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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75>
삼황오제(三皇五帝), 우리의 조상이다(2)
출처 Sky Daily 스카이데일리 :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2321
삼황오제(三皇五帝)는 그 계보상으로 봐도 한족(漢族)아니다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나(支那)의 사서(史書)중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는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지나의 시조(始祖)로 기재하고, 또한 한족(漢族)의 혈통을 황제 헌원에서 비롯되어 전욱(顓頊), 고양(高陽)과 제곡(帝嚳) 고신(高辛)을 거쳐 당요(唐堯)로 이어졌다고 기록하면서 지나의 혈통이 구축되었다고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날조한 조작으로 여러 기록들은 헌원에 앞서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족이 아닌 동이족(東夷族)으로, 복희는 태우 환웅(서기전3512~서기전3419)의 아들로 주로 기원전 35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신농은 서기전 32세기 인물로 환웅천황(서기전 3897~3804)때 알려진 고시씨(高矢氏)의 방계(傍系) 중에 소전(少典)과 소호(小嗥)의 후예로 이들은 신라김씨(新羅金氏)로 이어졌다. 또 헌원은 헌구(軒丘)로 흘러든 소전의 별종인 공손씨 등의 우두머리였다.
그런데 사마천은 헌원은 소전의 아들이고 헌원의 아들이 소호라고 하면서 요(堯)임금까지는 헌원으로부터 혈통(血統)을 끌어다 붙이고, 순(舜)임금은 효(孝)를 행하고 큰 덕을 이루어 요(堯)임금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은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
여기서 지나의 역사학자라는 자들은 사마천의 사기를 해석하면서 헌원으로 부터 요 임금으로 혈통이 이어지며 한족(漢族)들이 중원대륙(中原大陸)을 경략(經略)한 것과 같이 붓끝을 놀려댄다. 그러나 고시씨(高矢氏)와 혈연이 닿는다해 소전(少典)과 소호(小嗥)를 단일한 왕력(王歷)의 범위 안으로 포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마천의 ‘소전-헌원-소호’의 계보를 만드는 것은 사기에 불과하다. 사마천의 계보에 따르면 황제헌원과 염제(炎帝) 신농이 형제가 되는 모순이 생긴다. 또 황제 헌원과 요순(堯舜)사이의 연결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요(堯)나 순(舜)은 부용국(附庸國)의 제후(諸侯)일 뿐이다. 즉, 당시 배달국에서 요순에 이르기까지 한족(漢族)은 우리의 지배를 받으며 그 거주한 곳도 섬서성(陝西省)의 일부와 하남성(河南省) 일부에 불과한 좁은 지역의 영토에서 살았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지나(支那)에서는 헌원이 하(夏), 은(殷), 주(周)의 공통시조라는 주장까지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날조가 정사(正史)가 되었다. 이것은 조작된 거짓의 위사(僞史)임에도 황제헌원을 단일시조로 받들어온 것을 80년대부터는 헌원과 신농을 포함시키고 90년대에 와서는 배달국의 제14대 자오지천황;蚩尤天帝)를 삼황으로 모시고 있다.
이번 원고에서는 하북성 탁록현(涿鹿縣)에 소위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건립해 삼조(三祖)로 모시고 제사 드리고 있는 이 삼황(三皇)도, 오제(五帝)도, 모두가 우리의 선조이지 지나의 선조가 아니라는 점과 고대 지나의 역사를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농염제(神農炎帝)는 어느 민족의 사람인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이해함에 있어서 먼저 알아야할 것은 지나 역사는 상고사(上古史)가 없고 배달국(倍達國), 고조선보다 뒤의 역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해가 잘 되리라 본다. 또한 삼국시대도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원을 우리가 지배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류의 시원국(始源國)인 환국(桓國)과 배달국시대 지나에는 나라다운 나라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나는 배달국시대의 우리선조를 가져다가 자기들의 삼황오제라 하는데 어떤 이는 삼황(三皇)은 수인 복희씨, 신옹씨, 여와씨(女猧氏)이고 오제(五帝)는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이라 하는 자도 있는데 이는 날조이고 조작된 역사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런 기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삼황 중의 한 분인 신농도 지나 사람이라 주장하나 전혀 아니다. 그 역시 우리 선조이다. 그의 출신성분을 고기(古記)의 기록을 보면, 신농은 배달국 제8대 안부련환웅(서기전 3240~서기전3167)의 신하인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은 원래 웅씨(熊氏)의 분파로 환웅의 명을 받아 강수(姜水)에서 병력을 감독하는 일을 한 인물이다.
소전은 고시씨(高矢氏)의 방계(傍系) 중에는 소전과 소호가 있었는데 소전의 아들이 신농인 것이다. 고시씨는 신지(神誌), 혁덕(赫德)과 더불어 서기전 36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배달조선 1대 거발한(居發桓) 환웅천황의 신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풀을 맛보고 약을 만들고 성장해서는 열산(列山)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 기산(淇山)의 양지에 백가지 곡식과 백가지 채소를 심고, 오곡을 심어 9주(州)의 백성들이 곡식을 알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곡식을 먹게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당시 백성들은 정착해 생업에 종사하면서 점차 마을을 이루었고 밤낮의 길이가 같은 때에는 장을 열어 교역을 하니 사람들이 엄청 편리하였다고 했다. 또한 곡식, 의복, 약재, 석공의 기술 역시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했다. (태백일사 제4 삼한관경본기 참조)
신농은 전형적인 조선인이지, 지나의 사람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지나는 치후천제(蚩尤天帝)와, 헌원과 신농까지 삼황으로 모시는 앞뒤가 맞지 않은 만행(蠻行)을 자행하고 있는데 경악함을 금치 못할 일이다. 이는 그 얼마나 역사가 빈약했으면 이러한 날조와 조작을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우리의 고대 자료가 그리 많지가 않으니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많이 이용하는데 이 사기는 제멋대로 붓을 옮긴 것이 너무 많고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들을 쓰고 있는데 그 오류와 허구가 많다.
사마천은 상고시대는 물론 고대에 역사라 할 기록물이 없으니 우리역사를 지나의 역사인양 쓰고 있다. 그가 쓴 사기를 살펴보면, 고대 지나의 패권(覇權)이 황제헌원-전욱(顓頊)-고양(高陽)-제곡(帝嚳)-고신(高辛)-당요(唐堯)로 이어진 것처럼 기록한다.
그런데 이들은 지나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설령 황제헌원의 혈통이 면면히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영토는 오늘날 하남성(河南省) 남양시(南陽市) 당하현(唐河縣) 일대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유주(幽州)에 이르는 작은 나라에 불과 했다.
실재가 확인된 지나(支那) 고대왕조는 은(殷)으로 보고 있다
사마천의 사서(史書)에 관해 서적들을 읽다보면 지나의 역사는 너무 소설같은 내용이 많다. 지나인들은 제대로 된 역사가 없음에도 요순시대(堯舜時代)가 하(夏), 은(殷), 주(周)순으로 이어졌다고 사마천이 사서에 쓴 대로 주장한다.
그러나 한민족의 시조는 단일(單一)이 아니라 멀리 서북방면의 사막과 산악지대로부터 살기 좋은 황하(黃河)를 따라서 동진(東進)해서 많은 유목민이 비옥한 황하유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민족이 융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가 확인되는 지나의 최초의 왕조는 은(殷)으로서 서기전1600~서기전1100년까지 황하중류에서 번영했다고 주장하는 중·일(中日)의 학자들도 있으나 황하유역은 당시 동이민족들이 번영한 지역이다. 그리고 은(殷) 역시 동이족이다.
그런데 2004년 7월에 은보다 전의 왕조인 하(夏)의 궁전적(宮殿跡)이 발굴되었다고 지나의 사회과학원이 발표했으나 한민족이나 부족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불명(不明)하다. 세계의 학자들이 말하는 학설은 여러 개가 있어 흥미가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영, 독, 불, 학자 간에도 일치된 것이 없는 상태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선 은시대(殷時代)가 되면 갑골문자 문자에 의해서 은족(殷族) 이외에 50정도의 씨족집단과 50을 넘는 만족(蠻族)의 이름이 들 수는 있다. 이 족속들은 후에 나라를 만들어 국가가 된다.
그런데 은의 세력권 확대방향을 보면, 그 후에 계속되는 진출방향이 낙읍(洛邑;洛陽)이나 호경(鎬京;후에 장안(長安;현재의 서안(西安))으로 부터 동방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집단은 서방으로부터 사막지대를 넘어서 살기 좋은 황하(黃河)나 위수(渭水)에 와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은족이 황하중류로부터 하유역(下流域)에 걸쳐서 씨족연합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때 지나 각지에도 각기 선주민(先住民)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현대 지나인의 조형(祖型)은 몽골인이 주류로서 퉁구스계, 몽골계, 티베트계, 터이키계, 이란계 등의 유목, 수렵민족이 융합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내용은 이미 기술한바 있으나 한민족의 형성에 유목민족이 북방과 서방으로부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사실로 보고 있다. 그것은 가자(茄子), 호고(胡瓜;오이가 인도(印度)원산)과 수박(西瓜;아프리카원산)이 빠르게 지나에 생산이 되고 있음이 입증됨에서다.
이것은 고고학적 인류학적인 자료는 적으나 서방 이란 페르시아로부터의 민족도 페르시아 원산의 포도와 석류 등의 식물과 함께 이입(移入)되고 있는데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유목민족의 활동무대가 광범위하게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하(夏)도 단군조선의 제후(諸侯)였을 뿐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믿을 수 없는 사서(史書)인 것은 헌원의 역사에서와 삼황오제의 역사부터 모두 조작된 역사라는 데서부터 확인되는 것인데, 오늘날 지나 대륙 전체에 미치는 패권이 황제헌원을 필두로 요순(堯舜)을 거쳐 하(夏)로 이어졌다는 것을 비롯해서 진(秦), 한(漢)역사가 허구로 과장된 소설임을 알 수 있다.
하(夏)는 고조선의 제후국(諸侯國)의 하나로 하남성 정주(鄭州)일대에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정의(正義)에 따르면 제왕기(帝王紀)에 이르기를 우가 봉함을 받아 하(夏)의 제후(諸侯)백(伯)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하(夏)는 제(帝)가 우(禹)에게 봉한 나라의 이름이라고 했다.
또한 부도지에 따르면 요(堯)의 무리였던 우(禹)는 순(舜)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어 유상에게 쫒겨서 달아나던 순(舜)을 죽이고는 유호씨에게 귀순했다고 한다. 하(夏)는 우두머리의 직위가 ‘제(帝)’나 왕(王)이 아닌 ‘백(伯)’이란 점에서 하(夏)의 시조 우(禹)는 삼황오제의 계보를 이은 것이 아니라 단군으로부터 보해진 제후(諸侯)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우(禹)가 황제 헌원의 현손(玄孫)이라고 하더라도 하는 고조선의 제후국(諸侯國)에 불과하니 위대한 지나의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있지도 않은 허구의 역사를 있는 것으로 조작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夏)는 어떻게 멸망한 것인가?
[부도지]에 따르면 그 후, 우(禹)는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병기를 만들고 수리해 유호유(有戶)씨에게 대항하며 스스로 하왕(夏王)이라고 칭하니 유호씨가 하(夏)를 토벌하고 우(禹)를 죽였는데 그럼에도 하(夏)의 무리들이 완전히 토벌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단군조선13세 흘달단군(屹達檀君) 16년 겨울, 은(殷)이 하(夏)를 정벌하였는데 이 때 그 임금 하(夏)의 걸(桀)이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제(帝)가 읍차(邑借),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원조케 하니 은(殷)나라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함으로 말량(末良)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다.
그런데 하(夏)나라 걸주(桀主)는 조약을 위배하고 병력을 보내 길을 차단하고 맹약을 깨트리자 이에 은(殷)과 함께 하주(夏主)의 걸(桀)을 정벌하기로 해 은밀히 신지(臣智)인, 우량(于亮)을 보내어 견군(畎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세해 관중(關中)의 빈(邠), 기(歧)지방을 점령하고 그 곳에 살며 관제를 설치했다. 이 때가 갑오16년 서기전 1767년의 일이라고 한다.
이 흘달단군(屹達檀君)은 이 은(殷)과 함께 고조선의 제후였던 하(夏)를 정벌하고 나아가 관중(關中)일대까지 점령했던 것이다. 이 흘달단군(屹達檀君)은 바로 조서(詔書)를 내려, 주(州)와 현(縣)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제도를 수립해 관리는 월권(越權)을 하지 못하게 하고 정치는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자,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글을 맺으며
삼황오제가 우리조상인데 자학반도식민사관 학노(學奴)들은 아직도 지나와 일본이 날조하고 왜곡한 역사가 진실인양 연구를 뒷전으로 우리역사를 파괴하는 일에 영혼을 팔고 있다. 이에 하루속히 거짓역사를 버리고 진실을 교훈으로 미래를 구하는데 힘을 모았으면 한다.
지나의 역사서는 거의가 소설과 같은 것으로 사마천의 사서에도 현혹함이 없어야 한다. 또한 일본의 역사도 조작과 날조된 역사임은 일본 학자들이 더 우리보다 잘 알고 있다.
전후 일본에서는 1403년 명(明)이 역사를 왜곡하게 ‘왜(倭)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라(加羅);任那), 모한(慕韓), 진한(辰韓)을 다스렸다고 왜곡(歪曲)해서 왜인전(倭人傳)에 집어넣고 이를 왜국에 전해주며 일본의 국호를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써도 좋다고 했다.
이것은 위만의 예조선과 기준(箕準)의 삼한 위치를 찾지 못해서 왜곡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어서 지금까지 금서(禁書)로 되어 있는 신황기(神皇紀)등이 출판됨으로 일본역사가 잘못임을 깨닫고 지금은 우리역사를 바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그 내용들을 보면, ‘일본이 우리역사를 한반도역사로 한 것이 잘못이고, 신라도 둘이 있음과 대륙의 신라는 신라방(新羅坊)이라고 조작한 것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며, 우리역사가 유구하며 같은 조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며, 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리걸음이니 한심하다.’
이 사서들이 전후 잘 알려진 고사서(古史書)로는 수진전(秀眞傳), 궁하문서(宮下文書;神皇紀), 죽내문서(竹內文書), 구카미(鬼文書)등과 여기에 환단고기(桓檀古記)는 한국고대사의 접점을 찾는 중요자료가 덧붙여져 있다. 그런데 자학반도식민사관의 학노(學奴)들은 환단고기(桓檀古記)도 위서(僞書)라고 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이다.
위 서적 중 궁하문서(宮下文書;神皇紀)는 일본의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보다도 100년이나 먼저 쓰여 졌고, ‘일본천황가의 7000년 역사’를 [신황기(神皇紀)]로 1921년에 이어 1980년 복간이 되어 지나 ‘위지(魏志) 왜인전’보다도 50년 일찍 쓰여진 것이다.
이 [신황기(神皇紀)]에는 한국인이 일본열도에 이주하기 이전의 통치자들(神皇)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신왕(神皇)이 일본 땅에 온후 역사는 신왕과 황후며 친족의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으며 그 때 다스린 내용과 지명 일람도(一覽圖), 지도까지 첨부한 책이다.
1890년 1200년간 후지산록 대나무밭 서고에서 발견된 [신황기(神皇紀)]는 미와요시히로(三輪義熙)에 의해 공개되어 일본학계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사서로 사학을 가장(假裝)하고 있는 학노(學奴)들에게는 극도로 자극한 것이 되고 있다고 당시 신문에 소개되고 국내에도 몇 권이 있다. 우리학계도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서 바른 역사를 세워지기를 기대되는 상황이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정희철[중국은 없다.]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朴鐘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朴昌和 찬술, 金星謙 번역,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朴昌和 筆寫 金星謙 번역, [고구리 창세기]. 檀檀學會編輯, [桓檀古記].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貝塚茂樹,[中國の歷史].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 .三浦一郞,小倉芳彦,樺山纊一, [世界を變えた戰爭, 革命, 反亂]外 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빛명상
|프롤로그| P r o l o g u e
2015년 5월 12일 초판 2쇄
당신과 세상의 행복을 위해
지난 30여 년간 수만 명의 사람을 만나고 지켜보면서 한 순간의 선택과 판단이 평생의 길흉화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이나 만남으로 인해 평생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떨어지는 사례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마음을 보살피고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도 좋지만 어려운 처지에 이르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배달倍達나라의 신하 동이족인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서토 문명의 효시인 태호복희太昊伏羲가 하늘(우주)로 부터 받은 팔괘 획에 도경道冏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종합하여 한역팔목韓易八目과 삼목三目을 만들게 되었고, 남녀노소 상하빈부를 막론하고 누구나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사용하여 한 치 앞을 못 보는 궁금증과 답답함을 풀어나가는 데 참고가 되고자 한역韓易을 집필하였다.
인간 복제를 꿈꿀 정도의 최첨단 과학 시대에 이러한 것들이 과연 무슨 소용이 될까 하며 고개를 젓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학은 우주만물이 형성되는 섭리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기본 원리를 밝힌 지혜의 학문으로, 올바르게 알고 응용하면 마치 정확한 일기 예보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참고로 하기 전에 반드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점이 있으니 바로 모든 것이 결국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그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되, 마음(종교에서는 영혼, 철학에서는 이성 · 생각으로 표현함)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근원 즉,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받았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세상에 나면서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유래한 본래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한역은 그 순수한 마음인 본성과 연결되어 있어 여러분들의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것이다.
올해는 '선친'과 '도경'께서 탄생 103주년이 되는 해이다. 목으로 103이란 숫자는 1,3목과 3,1목으로 64목 중 최상의 목이기도 하다. 지난 어린 시절, 두 분의 은공恩功을 떠올리며 이 책을 완성했다. 한역팔목을 통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인류의 미래를 밝히고 모든 이들에게 풍요롭고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시기를 그리며 펜을 놓는다
새 시대를 여는 팔공산 빛VIIT의 터에서
저자 씀
출처 : 행복예보 생활한역
2015년 3월 12일 초판 1쇄 발행
2015년 5월 12일 초판 2쇄 P. 14-16
한역팔목과 태호복희 획팔괘
우주마음은 6,000여년 전 태호복희에게 '팔괘'를 주셨다. 지금은 우리에게 '빛VIIT'을 주셨다. 팔괘를 이용하여 한역팔목을 뜻대로 활용해 온 세상에 '빛VIIT'을 알리라 하셨다. 다시 한 번 빛VIIT으로 인류를 살릴 새로운 기회가 온 것이다.
한역팔목과 태호복희 획팔괘
한역팔목은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한역팔목에 잠재된 빛VIIT을 통해 우리 내면의 예지력을 일깨우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본래의 순수한 나, 그 참나 ㅡ 빛VIIT마음을 깨달아 한역팔목을 통한 최상의 선택과 판단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데 목적이 있다. 한역팔목은 빛VIIT과 함께 하지 않으면 점술도구에 불과하지만 빛VIIT과 함께 하면 우주의 섭리가 주는 빛의 최첨단 미래예지도구가 된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갑자기 닥쳐온 불행에 많은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다. 계획했던 일에 차질을 빚고 예기치 못한 불운한 사고를 당하며 한탄한다. 한치 앞을 정확히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과 판단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져 평생 고통스러운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한역팔목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앞둔 순간, 가장 쉽고 빠르고 간단하게 당면한 문제를 풀고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한역팔목은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한역팔목에 잠재된 빛VIIT을 통해 우리 내면의 예지력을 일깨우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본래의 순수한 나, 그 참 나(빛마음)을 깨달아 한역팔목을 통한 최상의 선택과 판단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데 목적이 있다. 한역팔목은 빛VIIT과 함께 하지 않으면 점술도구에 불과하지만 빛과 함께 하면 우주의 섭리가 주는 빛의 최첨단 미래예지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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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 따르면 모세가 허허벌판 사막에서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치자 물이 펑펑 솟아났다고 한다. 지팡이가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지팡이는 그냥 나무작대기에 불과하지만 거기엔 '모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하느님의 무한 계시(축복)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수맥을 찾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하고, 일기日氣를 알기 위해 개구리, 할머니 신경통 등을 활용한 것은 비과학일까? 그렇다면 오늘날 구름의 방향, 풍향을 보고 일기예보를 하는 것은 과학일까? 과학과 비과학은 무엇으로 선을 긋는가?
과학을 비롯한 현대의 모든 지식은 인간 두뇌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 두뇌를 넘어선 무한한 것들은 그 무한에 있는 마음, 즉 조물주의 영역에서 나온다. 인간의 유한한 생각을 넘어 무한에서 오는 에너지가 한역팔목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고사'를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역팔목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을 즈음, 퍼즐을 짜 맞춘 것 같이 '지승 스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스님은 '한민족의 역사'를 찾기 위해 맨몸으로 30여년을 몽골과 중국대륙, 바이칼에 이르기까지 헤매었고, 그 결과 잃어버린 4,000여년 배달민족의 역사를 자신의 저서 "우리 상고사 기행"에 담았다.
한역팔목을 만들고 집필하면서 느꼈던 아쉬움은 한역팔목의 원천이 되는 태호복희 획팔괘처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 못 하고 편집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상고사에 정통한 스님과의 인연으로, 지난 2013년 6월 4일부터 11일간 스님과 동행하여 전설로만 알려졌던 '삼황오제'의 발자취를 현장에서 직접 취재할 수 있었다.
한역팔목의 기원을 추적한 결과, 중국이 아닌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단군조선과 홍산문화 등 서기 2000년 이전, 약 4000년의 우리 역사가 사라져 버렸다.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와 일제치하 36년 동안 상고사에 관한 사료가 전부 왜곡되거나 폐기되었다. 곰이 마늘을 100일 동안 먹고 사람이 되었다며 우리 역사를 단군신화로 조작해놓고 단군 이전의 역사를 말살시킨 것이다.
한역팔목의 원천은 주나라 주역의 기초가 되었던 팔괘이다. 팔괘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0여 년 전 태호복희가 하늘을 향해 한치 앞을 모르는 당시의 삶을 탄하여 미래를 좀 알아가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청한 결과 얻게 된 것이다. 이후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로 국가가 형성되면서 계급층이 서게 되고, 그에 따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태호복희 팔괘를 응용하기 위하여 주나라 임금의 명령에 의해 주역이란 이름으로 어렵게 만들어 상위층 계급만이 접할 수 있고 일반서민들은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사서삼경의 한 과목으로, 벼슬을 하고 사람을 다스리고 앞서가기 위한 필수 과목이 되었지만 하늘이 주신 본래의 뜻을 잃어버렸다.
팔괘가 창시된 본래의 목적과 우리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 획팔괘처를 비롯해 직접 중국의 6대성(섬서성, 산서성, 산동성, 호남성, 하남성, 하북성)에 산재되어 있는 삼황오제의 능과 사당을 직접 확인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삼황오제를 중화문명의 시원이자 중국 내 56개 소수민족의 원조상이라 주장하면서 그 위에 있었던 홍산문화 등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문명의 으뜸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황오제 위로 올라가면 동이족이 있었고, 그들은 당시 미개한 다多부족들을 개화하였다. 우리 조상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바로 연결되어 있던 '천지인'의 조화시대에 살고 있었다.
중국은 자기네 으뜸 조상으로 동이족인 삼황을 빌려와서 자국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삼황"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과 심지어 그 사실 자체조차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럼 우리 민족은 어디에서부터 왔단 말인가?
태호복희의 가슴에 품고 있던 팔괘를 보았을 때, 이것이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의 것이 맞다는 것을 우주마음의 느낌으로 전해 받는 순간, 머나먼 중국에서 볼모처럼 잡혀있던 태호복희 팔괘에 지난 수 천년 동안 모여든 온갖 미세한 먼지 같은 것들,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여기에 뭉쳐있던 파장이 몰려나오면서 순순히 나의 궁금증을 확인해 주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와서야 알 수가 있었다. 오래 묵은 먼지와 함께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장을 받게 된 것이다.
삼황오제 탐방을 마치고 귀국 후,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기침이 심하고 허리통증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병세가 심상치 않아 병원에서 진찰해보니 황수관 박사가 이 병으로 운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2013년 가을 나와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의 부고 소식은 더욱 안타깝게 들여왔다. 얻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하듯, 체력 저하나 피로감을 넘어 죽음의 위기를 맞딱드리게 되면서, 한역의 원천을 확인하고 한역팔목을 완성시킨 사실에 대한 그만한 대가를 내주어야 했던 것이다.
중국 6개성 답사 후 지난 여름은 나에게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할 만큼 힘든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 어렵게 확인한 태호복희 팔괘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한역팔목은 우주근원의 빛VIIT을 알리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한역팔목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남녀노소 상하빈부 할 것 없이 누구나 모두 빛VIIT과 함께 잘 사용하여 한 개인과 가정의 행복은 물론 나아가 이웃과 온 사회가 행복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나라를 만드는 밝은 빛VIIT의 도구이자 미래예지도구가 될 것이다. 한역팔목의 미래는 밝다. 책이 출간되어 주역의 근간이 된 태호복희의 팔괘가 우리 조상인 동이족의 것이며 한역의 근본이 되었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며, 잃어버린 4,000여 년 역사와 함께 다시 세상에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민족기상과 정기 또한 높이게 될 것이다. 한역팔목은 온 세계가 함께 공유하며 상호간의 평화와 번영을 꾀하고 하나뿐인 지구가 아름답게 바뀌는 그날을 그려본다.
출처 : 행복예보 생활한역
2015년 3월 12일 초판 1쇄 발행
2015년 5월 12일 초판 2쇄 P. 228-234
|부치는 글|
한역팔목 출간에 부쳐
‘우리 상고사 기행’의 저자 지승 스님
정광호 선생께 부치는 글
나는 30년 동안 상고사를 해왔다. 백제가 망하면서 사비성이 불타던 날, 또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던 날, 그 도성의 불길들은 역사 창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나라 군사 설인귀가 제 임금의 명령대로 불을 지른 것이다. 우리 역사는 그때 민멸泯滅 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기왕에 모화주의자의 끄트머리가 남긴 찌꺼기여서 우리의 혼이 없고, 삼국유사는 혼은 있으되 18대에 이르는 환웅천왕들의 1565년 배달나라 역사와, 47대 단군왕검들이 다스린 2096년의 단군조선 역사가 들어있질 않아 - 합해서3660년 - 민족의 뿌리를 알 수가 없다. 그런 결과가 오늘 서토인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악착한 일본의 독도 문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서기 1992년 9월부터 서기 1996년 6월까지 나는 흑룡강 지역인 대흥안령과 소흥안령 지역을 두루 돌아보며, 몽골족 만주족 어원커족 어룬춘족 다굴족 시바족 허절족을 취재하고 다녔다. 그리고 황하문명의 시원으로 말해지는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찾아 황하 위쪽에서부터 양자강 이남까지 다시 5년을 헤매었다.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는 배달나라 신시神市정부의 명령을 받고 중원대륙에서 제후諸侯:地方長官를 살았던 분들이다. 만일 그분들의 능묘와 사당이 사실로 확인 된다면 저 중국대륙은 배달민족의 변두리 역사를 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한 짓인데, 나는 그분들의 능묘와 사당을 모두 찾아냈다. 단 산동성 하택시荷澤市 목단구牧丹區에 있는 요堯임금 능묘는 1936년에 왜놈들이 도굴로 훼손한 것을, 서기 2006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다.
파밀고원에서부터 삼신 할매의 손자국이라하여 엉덩짝에 시퍼런 몽골반점을 달고 태어나는 우리는, 파밀고원을 벗어나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 그리고 한가이산맥을 넘어서 바이칼에 닿아, 거기서 동서가 2만 리 남북으로 5만 리나 되는 밝누리나라波奈留國을 건설한다. 그것이 전설로 전하는 7세 환인천제桓因天帝들의 환국桓國인데, 12개의 작은 나라들로 나누어지는 연방국聯邦國이었고, 그 끄트머리의 슈메르는 나중에 그리스 문명과 에집트 문명의 모태가 된다.
그러나 그 거대한 환국도 바이칼 침하와 함께 운명이 다하여 떠나야 하는 날이 온다. 그리하여 앙강라 강에 뗏목을 띄우고 흑수黑水(黑龍江)를 건너 흥안령에서 발길을 멈춘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일곱민족이다. 그러나 환웅족은 대륙으로 깊숙히 남하하여 오늘의 서안西安에다 나라 터를 잡고, 태백산에다 국가 제단祭壇(수두蘇塗)을 묻으면서 밝달나라倍達國을 시작한다. 지금 그 태백산 꼭대기의 환웅천왕 사당이 그것을 증명한다.
삼황오제에서도 첫 번째가 되는 태호복희씨太昊伏犧氏는 제5세 환웅천왕의 열 두 번째 아드님이다.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天水市에서 태어났고 거기에 사당이 있다. 성장해서는 홍산문화가 발굴되는 요하遼河 곧 청구靑丘와 낙랑樂浪(오늘의 서요하는 요락수遼樂水 대능하를 백랑수百浪水라 했는데, 요락수遼樂水의 락樂과 백랑수百浪水의 랑浪을 따서 낙랑樂浪이라 함)을 거쳐, 하남성 회양현淮陽縣에 있는 여와씨女媧氏의 여黎나라를, 진陳나라로 봉토 받는다. 여와씨의 여黎나라는 모계사회였으므로, 복희 한아비는 혼인의 예법을 가르쳐서 처음을 부부라는 것을 세운다. 부부는 촌수가 없지만 거기서 부자父子라는 일촌一寸이 나오고, 형제라는 이촌二寸이 생기고 삼촌 사촌 오촌 육촌··· 이렇게 해서 비로소 부계의 질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부계의 제사를 가르쳐서 우주가 음양의 조화 속에 있음을 알게 하고, 팔괘를 그려 장차오는 일을 알게 했으며, 그물을 엮어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는 등으로 문명의 살림을 차례로 가르친 것이다. 저 서토의 지나인들이 태호복희 할아버지를 그들 문명의 비조鼻祖로 꼽는 것이 까닭이 이러해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 한반도의 남쪽 대구에서는 지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다. 이 일은 26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광호鄭光浩선생이 행하는 이적이다.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나면 몸에서 금가루가 나온다. 병이 있는 사람은 병을 치유하고 달리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원했던 바를 이룬다. 원망하는 마음도 풀어 없어지고, 시기하고 질투하던 감정이 봄눈처럼 녹아서 화평을 경험한다.
첫 째가 성신불위誠信不僞.
두 번째가 경근불태敬謹不怠.
세 번째가 효순불위孝順不違.
네 번째가 염의불음廉義不淫.
다섯 번째가 겸화불투謙和不鬪이다.
첫째 조목은 성실하고 신실해서 거짓되지 말라고 한다. 誠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글자다. 굳이 말한다면 충심衷心이 발하는 곳으로 진실에서 나오는 정성을 관장하는 곳이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信은 천리天理의 필합必合으로 인사의 필성必成을 말한다. 생각건대 이것은 하늘에 마주서는 인간의 자세를 말한 것이다.
첫 번째 조항에 이 성신誠信을 말했다는 것은, 그리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머리위에 하늘을 이고 있는 사람의 직분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하는 말이다. 그것은 천부경을 강講하고 주역을 논해서 천지간에 주인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동시에 어떻게 어려운가를 전제해서 하는 소리다.
두 번째 경근불태敬謹不怠는 공경하고 부지런해서 게으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것은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을 조심해서 섬기라는 말이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땅이 직접 내주고 간수하는 것들이다. 행여 그 땅을 생각없이 디디는 것을 경계했다고 보이는 대문이다. 홍익인세弘益人世하려면 우선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것이 어떻게 크고 원대한 은혜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당연하다. 세 번째 효순불위孝順不違는 부모와 동기간 사이에 윤리를 지적한 것이다. 하늘과 땅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를 말하고 그 다음에 부모와 동기간 사이를 말한 것은 순리에 합당하다.
그런 다음 네 번 째로 염의불음廉義不淫을 말했다. 이것은 이웃 간에 가질 우애와 태도에 대해서다. 청렴하고 의리를 지킬 것과 자칫 남녀 간에 일으키기 쉬운 스캔들에 대한 염려다. 그리고 끝에 있는 다섯 번째 조항은 겸화불투謙和不鬪다. 서로 겸손하고 화목한 것은 사회전체에 해당하는 윤리규범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끼리의 투쟁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 만물의 중심에 서서 홍익인세하는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환국에 이 다섯 가지 윤리는 아무 무리가 없이 잘 지켜졌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동서로 2만 리 남북으로 5만 리라는 너른 국토를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통치했을 것이다.
신시에는 오사五事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윷판에서 쓰는 도 개 걸 윷 모가 신시시절의 각 부서를 전담하는 직책이었다. 먼저 도는 돼지다. 병을 보는 직책이었다. 개는 형벌을 관장했고, 걸은 양이다. 이 양은 선악을 관장했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에 윷은 소를 상징했다. 농사를 관장하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끝으로 모는 말이다. 명분을 관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을파소乙巴素가 전했다는 참전계경參佺戒經에는 신시의 오사보다 인간 생활의 360여 사를 주재한 팔조의 강령八條綱領을 먼저 들고 있다. 성誠신信애愛제濟화禍복福보報응應이 신시의 팔조강령이라 했다. 그리고 이 팔조의 강령이 경經이 되고 오사가 위緯가 되어서 신시의 법속을 전했다고 설명한다. 성신誠信은 앞에서 본대로 하늘을 마주대하는 인간의 자세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바이칼의 한국에서 이미 천부경을 설하고, 복희씨가 한역을 시작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요 또 하늘의 별자리를 살펴 책력을 만들며, 사람이 만물의 중심에 서서 홍익인세弘益人世의 큰 뜻을 펼치는 것을 총체적으로 바르집은 대문이다.
애愛는 자심慈心의 본연으로 인성人性본질이다. 제濟는 겸선兼善으로 도가 잘 미치는 것이다. 화禍는 악이 부르는 것이다. 복福은 착함이 불러들인 나머지 경사스러움을 말한다. 보報는 천신이 하는 것으로 악인에게 보하는 데는 화로써 하고, 선인에 보하는데 있어서는 복으로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응應이란 악은 악보를 받고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 고로 하늘은 말이 없으나 인간사를 두루 살펴서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계를 받음이라 했다.
바이칼에 있던 한국은 사람의 윤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친 정도였는데, 신시의 팔조강령이나 오사는 윤리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틀거리를 짜고 그 틀에 맞는 당해 부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시만 해도 아직 염려스러운 세상이 아니었다. 하긴 아직 원시의 감각을 못 버린 모계사회의 풍속이 그냥 있어서 태호복희씨가 혼인예법을 가르쳐서 처음으로 부계사회를 일으켰다니, 그런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할 만큼 영민하지 않았으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이 되는 일이다. 이제 사람들이 서로의 욕심과 이기심을 가지는 것은 사회가 훨씬 진보하고 나서의 일인 것이다. 그래서 단군왕검시절로 오면 소위 말하는 팔조금법八條禁法이 생겨난다. 신시의 팔조강령이 이제 문명한 시절이 되니 갑작스럽게 달라진 것이다.
1. 서로 죽이면 당시에 죽여서 갚는다.
2. 서로 상하면 곡식으로 갚는다.
3. 도적질하면 재물을 빼앗고, 남자는 그 집의 노예가 되며, 여자는 여비가 된다.
4. 수두蘇塗를 헌자는 금고禁錮한다.
5. 예의를 잃은 자는 부역에 징발한다.
6. 일하지 않은 자는 부역에 징발한다.
7. 사음邪淫을 한 자는 태형에 처한다.
8. 사기를 하면 훈방하나, 스스로 속죄하고자 하면 면해도 공표한다.
이로써 본다면 한국의 오훈五訓이 가장 수승했고, 다음에 신시의 팔조강령과 오사五事가 버금가다가, 단군에 이르면 세상이 점차로 말세가 되는 것이 한 눈에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초기의 순수하고 절박한 것은 문명의 정도를 따라 자꾸 엷어지고 거칠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상식이지 않는가.
그러나 정광호 선생이 일으키는 이적은 단군시절의 문명도 아니고 신시의 호흡도 아니다. 그것은 훨씬 이전에 바이칼에서 오훈五訓 설할 적에 첫 번째가 성신불위誠信不僞였던 것을 상기하면 자명해진다. 선생의 하는 짓은 바로 그 시절의 성신誠信에서 나오는 몸짓이요 그 적의 호흡이다. 이것은 신시를 거치지 않은 바이칼의 한국에서 환인천제들이 지극한 무위無爲를 써서 동서가 2만 리요 남북이 5만 리였던 거대한 국토를 다스린 행위가 되살아나고 있음이다. 그랬기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이 신의 축복이라 하여 손때 묻은 묵주를 쥐어주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빛viit을 받고 지팡이를 놓게 되었고 '믿기만 하여라, 네 딸이 살아날 것이다'라는 성서의 문구가 떠올라 이 내용을 휘호로 남겨 고마움을 표했다. 생각건대 이 일은 홍익인세弘益人世로 인류문명의 초석이 된 한국桓國의 피를 내림한 배달민족의 잔잔한 기적이다. 238-245
단기 4346년 6월 5일
그때 우리는 10박 11일의 계획 아래 삼황오제의 자취를 더듬어 산동성과 산서성 그리고 섬서성을 지나면 호남성과 하남성을 지나 하북성에서 일정을 마치기로 되어 있었다. 첫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섬서성이었고 여행 이틀째 되는 날이 6월 5일 이었다. 나는 이미 세 번째로 황제헌원의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었으므로 내게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었다. 헌원의 묘소는 측백나무가 많다. 그것이 어떤 것은 3천 년 된 것이 있다 했고, 어떤 것은 후한의 광무제가 갑옷을 걸었던 나무라 하여 사람들의 주변 시선을 끌어모으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과장하기 좋아하는 서토인들이 내뱉는 실없는 소리지, 광무제라면 아직 북경지역도 제대로 간수 못해서 그냥 변두리로 두던 때다.
우리 역사에 비상하게 말이 많은 한사군이 바로 광무제 때의 사단이다. 지금의 북경 난하欒河 언저리가 바로 한사군을 두었던 땅이다. 그런데 섬서성 자오산子午山이 어디라고 거기까지 와서 제 갑옷을 걸었다는 말인가. 각설하고 정광호 선생이 하늘의 해를 향해 무슨 이적을 행한다고 주변이 수런수런 해서 하늘에 해를 올려다보니, 해 주변에 선명하게 무지개 색의 햇무리가 떠 있었다. 점차로 둥글게 두렷한 게 떠 오른 햇무리가 하늘 복판에 분명하게 보이던 것이다. 그때는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꾸무룩 했고, 언제 장마비가 한 줄기 쏟아질지도 모르는 좀 위태위태한 상황이어서, 나는 선생의 이적이 신통해 보이기는 하면서도, 그거야 선생의 신통력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어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로 펼치는 이적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황제헌원의 묘소가 있는 뒷켠에서 선생이 무슨 행사준비를 한다면서 나를 찾는다는 전갈을 듣고 능묘뒤전에 있는 측백나무 숲을 찾았을 때였다. 선생은 땅에다가 대개 한 변의 길이가 45cm가량의 삼각형을 긋더니, 하늘의 해가 땅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하늘의 해가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온다? 나는 아까 보았던 그런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그러나 차제에 정광호 선생의 이적이 무엇인지를 나름 확인하자 싶었다. 마침 해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들의 정수리 위로 힘찬 햇살이 퍼졌고 그 여파는 머리위에 키 큰 소나무와 측백나무 숲을 환히 비추었다. 선생은 '해의 자외선을 차단해서 우리의 눈이 이상이 없도록 하라' 하고 해를 향해 명령했다. 이 엄숙한 한마디에 과연 해가 시그러운 눈물을 거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이 해를 이렇게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게 얼른 믿기지 않았다.
선생은 해를 향해 빙글빙글 손가락을 돌리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마치 장난하듯 해를 빙글빙글 돌린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순간의 감동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얼크러진 측백나무와 소나무 사이로 햇덩이가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앉는 것이 당장에 느껴지던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본 것은 어디까지나 착시일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내가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졌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머릿속에 서는 분명 착시가 틀림없다고 여기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그러나 내가 보는 이 상황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고 엄중하게 묻는 자성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있었다. 복잡한 심정의 실타래가 엉기는 중에 이번에는 갑자기 구름 띠가 한 자락이 나타나서 점점 더 커지는데, 해는 그 구름을 중심으로 힘차게 멈칫멈칫 하강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도시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이 어중뜬 상황에서, 그러나 한눈을 팔지 않겠다는 굳은 일념으로 이 상황을 지키고 있었다.
하강하던 구름이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에 나타나서 점차로 부풀던 구름의 뭉텅이도 제 할 일을 다 한 듯 흩어지고 이번에는 허공 가득이 금빛분이 내려앉는다는 주변의 소리에 나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긴 시간을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햇덩이를 바라다본 나는 그 금빛분이 자욱하게 내려앉았다는 숲을 볼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숲속에 가득한 금빛분을 보는 듯도 싶고, 어찌 보면 아닌 듯도 했던 것이 당시의 내 시력의 한계였다. 금빛분이 내려앉았던 시간을 십 분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러자 내 눈도 시력을 회복하여 비로소 온 숲에 묻어난 금빛분을 바라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날 저녁 호텔에 돌아온 나는 오늘 그 현상을 무비카메라에 담았던 지풍을 시켜 그 필름을 반복해 돌려보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낮에 못 보았던 금빛분이 비로소 온 숲에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무 관세음보살.
순제릉에서 학회장님과 함께
두 번째 기적은 장사長沙에서 있었다. 장사는 호남성의 성도가 있는 곳이고 거기는 유독 안개가 많은 곳이다. 동정호洞庭湖가 때문에 물안개가 많다는 것이다. 하긴 동정호라면 둘레가 칠백리로 통하는 곳이니 거기서 밤낮이 없이 물안개를 피워 올린다면, 그 동정호 옆에 있는 장사는 그것 때문에 늘 뿌연 하늘을 바라 볼 수밖에는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새벽에 잠이 깨서 호텔 주변의 한적한 길을 산책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의 산책로가 너무 흐려 보이고 맑지 못한 것이, 자칫 마주 오는 차를 분간하지 못하면 사고로 연결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 아침, 정광호선생은 당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는, 선명한 새벽하늘에서 유독 밝게 빛나는 별 한 개를 우리들 앞에 내보이고 있었다. 밝은 별이 나타나기 전에는, 아침에 내가 보았던 유독 안개가 짙고 검은 빛이 도는 장사의 하늘이 거기에 그냥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선생은 이런 말씀을 했다. 장사의 하늘에서 이 새벽 별을 보지 못한다면 안 될 것 같은 깊은 곡절이 있어서라는 이야기는 알겠는데, 그 곡절이 무엇인지는 미처 새겨듣지를 못했다.
나는 다만 오늘 아침의 그 안개를 헤치고 별을 집어냈다는 것이 신통하고 대견했을 뿐이다. 스마트폰에 떠 있는 별은 우선 주변의 환경이 너무 깨끗하고 조용해 보였다. 그곳이 오늘 아침에 내가 산책을 포기했을 만큼 그런 깊은 안개 도시였다고는 도시 생각할 수가 없는, 깊은 산간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신새벽의 깨끗하게 닦인 그런 하늘이었다.
어떻게 선생은 그 지독한 안개 속에서 저렇게 청명한 하늘을 건져 올릴 수가 있는가. 저분은 대체 어떤 능력을 가진 분이어서 저렇듯 멀쩡한 이적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 그 스마트폰에 찍힌 푸른 여명의 하늘은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청승맞게 푸를 수가 있는 것이며, 그 하늘 복판에 금빛으로 빛나던 샛별 하나는 또 어쩌자고 그렇게 밝을 수가 있는가. 나는 이것저것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정광호선생은 옛 바이칼에서 환인천제들이 행했던 이적을, 이 혼탁한 말세에 와서 그대로 펼치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만으로 접기로 들었다. 장사에서 보았던 기적은 오히려 뚜렷이 설명이 되지만, 헌원의 능묘에서 행했던 이적은 지금도 나는 설명을 못해서 그저 나 혼자서나 알고 덮어두는 것이 옳을 성 싶기도 하다.
출처 : 행복예보 생활한역
2015년 3월 12일 초판 1쇄 발행
2015년 5월 12일 초판 2쇄 P. 238-250
첫댓글 삼황오제가 우리 선조... 감사합니다.
한역팔목을 세상에 내어주신
우주마음님 학회장님께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2013년 6윌11일 삼황오제
탐방하심에 수고와 감사의
마음 존경과 감사를 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예보 생활한역
한역팔목韓易八目과 삼목三目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고 감사 드립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한역팔목을 내어주시기 위해 애쓰신 노고에 깊은 공경과 감사의 마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빛VIIT의 도구이자 미래예지도구인 한역팔목을 내어주신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감사와 공경의 마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역팔목을 내어주신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공경과 감사의마음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한역팔목을 내어주신 학회장님의 노고에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밝혀지는 게 역사이죠.
감사합니다.
한역의 완성을 위해 중국 태호복희 획팔괘처를 방문하시고 태호복희가 우리의 조상임을 확인하시고
한역팔목을 자랑스럽게 세상에 내어주신 학회장님과 우주마음께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한역팔목과 함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빛을 알리고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승스님의 글은 어떻게 그렇게 표현을 잘 하시는지 읽을 때 마다 감동이 새롭습니다.
빛VIIT의 세계에서 편안 하시겠지요.
다시 볼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한치앞을 알수없는 앞날을 예지하고 지혜를 구하도록 길을 알려주는 든든한 예지도구 한역을 편찬하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귀한글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삼황오제, 우리의 조상이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삼황오제와 한역팔몫 ...귀한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삼황오제 자세히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삼황오제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큰 소리로 알려 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을 제대로 찾는 일에 마음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삼황오제는 우리의 조상이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삼황오제 동이족은우리조상이다.
감사합니다.
한역팔목과 태호복희에 대해서 앍고 또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의 마음으로 담습니다*
귀한 빛 의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삼황오제 탐방과 태호복희씨에 관한 진귀한 역사이야기 자세히 올려주심에 감사합니다~ 기적을 이루시는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 가득 담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삼황오제 탐방과 태호복희씨와 한역팔목...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고 한역팔목을 세상에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동이족 삼황오제 우리조상 태호복희씨와 혈통을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역사도 되찾고 자주국방 무한의 학회장님 우주빛VIIT마음 천혜의 초광력 찬란한 빛명상 영원무궁 빛터빛안의 온 인류의 보루신 빛안의 무궁한 공경과 감사마음드립니다...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