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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의심과 불신을 통과한 믿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이 믿지 않음에 대해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인지 생각게 됩니다.
믿지 않았다기보다는 믿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믿지 않음과 믿지 못함의 차이는 의지와 능력의 차이입니다.
믿지 않음은 믿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이지만, 믿지 못함은 믿으려고 하는데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적대하는 사람이 말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하건 곧이듣지 않고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말하면
그가 말하면 따지지 않고 무조건 믿으려는 의지가 작동을 하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여자라고 해서 그녀의 말을 무조건 믿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시골로 가는 다 두 제자의 경우는 자기들을 배반하고 떠났다고 해서 제자들은 다른 두 제자의 말을 무조건 믿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마리아와 다른 두 제자 때문에 불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불신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불신한 것이지만
믿을 수 없어서 불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나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그저 무조건 믿으려고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믿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힘,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선은 끈질기게 의심 또는 불신을 하는 것입니다.
웬만큼 의심하다가 대충 믿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끈질기게 의심하고 불신해야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끈질기게 의심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그 문제를 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깨닫기 위해 의심을 하고,
의심을 크게 하기 위해 화두를 붙잡으라고 하지요.
그리고 화두를 끈질기게 붙잡고 매달리는 능력을 근기(根機)라고 하고,
화두를 끈질기게 붙잡고 의심하는 사람을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라 하지요.
아무튼 이렇게 대단한 의심과 불신을 처절하게 통과한 믿음, 커다란 의심과 불신을 이겨낸 믿음이라야 큰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불교 방식이고,
우리 그리스도교 방식은 우리 인간의 끈질긴 노력에 하느님의 은총이 따라야 합니다.
어제 봤듯이 우리 인간의 끈질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때
그때 하느님께서 마침내 등장하시고 믿음을 완성해주십니다.
구약의 야곱이 인간적으로 많이 부족하고 야비한 존재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의 열두 아들에서 비롯된 것은
바로 그의 그 끈질긴 하느님과의 씨름 때문이었지요.
야뽁강을 건너기 전 그는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새벽이 되어 하느님이 이제 그만 하자고 해도
축복을 해주지 않으면 놔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텨 드디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제 생각에 부정적으로만 보면 제자들은 오늘 주님께서 꾸짖으시듯
마음이 매우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고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믿기 위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한 야곱들이죠.
오늘 마르코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바로 그런 제자들에게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시는데,
꾸짖음과 사명의 부여 사이에 분명히 다른 복음들에 있었던 것처럼 제자들의 끈질긴 믿음 싸움, 깨달음, 만남의 체험 같은 것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는 우리도
자신에 대해 너무 실망치 말고 제자들에게서 희망과 본보기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뽑는다면 아마 ‘노벨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이너마이트(TNT)를 발명하여 사업적으로 성공한 노벨이 유언으로 만들어진 명예로운 상이지요.
노벨이 이 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잘못된 신문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교통사망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노벨의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었는데, 신문기사는 노벨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신문기사의 제목이 이런 것입니다.
“희대의 살인마 노벨, 사망하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생명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무튼 이 기사에 그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 결과가 바로 노벨상이라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명예로워하는 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그 누구도 노벨을 희대의 살인마라고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을 만들어서 인류 발전에 기여했다면서 칭찬을 하고 있지요.
노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으면 합니다.
즉, 내 마지막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이지요.
그리고 부정적 평가에 후회하고 절망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오늘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혼내셨던 이유에 대해 오늘 복음은 ‘불신과 완고한 마음’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으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에게 나타나셨음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명백한 사실인데도 믿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그대로 절망에 빠졌기 때문에 명백한 사실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믿지 않을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역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또한 어떤 좌절과 절망 속에서 헤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제자들처럼 주님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의 사건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는 삶이 아닌, ‘내 마지막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하면서
주님께 희망을 두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두려움은 하느님을 잊은 증거>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씁니다.
이들은 소년들에게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만들면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웁니다.
시험을 받는 날 밤, 소년은 얼마나 무서움을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들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부터도 소년들은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활을 겨누고 있는 느낌을 받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내 등 뒤에 계신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에게 와서 아우성쳤습니다.
모세가 사라졌으니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하느님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론은 그들의 금붙이들을 모아 그들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금송아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아론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대사제입니다.
대사제라면 하느님을 두려워했어야 했지만 사람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스운 가축의 모습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전쟁을 하고 있던 사울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진영을 이탈했습니다.
사울은 두려워졌습니다.
그러다가는 병사들이 다 떠나갈 것 같았고, 제사장 사무엘은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이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왕위에서 쫓겨나는 이유가 되게 됩니다.
두려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결국 버림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추문을 감추기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고,
솔로몬은 여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방 신들에게 향을 올렸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느님을 벗어나는 계기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담부터 하와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하느님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가족 간의 분열이나, 나라의 분열까지 서로 갈라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두 부류가 대립합니다.
바로 기득권자들인 유다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에게 어떤 처벌할 방도도 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백성이 모두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것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고 백성들로부터 힘을 얻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요한은 누구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위협에 이렇게 대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함도 성령의 일곱 은사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만을 두려워할 뿐 세상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타이타닉 호가 가라앉을 때 승객들의 불안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 갑판에서 정복을 입은 악대가 성가를 연주하였습니다.
곧 죽음에 임박한 그들은 모두 성가를 부르며 물속에 잠겼습니다.
죽음이 오더라도 그분만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눈처럼 우리를 지키십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믿는 이들의 사명>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 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 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부활 신앙>
4월 11일의 복음 말씀을 보면, "믿지 않았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말을 '정말로' 믿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믿지 않는 우리를 꾸짖으셨다.
우리는 지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고 그것을 증언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여자들의 말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말을 안 믿은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이어서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벗어나서 신자들에게 갔을 때 신자들이 안 믿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헤로데가 베드로 사도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둔 일이 있습니다(사도 12,1-5).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갑니다(사도 12,6-11).
베드로가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자
하녀가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신자들에게 달려가서 알립니다(사도 12,14).
그러자 사람들은 "너, 정신 나갔구나." 하면서 안 믿습니다(사도 12,15).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을 때
제자들은 그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루카 24,11)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그런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물증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증언'만 듣고 믿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이란 선택과 결단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니라,
돌아가신 것이 확실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였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다른, 또는 한 차원 높은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믿음은 사실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안 믿으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라는 분을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할 수는 있겠지만, 그분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끝까지 부활을 안 믿었다면, 그들은 그냥 그대로 흩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새로 제자로 뽑아서 다시 시작하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또 만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일도, 복음서를 기록하는 일도,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수난 전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존하고 전파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힘을 잃었을 것이고,
결국 몇몇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할 사람도, 믿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4월 11일의 복음 말씀만 보면,
제자들이 하도 안 믿어서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마르 16,14),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14,18-19)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
사도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속마음과 계획을 잘 모르지만,
여자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자들의 믿음과 사랑이 사도들보다 앞서 있었거나,
또는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코린 12,9)와 같은 이유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믿는다면 믿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믿음을 능동적으로 증언하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마태 10,27)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부활하신 주님의 꾸짖으심>
생명의 숨결은 차가운 대지와 앙상한 나뭇가지 저 밑에서도 숨쉬고 있었다.
그 숨결이 이제 감각의 한계 속에 눈으로 보아야 알아차리고 느끼는 우리에게 새 봄을 알리기 위해 연초록빛을 뿜어내고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이런 자연의 창조적 몸짓은 감각 저 너머의 것을 보고 알아차리며 새로워지라는 하나의 부르심인 듯싶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 한 사람에게, 이어 두 제자에게,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나
부활 발현을 보지 못한 자들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16,9-14).
부활의 증인들은 완고한 마음과 감각의 세계에 매여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시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적 믿음의 빛을 비추어 주지 않으시면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다.
곧, 부활신앙은 예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전에 유다인들의 적대적인 불신앙을 꾸짖을 때 사용하신 적이 있는 표현을 하고 계신다.
성경에서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기관이며 하느님을 느끼는 안테나이다.
‘꾸짖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오네이디센’은 믿음이 없는 도시 코라진과 벳사이다에 대해서도 발설되었다(마태 11,20).
‘불신’을 뜻하는 ‘아피스티아’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보인 태도(마르 6,6)와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완고한 마음’을 나타내는 ‘스클레로카르디아’라는 말은 인간이 하느님께 저항하는 타고난 성향을 가리킨다(마르 10,5).
예수님의 꾸짖음은 믿지 않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열어주고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선포하도록 준비시켜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발현하신 것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도 하셨다(16,15).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시어 정신을 차리게 하시고 눈을 뜨게 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당신을 믿도록 이끄신다.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살도록 불리었고,
그 소명을 수행함으로 인해 그들의 부활 신앙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이렇듯 신앙은 반드시 행동으로 표현될 때 참신앙임이 드러난다.
믿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결단이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서 차별 없는 형제가 되도록 사랑으로 행동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겠다고 약속한 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독선과 고정관념, 완고함을 드러낼 때가 있다.
이런 마음들이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임을 잘 알지 않는가!
오늘도 나를 향해 사랑으로 꾸짖으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 모두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또한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예수님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회 지도자들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거부한 사도들의 태도를 깊이 새겨 주님을 선포하자.
우리에겐 어정쩡한 중간지대나 그럴싸하게 넘어가기 위한 양비론은 존재할 수 없다.
생명과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행동이야말로 그 어떤 반대나 거짓도 부끄럽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임을 되새길 일이다.
완고함과 불신의 안경을 이제는 벗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호흡하는 부활 여행을 시작하자.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파스카 신비>
답은 파스카 신비 하나뿐입니다.
파스카 신비의 체험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파스카 신비의 체험만이 치유와 구원의 길입니다.
내 상처와 아픔의 자리에 치유와 구원의 부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파스카 신비 체험이 아니라 평생 끊임없이 체험해야 하는 파스카 신비,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예물기도와 영성체후 기도도 파스카 신비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저희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감사하며 드리는 이 제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참 아름답고 깊은 기도문입니다.
신비 중의 신비가 파스카 신비요, 모든 신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파스카 신비입니다.
세상에 신비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의 신비, 몸의 신비, 죽음의 신비, 고통의 신비, 사랑의 신비, 믿음의 신비, 성사의 신비, 악의 신비 등 끝이 없습니다.
모두가 신비입니다.
이 모든 신비를 푸는 열쇠가 바로 파스카의 신비,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모든 신비의 중심에 바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새삼 파스카 신비의 성체성사가 궁극의 치유와 구원의 만병통치(萬病通治) 명약(名藥)임을, 영원한 기쁨의 원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불신과 완고함으로 요약되는 제자들을 꾸짖으신 주님은 우리를 꾸짖으십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파스카 신비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치유되는 불신과 완고함, 무지와 교만의 마음의 병입니다.
한 번으로 치유되는 마음의 병이 아니라 끊임없이 파스카 신비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해야 치유되는 마음의 병입니다.
하여 매일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이들의 담대함에 놀란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이 이들을 믿음의 용사로 변모시켰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에 복종하는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될수록 담대한 용기요 샘솟는 활력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에 매진합니다.
당신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은 사명을 부여 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각자 세상의 중심인 제 삶의 자리에서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분도회의 정주(定住) 수도승들은 매일의 성체성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종합해서 전하는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완고해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 했다고 증언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분께서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전해도 믿지 않았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전해 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스승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 16,14)
복음서의 이 꾸짖음은 우리를 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사도들은 부활하신 분을 목격한 이들이고,
우리는 단지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전해 들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선언합니다(로마 10,17 참조).
우리의 믿음은 사도들의 증언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증언을 들음으로, 들음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다시 증언으로 이천 년 동안 전해져 온 신앙입니다.
부활하신 분을 뵈었던 이들의 증언을 믿지 못한다면,
그래서 다른 놀라운 계시를 바라거나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복음, 곧 기쁜 소식이며 희망의 원천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면서 부활 신앙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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