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친한 형님이 있다.
이 분은 '목사'였다.
대학 때부터 '네비게이토' 활동을 하며 선교와 헌신에 매진했던 정통파 신앙인이었다.
캠퍼스를 떠난 이후 형님은 직장생활을 했다.
결혼해 아이도 둘을 낳았다.
그 자녀들이 중고생을 거쳐 대학생이 될 때까지 형님은 선교와 봉사에 매진하는 삶을 살았다.
형수님도 같은 길을 걸었다.
두 분의 신앙과 믿음은 순수했고 뜨거웠으며 고결했다.
그리고 부부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부모 밑에서 말씀과 기도로 교육받았던 아이들이었다.
착하고 얌전하게만 성장했던 아이들이 고교시절에 사고를 쳤다.
폭력이나 싸움과 관계된 일반적인 사고가 아니라 이성과 관계된 일이었다.
충격이었다.
그 가정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겐 실로 커다란 쇼크였다.
큰 태풍이 지나고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형님이 그랬다.
"내가 잘못 살았어"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었고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열심히 선교하고 봉사하며 달려왔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게 신앙생활인 줄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눈물로 회개했고 참회하며 기도했다.
큰 파도가 지나간 뒤에 그에게 '상전벽해'가 일어났다.
외부활동을 대부분 정리했고 가정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마음을 담아 노력했다.
착하고 성실하게 크는 줄만 알았지 아이들과 가슴 속 깊은 대화를 별로 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외부에선 무척 바빴으나 내부에선 다소 소원하게 지냈음을 솔직하게 인정했고 반성했다.
늦었지만 그래도 가정의 첫 단추부터 다시 한번 끼워보자고 설득했고 가장인 자신부터 진심을 다해 노력했다.
그리고 언행일치를 간구했다.
소통하고 공감하는데 방점을 두었고 또한 그렇게 성심을 다해 살았다.
온전한 가정, 가족간의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다.
신학공부도 새로 시작했다.
끝내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담임목사를 맡아 어느 교회를 섬기는 건 아니었다.
삶의 현장에서, 그가 땀을 쏟는 일터에서 '비즈너리'를 실천하고 있었다.
역시 형님다웠다.
2월 초순에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침 '신림동'을 지나는 길인데 사무실에 있느냐고 물었다.
시간이 없어도 내야할 판이었다.
나도 무척 보고 싶었으니까.
식사도 했고 커피도 마시면서 오랜만에 형님과 교제다운 교제를 나눴다.
대문밖에서 바쁜 사람들이 있다.
또한 외부에서 사업이나 선교, 봉사 등으로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평판과 인정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사역과 신앙의 본질'은 그게 아니라고 고백했다.
가정 안에서 존경과 사랑 공감과 헌신이 살아숨쉬도록 노력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본질이라고 했다.
성경의 가르침도 그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고희'에 가까운 형님은 영향력이 매우 큰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런 리더였다.
본인이 스스로 리더가 된 게 아니었다.
주변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고 싶어 했고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를 믿고 따랐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고 있다.
형님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투명하고 멋진 삶을 엮어왔다.
가까운 사람들, 곁에 있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잔잔한 감동과 감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게 진짜다.
그렇지 못하면 그의 연설이나 설교 그리고 화려한 프로필과 세상적인 성공이 때로는 공허하고 안타까운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성직자나 사회 지도층 자녀들 중,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엇나가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부모의 삶에서 '언행일치'와 '필행합일'의 향기와 감동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녀 양육이 어찌 말로 되는 영역이던가.
가까운 곳을 먼저 헤아리고, 그곳에서 진정으로 사랑의 꽃이 만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자 했다.
형님과의 값진 교제시간, 그 시간의 핵심도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크고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곁의 어둡고 외로우며 아픈 곳일 테니까.
오늘도 배려와 감사가 충만한 하루가 되길 빈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