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전 9:1-14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전 9:1-14 / [사도의 권리와 의무]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의 삶이 변화된 것도 내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결과가 아닙니까? 2) 비록 다른 사람들은 나를 사도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내가 분명히 사도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나를 힐난하는 사람들에게 묻겠습니다. 4) 도대체 내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말입니까? 다른 사도들처럼 여러분의 집에서 손님으로 대접받을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5) 만일 내게 그리스도인 아내가 있다면 다른 제자들이나 주님의 형제나 게바처럼 아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6) 왜 여러분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생활비를 주면서 바나바와 나만은 생계를 위해 계속 일을 하게 합니까? 7) 자기가 비용을 써가면서 군대생활을 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한 농부가 그 곡식을 먹을 권리가 없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양이나 염소를 먹이는 목자가 그 젖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까? 8) 나는 단순히 인간의 관점에서 권리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말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율법 중에서 ㄱ) `타작 마당에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이 단순히 소만 생각하고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ㄱ. 신25:4) 10)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일을 한 대가로 사람들에게서 보수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밭 갈고 타작하는 사람이 추수한 몫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11) 우리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심었습니다. 그러니 그 보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요구한다고 해서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12) 다른 설교자들도 그들의 권리를 내세워 여러분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한번도 이런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여러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해서 충당하였습니다. 혹시 그런 폐를 끼쳤다가 여러분의 관심이 우리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멀어질까 염려한 때문입니다. 13)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께 드린 음식일지라도 얼마간은 필요에 따라 가져도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주께 바친 제물의 분깃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14) 주께서는 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로부터 생활비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본 장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는 복음의 삶을 보여줍니다.
권리가 없겠느냐(1-6) 바울이 말하는 자유인은 율법의 모든 의식의 속박에서 방면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사도의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자유를 사용하지 않았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주어진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바울이지만 고린도의 성도들은 오히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합니다. 이에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보았으며, 그 주님을 전파한 결과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인 너희가 있지 않느냐며 사도로서 행한 일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비롯하여 복음 전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권리와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하여 순전한 봉사와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주어진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 사랑입니다.
복음으로 살리라(7-14) 바울은 군인들이 자신의 비용으로 봉사하지 않는 것과 포도원 농부나 양 떼를 기르는 일꾼들이 보수를 기대하고 일을 하는 것처럼(신 20:6), 복음의 역군들(딤후 2:3,4)이 보수를 받고 신령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가축도 율법에 의해 보장을 받는데, 사람 역시 일한 것에 대해 보상을 소망하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마 6:26; 신 24:15; 레 7:6, 8-10, 14, 18-36). 베드로와 아볼로 등 다른 사도들은 고린도의 성도들로부터 생계비를 보장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지역에서 영적인 씨를 뿌려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운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물질적 권리를 요구할 권한이 있지만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믿는 자들의 헌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예수의 명령입니다(마 10:10; 눅 10:7). 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물질에 얽매여 산다는 것으로 오해되어 누군가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적용: 성도로서 목회자의 사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목회자라면 받는 사례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근거는 복음(사랑)입니까?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은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 10:10; 눅 10:7)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의 헌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라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인 만큼 강력한 권위를 가진 증거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권리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 설 교 >
목회자의 생활비에 관한 원칙
고전 9장 / 최영기목사
Ⅰ. 목회자의 생활비에 관한 원칙
목회자가 목회자의 생활비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이 거북하기는 하지만 오늘 본문의 주제가 그것이고 이에 관하여 말할 기회가 없는 것 같아서 목회자의 생활비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진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어떤 분은 생활비를 받지 않고 목회하는 분은 진정한 목회자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비상시에 당분간 하는 것이지 원칙은 교회에서 목회비를 책임져야합니다. 사도 바울을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일상의 삶을 보아도 그렇고(7절) 성경에서도 그렇게 하도록 했고 (8-11절) 예수님도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3-14절). 어떤 교회에서는 선교 우선 이라고 목사님 생활비는 충분히 드리지 못하면서 선교비는 많은 지출을 하는데 이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목회자가 충분히 생활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다음에 선교사를 돕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노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데 외로운 노 부모님을 찾아 뵙지 않고 양로원 봉사한다고 양로원에 가서 설쳐대면 우리 마음에 불편이 있지 않겠습니까? 목회자 생활비를 충분히 드리지 않고 선교비로 지불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꼴이 됩니다. 약간 다른 문맥에서이지만 사도 바울도 자신의 가족을 먼저 돌보지 않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5:8).
2. 생활할 만큼 충분히 드린다
생활비를 드리되 생활할 만큼 충분히 드려야합니다. 어떤 교회는 재정적으로 충분히 감당할 만 한데 생활비를 너무 조금 드립니다. 목사님을 교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과 같은 수준의 사례를 드려야 교인들의 고통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유만 된다면 목회자가 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에도 유익이 될 것입니다. 생활에 쪼들리다 보면 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도 처자식이 있는 데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성도들을 위하여 해야할 기도도 가족들을 위한 기도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쓰신 분도 목회자가 기쁜 마음으로 목회를 해야 교인들에게 유익이 되지 무거운 마음으로 하도록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13:17).
목회자의 필요는 지도자들이 미리 알아서 해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목회자가 먼저 할 때까지 기다리면 요청하는 목회자 자신도 비참한 생각이 들고 교인들에게는 돈을 밝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가 쉽습니다.
3. 일할 수 있는 선택권을 드린다
목회자에게는 또한 일을 하며 목회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어야합니다. 바울에게는 일하면서 목회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생활비를 요구했다가 새로 믿는 분들이 소위 시험이 들 것 같아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을 할 때에 원래 직업인 텐트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사역을 했습니다(행 18:3). 그런데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흉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고린도에 들렸을 때에 교인들의 보살핌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3-6절). 이것을 사양하고 일하며 사역하는 바울은 사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강하게 변호합니다(2절). 교회가 개척될 때에 생활이 되지 않으면 목회자들도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로써 안 할 일을 하는 것처럼 혹은 영성이 없거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탓인 것처럼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교회가 목회자 생활을 책임질 만큼 튼튼해지면 일을 그만두고 목회에 전념하는 것이 원칙이겠지요.
사모에게도 일하기를 원하면 일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어야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사모가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데 그러면 안 됩니다. 사실 사모는 은사도 아니고 직책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모는 헌신된 평신도로 취급하면 가장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없는 사모를 사모라는 이유 때문에 앞에 나서는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은사가 있는 사모를 사모라는 이유 때문에 뒤에 물러 앉아있으라고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은사대로 사역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회자 사모는 하고 있는 사역에 관한 것 외에는 교회 일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모는 남편이 목사라는 이유 하나로 자신이 목사인 것처럼 교회 일에 간여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저희 집에서는 아내가 누구 집에 심방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아내를 통해서 부탁하면 목사님이 심방 오신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Ⅱ. 능력 있는 구령 사역자가 되기 위한 비결
목회자가 주님에게 부름 받은 종이지만 평신도 여러분들도 모두 주님에게 부름 받은 종입니다. 목회자는 생활 전체를 바쳐서 사역하라고 부름 받았고 평신도는 생업과 구령 사역을 같이 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생활비를 받느냐 안 받느냐의 차이를 빼고는 목회자나 평신도나 주님의 종이고 풀타임 사역자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사역 목표는 영혼 구원하여서 제자 만드는 사역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효과적인 구령 사역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합니다.
1.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하여서였습니다(12절). 우리 교회에서 영혼 구원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은 목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목장 모임을 할 때에 사실 집을 돌려가면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목장 식구들이 자원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모입니다. 이것이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목장 식구들을 희생적으로 돌보니까 목자가 필요가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에 목장 식구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런 도움이 오지 아니해도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마음을 추스릅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만큼 상대방이 해주기를 기대하면 영혼 구원의 사역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줄 때에 그 사랑에 감복하여서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마침내 그들도 권리 주장을 포기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나름대로 권리 주장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목회를 해오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담임 목사는 많은 생활비를 받고 다른 사역자들은 훨씬 적은 생활비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역자가 되어서 오래 같이 사역하기 위하여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부임해서 매년 생활비 인상을 해주시면 인상 부분을 처음에는 서형순 전도사님, 다음에는 서 전도사님과 신동일 목사님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6-7년을 모든 스태프들이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가 같아졌습니다. 그후부터는 인상해준 생활비를 받기 시작했는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드디어 생활비가 19년 전 제가 직장 그만 둘 때 마지막으로 받았던 봉급과 액수가 같아졌습니다. 받던 생활비 수준이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권리를 포기하니까 우리 교회에서 영혼 구원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영혼 구원하는 사역자가 되려면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2. 안 믿는 분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영혼 구원을 위하여 유대인들과 있으면 유대인들처럼 행동했고 이방인들과 있으면 이방인들처럼 행동했습니다(20절). 왜냐하면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그들의 마음에 부담이나 거부감을 심어주어서 복음을 전할 때에 마음을 닫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 때문에도 바울을 비난을 받았습니다. 표리 부동한 사람이 아니냐는 평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고자 하는 강렬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했던 것입니다(22절).
목장을 통해서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마음가짐이 목장을 지배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분이 처음 참석하면 순서를 무시하고 그분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성경을 어려운 말로 쓰여진 개역 성경 대신에 읽기 쉬운 표준 새 번역으로 바꾼 것도 이러한 배려 때문입니다. 방문하신 분들을 소개 시간에 일어서시도록 요청하지 않는 것도 안 믿으시는 분들에게 심적 부담을 심어주는 것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모든 관심이 이미 믿는 분들, 오래 믿는 분들에게 집중되어있습니다. 설교도 그런 분들을 대상으로 하고, 교회 프로그램도 그런 분들이 좋아할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이미 믿는 분들이 너무 친해서 새로 온 분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지를 못합니다. 영혼 구원하는 사역자가 되려면 항상 안 믿는 분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분들에게 심적 부담을 주지 아니하고 복음에 마음 문을 열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합니다.
또 새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얼마간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는 전의 자기처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부담을 가져야합니다. 목자가 새로 믿는 식구에게만 관심을 갖고 자기에게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는 식의 어린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려면 멸망해 가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한 명이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천사들과 더불어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눅 15:10). 이러한 하나님이 소원을 알고 하나님을 기쁨을 같이 느낄 때에 가능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하겠습니다.
3. 천국 상을 목표로 일한다
어떤 분들은 천국의 상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이해는 합니다.천국은 자연 세계가 아닌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한정된 사고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상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대가 없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상이 있을 것을 약속하시고 상을 기대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5:11-12). 히브리서를 쓰신 분은 믿음의 기초를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에 두었습니다(히 11:6). 바울이 상을 위하여 뛰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24절).
상을 받기 위하여서는 목적이 분명하여야합니다(26절). 우리 교회에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사역이 비교적 활발하게 벌어지는 이유는 목표를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워주신 목적이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것임을 알고 이 목표를 바라보면 목표 있는 사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사역 자체에 몰두하다보면 사역의 목표를 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역 활동과 행사를 계획하거나 집행할 때에 항상 영혼 구원하여서 제자 만든다는 교회 존재의 목적에 맞추어 검토하고 수정하여야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다가 지쳐서 케이오 펀치를 맞고 쓰러지는 권투 선수처럼 사역하다가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제풀에 지쳐서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역이 무엇인지도 알아서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사역. 저는 그것이 가정 교회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 교회 사역에만 집중하고 그 외에도 많은 집회 인도 요청 등이 들어오지만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거절해오고 있습니다. 불러주신 목표에 집중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상 받는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절제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운동 선수들도 상을 받기 위하여서는 극기와 훈련을 겪습니다. 술도 안 마시고 여자도 멀리하고 음식도 조절하고 잠도 충분히 자며 끊임없이 연습을 하여서 몸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영혼 구원하는 사역자가 되려면 절제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을 철저히 갖고 몸 건강도 잘 관리하여야합니다.
또한 사역에 지장이 되는 것이 가지 치는 절제도 필요합니다.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게임에서 한국인으로써 최초로 금메달을 땄을 때에 제가 그 실황 중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황용조 선수는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지 않았습니다. 선두 그룹에서 뛰고 있어서 카메라에 잡힌 것 뿐입니다. 그때에 해설자가 황 선수 바로 앞에 뛰는 선수와 황선수를 비교를 했습니다. 앞에 뛰는 선수는 뛸 때에 몸이 아래 위로 약간씩 bounce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오래되면 그로 인한 에너지 손실로 인하여 막판에 힘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황선수를 보이는데 황선수는 boundce 없이 수평으로 머리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황 선수가 우승을 했습니다. 에너지가 쓸데 없는 동작으로 인하여 낭비되는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상 받는 사역자가 되려면 에너지를 절약해합니다.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걸치적 거리는 것을 과감하게 제거해야합니다. 우리 교회 목자들 가운데에는 직장 생활이 보통 사람의 2배 정도 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이 교회 사역도 잘하고 가정도 잘 봅니다. 그런에 그런 분의 삶을 보면 절제가 배어있는 것을 봅니다. 쓸데 없이 걸기적 거리는 요소를 과감히 제거해 버리니까 꼭 필요한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갖고 절제 된 삶을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이렇지 못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쓰임 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에게 채찍질하지 않을 때에 더 이상 쓰임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봐 두렵다고 했습니다.(29절). 절제된 삶을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상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한 권리 포기
고전 9:1-18 / 박덕기목사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4년 만에 다시 재개될 것 같습니다. 한미 군사훈련 중지를 끈질기게 요구하던 북한이 ‘키 리졸부’ 군사훈련 기간 중에도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는 일에 합의를 해오면서, 자기들이 통 큰 양보를 했다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국내외 정세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지만, 어떻든 소위 그들의 통 큰 양보에 대하여는 평가할만한 점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만일 북한의 김정은이 자신은 남한처럼 투표를 해서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므로, 그 자리를 기꺼이 내어놓고 통일을 하자고 한다면 어찌될까요? 과연 그러한 발상이 가능할까요? 단언컨대 그러한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기득권을 내려놓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인생들은 그렇게 큰 기득권이 아니라, 실로 조그만 자신의 권리나 기득권도 결코 양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양보는커녕 악착스럽게 자신의 권리나 기득권을 사수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 인간들의 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하면서, 얼마든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오늘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어떻게 포기하고, 복음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는가를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1절에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의식적인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영적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또 ‘사도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입니다. 그토록 위대하고 충성된 사도 바울이었지만, 그의 사역 동안에 외부로부터는 심한 박해와 반대를 받았고, 내부로부터는 섭섭하고 실망할 만한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매우 섭섭하게 한 일 중에 하나는, 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랫동안 피땀 흘리며 복음을 전파했던 교회, 그래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고린도 교회에서조차, 일부 신도들이 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이 정당한 것임을 강력하게 역설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1)그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 부활의 증인이란 것을 거듭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선택할 때, 제자 곧 사도의 자격을 논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도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 곧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이 사도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란 무슨 뜻입니까? 사도 곧 απο?τολο?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사도직은 구약의 선지자직 수준과 비슷한 신약의 기초직으로서, 한편으로 사도직을 가리켜 교회의 창설 직원이라고도 합니다. 사도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있어서 신앙이란, 어떤 교리, 혹은 신조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항상 인격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믿는 것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러니까 본질상으로 예수님은 신이시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곧 그 분의 사역을 믿는 것인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를 구속하신 속죄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사상운동, 윤리 운동, 도덕 운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그 분의 속죄사역을 전파하여,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도록 하는 구원 운동인 것입니다.
이와 상반되는 잘못된 사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 탄생, 죽음, 부활은 다 무시해 버리고,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라든지, 윤리 도덕만을 높게 평가하여, 그러한 것들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을 믿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친히 목격한 증인이기 때문에 사도의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2)그의 복음 사역의 열매를 통해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1절에 “주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 아니냐?” 라는 말이 그러한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그리하여 많은 교회들을 세우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고린도 교회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고린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곧 나의 사도직에 대한 하나님의 확인이요 신임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무례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하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사역의 열매이므로,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한다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실도 모두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사도직을 분명히 밝히고, 자신이 사도이면 또한 그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4절에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사도로서 그가 수고한 교회와 교인들로부터 부양 받을 권리, 곧 사례 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5절에서는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의 여러 사정들을 가리켜 주는 소중한 구절들입니다. 여기 ‘주의 형제들’에 대하여, 천주교에서는 마리아의 동생의 아들들인 주님의 이종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마리아의 영원 처녀설을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님의 실제의 형제들로 봅니다. 또한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 했는데, 여기 게바는 베드로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매 된 아내란, 그리스도인이 된 믿는 아내를 의미하고, 그것은 베드로의 결혼 사실을 밝혀 줍니다. 마 8:14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신 기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의 사제 독신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반증이 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에 대한 소중한 자료입니다. 제 2차 전도여행 초에,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의견 충돌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시 동안 결별을 합니다. 그 후 바나바의 행방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바나바는 계속해서 자급 전도를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생애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과, 그리고 바울과의 화해가 성립한 사실 등을 알려 줍니다. 다음 7절 이하에서부터는, 바울이 그가 사도로서 생활비를 받는 것이 합당한 이유를,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일반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1)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목회자는 신령한 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딤후 2:3절에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2)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목회자는 신령한 농부이기도 합니다. 고전 3: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고 하였습니다. 3)누가 양떼를 기르고 젖을 먹지 않겠느냐? 목회자는 양의 목자와 같습니다. 요 21:5절에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군인이요, 신령한 농부요, 양의 목자와도 같은 목회자들이,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율법을 들어 설명합니다.
8-10절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목회자들이 보수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도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신 25:4의 인용입니다. 딤전 5:18절에도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보통 때에는 소에게 망을 씌워, 곡식밭을 헤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밭에서 일하는 소에게는, 망을 벗겨 자유로이 곡식을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라고 하신 말씀처럼, 율법은 소에게 주신 것이 아니요, 인간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장차 있을 일의 그림자이니, 결국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인 것입니다. 밭 갈고 심는 자나, 곡식을 떨고 추수하는 자나, 다 같이 응분의 보수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도 사도이든, 선지자이든 목사이든 보수를 받는 것이 정당한 일이고, 율법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3. 영육간의 주고받는 원리로 설명합니다.
11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이란 말은, 성령으로 복음을 전한 것을 의미하고,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라고 한 것은, 목회자가 물질로 사례 받는 것을 잘못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 6: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고, 롬 15:27절에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것은 복음 진리를 말하고,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요, 그래서 영원하고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신령한 복음을 받은 자가, 물질 면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4. 다른 사역자들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12절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러한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고 하였습니다. 여기 다른 이란, 사도 바울 외에 다른 사역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보수를 받았다면,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사도 바울에게는 더욱 그러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5. 구약의 성전 제도를 들어 설명합니다.
13절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 성전에 바쳐지는 제물로 살았다면, 그래서 14절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명하신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마 10:10절이나 눅 10:7절에도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면서, 목회자들이 보수 받는 것이 정당함을 역설하다가, 마지막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논증을 끝맺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사도의 권리를 길게 논증한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도의 당연한 권리를 그가 어떻게 포기했는가를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정당하고 떳떳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을 말합니다.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목회자의 보수 문제에 대해 가르친 것은, 그렇게 대접해 달라는 암시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러한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수를 받지 않고, 자급 전도를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을 합니다. 왜 그러하였습니까? 12절에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형편을 생각하면, 사도 바울이 보수를 받는 것이 그의 사역에 지장이 있을 번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때의 거짓 선생들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사도 바울을 헐뜯어, 그의 복음 전도 운동을 방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고후 12:16절에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직접적으로 물질의 보수를 받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형식뿐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교활하게 고린도 교인들을 착취한다고 거짓 선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형편이었으므로, 만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보수를 받았더라면, 그의 복음 전파하는 일이 헛되게 될 우려가 있으므로 자급 전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 전하는 일도, 자급 전도 하는 일도, 일체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로 받은 사명이니, 피할 수 없고, 만일 요나처럼 그 사명을 피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7절에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을 자의로 하였다면 상이 있을 것이나,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께 받은 귀중한 사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18절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사도로서, 복음 전도자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자유를, 사랑으로 포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훗날 하나님께 받을 상이 있다면, 자급 전도하면서 그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생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도 바울의 자급 전도의 목적은, 당시의 형편으로 보아 복음 전파하는 일에 장애가 없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교계에는 종종 자급 전도자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급 전도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며 권리행사를 하려고 든다면, 조금도 은혜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십자가를 지는 생활에서 멀어지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박윤선 박사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를 받고, 미안한 생각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사역의 효과도 반성해보며, 주는 자들 측에서 자세하는 기쁘지 않는 일도 당하면서, 겸손하게 참아 나가는 것이 오히려 은혜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보수 받는 것이 성경적이며, 주님의 명령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 자급 전도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고, 부끄럽고 민망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헌금은 목회자를 위해 바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것임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권리,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무도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오직 복음 전파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꺼이 포기하였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인류 최고의 권리 포기의 모범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늘나라의 보좌와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마침내는 자신의 목숨까지 우리를 위하여 포기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본받아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 하였고, 슈바이처 박사는 철학, 신학, 의학 3개의 박사학위와 요즘말로 그의 모든 스펙을 내려놓고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수많은 선교사와 주의 종들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당연한 권리와 기득권을 주님과 복음 전파를 위해서 포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내가 내려놓아야 할 나의 권리, 나의 기득권, 나의 자존심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면서, 우리도 그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누가 나를 무시하지 않는가? 누가 내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는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은 결코 권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넷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 하였고, 롬 1: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줄 알아서 전하는 사람, 빚을 갚는 심령으로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무슨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 자유 선언
고전 9:1-2 / 이정익목사
본문은 참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마음대로 놀러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인간의 실력을 말하고 삶의 깊이를 말하고 삶의 무게를 말합니다. 그래서 참 자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비록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태연하게 종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함입니다. 거기에 얼마나 깊음이 있고 심오함이 있습니까? 그러나 부자유한 사람은 종말 앞에서 안달하고 초조해 합니다. 그만큼 부자유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참 자유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때 가장 위대했던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한때 예수를 몰라서 무서운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을 무섭게 핍박했습니다. 이 편견이 참 무섭습니다. 편견은 진주를 돌로 보게 하고 돌을 진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만큼 편견은 오류를 낳고 곡해를 낳습니다. 로마시대에도 그런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피를 마시고 사람의 살을 먹는다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런 편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무고히 죽어갔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초기에 많은 편견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문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습니다. 이 모두가 편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편견 속에서도 예수를 깊이 아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순교를 했습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서 그만큼 깊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예수에 대해서 오해하고 곡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나게 되어 예수를 깊이 알게 되면서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해가 풀리고서야 제자들이 전파한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자신의 삶을 유턴시켰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선언하고 평생 예수를 전하고 증거 하다가 마침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깊이 알고 나니까 자유하게 되었고 목숨을 버릴 힘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내가 예수를 보지 않았느냐, 이점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고, 예수를 깊이 알고 나니까 사도바울은 비로소 스스로를 참 자유인이라고 강조하여 말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 27편에서 다윗도 그 자유함을 노래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자’였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나의 빛이신데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대적이 내 살을 먹으려고 왔으나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치나 나는 두렵지 않으며 전쟁이 나를 치려하나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합니까? 이것이 자유함입니다.
월간 조선 11월호에는 오늘 중국이 한국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첫째는 한국이 부럽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참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해안 기름 유출사건 때 100만 명이 줄지어 자원봉사자로 달려가 기름때를 벗기는 모습을 보고 중국이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유롭게 스스로 달려가는 그 모습은 중국으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한국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운 이유도 한국의 축적된 자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자유는 60여 년 동안 축적된 것입니다. 4․19때부터 자유를 위한 항거가 일어나서 현재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야 그 물결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는 200만 명의 민병대가 있습니다. 그 민병대의 역할은 폭동을 진압하는 것입니다. 오늘 중국에서는 한해에 크고 작은 폭동이 30만 건씩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폭동들은 겉으로는 생활고로 인한 폭동 같아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유를 달라는 폭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중국이 한국을 그렇게 부러워하고 또 한편으로 두렵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이 바로 이 자유함입니다. 마음의 자유, 영적인 자유, 삶의 자유, 신앙의 자유, 신체적인 자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그 자유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자유부터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나는 자유자”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헬라어로 “엘류데로스(έλεύθρος)”입니다. 이 자유는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를 아는 삶
바울은 “내가 예수를 만나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참 자유는 예수를 아는 삶에서 주어집니다. 내 인생 최고의 사건은 예수를 만난 일입니다. 예수를 몰랐으면 오늘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떤 새 신자는 자신이 예수를 앎으로 인해 3가지의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신비로운 만남의 복입니다. 그분은 이전에는 절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에 갔다가 불공 중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꿈을 깨 그 사실을 주지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당신은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입니까? 둘째는 신비한 깨달음이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전혀 무지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죄인이었고 그럼에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세 번째는 홀가분함의 복입니다. 전에는 여러 신을 믿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예수를 믿고 보니 예수 한분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보름 때가 되면 음식을 만들어 집안 곳곳에 조금씩 놓아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놓았는데도 혹시 빠트린 귀신이 있을까 봐 마루에 또 한 그릇의 음식을 놓아두었습니다. 혹시 그 빠진 귀신이 해코지 하거나 동티를 낼까 걱정되어서 입니다. 사도바울도 그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 일행이 헬라의 도시 아덴지방으로 전도를 갔는데 거기에는 우상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도 보았다(행 17:22-23).” 아덴 사람들은 많은 우상들에게 제물을 드렸는데 혹시 빠진 신이 있다면 해코지 할까봐 두려워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귀신을 섬기다가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아주 편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복 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장수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그 보다도 참 자유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길이 보이고 영적 세계가 보이는 이 앎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나는 참 자유인”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참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죄의 해결
바울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영혼의 자유입니다. 내 영혼이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뭔가에 얽매이면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받고 죄 사함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나 율법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참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자유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죄 사함의 문제에 대하여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그런데 도둑질만이 죄가 아닙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하나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모르고 버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큰 죄입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미완성의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 미완의 부분은 하나님께 나아가야 만 채워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가 불가능하게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미완성 상태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혼자일 때는 고독하고 허전합니다. 그래서 짝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헬라신화를 보면 인간 남녀는 원래 한 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제우스신이 그것을 질투하여 반으로 갈라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짝을 찾아 결혼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둘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채움이 이루어지고 그때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수시로 고향을 찾듯이 멀리 외국에 있다 해도 고국을 찾게 되듯이 인간은 갈증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가 미완성품이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인간을 영적 공허감, 영적고뇌, 영적 갈증을 느끼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찾아가야 죄의 해방을 받고 영혼의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참 자유인”이라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죄로부터 사함 받아 구원받는 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점이 복중의 복임을 알고 사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죽음의 극복
바울은 예수를 믿고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고 사는 문제를 초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 자유는 죽음의 문제까지 극복될 때 주어집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입니다. 그래서 모두 죽음을 싫어하고 모두 무서워합니다. 이 세상 천하 누구도 죽음 앞에서 큰 소리 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의사가 암에 걸렸습니다. 그 의사는 평소 아주 냉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했고 침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자 무당을 불러 굿을 했고 그 자리에서 발광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느 수도사는 진찰 결과 이상한 점이 발견되어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이니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해 줬더니 며칠 후에 그냥 급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모두 삶과 운명, 미래 앞에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초라한 점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지성인들조차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그런 사람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물어봅니다. 얼마나 불안하면 그렇겠습니까? 이처럼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참 자유는커녕 오히려 불안함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참 자유인은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죽음의 문제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갈 곳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준비된 사람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태연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순교자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서울역 개찰구에 가 보면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무리는 개찰이 시작됨과 동시에 죽어라 뛰어갑니다. 그리고 또 한 무리는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걸어갑니다. 뛰어가는 사람은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먼저 도착해야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 뛰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천히 가는 사람은 이미 자리가 예약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천천히 가도 자기 자리가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노래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준비되었다는 것에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엊그제 어느 분이 임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완전히 준비하고 임종을 맞았습니다. 임종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농담을 하고 잡담을 하는 것입니다. 준비가 되면 이렇게 담담해집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자유 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사모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산에 가서 하관을 하고 내려오다가 목사님이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무덤 앞에 가시더니 “내 금방 올게, 조금만 기다려”하고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얼마나 자유로운 모습입니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여유만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죄로부터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멋이고 자유함입니다.
신분의 자유
바울은 “내가 사도가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나는 소속이 분명하다. 나는 주님의 사람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사람은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경계인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경계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아주 애매한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 위치, 내 입장, 내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내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고로 나는 죽든지 살든지 예수만 전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소속이 분명합니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자유한 사람입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누군가에 강하게 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여인의 행복은 한 남자에게 매여 있는 것이고 한 남자의 행복도 한 여자에게 강하게 매여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대로 매이면 나의 인생, 나의 운명, 나의 미래를 인도받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자유한 삶입니다. 나의 위치, 나의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매이지 않으면 자유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러니까 때로 허무에 빠지고 방탕에 빠지고 무질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허무에 빠집니까. 소속이 불분명해서 그렇습니다. 위치가 불분명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몹시 흔들리게 되고 혼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급하니까 부처님 신령님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삶의 모습니다. 거기 어디에 자유함이 있습니까? 오직 부자유함 그리고 얽혀 매인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평생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고 심고 가꾸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느라 평생 수고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난당하고 무시당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종말의 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외쳤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리라.” 얼마나 자신감에 넘치는 고백입니까? 심은 것이 많은 사람은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예수를 만난 것이 내 인생 가운데 최고의 복이고 은혜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내 영혼이 은혜를 입었고 죄의 짐을 벗었고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사도바울도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입니다.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는 교회
고전 9:1-12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사도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기본적 생활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교회로부터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직접 이 문제에 관련시켜 말합니다. 그는 자기가 사도 또는 복음전도자로서 누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우선 자기 자신의 사도 됨에 대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동의를 구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먼저 네 가지 질문을 연속해서 던지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이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본문 1절입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한 데서 “자유”는 사도로서 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한 것은 분명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을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았다는 사실은 사도로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습니다. 사도라는 것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사울이었을 때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만난 주님으로부터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는 사명을 받고 이방 나라들을 두루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복음을 전한 확실한 사도였습니다. 사도로서 그가 행한 일의 결과의 하나가 바로 고린도교회였던 것입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하는 물음은 바로 그 말입니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던 바울은 그 교회 신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그들은 바울이 사도로서 행한 일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임을 재확인 시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인쳤다는 것은 법적으로 유효하게 확증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장이 일을 하며 스스로 돈을 벌어 자기의 생활비에 충당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처럼 사도로서 대우받을 자격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은 믿고 들을 만한 것이 못되지 않느냐 하는 의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의식하며 쓴 글이 본문 3절과 그 이하의 내용입니다. 먼저 3-4절을 봅니다: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이 말은 사도 바울 자신과 그 일행이 스스로 일해서 먹고 사는 것이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을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도 다른 사도들과 꼭 같이 섬기는 교회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얻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그 당시 다른 사도들이나 야고보를 위시한 예수님의 혈육상의 형제들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이들은 전도여행을 할 때 아내들이 함께 다녔으며 교회는 그 모든 비용을 다 담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아내들 없이 혼자 다닌 것 가지고도 그들의 사도로서의 자격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그 점에 있어서도 다른 사도들과의 꼭 같은 권리를 갖고 있음을 주장한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는 바울과 그 일행도 굳이 스스로 일해서 생활비를 벌지 않고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본문 7절에서는 사도로서의 권리를 세 가지 비유를 사용하여 다시 주장합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군인이 군대에서 생활비를 받고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이 그 열매를 먹으며 양 치는 사람이 그 양의 젖을 먹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로 섬기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며 주의 양 떼를 치는 사역자는 당연히 교회로부터 그 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쓰고 난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인간적으로 하는 말로 생각되느냐고 되묻고는 그것은 율법에서도 가르치는 바라고 말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는 그 예를 들어 말합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한 율법이란 신25:4의 말씀입니다. 옛날에는 타작마당에서 겨와 알곡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소로 하여금 추수한 밀을 발로 밟게 했습니다. 또 알곡을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도 소로 하여금 맷돌을 갈게 했습니다. 그때 소가 일하면서 곡식을 먹어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소의 입에 망을 씌우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가 그렇게 일하고 있을 동안에는 망을 씌우지 말고 소가 일하는 대가로 필요한 만큼 먹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짐승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하물며 사람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진정 깊은 관심은 사람에게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도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주의 일에 전념하는 대가로 생활에 필요한 재정적 도움을 교회로부터 얻게 하시려고 그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묻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신령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그들의 육신의 삶을 위한 도움을 교회로부터 취하는 것이 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과 주의 사역자들이 다 교회로부터 그런 지원을 받고 있다면 사도 바울과 그 일행도 꼭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12절 상반절을 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이들의 삶을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을 사도 바울은 본문 13-14절에서도 계속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전도하도록 내보내시며 명하시기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하셨습니다(마10:9-10).
이렇듯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세 가지 요점 중 첫 번째인 사도의 권리에 관하여 쓰는 데 본문의 대부분을 할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문에서 의도한 보다 중요한 강조점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두 번째 요점입니다. 12절 중간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한 데입니다. 또 본문 15절 앞부분을 봅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것을 행사하기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권리 포기에서 오는 온갖 삶의 어려움을 다 참아냈다는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당당한 주님의 사도로서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의 세 번째 요점이며, 여기에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쓰며 의도한 진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제 본문 11-15절 전체를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우리는 12절에서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한 말과 15절에서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한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12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에로 나아오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15절의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한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자랑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그 대가로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으면 혹시라도 사람들이 그를 삯군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복음전도사역이 헛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사도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지는 데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는 그의 일념이 그로 하여금 사도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게 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에서의 바울의 말 중에는 우리는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5절 전체를 다시 한 번 읽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사도로서의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는 이유가 어디 잇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거나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다른 사도들에게 하듯이 자기에게도 해주기를 원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쓰기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해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도사역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도로서의 자기 권리뿐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의 목숨까지도 걸면서 원했던 것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사도 바울의 그런 자기 권리 포기를 본받아 고린도교회 신자들 또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직전에서 사도 바울이 쓴 것이 무엇입니까? 고전8:10-13을 다시 봅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지만 혹 그 때문에 교회 안의 믿음의 형제 중에 실족할 사람이 하나라도 없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자기 권리 포기와 희생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하여 사도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행사하지 않았다고 한 말은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도 없게 하기를 힘쓰는 교회가 되어 날로 더욱 부흥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의 자긍심
고전 9:1-2 / 지용수목사
술집 색시는 척 보면 술집 색시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술집 색시 같은 가정 주부도 많습니다. 또 의복이 날개라고 합니다. 그래서 입은 거지는 대접받고 얻어먹으며 사는데, 못 입은 거지는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잘 얻어먹지도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옷을 바꾸어 입으면 그럴 듯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TV를 잘 보지 않지만 연속극을 보면 임금이 자주 나옵니다. 임금이 아닌 사람이 임금 옷을 입고 임금 노릇을 하는데 TV를 보는 사람들은 그 옷을 보고 임금인 줄 압니다.
옷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 속 사람, 정신 자세, 삶의 자세, 또 자신을 얼마나 가치 있게 평가하는가 하는 스스로의 평가, 그것이 중요하고 귀합니다.
자동차 왕이고 세계적인 재벌 헨리 포드가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모든 매스컴이 그것을 대서 특필하고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공항에 내린 헨리 포드는 공항 안내소에 가서 런던에서 가장 값싼 호텔로 안내해 달라고 했습니다. 안내원이 척 보니 옷은 누추하지만 얼굴은 방송에 나오고 신문에 나오는 헨리 포드입니다.
"실례지만, 혹시 헨리 포드 씨가 아니세요?"
"맞아요. 내가 헨리 포드요."
"아니, 세계적인 재벌께서 어찌 값싼 호텔을 찾으시지요? 그리고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지금 입으신 외투가 너무 낡고 오래된 것 같은데, 어찌 이런 낡은 외투를 입고 오셨나요?"
"값싼 호텔에서 자면 헨리 포드가 아니오? 어느 호텔에서 자든 상관없이 나는 헨리 포드요. 그리고 이 옷은 내 아버님이 내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것이오. 아버님께서 입으셨던 외투를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내가 입소. 무슨 옷을 입든 나는 헨리 포드요. 나는 이 옷으로 만족하오. 무슨 옷을 입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오?"
그리고 그는 값싼 호텔로 갔습니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 왕이고 세계적인 재벌이기에 옷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값싼 호텔에서 자도 그는 자부심, 자긍심이 굉장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아무리 목에 힘을 주어도 자부심이 약합니다. 그러나 큰 재벌은 잠바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눌러 쓰고 등산해도 그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옷보다 중한 것은 정신적인 긍지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속 사람이 강하고 어디서나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을 보면, 자긍심,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고고할 정도로 아주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런 자긍심을 갖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이 말은 '나는 노예가 아니다. 종이 아니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바울은 종이 아니고 노예가 아닙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이고 자유자입니다.
하지만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하는 바울의 말은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지옥에서 자유를 얻었고, 마귀의 쇠사슬에서 자유를 얻었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 율법에서까지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십계명을 행하고 성경대로 살아야 구원받을 줄 알고 쩔쩔매며 살았습니다. 자칫하다가 계명을 어겨 지옥에 갈까봐 쩔쩔매며 살았지만 늘 답답했습니다.
아무리 지켜도 한도 끝도 없는 말씀대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율법에 매여, 계명에 매여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깨달으니 율법은 몽학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시키신 분이시고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몽학 선생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유치원은 학교가 아닙니다. 유치원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사실은 불법입니다. 유치원은 아이들이 잘 놀 수 있도록 해 주고 학교에 들어가서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곳입니다. 학교가 아니라 학교 앞의 유치원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서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하며 살아도 그대로 살지 못하니 '내가 어떻게 살고(What shall I do)?'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십계명을 지키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 말씀대로 사는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상을 받고 내 자녀가 복을 받고 주변이 복을 누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내가 괴롭고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시고 가족들이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주변이 나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거나 지옥에 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십자가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옥에서 자유를, 마귀에게서 자유를, 죄에서 자유를, 세상의 모든 미신에서 자유를 얻은 것에 대해 놀라워하는 것입니다.
미신도 무서운 것입니다.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도 결혼 날짜를 잡을 때 덜덜 떱니다. 혹 나쁜 날 결혼했다가 불행하게 될까봐입니다.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도 덜덜 떨면서 점치러 갑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이 자유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36년간 일본의 압제 하에 있던 우리가 8월 15일에 해방되었을 때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자유를 만끽하며 좋아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예수님을 믿는 자가 얻은 자유, 영원한 지옥에서, 죄에서, 멸망에서, 율법에서, 모든 것에서 얻은 자유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만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똑같이 얻은 것입니다.
바울의 자유, 저의 자유, 여러분의 자유가 된 것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우리 모두 이 긍지를 갖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 사도 바울은 "내가 사도가 아니냐(Am I not an apostle)?"라고 말합니다.
사도(apostle)의 뜻은 하나님께서 대리자로 보내신 자입니다. 즉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전권 대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로마에, 고린도에 파송한 하나님의 대사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당시 귀족도 아니고 높은 공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 사장도 아니었지만, 아무런 사회적 계급이 없는 복음의 증거자였지만, 로마 황제를 눈 아래로 보았습니다. 그는 그 누구도 부러운 사람이 없는 사람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도다."라는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미국이 한국에 파송한 미국 대사 뒤에는 미국의 막강한 국력과 미국 대통령이 있는 것처럼, 바울의 뒤에는 천국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바울이 알았기 때문에 언제나 고고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라고 평강을 비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As the Father has sent me, I am sending you)."
그런 다음 '후' 하고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으면 사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보고 배운 사람들이 사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도 성령을 받으면 사도의 반열에서 사도처럼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갖고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돈을 벌어도 주님을 위해 벌고, 회사를 경영해도 병원을 경영해도 약국을 경영해도 대학 교수라도 주님을 위해 한다면 사명자인 줄로 믿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미국 달라스에서 쓰러지셔서 3년간 누워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으로 쓰시려고 택해 놓으신 분을, 그 착하디 착한 분을 왜 결핵으로 쓰러지게 하셨습니까?
한 목사님께서, 그 때는 몰랐지만 한국에 와서 사역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사역해 보니 너무 바빠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제대로 없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멀리 보시고 일찍이 목사님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3년간 누워서 많은 명상을 하고 책을 읽으며 영적으로 모든 것을 채우게 하신 후 한국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내가 누워 있지 않았으면 이 큰 목회를 어찌 했을까!"
여러분,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고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할 답답한 가운데 계셔도 멀리 보시는 주님께서는 여러분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 뜻을 알고 하루하루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 목사님을 치료해 주신 의사의 명함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답니다. 목사님이 궁금해서 여쭈어 보았답니다.
"선생님, 명함에 왜 이 말씀을 기록해 두었습니까?"
"예, 저는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방탕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목사님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으로 설교하셨는데, 그 설교를 듣고 제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려고 명함뿐 아니라 제가 쓰는 모든 물건에 이 말씀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 의사가 가방을 열어 주어서 보니, 약봉지에도 봉투에도 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이 있었습니다.
병원을 경영하든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가 바로 사명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산다면 사도가 아닙니다. 사명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사명자입니다. 할렐루야!
조국을 사랑한 남강 이승훈 선생이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사비를 털어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바르고 얼이 살아 있는 고당 조만식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선생, 우리 학교를 책임지고 이끌어가 주시오."
"예, 기꺼이 하겠습니다. 힘껏 일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무슨 조건이오?"
"내가 오산학교 선생으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겠지만 월급은 절대로 받지 않겠습니다. 만일 월급을 주신다면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장로님인 조만식 선생에게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장로님으로서 한국의 젊은이들을 바로 교육하기 위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돈을 받지 않고 일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조만식 선생은 오산학교에서 얼마나 많은 인재를 길러냈는지 모릅니다. 그는 목사님이 아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도였습니다.
한달 한달이 끝나고 한해 한해가 끝나듯이, 우리 일생도 끝납니다. 어차피 사는 인생인데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저도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에 두는 사명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이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보지 못했느냐(Have I not seen Jesus our Lord)?"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말입니다.
'이래 뵈도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굉장한 자기 긍지인지 모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이 많습니다. 바울의 간증거리가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엄청 미워했고 교회를 엄청 싫어했습니다. 스데반이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박수 쳐 준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한 사람입니다. 다메섹에 가려 했던 이유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메섹에서 전도한다는 말을 들은 그는 대제사장에게 허락을 받고 그들을 체포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수행원을 거느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으러 가는 그는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예수쟁들을 다 잡아 죽이고 말 거야.'하는 마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덕에 올라갔을 때 신비로운 영광의 빛이 홀연히 자기 길을 좌악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쇼크로 그는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 사울!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에 그는 두려워 떨며 물었습니다.
"누구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 직가라는 거리로 가라. 거기에 너에게 지시할 자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장님이 되었습니다. 영광의 빛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수행원의 인도를 따라 직가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3일간 회개했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내가 예수님을 오해했구나. 예수님은 하늘의 왕이시구나.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바울은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때 환상이 보였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는 순간 눈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 집에 가면 다소 사람 사울이 있는데 그에게 안수하여 성령으로 충만케 하고 다시 보게 하라."
"주여, 제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사울 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온 것도 주님을 믿는 우리를 잡으러 온 것입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이방인들에게, 왕들에게, 이스라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해를 받을 자다. 고난을 받을 자다. 그러니 어서 가서 행하라."
아나니아가 말씀에 순종하여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가니 사울이 울며 회개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네가 길에서 만난 주님께서 나를 네게 보내셨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다시 보기를 원하노라."하는 순간,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어떤 분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병에서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분의 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그 때부터 바울은 예수님을 구세주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체험뿐 아닙니다.
그를 감옥에 가두면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그가 쓰던 손수건을 사람들이 가지고 가서 병자에게 놓으면 병자가 나았습니다. 그가 설교하다가 한 앉은뱅이를 보고 믿음이 생겨 "일어나라!" 하니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독사한테 물렸지만 독사를 떨어버리고 "주여!"하니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을 만난 자가 아니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간증입니다. 얼마나 굉장합니까?
사실 여러분과 제게도 이런 경험이 다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집권하려다 문제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굉장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녔지만 확실한 체험이 없었던 그가 독립 운동을 하다가 6년간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때 기도하다 체험을 하고 성령의 사람, 불의 사람이 되어 얼마나 복음을 열심히 전했는지, 그를 접했던 40명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갇혀 있었던 감옥은 교회인지 감옥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간수까지 이승만 씨의 설교를 들으러 모였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게도 이런 경험이 다 있습니다.
제가 오늘까지의 간증을 다 하려면 한 달 동안 해도 못할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목사님이 되려고 준비했지만, 목사님들이 가난하게 살고 교인들에게 입방아 찧음 당하는 것을 보며, 또 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괜스레 목회하려고 했네.'하고는 목회하지 않으려고 신학교에 가는 날 그냥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목사는 되지 않을 거다. 무엇 때문에 가난한 목사, 욕먹는 목사를 해?'
그런데 그때 지용수가 아닌 주용수 목사님의 사모님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호통을 치셨습니다.
"일어나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누워 있어요? 어서 일어나 가요! 어서 일어나요!"
그때 사모님이 새댁이었는데, 제게 호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이 제게 사모님의 음성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꼼짝 못하고 일어나 학교로 가서 이렇게 목사가 된 것입니다.
안진삼 목사님이 강원도 상동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하실 때 그 마을에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 아침 7시와 12시에만 지나갔습니다. 목사님은 4년간 늘 아침 7시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삼척에서 노회를 하는 날, 노회에 함께 참석할 박 장로님이 사택에 오셨습니다.
"목사님, 아침 7시 차로 갑시다."
그런데 그날 목사님은 이상하게도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고 아침 7시 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12시 차로 갑시다."
"아니에요, 목사님. 7시 차로 갑시다."
"12시 차로 갑시다."
"목사님, 그러지 말고 7시 차로 갑시다."
"아니에요. 12시 차로 갑시다."
고집이 센 박 장로님이었지만 목사님의 고집이 더 세었습니다.
"고집불통 목사님 같으니라고."하며 장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침 10시에 교회 집사님이 목사님께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7시 버스가 뒤집혀 열 명이 죽고 열 몇 명이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실려갔대요. 박 장로님이 돌아가셨으면 어떻게 하지요?"
목사님도 박 장로님이 걱정되었습니다. 12시 버스를 타러 나가면서도 내내 박 장로님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 정류소에 가니 박 장로님이 나와 있었습니다. 7시 차를 놓치고 12시 차를 타러 나온 박 장로님이 목사님을 보시자마자 말했습니다.
"목사님, 특별 계시를 받으셨습니까?"
특별 계시를 받지 않았지만 왠지 7시 버스를 타기 싫어서 타지 않았다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한 부인은 교회에 나간다고 남편에게 얼마나 구박을 받고 매를 맞았는지 모릅니다. 주색잡기가 심한 남편 때문에 살기가 힘들고 가슴이 답답하여 교회에 나갔는데, 남편이 "내 집 망한다."며 아내를 얼마나 때렸는지 모릅니다. 아내는 날마다 "하나님, 제 남편을 구원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한 학생이 부인의 집에 와서 그 마을의 유지이자 집안 사람인 아무개가 보내어서 왔다며 "아저씨보고 교회에 오시라고 하는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부인이 달려나갔습니다.
"쉿! 우리 남편이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깨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이상한 일이 다 있어. 오늘 아침에 내가 일어나니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가 보내어서 왔으니 교회에 가자면서 자꾸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그래서 나가 보니 아무도 없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나봐. 오늘은 나도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겠소."
그래서 남편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간증입니다.
제 딸 경이가 성지여고에 다닐 때 집으로 오기 위해 학교 앞에서 36번 버스를 타려는 순간 "경아!"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보니 중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아이고, 반갑다."
친구가 부르는 바람에 그 버스를 타지 못하고 20분 뒤에 오는 버스를 탔습니다. 조금 가다보니 친구 때문에 타지 못했던 36번 버스가 사고로 다 부서져 있더랍니다. 경이가 집에 와서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나를 사고 버스에 태우지 않으시려고 중학교 동창생을 만나게 하셨나 봐요."
이것이 경이의 간증입니다.
제가 제 아내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아내가 저혈압으로 샤워하다가도 쓰러지고, 가만히 있다가도 쓰러지곤 했습니다. 제 아내가 자기는 원래 독일산이라 할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하니 아내가 신경 쓸 일이 많아 저혈압이 되어 어지러워하고 자주 쓰러지니 아내의 혈압이 정상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이스라엘에 갔다가 통곡의 벽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과 우리는 같은 종자인지 기도하는 모습이 비슷합니다. 몸을 막 흔들며 기도합니다.
통곡의 벽에 종이가 많이 꽂혀 있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 제목이 적혀 있는 종이를 그 벽에 끼워 놓고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가 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 제목을 끼워 놓고 벽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지, 통곡의 벽에 기도 제목을 끼워 놓고 기도한다고 응답을 받겠습니까?
그때 제게 다급하게 기도할 것이 저혈압인 아내의 혈압이 정상이 되는 것 말고 또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예배당이 마치 창고 같았는데 우리 땅이 종교 부지가 아니라 교회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통곡의 벽에 기도 제목을 꽂아 놓고 기도했습니다. 아내를 위한 기도를 첫 번째 기도 제목으로 쓰고 싶었지만, 하나님께 미안해서 "하나님, 우리 양곡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우리 땅을 종교 부지로 바꾸어 주세요."라는 기도를 첫 번째 기도 제목으로 썼습니다. 둘째 기도 제목에 "하나님, 아내의 혈압이 정상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썼고, 세 번째 기도 제목에 "하나님, 열심히 목회하면서 공부를 하려니 길이 없습니다. 공부할 길을 열어 주세요."라고 썼습니다. 저도 이 세 가지 기도 제목을 통곡의 벽에 꽂아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부 예배를 마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 세 가지 기도를 다 응답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여기에 우리 교회를 지었습니다. 또 제가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가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혈압이 정상이 되었습니다. 아마 다시 독일산으로 되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런 간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은 믿음이 있나?'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각 사람 안에 믿음이 다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오래 섬기다 보면 간증거리가 많아집니다. 할렐루야!
바울이 "내가 하나님을 보지 않았느냐? 내가 예수님을 보지 않았느냐?"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할렐루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제 안에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긍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 변하여 영광의 몸이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것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 이하에 바울이 말씀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만난 자가 아니냐(Have I not seen Jesus our Lord)? 내 안에 성령이 계신 자가 아니냐?'
바울은 이런 높은 긍지를 가졌습니다. 이 긍지가 여러분과 저의 것이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주 안에서 일한 것이 너희가 아니냐?"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내 일의 결과가 너희가 아니냐(Are you not the result of my work in the Lord)? 내가 주 안에서 열심히 사역해서 너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너희에게는 사도가 아니냐? 너희가 증거 아니냐? 예수 안에서 내가 사도 된 것을 너희가 인친 것이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내가 열심히 전도해서 세운 많은 교회 중 하나가 고린도 교회이다. 주님의 일에 열매가 많으니 하늘의 상이 나를 기다리도다.'하는 희열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뻤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8절에 바울이 말씀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할렐루야!
바울이 이렇게 높은 긍지를 지닌 것은 지금은 집 한 채 없고 세상의 것은 가진 것이 없지만 마지막 그날에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이고 하늘의 엄청난 저택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긍지는 헨리 포드의 긍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의 부자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자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긍지입니까?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내가 예수를 보지 못했느냐?'
바울의 이 긍지는 우리도 다 나누는 것이지만 마지막 것은 다릅니다.
제게는 작은 기쁨이 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주의 종으로 여러분을 섬겨 조그마한 교회가 이만큼 되었으니, 금년에만 해도 우리 교회를 통해 2천 명이 넘게 구원 받았으니 이것이 저의 열매이고 저의 자랑이고 하늘의 상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구역장으로 섬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구역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르치면 구역 식구들이 자라서 집사님이 되고 또 교회 일꾼이 되면 그것이 구역장의 열매입니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주일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고 집사님이 되고 성가대원이 되면 그것이 교사의 상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을 위해 한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지막에는 물거품입니다. 대통령으로 아무리 많은 봉사를 하고, 병원 원장으로 아무리 바삐 일하고, 학교 교사로 아무리 많은 연구를 해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면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존 렌돌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정치했지만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말했습니다.
"후회(repentance)! 후회(repentance)! 나는 후회한다. 나는 잘못 살았다. 성경책 안에 기록된 것을 좀 보여달라. 나는 잘못 살았다. 내 영혼을 주님의 자비하심에 맡길 뿐이다. 나는 잘못 살았다"
우리 중에서 잘못 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 같은데 잘못 삽니다. 어떤 일을 위해서는 온 힘을 다 쏟으면서도, 주님을 위해서는 체면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 사는 것입니다.
저명한 건축업자가 자기 조수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제 그만하면 내 기술을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 자네 실력으로 집 한 채를 잘 지어보게. 나는 전혀 간섭하지 않겠네. 자네 실력으로 잘 지어보게."
"예, 사장님."
그런데 조수의 성품이 좋지 않았습니다. 성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좋지 않은 재료로 집을 대충 지어놓고 자기 사장님에게 갔습니다.
"사장님, 집을 다 지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그동안 나를 위해 수고한 대가로 그 집을 자네에게 줄 테니 가서 잘 살게."
그가 얼마나 후회했겠습니까?
'내가 이 집에 살 줄 알았으면 잘 지었을 텐데….'
오늘날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에 충성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 같아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지만 천국에 가면 후회합니다.
어떤 분이 오늘날의 교인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사글세 교인, 둘째는 전세 교인, 셋째는 자기 집 교인이랍니다. 사글세 교인은 등록도 하지 않고 교회에 나타났다가 사그라지는 교인들이랍니다. 전세 교인은 등록은 해놓고 언젠가는 전세금을 받아 나갈 것이라 생각하고 충성하지 않는 교인들이랍니다. 자기 집 교인은 교회를 자기 집으로 생각하고 청소도 하고 교회 일을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집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글세 교인이나 전세 교인들 중 많은 사람이 나중에 후회할 것입니다. 사글세 교인이나 전세 교인은 자신이 그것을 압니다.
'목사님이 내 말을 하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여러분의 말입니다. 혹 사글세 교인이나 전세 교인이 있으면 오늘부터 자기 집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마음만 고치면 됩니다.
자기 일을 위해서는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으면서, 교회 일은 조금만 하고 나면 '아이고, 힘들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든 것이 아닙니다. 힘들수록 하늘의 상이 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 열매가 아니냐? 이것이 내 열매가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의 충성의 열매가 바울처럼 많아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바울이 되어 고고한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감사하게 의젓하게 승리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자비량 선교
고전 9:8-18 / 이종철목사
밤낮으로 일하며
바울은 자비량 선교를 하였습니다. 선교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제 손으로 벌면서 선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2:9) 데살로니가서는 고린도에서 썼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다...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후11:9)
아마 바울은 뜨거운 한낮을 피해 쉬는 지중해의 시에스타(오수 시간)나, 일하지 않고 쉬는 날에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작업장이 그의 선교지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천막을 짓거나 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R. 호크라는 학자가 『바울선교의 사회적 상황』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는 바울이 작업장에서 선교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립니다. “천막을 만들기 위해 가죽을 자르고 꿰매며 그의 작업장에서 긴 시간 동안 바울은 자신의 생계를 자급했다. 작업장 안에는 그의 동료 근로자들, 아마 몇몇 방문객이나 또 고객들 또는 이 도시에 새로 도착한 천막제조자(철학자)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상에게서 전향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것을 권하는 바울의 말을 듣고 그와 토론을 하였을 것이다.”(92)
일하면서 복음 전하는 것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천막 짓는 일은 전문직은 아니고, 전문직이 그렇게 인정받던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일자리도 많지 않았고, 겨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일해야 했으며, 그래도 비용이 부족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의 권리
바울은 왜 이처럼 다른 직업을 가지고 선교하는 이중직을 했어야 했습니까? 교회가 어려워서? 교회가 배은망덕해서? 아닙니다. 바울은 마땅히 자신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지원받을 권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자그마치 1년 6개월을 선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했다면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생활비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급료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며 여러 이유를 듭니다. 8-9절에서는 모세의 율법을 거론하며,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지요, 눈앞에 보이는 먹을 것을 못 먹게 하면 소가 제대로 일하겠습니까? 13절에서는 성전 일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성전이나 제단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나눕니다.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일반적 사례나 상식을 듭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렸으면 씨 뿌린 자가 일정 부분 대가를 가져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14절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명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10:10) 복음 전하는 곳에 기거하며, 그곳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며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안타까울 정도로 자신의 권리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고린도 교인들은 사역자에게 급료를 주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받지 않았스니까요. 그래서 일깨워줍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나중에는 이런 바울의 호의를 왜곡하여 바울은 정식 사도가 아니라서 급료를 못 받는 거라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몰래 헌금을 취한다는 모함까지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고후 12:18) 예나 지금이나 돈 문제는 좀 예민합니다. 이 때문에 바울의 변명이 길어집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서운함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마땅한 책무를 이행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원망도 담겼다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밀린 생계비를 받아 내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최소한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바울의 진심을 알아주고, 그 자랑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속마음입니다.
자비량 선교의 이유
그러면 바울이 자비량으로 일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2절의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입니다. 다른 하나는 16절의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첫째, 복음의 장애가 무엇을 뜻할까요? 당시에는 바울과 같은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철학이나 진리를 전하면 그 지역의 유력자가 듣고는 그에게 숙식과 급료를 제공합니다. 심지어는 가정교사로 삼기도 합니다. 이것이 당시 철학자들이 먹고사는 방식입니다. 급료를 제공받으면 그 선생은 급료를 준 자에게 매입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야 하고 주인의 명예를 높여야 합니다. 그것이 당시의 관례입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선물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복음이 물건이나 싸구려 철학 취급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복음인데 감히 인간이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 있겠습니까? 복음 앞에는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왕이나 거지나 다 철저한 회개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죄인 됨을 모면할 수 있다 착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 또한 자신의 후원자의 뜻에 반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기도 힘들게 됩니다.
사실 이는 당대의 철학자들의 고민이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또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어느 누구로부터 선물이나 보수를 받지 않는 나보다 더 자유한 사람이 있겠는가?”(크세노폰 Apo1 16) 스토아 철학자, 디오 크리소스톰(AD 40-115)은 철학자의 자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금욕으로 살아가야 하며 지식을 전달하되 그 대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돈을 받기 때문에 위장을 하고 청중에게 아부하며 듣기 좋고 달콤한 말을 하는데 결국 이것은 진정한 철학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결국 효과적인 복음 전파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은혜가 제대로 전파되도록, 곧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도록 이중직, 곧 자비량 선교를 한 것입니다. 반면에 현대 사회의 경우처럼, 다른 일을 가지고서는 교회를 운영하거나 복음전파가 어렵다면 정당한 급료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지불할 능력이 없는 미자립 교회 같은 경우는 최소한도 교회의 존속을 위해서 목회자가 세상의 다른 직업을 갖는 이중직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해외 선교사들에게 스스로 급료를 마련하라는 자비량 선교가 성경의 모범이라며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생계비를 스스로 마련하면서 어떻게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효과적인 복음의 전파, 곧 복음의 장애가 없는 선교에 있지, 자비량 선교라는 방법론에 있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사명의식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17절에서는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라고 말씀하고, 18절에서는 자기의 상이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황송하게도 자신에게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사명까지 주어졌습니다. 사명은 대가를 바라보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 수행의 결과 재물이 주어지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신성한 사명이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내 자랑”(15), “내 상급”(18)이라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은 그 권리를 쓰지 않는 것(18), 이것이 바울의 프라이드입니다. 장차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이요, 영예입니다. 그것은 사명의 숭고함입니다. 어떤 대가도 필요 없고, 사명 수행 그 자체가 보상입니다. 만족은 반드시 금전적 대가나 지위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자는 일의 성취 자체가 보람입니다. 그 만족감이 상이요, 그 상은 장차 주님으로부터 주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됨을 “부득불 할 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속에서 우러나서 하는 사람은 말릴 수 없습니다. 외부적 요인이나 대가가 아닙니다. 배워서, 계산해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워서, 마지못해서, 속에서 끓기에 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그런 사람은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길을 내고, 일을 성취합니다.
부득불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부득불 할 일이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과 장애
시 119:163-165, 고전 9:11-13 / 이성희목사
서론
‘장애물경기’가 있습니다. 장애물경기는 여성경기인 100m 허들이 있고, 남성경기인 110m 허들이 있습니다. 장애물경기의 표준경기는 400m 트랙 7바퀴 반을 도는 3,000m 경기입니다. 이 경기는 28개의 허들이 있고, 7개의 물구덩이가 있습니다. 허들높이는 90cm입니다. 장애물경기에서 선수들은 장애물이 없으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애물 경기는 장애물을 피해가는 경기가 아니라 장애물을 넘어가는 경기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애물을 넘어가는 것은 경기이고, 장애물을 잘 넘어간 사람이 상을 받게 됩니다.
인간에게 넘지 못할 장애물은 없습니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산은 넘지 못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정복을 당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양사언의 시조가 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나니.” 오르지 못할 산, 넘지 못할 산이 없습니다.
스가랴 4:7에는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합니다. 아무리 큰 산이라도 정복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이 높다고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 40:4에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합니다. 골짜기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높은 산도 언덕도 평탄하게 되고 정복될 것입니다.
이사야 43:2에는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나아가는 길에 물도 불도 정복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 지구상의 산이나, 바다나, 남극이나, 북극도 다 인간에게 장애물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지배되지 않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히말라야에서 8,0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14개가 있습니다. 이 14좌를 완등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2010년까지 14좌를 완등한 등반인은 23명입니다. 제일 먼저 완등한 등산가는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이탈리아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오은선 대장이 14좌를 완등했습니다. 오은선 대장은 여성 최초의 완등자입니다. 북극은 1909년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정복하였고, 남극은 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젠이 정복하였습니다. 이렇게 세계 어느 곳이나 인간에게 넘지 못할 장애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히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고정시키지 않고 항상 변화하며 유연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물은 유연하여 어디에나 다 들어갑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굽이치면 굽이치는 대로 흐릅니다. 그래서 물은 거침이 없습니다. 물은 들어가지 못할 데가 없고, 넘어가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방해받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방해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방해 받을 것 같지만 방해 받지 않습니다.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해도 말씀은 그침 없이 전파됩니다.
고린도전서 10:32에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방해자가 되지 말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가 삼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복음을 잘 전하여 복음의 일꾼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음 전하는 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12 상반절에는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 예언자, 교사는 ‘보편적’(universal) 직분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나 자신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직분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직분을 가진 자는 큰 직분자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서 생활비를 보장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생활에 꼭 필요한 생계비를 보장 받고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포기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설립자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가보면 입구 양쪽 벽면에 헬라어로 글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고린도교회의 역대 목회자 이름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고린도전서 13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역대 목회자는 바울, 실라, 아볼로, 소스데네 등 순서로 새겨져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설립자이며 1대목회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받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5에는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선교비를 벌어서 쓰는 ‘자비량’ 선교의 원조입니다. 바울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의 가문이나, 그의 유산이나, 학문이나, 지위를 보면 스스로 돈을 벌면서 선교하는 ‘자비량’은 참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선교학에서 자비량을 ‘tent making’이라 부릅니다.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여 돈을 벌어 선교하였다고 그렇게 부릅니다. 사도행전 18:3에는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합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교한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교회의 설립자이며,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바울의 자비량 동업자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에는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권리를 주장하기는커녕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라는 말은 고린도후서에 3번, 데살로니가전서에 1번, 데살로니가후서에 1번 나타납니다. 바울의 투철한 선교철학을 볼 수 있습니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미숙한 상태를 말합니다. 권리가 있지만 주장하지 않는 삶이 성숙한 삶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어떤 공동체이든 사회이든 혼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권리가 있지만 주장하지 않는 것이 너그러운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창세기 13:9에는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갈데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삼촌과 조카 관계입니다. 삼촌인 아브라함이 조카인 롯을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삼촌이 우선권을 포기하고 조카에게 먼저 좋은 곳을 택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성숙한 모습입니다.
디모데후서 2:6에는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합니다. 농부가 자신의 권리만 주장한다면 성경에 나온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사사기에는 기드온의 죽음 이후에 아들들의 ‘형제의 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큰 아들 아비멜렉이 다른 형제들을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막내인 요담이 겨우 살아남게 되었는데 요담은 아비멜렉을 빗대에 세겜 사람들에게 ‘나무왕의 비유’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감람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는데 좋은 감람을 열어야 하므로 거절했습니다. 무화과도 거절하고, 포도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더니 가시나무는 왕이 되겠다고 하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불살라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자격이 없는 나무가 자기주장만 합니다. 인간사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장 자격이 없고, 못난 사람이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바울은 권리를 포기하는 동시에 의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 권리를 희생시켜 생산적 삶의 본을 보이려고 한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의무에 충실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에는 등한히 하는 사람입니다.
제20대 국회가 개원되었습니다. 국회가 시작될 때마다 의원의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나오지만 시행한 적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특권을 누릴 수 있지만 포기하는 마음이 국민을 대표하는 큰사람의 큰마음입니다. 의원들이 지나친 특권을 누리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잘못을 해도 벌 받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이 아닙니다. 이런 의원의 특권을 포기할 줄 알아야 좋은 국회입니다. 국민들의 압박에 의해 빼앗기지 말고 스스로 내어놓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덴마크 국회는 우리나라와 같은 특권이 없습니다. 많은 의원들이 자전거로 출근하고 있고 면책특권 등은 아예 없습니다. 권리가 있지만 포기해야 바른 국회 상을 세워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아마 미국대통령일 것입니다. 지구에서 권력의 최고봉을 가진 미국 대통령조차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끊임없이 견제를 받고, 비판을 당하고, 작은 실수만 해도 미디어의 패러디 대상이 됩니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가 지긋지긋한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은 퇴임식을 손꼽아 기다리며 달력에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이제 종노릇은 그만두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재선을 포기하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백악관을 떠났습니다. 할 수도 있지만 그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함입니다. 때로는 그 것이 선한 일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또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알아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에 장애가 되지 말고, 복음전파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복음 전하는 자가 참아야 하는 것은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려 함입니다.
고린도전서 9:12 하반절에는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합니다. 복음이 방해받지 않고 전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많이 참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육체적, 경제적, 감정적 인내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참는”이란 말은 ‘스테고멘’으로 지붕이란 뜻의 ‘스테게’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덮다’, ‘감추다’, ‘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신약성경에서는 바울만 사용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바울이 자신이 당했던 고통들을 열거합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을 뻔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고, 3번 태장을 맞고, 1번 돌에 맞고, 3번 파선하고, 일주일을 깊은 바다에 있었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과, 자지 못함과, 주림과, 목마름과, 굶음과, 춥고 헐벗음을 당했습니다. 이런 고충들을 바울은 다 참아냈습니다. 왜 그렇게 혹독한 고통을 참았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에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통을 참은 것입니다.
선교사들을 보세요.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을 보면 인간으로 참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경제적 여건도 변변치 않을 것인데 참아야 합니다. 문화적 차이도 많아 적응도 쉽지 않을 것인데 참아야 합니다. 날씨나 주위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애를 먹을 것인데 참아야 합니다. 현지인의 테러나 위협도 참아야 합니다. 주변 인물이나 타종교인의 노골적 방해도 참아야 합니다. 심지어 죽음을 각오하고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내가 없으면 복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참지 않으면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큰 방해꾼은 복음전하는 것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왜 당신이 교회에서 생계비를 안 받아 우리까지 못 받게 만드는 거야?”라는 식의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게일 목사의 선교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게일목사님이 한국에 온지 3년 후인 1891년부터 우리교회에 부임하기 전인 1899년까지 미국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 목사님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환경에 적응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병과, 피곤함과, 좌절을 말합니다. 미망인이었던 헤론 여사와 결혼문제로 선교부와 갈등을 가진 내용도 적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사례비를 예고도 없이 삭감하여 선교본부와 갈등을 가진 이야기도 있습니다. 선교사들 사이의 성격이나 업무의 갈등도 적고 있습니다. 이런 게일목사님의 이야기는 선교사라면 누구나 가지는 갈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갈등을 참아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4:12에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비천함, 배고픔, 궁핍을 다 참아내는 비결을 배웠고, 이 모든 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더위를 못 참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우면 에어컨에 의존하는 냉방민감도가 높아집니다. 최근에 와서는 에어컨의 사용량이 10년 전에 비해 2.7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양극화’의 시대입니다. ‘부익부빈익빈’으로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 간의 경쟁도 심화되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못 봐 줍니다. 그래서 충동조절장애도 나타나고, 불특정다수에 대한 보복 살인도 빈번합니다. 요즘에 등산로나 화장실 등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자신의 돌발적 감정을 참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인내’(patience)와 ‘열정’(passion) 두 단어는 라틴어의 한 어근(pasio)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견디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인내도 열정도 다 견디는 것입니다. 잘 견디는 사람이 인내하는 사람이고,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내는 넋을 놓고 기다리는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라 비상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기다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기다리지도 못합니다.
1914년 대원 27명을 이끌고 남극대륙 횡단에 도전했다 배가 파선하였지만 2년 뒤, 탐험대 전원을 생환하게 했던 전설적인 탐험가 섀클턴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참자, 참자, 또 참자.” 섀클턴이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는 단어는 ‘인내’였습니다. ‘참을성’(patience)이란 말은 그냥 앉아서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는 뜻이지만 ‘인내’(endurance)는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섀클턴의 참음을 ‘인내’(endurance)라고 합니다.
5 살배기 철수가 엄마와 지하철을 타고 갑니다. 철수가 너무 떠들어 함께 탄 승객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습니다. 엄마는 창피한 마음에 철수에게 말했습니다. “철수야, 엄마가 어떤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지?” 철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빠!”라고 했습니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마음의 장애나 가문의 굴욕은 없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은혜로 맺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 장애가 없게 참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비로소 가능합니다.
우리가 참아햐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 복음에 장애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다른 사람의 비난의 소리나,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험담이나, 사사로운 감정 등을 잘 참아야 복음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시편 119:165에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주의 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습니다. 장애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인내하게 합니다. 장애물이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받아 말씀을 극진히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장애를 받지 않고 동시에 말씀을 전하는 우리에게도 장애가 없기를 바랍니다.
결 론
아프리카에서 사역한 의사 선교사인 해리 크라우스가 쓴 ‘비밀은 몸에 있다’(The Cure)라는 책에는 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암은 정확하게 사랑과 반대로 행동한다고 합니다. 암세포들은 주변 세포들에게 전혀 유익을 끼치지 않습니다. 암세포들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항상 “나, 나, 나!”만 외치고, 내 공간이 필요하고, 내 시간을 요구하고, 내 뜻을 내세우고, 내 방법만 주장합니다. “나를 먹여줘요” 암세포가 외치는 소리입니다.
자기 권리를 다 쓰는 것이 암입니다. 그래서 자기 권리 주장만 하고, 다른 사람이나 함께 해야 할 공동체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자를 ‘암적 존재’라고 합니다. 이런 암적 존재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전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까닭은 복음에 장애를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복음이 얼마나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까? 복음이 방해를 받은 것은 외적 요인이 아니라 내적 요인도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방해꾼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삼가야 합니다.
복음에는 내적 장애가 외적 장애보다 더 큽니다. 현 한국교회 안에 있는 복음의 내부적 방해를 보세요. 부패, 안일, 이단, 세속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이 교회 안의 방해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꾸준히 인내하면서 모든 복음의 장해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복음만이 승리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