곧 약한 성도를 돌아보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잘 나타내 줍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이 같은 사랑은, 그의 지식을 능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지식은 교회를 살리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자를 믿음이 약한 자로 취급하고, 또 우상의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는 자를 믿음이 강한 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보는 앞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었고, 또 연약한 자들은 자신의 나약한 신앙을 감추기 위해서,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면서도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귀한 것 가운데 하나는,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훌륭한 삶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강한 자의 사소한 행동 하나는, 믿음이 연약한 자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거나, 시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나 자신의 행실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늘 신앙 안에서 점검하며, 신앙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고 절제할 수 있는 미덕을 겸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어느 음악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가난한 음악가는, 새 예복을 장만할 돈이 없어서, 생각 끝에 옛날에 입던 낡은 예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휘자가 연주에 열중하여 팔을 힘껏 휘두르는 바람에, 그만 예복이 찢어져 속옷이 보였습니다. 한 곡이 끝나고 두 번째 연주를 하려는데, 사람들이 그 모양을 보고 너무 웃기 때문에,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 웃옷을 벗은 채, 셔츠바람으로 지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사람들이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 지휘자는 열심히 지휘를 했습니다. 이 때 맨 앞에 앉아 있던 백작 한 분이, 조용히 자기가 입고 있던 예복의 겉옷을 벗자, 그것을 보고 앉아 있던 사람들도 웃음을 멈추고, 입고 있던 예복의 겉옷을 벗었습니다. 그 결과 그 날의 연주는 감격스럽게 성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을 보고 판단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실수와 약점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이 앞서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마음일 것입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그리스도의 복음은 잃은 자를 구원해야 하며,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는 놀라운 원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 문명의 가치는,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일에 의해 결정되고, 그러한 원리에서 고아원, 병원, 양로원 등은 기독교 문명의 큰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1) 우리는 그 자체가 무죄하더라도, 형제에게 걸림이 되는 일은 지극히 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해도 좋고 행동해도 좋은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덕을 세우기 위해서, 그만 두는 일이 자주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식문제와 같은 것으로 갈등을 겪었던 고린도 교회처럼, 하찮은 일들을 가지고서, 인간의 보잘것없는 자존심 때문에, 혹은 위신이나 체통 때문에, 시시콜콜하게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똑똑하고 영리한 신자들보다는, 덕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야 좋은 성도가 되고,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식보다, 원칙보다, 사랑과 덕을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면, 자신이 죄 짓는 일은 더욱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험하게 해서 안 된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얼마나 삼가고 근신해야 하겠습니까?
3) 다른 사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배려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송정 중앙 어린이집에서는, 좋은 나무 성품학교의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12가지 성품 계발을 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배려’라는 것입니다. 배려란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환경에 대하여 사랑과 관심을 갖고 보살펴주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은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배려하는 사도 바울을 본받아, 자기 지식 자신의 편견만 주장하여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자신의 지식과 자유를 선용할 줄 아는, 참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만한 지성보다는 겸손한 마음이
고전 8:1-13 / 김병삼목사
지식은 교만을, 사랑은 덕을
여기에서도 사도 바울은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선교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자신의 신앙에 익숙해지면 ‘익숙함’과 ‘지식’이 기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평신도들이나 초신자들에게서 발생하기보다는 뭔가를 좀 안다는 지적 교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8장부터 16장까지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었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는데, 그중의 첫 번째가 ‘우상 제물’에 관계된 논쟁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무슨 말인가요?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는데, 성경에 관한 지식과 믿음의 경험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랜 신앙생활로 신앙의 경험과 신앙생활이 능숙해질 수 있으나 그것이 믿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본질에서 겸손함과 자기 포기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들어가는 순간, 아니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교만이 찾아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그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느냐, ‘믿음’을 자랑하며 누군가를 핍박하는 사람이 되느냐? ‘지성’이 겸손하게 나타나느냐, 아니면 ‘지성’이 교만하게 나타나느냐?
자신의 믿음과 지성에 ‘확신’은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자신의 확신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확신 때문에 상대를 힘들게 하기보다는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늘 누군가를 정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의 문제만을 가지고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사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은 교회의 문제가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 없는 지식’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최초의 죄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 그리고 불순종의 결과로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는 욕망이 무엇입니까? 모든 인류의 문제를 지식으로,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 없는 지식이 얼마나 큰 재앙으로 인류에게 되돌아오는지 우리는 경험합니다.
나 자신이 확신하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지식’이 교만하다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지식이 ‘진리’처럼 자리를 잡을 때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신의 주장이 강한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즘 이런 표현을 종종 사용합니다.
‘지식의 저주’ 혹은 ‘지식의 오류’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지난해 심장 스턴트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심장에 있는 관상 동맥이 그렇게 막혀 있는데 전조 증상이 없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 스스로 지식의 저주 속에 빠졌던 것이죠.
어느 주일 아침 갑자기 가슴과 어깨 쪽으로 극심한 통증이 와서 설교를 못 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심장의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보다는, 제가 가진 질병들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생각하고 안정제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30분쯤 지나서 통증이 사라지고 난 후에 설교하고 며칠을 지냈던 것입니다. 만약 저에게 이전의 병증이 없었다면 통증이 왔을 때 심각하게 의심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 대부분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배운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진리로 알았던 지식의 진리가 얼마나 바뀌어왔는지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결국, 지식이란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지식의 한계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하죠.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가장 큰 적이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은 과거의 것으로 머물러야 하는데, 현재에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의 오류와 교만이 신앙생활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을 진리로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교회의 문제, 그리고 사람들이 받는 상처에 대하여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4절과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두 절을 비교해 보면 사도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진리인 것은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우리에게 진리인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우상에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금으로 치장하고 특별하게 생긴 나무나 돌에 절한다고 해도,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절하고, 음식을 차려 놓는다 해도 우리는 별로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군목 시절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곳에 서부전선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습니다. ‘감악산’인데, 대전의 계룡산처럼 온갖 잡신과 우상숭배가 난무하는 곳입니다. 제가 군종 활동을 하던 그 지역에 진지 보수공사를 하고 막사를 다시 짓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산을 드나들던 무속인들의 출입을 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군부대로 항의가 이어졌고, 막사를 짓기 위해 산 정상에 있는 옹달샘을 시멘트로 막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속인이 찾아와 소대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옹달샘은 이 산에 있는 신령의 숨구멍인데, 그것을 틀어막으면 사람이 앞으로 열 명이 죽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소대장과 부대원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밤에 근무를 서다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사람이 죽기 시작합니다. 감악산 주변에서 교통사고가 나기도 하고. 그런데 그러한 인명사고는 늘 일어나던 일이었다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아마도 10명이 죽을 때까지 그 부대원들은 다 공포에 떨 것입니다. 신앙이 깊었던 당시 사단장은 군목인 저에게 그 부대의 공사현장에 올라가서 가장 큰 성황당과 나무를 베어버리고 태워버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나무를 자르려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괜히 손을 댔다가 어떤 재앙이 내릴지 모른다는 무서움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저 혼자 나무를 자르고 잘린 가지와 걸쳐놓은 성황당의 천 조각들을 태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아마 그 산 주위에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저에게 그 부대원들이 참 우매하게 보였습니다. 서울대학을 나온 소대장이 헛것을 보고 다리를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던 모습도 너무나 한심스럽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우상 숭배하는 것이 참 우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에 절하고 공포에 떠는 것이 어떻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기괴하게 생긴 자연의 형상물조차도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매한 지식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 그냥 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제물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선택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의 말씀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자유함이 없는 사람에게는 죄의식이 들어갑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올무가 됩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 ‘양심’이란 말은 ‘아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신약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양심은 우리 행동이 용인되거나 정죄를 받는 마음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양심은 우리가 아는 지식에 근거합니다. 중요한 것인 이 지식이 세상 것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영적인 것을 따르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영적 지식이 많아지면 훨씬 더 양심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 즉 영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양심을 가지게 될까요?
대부분 사람은 자신들이 살던 세상의 습관과 관습의 틀로 인해 소위 양심의 가책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 가책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죄책감으로 인해 죄인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부분을 ‘약하고 더러워지느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약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양심이 쉽게 더러워지고’(7절) ‘쉽게 상처받으며’(12절), ‘쉽게 실족합니다’(13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약한 성도들에게 양보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약한 성도들에게 해가 되거나 피해가 될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보는 성숙한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약한 자가 하는 것을 다 내버려 두어 제멋대로 하도록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한 것은 사실이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철저하게 목회적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입니다.
하루도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 신학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생은 나라를 염려하며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때지요. 그리고 눈앞에서 학우들이 매를 맞거나 잡혀가는 일을 보면서, 이념의 문제를 떠나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을 했죠.
저도 학교에 다니며 데모도 해보고 학내 문제로 한 주간 단식투쟁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위 ‘운동권’과 멀어지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하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단지 제 경험입니다)
술과 담배 그리고 조금은 상스러운 말들과 투쟁의 언어들이 민주화 운동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기며. 아직도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면 ‘깨어지지 않은’ 지성으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젊은이’로 매도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참 힘들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깨어있는 지성이 있듯이, 데모하지 않아도 학문을 가지고 이바지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말입니다.
메시지 성경을 보면 조금 더 쉽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 그런 교만한 지성보다는 겸손한 마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됩니다. … 어떤 사람들은 우상이라는 것은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 하나님 한분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아주 정확하게 말합니다. … 엄밀하게 따지자면,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느 고기와 똑같습니다. … 그러나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 참된 앎은 그렇게 무신경한 것이 아닙니다. …
여러분 가운데는 평생 동안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 왔고, 그 고기 속에 악한 것이 들어 있어서 여러분 안에서도 악한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조건 아래서 형성된 상상력과 양심이라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신의 자유를 부주의하게 행사한 나머지, 아직 과거의 틀과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동료 신자들을 길에서 벗어나게 할까 봐 마음을 쓰십니다.
사도 바울이 염려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파하는 것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본문 11~13절을 보세요.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여러분의 동료에게 상처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거리낌 없이 행해지는 식사는, 이 약한 사람들을 희생시켜도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도 사도 바울의 목회적 관점이 와 닿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 ‘상처’받는 교인들입니다. 설교할 때는 “상처를 준다고 다 받느냐? 받은 상처를 돌려주라!”고 말하지만 사실, 무의식중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이 부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제가 경험했던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분당에서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조금은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식당주인이 목사님이라고 인사하는 상황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맥주와 와인을 주문하는 목사님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맥주와 와인이 사람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당에서 목회하는 저에게 그리고 저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식당에서 말입니다.
그분의 눈빛은 “뭐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라고 말하고 있었죠. 그것을 먹고 안 먹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그분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첫 번째 배려가 부족한 부분은 같이 식사하는 상대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과 전통에서 목사가 식사하며 술을 먹는 상황이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는 목사를 볼 수도 있는 교인들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술을 먹는 목회자의 모습 때문에 설교가 은혜가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신념과 지식을 내세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독선과 교만이 아닐까요?”
요즘처럼 지적 교만이 팽배한 때가 없는 듯합니다.
아니, 누구든지 자신의 지적 교만을 펼칠 수 있는 장이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바로 저도 그중의 한 사람이고, 또 제가 사용하는 SNS가 그 중요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 자신의 ‘익숙함’을 지성이라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신과 익숙하지 않은 것을 모두 ‘반지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반지성적 행동은 때로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려는 교만의 모습은 아닌지 역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성’보다 더 소중한 것은 ‘존중’과 겸손한 마음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지적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인지 상대방을 위한 것인지”는 자신만 모를 뿐 모두에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조언하고 싶을 때, 내 생각과 다를 때는 조금 더 생각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식의 교만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비판은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어떤 지식과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인격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인격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지식은 올무와 멍에일 뿐입니다. 또한, 믿음은 있으나 지식이 없으면 독선과 방종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게 하는가?
그런데 이 결단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인데, 최근에 교인 중에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사하는데 주일에 문을 열어야 할까요? 닫아야 할까요?”
“안식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쉬는 것일까요?”
“‘일’이라고 하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서 제가 주일에 설교하고 사역을 하는 것은 ‘일’일까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일까요? 주일에 우리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또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문을 여는 것은 일이고, 크리스천 배우가 주일에 공연하는 것은 일이 아닐까요?
오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이 문제에 대해 적용해 볼까요?
어떤 사람은 주일에 일하든지 안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돈을 쓰는 일이 하나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돈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을 쓰면서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는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입니다. 주일에 일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에 의하면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을 더한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안식일에 밀을 까불러 먹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면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되묻습니다.
“안식일이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냐?”
어떤 사람에게는 안식일에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날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요?
기준이 무엇일까요?
당신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결단입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음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믿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위엄 앞에서 인격적인가? 그리고 그분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인가”를 묻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격적’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염려하고 배려하며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는 일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자신의 자유’를 누구를 위해 쓸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믿음은 교만한 지성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과 그 교만은 하나님께서 꺾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 사랑
고전 8:1-13 / 김동호목사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우리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존재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다 세상이 잘못 되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사람이 잘못 되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격는 모든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들은 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거듭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거듭남입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인간의 모습에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세상 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식으로 그 근본은 사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의 식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저는 성경이 참 재미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식을 의미합니다. 세상 식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식이 성경에 있는데 저도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식이 때로는 황당해 보이고, 바보 같아 보이고, 말도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나님의 식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세상 식이 틀린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아는 것처럼 세상 식의 열매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사망으로, 고통으로, 아픔으로, 혼란으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세상 식이 틀렸다면 세상 식과 전혀 반대가 되는 하나님의 식이 맞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식에 관심을 가지고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솔직히 겁도 나고 잘 믿어지지도 않았지만 삶에 세상 식이 아닌 하나님의 식을 적용해 보았습니다. 식을 바꾼다는 자체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그것을 좁은 길과 십자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그 결과는 구원이었습니다. 세상 식은 바람에 나는 겨가 열매이었지만, 하나님의 식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맺어내는 열매와 같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믿지 못해 세상 식대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식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리는 구원의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마음에 늘 평안을 누리고 살아가는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와 같은 구원의 삶을 얻는다면 세상이 높은 산이어도 큰 상관이 없고, 거친 들이어도 큰 상관이 없고, 초막이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면, 그리하여 내 삶에 구원의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그와 같은 세상의 환경과는 아무 상관없이 늘 천국을 사는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삶이 부럽습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그와 같은 삶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좀더 좋은 것을 먹고, 좀 더 좋은 것을 입고, 좀 더 좋은 것을 마시고 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매 주일의 설교를 통하여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여야 할 하나님의 식을 배우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듣지만 말고 그것을 실천함으로 여러분들이 과연 하나님의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됨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누리는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축복이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강단을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넘쳐나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평화에 대하여 설교하는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성경을 통하여 전혀 세상 식과는 다른 하나님의 식을 배우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 동안의 잘못된 세상 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식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된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쳐나게 될 줄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와 같은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 교회에는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하여 이견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통되는 고기들은 사람들에게 판매되기 전에 먼저 우상에게 바쳐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고기는 다 우상제물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기를 놓고 초대 교인들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과 먹어도 상관 없다는 사람으로 나뉘어 제법 심각하리만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와 갈등은 교회의 평화를 위협하리만큼 위험한 것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와 같은 종류의 갈등은 교회의 위협이 되곤 합니다.
아주 옛날 미국 교회에서 술집 바에서 쓰던 전자 올겐이 기증되었습니다. 술집이 문을 닫으면서 바에서 쓰던 전자 올겐을 교회에 기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받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그 올겐을 교회 예배용으로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 본문의 고린도 교회가 우상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고기를 놓고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심각하게 다투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미국 교회는 그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술집이 기증한 전자 올겐 때문에 교회가 두 쪽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문제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교회와 가정과 세상의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없어서 결국은 교회와 가정과 세상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갈등하며, 다투며, 불화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세상 식은 끝까지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서 세상 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식과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은 오늘 고린도전서 8장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와 우리들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려 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하여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분명한 생각과 입장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 4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형제들과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형제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각은 서로 다르나 그 다른 생각의 동기가 같다고 말하며 자기와 생각이 다른 형제들을 두둔하였습니다.
바울은 매우 중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결과가 아니라, 왜 먹으며, 왜 먹지 않는가하는 동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의 동기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고기를 먹으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기를 좋아하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고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그 동기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우상에 드려진 것이고 먹지 않는다면 도리어 우상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이유가 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무시하고 하나님만 섬기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혀 다른 생각 같아 보였지만 그 동기를 캐보니 똑 같았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면을 보았고, 그렇다면 생각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우리가 다 잘 아는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라면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람과 하나님 때문에 먹어도 된다는 사람이 바울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서로 싸운다면, 그리고 서로를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자기들은 하나님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고집 때문에 싸우는 것이 됩니다. 자기 교만 때문에 싸우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 더 합리적이고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바울은 우상제물인 고기 먹는 일에 대하여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바울이 실제로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자기의 행동 때문에 오해를 하고 믿음의 손상을 입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오늘 본문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아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실제로 적용하며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끝까지 자기 고집을 꺽지 아니하고, 말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자기 때문에 싸우다가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분열시키는데 까지 이르는 것이 보통 우리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데,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형제에게서 자기와 똑같은 믿음의 동기를 발견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나 자기와 생각이 다른 형제의 생각을 존중하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좇아 행동함으로 자기와 생각이 다른 형제와 서로 평화 하는 기가 막힌
모습을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집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결국 그 진리를 위하여 순교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경우에 따라서 생각을 아무렇게나 바꾸고 사는 생각과 지조가 없는 사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순교의 고집을 가지고 있는 용기 있는 바울이 교회 안에서 전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오늘 본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고집이 너무 강하여 종종 하나님의 사람들과도 다투고 싸우고 헤어지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와도 싸웠고, 마가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바나바와도 헤어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바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하여 바울이 믿음 안에서 점점 더 성숙해 져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의 성장이 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불화들이 있습니다. 그 불화의 원인들을 찾아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들일 때가 참 많습니다. 치약을 끝에서부터 꼭꼭 짜지 않고 중간을 눌러 짠다고 그것을 가지고 싸우다가 이혼한 부부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이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살다보니 이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양말을 벗을 때 뒤집어서 벗지 말고 똑바로 벗어 놓으라고 잔소리하다가 이혼한 부부도 있습니다.
치약은 끝에서부터 꼭꼭 짜도 되고, 중간 허리를 눌러 짜도 되는 것입니다. 짜서 이만 닦으면 되는 것이지 꼭 끝에서부터 짜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다.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치약을 중간 허리부터 눌러 짜 놓지 말고 끝에서부터 꼭꼭 눌러 짜라고 남편이나 아내가 말한다면, 그 까짓것 치약 끝에서부터 꼭꼭 짜주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고집을 부리고 싸웁니까? 이제까지 그런 것 가지고 고집을 부리고 다투고 싸웠다면 식을 바꾸어 끝에서부터 꼭꼭 짜줍시다. 평화는 그와 같은 작은 일을 실천하는데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제 아내는 양말 가지고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바로 벗어 놓으면 바로 빨아서 개어 놓고, 뒤집어 벗어 놓으면 양말이 뒤집어진 채 빨아서 그냥 그대로 개어 놓습니다. 양말을 바로 벗어 놓으면 신을 때 바로 신으면 되고,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으면 나중에 신을 때 다시 뒤집어서 신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제가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으면 그것을 바로 다시 뒤집어 빨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제가 양말을 어떻게 벗어 놓든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빨든 똑바로 빨든 빨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신는 것은 제가 알아서 신는 것이니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제 아내가 그것을 가지고 잔소리를 한다면 저는 아내와 고집 부리고 다투지 않고 조금 귀찮지만 양말을 똑바로 벗어 놓겠습니다. 그것으로 집안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들과 별로 사이좋지 않게 지내는 어떤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자지간의 갈등 원인도 치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는데 일회용 샴푸 두 번 써도 되는데 샴푸 아까운줄 모르고 한 번에 다 써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자지간의 갈등의 원인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아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까? 둘 다 다 입니다. 치약이나 일회용 샴푸가지고 짜증나게 잔소리 안하는 것이 좋지만, 그까짓 잔소리 정도 가지고 멀 부자지간 사이까지 나빠지면서 싸웁니까? 까짓것 치약 끝에서부터 꼭꼭 짜주고, 샴푸 두 번 쓰면 될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쉬운데 사실 우리는 대부분 그런 것 가지고 싸우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여튼 자기와 다른 것을 도무지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과 같이 자기와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참으로 엉뚱한 고집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줄 때 오히려 사랑과 평화가 넘쳐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물론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른 사람이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 주며 살아간다면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사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행복하고 평화스러울 것입니다.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바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 알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바울이 누구 편을 들어 줄 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을 이해해 주고, 자기들과 같이 평생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의 생각과 행동이 고기 먹는 일로 인하여 분열의 위기까지 몰렸던 고린도 교회에 끼쳤을 영향을 한번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자기 생각과 주관이 뚜렷하고 또 고집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꺽는 논리에 강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꺽는 것은 제게 큰 어려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만큼 제게 어려운 일입니다. 저 같았으면 틀림없이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을 논리로 몰아부쳤을 것입니다. 꼼짝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고기 먹는 교회로 몰아갔을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바울 같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너무 훌륭해 보입니다. 근사해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바울을 본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늘 고집을 부리며 트러블 메이커가 되고 있는 우리들을 반성하고, 나와 다른 사람까지도 품고 존중하여 나와 같은 사람들끼리만 평화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설날과 우상제물
고전 8:1-13 / 김태복목사
오늘은 지난해 추석이나 성탄절, 신정처럼 공교롭게도 주일이자, 설날입니다. 금년 들어서 고린도서를 강해하고 있는데 오늘은 8장을 미리 앞당겨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설날이 되면 신자들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제사 문제이고 또한 제사 음식이나 고사 음식을 먹어야 되느냐, 아니냐?’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불신자들이 이 날을 맞으면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일은 조상 제사입니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나누는데 그 복을 받는 방법도 조상에게 제사를 정성껏 지냄으로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도 수천 만 명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부모가 생존해 계시는 동안 정성껏 잘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이지, 죽은 조상이 귀신이 되어서 떠돌아다니다가 제사 때 오셔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상들이 제사에 소홀히 하는 후손에게 노하셔서 재앙을 주기도 하고 제사를 정성껏 지내면 기분이 좋으셔서 복을 주기도 한다고 믿어서 제사 지내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사화복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고, 사람은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고 마는 것이라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만약 죽은 조상이 영계(靈界)를 떠다니시다가 배고파서 명절이나 제사 때 찾아오신다고 믿는다면 삼시 세 때를 음식을 차려야지 일년에 한두 번 제사 지내는 것도 너무 모순된 생각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추도예배를 드립니다. 조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자나 죽은 자의 영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부모님과 그 유훈을 기억하며 서로 우애함을 다짐하는 시간이 바로 추도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식도 다만 찾아온 형제들이나 손님들을 위해 마련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는 우상숭배입니다. 제사나 고사를 지낸 후에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제사를 지낸 음식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먹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그러한 문제가 교회 안에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고린도에서는 도살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고기는 이방 신전(神殿)에서 도살하여 일단 우상 앞에 제물로 바쳤다가, 시중에 유통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 고기를 신성하게 여겨, 그 고기를 먹는 순간, 우상의 효험이 자기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만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그 고기를 먹는다면 어떻게 되는가에 있었습니다. 그 고기에 어떤 사단의 힘이 작용하여 고기를 먹는 신자를 해치지는 않을까?
이러한 문제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사상이나 고사, 혹은 굿에 사용되었던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고민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는 방법을 무엇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1. 신앙적인 지식보다 덕을 나타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얄팍한 신앙적 지식으로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게 강하게 비판함으로 상처를 주지 말고 그들을 사랑함으로 덕을 나타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지식’이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견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으로 본다면 우상 제물에 대한 제 각각의 견해를 말합니다.
특히 그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율법적인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에 “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 반면,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우상이 무슨 신이냐? 다만 돌이나 나무로 깍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앞에 놓았던 고기는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줄 믿고 먹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간에 서로 주장하고 비판함으로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아직도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게 너무 강한 비판을 함으로 신앙의 상처를 입히게 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이 우상제물을 신전에서 마음대로 먹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일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가장 강조하게 된 것은 교리도 중요하고 신앙적인 견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혀셔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14:3에서도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강조하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믿음이 연약한 신자라도 하나님이 저들을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제물을 먹느냐 안 먹느냐?’라는 문제 때문에 지나치게 자기주장을 하거나 남을 비판함으로 믿음이 약한 신자들이 상처를 받게 된다면 하나님이 부르시고 받으신 자들을 병들게 하는 죄를 저지르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어떤 성도가 제사 음식을 먹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소위 믿음이 강하다는 신자가 믿음이 약한 신자의 형편도 살펴보지 않고 “아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우상제물을 먹다니, 내가 어느 부흥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제사나 고사를 지낸 음식을 분석해 보니까, 영양분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는 이미 귀신이 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음식을 먹었으니 벌을 받을까 두렵소.”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약한 신자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신앙지식으로 이처럼 다른 이의 신앙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음력 정초 때에 보면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도 몰래 점을 치거나 사주관상을 보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자기 교회 권사님이 목사님께 중매를 요청하더랍니다.
“우리 아들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연수 중에 있습니다. 좋은 신부 감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면서 “신부 감으로 나이가 24살이나 25살 정도가 좋고 이화여대를 나온 피아니스트면 제일 좋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수소문 끝에 그런 처녀를 소개해 주었고 약혼식 날짜까지 정했답니다. 그런데 약혼식 전날에 그 권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약혼식을 취소해야겠습니다. 어디 가서 사주를 보았더니 궁합이 안 맞는답니다. 우리 아들은 17세에서 20세 사이의 여자를 얻어야 잘 산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그 권사님을 대단히 야단을 쳤을 줄 압니다. 소위 권사란 분도 이 모양 이 꼴인데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오죽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집사님은 자기가 전도한 신자가 점을 보러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화가 나서 혹독하게 야단치기를 “세례 받은 사람이 아직도 미신을 못 버리다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당신을 위해 기도도 많이 하고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는데, 너무나 낙심이 되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느낌입니다.”라고 함으로 믿음의 큰 상처를 입힙니다.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 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세히 가르치면서 타이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자란 후에는 그런 어린 아이의 일, 세상적인 일을 저절로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이 할 일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신앙의 수준에 따라 잘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믿음의 견해 때문에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무서운 교만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1절 말씀 하반절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교리도 다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인 줄 알고 언제나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덕을 나타냄으로 마침내 장성한 신앙, 믿음이 강한 자들로 양육하는 것이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이 할 일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신앙적 양심의 기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4-7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는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 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때로 우리 신자들에게는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도무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제물을 먹어도 좋으냐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우상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줄 알고 먹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이처럼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 판단기준은 각자 믿음의 양심에 따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행23:1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신앙문제에 부딪혔을 때 성경에도 분명하지 않으면 각자 믿음의 양심에 따라 기도 중에 결정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 제물이 우상에게 절한 것이므로 먹으면 죄가 된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양심에 꺼리면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양심에 꺼리면서 먹으면 7절 말씀대로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 나가서는 더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4절대로 모든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이신 줄 믿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는 무슨 특별한 귀신의 힘이 내재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말고 먹으십시오.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염리동 경성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조희완 목사님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제사상에 차렸던 음식을 일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상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께름칙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식구들이나 친척들로부터 눈총과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사 음식이건 고사 음식이건 마음대로 먹는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무슨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거든 성경 말씀으로 해결하십시오. 성경에 분명치 않거든 믿음의 양심에 따라 기도 중에 결정하시고 행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8-13절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9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말씀은 비단 우상의 제물이라고 해도 우리 양심에 꺼리지 않는다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자유가 있다하더라도 우리보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그 일로 인하여 죄를 짓게 하는 일은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우리의 자유함을 잘못 사용하면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믿음이 약한 사람을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리가 우상의 제물을 담대히 먹는 모습을 보고서, 그 음식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하는 행위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위험성입니다. 둘째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리의 자유함을 보고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아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할 수 있다는 위험성입니다.
10절대로 가령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은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러분이 우상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칩시다. 그때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여전히 양심으로는 가책을 받으면서도 대담해져서 결국 그것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1절 말씀대로 여러분의 자유스런 행위가 믿음이 약한 형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살리신 형제에게 양심의 상처를 입히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상 제물보다는 술 담배 이야기를 하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사실, 술 담배 한다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들은 술 담배를 안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온 지 오래되지 못한 분들도 술 담배를 끊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교회 나온 지 오래된 집사님이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오래된 신자가 술 담배 하는 것을 보면 마침 위선자를 보는 것 같아서 교회 나오고 싶은 마음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동안 열심히 술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던 초신자가 오래 믿은 신자가 술 담배 하는 것을 보고 담대함이 생겨져서 마음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12절 말씀대로 형제에게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양심을 상하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단호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3절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고기란 우상의 제단 앞에 올려졌던 고기를 뜻합니다. 물론, 우상 앞에 올려졌던 고기라고 해서 무슨 귀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린도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 고기를 먹으면 무슨 신령하고 신비한 힘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우상 앞에 올리기 전이나, 올리고 난 후나 고기는 전혀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그 고기를 먹든 안 먹든 우리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고기로 먹을 자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마치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 앞에 올려진 제물은 먹지 않겠다며,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고, 동시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극명하게 보이고자 했던 신앙적인 정절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이제 막 우상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우상을 섬기던 시절의 그 어떠한 행위와 제약으로부터 철저히 해방되어 살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우상숭배를 많이 하던 분들이 교회 나온 후에 모두 끊고 살면서, 만일 우상의 제물을 조금이라도 손대었다가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까 해서 노심초사 조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허랑방탕하던 생활을 청산하면서 술 담배도 끊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난 신앙의 양심상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우상의 제물도 먹고 술 담배도 먹어도 된다고 행동함으로 우상 제물과 술 담배를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실족하게 한다면 하나님이 과연 진노하실 일이 아닙니까? 아니 됩니다. 바울에게서 13절에서 고백한 사실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자기 신앙 양심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한 형제가 상처가 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든지 자기 신앙의 정도나 자기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보다 언제나 교회의 덕과 믿음이 약한 신자들을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 은퇴하신 장로님의 간증을 들어 보았습니다.
자기가 50대 장로였을 때 교회가 큰 시험에 빠져서 목사님파와 장로님파가 싸움을 벌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교회 안에서 대판 싸움이 벌어지면서 한편에서는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려는 목사님을 자기가 앞장서서 끌어 내리려 하고 목사님 편에 선 젊은 집사님들은 그것을 막노라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서로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해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언뜻 보니까, 당시 고등부 회장이었던 자기 아들이, 무슨 일 때문에 본당에 들어왔다가 강대상에서 앞장서서 싸움하고 있는 자기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더랍니다. 순간적으로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더랍니다. 결국 그 목사님은 후에 교회를 떠남으로 교회가 안정되었으나, 자기 아들은 그때부터 자기를 피하는 눈치더니 결국 대학생이 된 후 교회를 영원히 떠났다고 합니다.
그 은퇴 장로님은 “당시는 자기 딴에는 교회를 위해 바른 일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어린 신자들과 아들에게는 큰 신앙의 상처를 남긴 결과가 되었다.”고 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반드시 명심할 것은 여러분의 신앙적인 주장과 행동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신앙의 상처나 실족을 주지 말고 언제나 덕을 세우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덕을 세우라
고전 8:113 / 박봉수목사
이번 중국 쓰촨성 지진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사망자가 10만 명에 육박하고 이재민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학교라는 점입니다. 7000 채의 학교 건물이 무너졌답니다. 이것은 쓰촨성 내 전체 학교의 40%에 해당한답니다. 그리고 전체 사망자의 10%가 학교에 있던 교사와 학생들이랍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학교에 피해가 집중됐을까요? 쓰촨성 주위안 중학교는 3층 건물인데 수업 중에 지진이 발생해서 건물이 무너졌고, 건물 안에 있던 289명의 교사와 학생이 그대로 매몰됐습니다. 그런데 학교 주변 관공서 건물들은 멀쩡했고, 허름한 상가들도 일부 균열이 간 정도였습니다. 부모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부실공사 책임을 물어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집을 잘 지어야 합니다. 잘못 지으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좋은 자재를 써야하고, 원칙대로 지어야 하고, 또 정성을 다해서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천재지변이 닥쳐도 요동치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집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엡 2:20-22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가 하나의 영적인 건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퉁잇돌이 되셨고, 믿음의 선진들이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위에 성도들 하나하나가 기둥이 되고 벽돌이 되어 건물을 이루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 때 성령께서 그 하나하나를 이어서 건물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라는 영적 건물이 외부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치 큰 지진이 와서 흔들리듯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을 발 보존하고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 힘을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 외부 충격은 이것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신전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 신전 제단에 바쳐진 고기는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제단에서 불태워지고, 사제에게 주고, 나머지는 제주가 가져갔습니다. 사제들은 받은 고기를 일부 자기가 먹고 나머지는 시장에 싸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제주는 집에 가져와 이웃들과 축제를 벌이며 함께 먹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우상 제단에 바쳐졌던 음식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웃이 벌이는 잔치에 초대 받고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면 우상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고기를 살 때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교인들은 이 고기를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습니다. 고기를 먹자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 제단에 바쳤던 고기를 먹는 것이니 꺼림칙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 같습니다. 먹지 않으려면 축제에 참석하지 말아야 했고 그러면 고린도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고기를 전혀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문제로 교회 안에서 격론이 벌어집니다. 먹을 수 밖에 없다는 사람들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이 대립합니다. 서로 정죄합니다. 자칫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바울이 볼 때 영적 건물인 교회가 마치 지진에 흔들리듯 심각하게 붕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러 문제와 함께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전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명확하게 해결 방안을 제시합니다.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원어로 “오이코도메”(oikodome)입니다. 이 말은 ‘집’이라는 뜻의 “오이코스”(oikos)와 ‘세운다’는 뜻의 “데모”(demo)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건물을 세운다는 어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쓸 때는 물론 영적 건물을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직접적으로는 개개인의 신앙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마치 기둥을 세우듯이 개개인의 신앙을 세워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포괄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마치 각 기둥들이 세워져 연합해서 하나의 건물이 세워져 가듯이 성도 하나하나의 신앙이 세워져 신앙공동체가 든든히 세워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덕을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하나하나의 신앙을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인 교회 전체가 믿음 위에 굳건히 서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는 우상 제물 문제로 많은 성도들이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흔들리는 믿음을 세워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놓고 싸우기만 했습니다. 그 싸움이 계속되고 격화될 수록 더 많은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일어날 때 지켜보고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관계된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 때 그 문제 해결에만 매달리다 보면 교회 전체가 흔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감정에 충실하다가 계속 그 문제에 빠져듭니다. 교회 전체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릅니다. 아니 교회가 흔들리고 깨지는 것은 알바 아닙니다. 자기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싸움에 몰입합니다. 결국 교회가 무너집니다. 자기도 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덕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믿음이 세워지고 나아가 교회가 믿음 위에 굳건히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엽적인 문제에 치중하다가 덕을 무너뜨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곧 부실공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덕을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1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지식이 있어서 그 지식을 근거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영적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전 1:5에 보면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전의 우상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신들은 다 만들어진 신이요 거짓 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바쳐진 제물들도 형식상만 제물이지 실제로는 제물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이 그 제물을 받거나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무지하다고 공격했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사람들과 날카롭게 대립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의 영적 지식은 옳습니다. 분명히 우상은 거짓 신이고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이라고 해도 다 형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먹는다고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밤을 무서워합니다. 혼자서 캄캄한 밤에 시골집 마당 뒷간 화장실을 못 갑니다. 귀신이나 도깨비라도 나올 것만 같습니다. 차근차근 설명해 줍니다. “빛이 없어서 다만 안 보이는 것뿐이라고... 귀신이나 도깨비 이런 것은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이들은 머리로는 이해가 돼도 무서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꺼림칙합니다. 우상 제단 앞에 바쳐졌던 음식은 먹으려면 꺼림칙합니다. 설명을 듣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먹고 싶지 않습니다. 먹을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결국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모릅니다. 지식은 지식이지만 참 지식은 아닙니다. 그것이 참 지식이 되려면 여러 가지 측면을 포괄적으로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도 폭 넓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파악할 때도 그 문제 자체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문제가 생기게 된 배경, 그 문제가 이렇게 불거지게 된 과정, 그리고 앞으로 그 문제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까지 포괄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참 사랑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접근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 제물인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지식으로 접근해서는 해결책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 대신 사랑으로 접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 논쟁 가운데 소위 “아디아포라 논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말은 헬라어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란 뜻입니다. 신학에서는 “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이란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아디아포라란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성도 각 개인이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판단할 문제라는 말입니다.
교회사에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함께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예배 형식을 계속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예배 형식을 만들어 사용할 것인가 때문에 다투었습니다. 루터는 문제는 신앙고백에 있지 예배 형식에 있지 않다고 하여 카톨릭 예배 형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럴 수 없다고 하여 카톨릭 예배 형식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개신교 예배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예배 형식에 관한 문제도 아디아포라입니다. 자기의 신앙 양심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이면서도 루터교의 예배 형식과 장로교의 예배 형식이 다릅니다. 그러면서 서로 존중하고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하나로 나아갑니다. 나와 다른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합니다. 참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라는 문제는 바로 아디아포라 문제입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의 신앙양심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접근할 문제입니다.
바울은 롬 14:6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참 사람으로 접근하라는 것입니다.
세종조의 윤회라는 사람의 일화입니다. 젊은 시절 하루는 시골길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았습니다. 뜰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관집 주인 아이가 커다란 진주를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놀다가 그만 진주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곁을 지나던 거위가 그 진주를 삼켜버렸습니다. 당연히 뜰에 혼자 기다리고 있던 윤회가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윤회를 관가에 고발하기로 하고 밧줄로 묶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윤회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를 묶어두려거든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고 했을 뿐입니다. 아침이 되자 거위는 진주를 배설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주인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왜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윤회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어제 내가 말했다면 당신이 반드시 거위의 배를 째어 구슬을 찾을 것이므로 욕됨을 참으면서 기다렸소.” 윤회는 자기가 궁지에 몰려있으면서도 거위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사랑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3. 참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그 자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유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상 제물은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우상 제물이 신앙 양심상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freedom from) 그러나 이것이 자칫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이것은 방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 있어서 먹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을 위한 자유”입니다.(freedom for) 이것이야 말로 참 자유가 됩니다.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로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구두쇠 집안에 며느리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시아버지께 고깃국을 맛있게 끓여드렸습니다. 그런데 맛있게 먹고 난 시아버지가 자초지종을 듣더니 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버렸습니다. 며느리가 울며 친정으로 쫓겨가는데 빨래터 아낙들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새댁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제 푸주간에서 남은 고기를 싸게 줄테니 떨이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두쇠 집안 내력도 있고 해서 한참 고기를 사는 것처럼 이리 저리 만지고 주무른 다음에 집으로 뛰어와서 냄비에 물을 받아 고기 만졌던 손을 씻은 물로 국을 끓여드렸지요. 그런데 아버님이 그 손을 가마솥에 씻었으면 온 식구들이 며칠간 고깃국을 먹을 텐데 냄비에 씻어서 한 끼 밖에 못 먹었다고 살림 더 배워오라고 친정으로 가라지 뭡니까?”
이 말을 들은 동네 아낙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싸다 싸 그 손을 동네 우물에 씻었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고깃국을 먹었을 텐데 그래 냄비에 씻었어? 그러니 쫓겨나는 게 당연하지...”
웃자고 만든 이야깁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나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비결입니다.
동물과과 사람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터지면 동물은 “반응”(reaction)을 보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응답”(response)을 합니다. 그 문제를 넓게 생각하고 포괄적으로 성찰해 본 다음에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단순히 반응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응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세워집니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더욱 굳건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
고전 8:4-13 / 지용수목사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너무 신비롭습니다.
특별히 천지 창조는 엄청난 일입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모든 것이 신비롭습니다.
오늘 오후에 제가 말씀을 묵상하는데, 얼마나 신비로운지….
이 지구 같은 별들이 우주에 셀 수가 없이 많습니다. 은하계만 해도 2천억 개나 되는 별의 군집인데, 이 은하계 같은 군집이 또 2천억 개가 넘는다니, 이 우주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셀 수 없는 별들 중에서 물고기가 우글거리고 새들이 노래하고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있는 별은 지구 하나뿐입니다. 달나라에 토끼가 없고 목성에 사슴이 없습니다. 금성에 잉어가 없고 해왕성에 돼지가 꿀꿀거리지 않습니다. 명왕성에 사과나무가 없습니다. 천왕성에 백도가 없습니다.
이 지구촌에만 오곡백과가 있고 꽃이 핍니다. 이 지구촌의 바다에만 물고기들이 우글거리고 이 지구촌의 하늘에만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이 우연히 되어졌다는 사람은 정신이상자라도 보통 이상자가 아닙니다.
우연히 된 세상이라면 이 별에도 사람이 살고 저 별에도 사람이 살고 이 별에도 짐승이 있고 저 별에도 짐승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별들 중 어떻게 냇물이 흐르고 샘이 솟아나고 공기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은 지구뿐입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셔서 정확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사야 45장을 읽다가 제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할렐루야!
토끼집은 토끼를 위해 짓습니다. 개집은 개를 위해 사람이 짓습니다. 주차장, 차고는 자동차를 위해 사람이 짓듯이 지구는 사람이 살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저 캄캄한 구름도 햇살을 받으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보십시오. 하늘의 수증기, 그 구름 덩어리도 햇빛을 받으면 빨주노초파남보의 아름다운 무지개로 착 펼쳐집니다. 기가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고 즐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인지 모릅니다. 이 지구촌뿐 아니라 온 우주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지금 오염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도 이렇게 좋은데, 새 하늘과 새 땅, 그 천국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것도 여러분과 저를 위해 지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한복음 14:1-2)
거할 곳이 없는 집에는 손님이 오면 어렵습니다. 저희가 10여 년 전 신촌에서 세를 얻어 살 때 처가의 식구들이, 처남들과 처남댁들이 떼를 지어 저희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 거할 곳이 없어서 숙박업소에 모셨습니다.
그러나 큰 집에는 손님이 와도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집은 너무 너무 커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가서 살 때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3부 예배를 마치고 많은 분들에게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지난 주에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셔서 장례식을 마치고 온 청년도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오기 전에 제가 우리 직원에게 청년의 아버님이 예수님을 영접했느냐고 물으니, 영접하지 않으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제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을 마치고 오신 가족에게는 기쁘고 시원하게 위로를 해드리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분의 장례식을 마치고 오신 가족들에게는 제가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말 안된 마음으로 그 청년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청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게 교회에 열심히 나가라고 유언하셨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서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에게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고 하셨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빛나는 그 나라, 저 천국에서 우리 모두 만나게 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살아도 이 좋은 세상에서 살고 죽어도 저 천국, 낙원에 가니 얼마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하며 살다가 감사하며 세상을 떠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셨는데, 특별히 중요하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입니다. 음식은 축복입니다.
하늘의 새를 잡아먹는 것이나 바다의 생선을 잡아먹는 것이나 오곡백과를 먹는 것이나 다 축복입니다. 수박, 밤, 참외, 포도, 파파야, 파인애플, 자두, 복숭아, 배, 사과, 그외 이름도 모르는 과일이 너무 많은데, 그 모든 것 하나하나를 우리를 위해 만드셨습니다. 커야 좋은 것은 주먹만큼 크게 만드시고 작으면 좋은 것은 포도알이나 밤처럼 작게 만드셨습니다.
한 농부가 밤송이를 까먹으며 "에이그, 밤송이 하나가 수박 만하면 하나만 삶아도 식구들이 실컷 먹을 텐데, 이렇게 작아서…."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나무 밑에 누워 자는데 나무에서 떨어진 알밤 하나가 농부의 머리를 쳤습니다. "악!"하며 일어난 농부가 알밤이 자기 머리에 떨어진 것을 알고 "아이구, 밤이 수박 만했으면 즉사할 뻔했구나."라고 하더랍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모든 것을 지으신 것을 우리가 괜히 욕심으로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중요하게 주신 음식은 축복입니다. 생명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오늘 낮에 예배를 마치고 나가니 한 집사님이 입맛이 돌아오게 기도 좀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음식을 보아도 먹기가 싫답니다. 왜 입맛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임어당이 말했습니다.
"최고의 반찬은 굶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새, 바다의 생선, 들의 오곡백과, 이 하나하나를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전도서 9장 7절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희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먹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엄마가 차려 놓은 음식을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면 엄마가 좋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우리가 맛있게 먹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기쁘게 먹어야 됩니다.
또 음식은 우리의 에너지입니다.
전도서 10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대신들은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는 이 나라여 복이 있도다』
'내가 잘 먹고 힘을 얻어 나라를 위해 일해야지.'하는 나라가 복이 있습니다.
먹지 않으면 힘이 나지 않습니다. 먹어야 힘이 나는 것입니다.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또 인생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가 먹는 것입니다. 임어당이 말했습니다.
"인생의 낙 중 최고의 낙은 먹는 낙이다."
우리가 잔치 때마다 음식을 해먹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이 젖을 뗄 때도 대연(큰 잔치)을 벌여 먹고 마셨습니다.
솔로몬도 잘 먹고 마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잘 드셨는지 모릅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겨 찾는 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얼마나 잘 드셨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벌써 숯불에 생선과 떡을 구워 놓고 기다리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에 보면, 제자들이 오니 예수님께서 "얘들아, 이리 와서 조반을 먹자."라고 하십니다. 갓 잡은 생선도 갖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잘 드시는지 모릅니다. 교인들도 대개 잘 먹는데 주님을 닮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미목회에 참석하시는 목사님들 가운데 제가 제일 부족합니다. 저만 부족하고 다른 모든 목사님들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들인데, 2년 전에 그분들과 종교 개혁지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 드시는지 제가 놀랐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부비시면서도 아침 식사를 다 하시고, 점심도 잘 드시고 저녁도 잘 드시고, 얼마나 잘 드셨는지 모릅니다. 스위스에서 우리를 안내해 주던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제 가이드 생활 20년 만에 이렇게 잘 드시는 분들은 처음 보았습니다."
대개 아침 식사는 잘 못하는데, 목사님들은 아침이고 뭐고 너무 잘 드시니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서 그렇게 잘 먹는 줄로 믿습니다.
먹는 것이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이 고린도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낮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의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대부분 우상을 섬겼던 제물이었습니다. 이웃집에 초대받아 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구나 세도 있는 집안에서는 파티도 신전의 식당에서 했습니다. 지역 유지 자녀들의 결혼 잔치를 우상 신전의 큰 식당에서 하는데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사귐이 끊어지고 지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니 가지 않을 수도 없고, 가게 되면 우상의 전각에서 먹어야 하니 고민이었습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음식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5절에서 26절에 말씀하십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할렐루야!
모든 음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것입니다. 우상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먹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우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 갓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우상에게 의식을 행한 음식을 먹으면 귀신이 자기들에게 따라 들어올까봐 또 믿음이 오염되고 양심이 더러워질까봐 겁을 내어 잘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닥을 잡아 줍니다.
우상의 제물도 다 하나님의 것이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파는 음식을 우상의 제물이냐 아니냐 묻지 말고 그냥 사 먹으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7절에 보면, 불신자에게 초대받아 갔을 때도 우상의 제물인지 아닌지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경우입니까?
음식을 먹는 자리에 믿음이 약해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자가 있는 경우입니다. 먼저 믿은 자가 우상의 제물을 마음놓고 먹으면 우상에 대한 지식이 없고 믿음이 약한 자가 '아이고, 장로님이 우상의 제물을 먹네. 나도 먹어야 되나봐.'하고 음식을 먹게 됩니다. 그런데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은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는 아무 해도 없고 믿음의 손해도 없지만, 우상에 대한 지식이 없고 믿음이 약한 자는 먼저 믿은 자를 따라 그 자리에서 음식을 먹긴 먹었는데 집에 가서는 '내가 우상의 제물을 먹었으니 내게 귀신이 붙어 왔을 거야. 나는 오염된 몸이야. 버린 몸이야.'하며 믿음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의 제물을 먹은 자가 지식으로서는 잘못이 없지만 사랑으로서는 믿음이 약한 자의 믿음에 상처를 주고 믿음을 죽이는 일이 되니 결과적으로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먹는 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의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이 죽게 된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서도 죽으셨는데 그 사람을 망하게 하면 예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되니 그럴 때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때문에 손해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28절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집에 가서 음식을 먹는데 "아이고, 장로님. 그건 제사지낼 때 제단에 놓은 것인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먹어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한 사람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위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에 맞추어 현실감 있게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장로님의 몸에 담석이 있어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이 수박을 많이 먹고 맥주를 마시라고 합니다. 담석이 있을 때 수박을 많이 먹고 맥주를 마시면 담석이 빠져 나오니 맥주가 치료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장로님이 술집에 가서 맥주를 마구 마시면 되겠습니까? 장로님이야 치료제로 마시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니 "장로님도 술을 마시는데 우리도 마시면 되겠구나."하고 술을 마시게 되면 장로님에게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장로님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 청년들이 따라 마시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면 장로님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가 담석을 제거하기 위해 맥주를 마셔도 네 살, 다섯 살 먹은 어린 아들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맥주는 마셔도 되는 것이구나.'하다가 결국 아이들도 맥주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자유가 아이를 망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약으로 먹는 것이라도 조심해서 아이들이 보지 않는 데서, 청년들이 보지 않는 데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형제를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지식으로 판단하지 말고 사랑으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판단해야 될 줄 믿습니다. 비단 음식뿐 아닙니다. 모든 일에 마찬가지입니다.
제 자동차가 목사로서는 타기에 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님들이 사 주신 것이고 또 타 보니 솔직히 덜 피곤해서, 12시간 동안 운전해도 피곤하지 않으니 일하기에 좋아 그냥 타고 다닙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타고 다니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 자동차 때문에 우리 청년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얼마나 마음이 쓰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다가도 청년들이 있을 때는 다시 들어가곤 했습니다. 또 노회나 목사님들의 모임에 그 자동차를 타고 가면 선배 목사님들의 마음을 상하시게 할까봐 될 수 있으면 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제 자유로는 탈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으로는 타기가 힘들었습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테니스를 얼마나 잘 하는지 아십니까? 아마 테니스하는 저의 모습을 보면 여러분들이 넋을 잃을 것입니다. 정식으로 테니스를 배워서 제 폼이 정말 멋있습니다.
제가 동성 아파트에서 살 때의 일입니다. 아파트로 이사를 와보니 테니스장이 있어서 새벽기도를 마친 후 아내와 함께 1시간 동안 테니스를 했습니다. 저도 운동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출근하다가 저희 부부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보고 그냥 지나가면 좋을 텐데, 못 본 척하고 그냥 가면 좋을 텐데 계속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저 집사님이 회사에서 일하시다가 문득 목사인 나를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날까? 테니스하는 목사로 생각되겠네. 테니스한다고 막 뛰는 목사로 생각되겠네. 기도하고 성경 연구하는 목사님으로 생각되어야 은혜가 되는데…,'
그 날로 테니스를 접었습니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테니스를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혹 교인들에게 상처가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했습니까? 잘못했습니까? 운동하지 않았다가 병원에 갈 뻔했지만 그래도 그때 그 생각은 잘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고기는 우상의 제물입니다. 모든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상의 제물은 아예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으면 힘이 나고 좋지만 약한 형제에게 부담이 되면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나 하나만 생각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주변의 우리 형제들을 위해 마음을 쓰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결론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해야 하지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음식을 먹고 마실 때 '이것이 몸에 얼마나 좋은가?'하는 것도 생각해야 되지만 '내가 이것을 먹는 것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이 없나?'를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진만연 집사님이 서울 위성 도시의 시장님으로 계실 때, 주변에 가난한 분들이 사셨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한 번도 불고기를 해 드시지 않았답니다. 고깃국도 끓이지 않았답니다. 시장 관사에서 불고기 냄새가 나고 고깃국 냄새가 나면 가난한 이웃들의 마음에 위화감이 생길까봐 한 번도 그런 음식을 하지 않았답니다.
그것이 이웃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모든 일에, 범사에 나 자신만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웃과 교회를 생각하고 또 주변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좋다고 생각되면 그때는 먹고 마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부담이 되거나 하나님께 누가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삼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나아갈 길인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제 이후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이웃에게 은혜가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