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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8일(화)
* 시작 기도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악한 영의 세력과 전쟁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분히 가지신 힘과 능력으로 싸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바램이셨습니다.
그렇게 아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육신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굉장한 스펙을 가졌습니다.
그는 행 17장에서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과 맞짱을 떠서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철학의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 크고 놀라운 스펙을 다 배설물이라 하면서 쓰레기 취급을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종은 예수님은 고사하고 바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내게 있는 알량한 지식이나 스펙들을 나의 힘으로 자랑하려고 얼마나 애를 쓴 자인지 모릅니다.
오늘 이 종은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났사오니 주의 공의로 나를 심판하사 나의 의를 멸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나를 향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성령 안에서 원망과 시비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날에 진짜 자랑할 것이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호 6:1-11
제목 : 힘써 여호와를 알자.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 나의 묵상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이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미워서 죽이고자 함이 아니라 주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주님의 인자와 사랑의 강력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심지어 저주까지 하신다.
그러나 그런 저주까지도 진짜 그들을 저주하여 죽이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이 그 저주의 말씀을 듣고 각성하여 깨닫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인 것이다.
(신 28:15절 이하)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찢으시는 심판을 단행하신다.
그러나 그 찢으심은 결코 그들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라 회복시켜 살리고자 하심이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의 심판은 은혜요 사랑의 선물이다.
물론 그것을 은혜로 받는 자에게 그렇다.
그래서 그런 심판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이틀 후에 살리시며 삼일 후에 일으켜 주셔서 일으킴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틀 후에 살리시며, 삼일 후에 일으키신다는 말씀은 일반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속히 빠른 시일 안에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는 말씀이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의미 외에 구속사적인 의미로 본다면 이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당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우리의 죽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땅 위에 사는 우리가 이제는 죄에 대하여 자유하여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나도 함께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따라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내가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보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나도 죽고, 주님의 장사되심과 같이 나도 함께 장사되어야 하며,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도 새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새 생명으로 살아난 자는 이제 주님 앞에서 살게 될 것이다.
(2b)....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것도 힘써 아는 것이다.
‘힘써’라는 말은 최선을 다하여 쫓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아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 분을 아는 것을 일컬어 곧 영생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초점은 항상 영생에 맞춰져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생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이며, 특히 이는 창세전부터 주시기로 약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이 세상 만물 즉 존재물에 다 매여 버리고 만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만 하고,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하며 더 높은 직책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내가 하는 사업은 항상 성공해야 하고 부자로 살아야 하며, 건강도 최고로 좋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이런 것이 되어 버릴 때 그 사람은 가장 비참하고 추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3A라 한다.
Appearance(남들 보기에 보란 듯해야 함).
Achievement(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성공해야 함).
Affluence(나는 풍요롭고 윤택하게 살아야 함).
이것이 진정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여기에 모든 삶의 목적과 뜻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제한적이요 한계가 있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가 믿는 예수를 이용해서 이런 목적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생이며, 그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런 영생은 날마다 존재이신 말씀과 함께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 땅의 상황이나 내 삶의 형편에 상관없이 날마다 말씀되신 주님과 깊이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생인 것이다.
날마다 이처럼 영생을 누릴 때 완전한 영생인 천국이 내 것이 되며, 또한 날마다 그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께서는 새벽의 빛과 같이, 그리고 이른 비 늦은 비와 같이 때를 따라 가장 적절하게 우리에게 은혜를 공급해 주신다.
그런데 에브라임이나 유다는 그렇지 못하였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패역하여 주를 멀리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안타까움을 가지고 하소연 하신다.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종수야 도대체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줄꼬?
어떻게 하면 네가 바르게 살 수 있겠니?
어떻게 하면 네가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겠니?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이 말씀을 통해서 폐부를 찌른다.
인애란 헤쎄드로써 사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속한 단어이다.
하나님의 사랑, 자비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은 자 역시 하나님께 그 사랑과 자비를 돌려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과 유다를 향하여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처럼, 금세 없어져버리는 이슬처럼 너무나 찾아보기 힘들다고 아쉬워하고 계신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젊어서부터 어쨌든 주일 예배는 빼먹지 말자는 식으로 마음을 먹고 최선을 다해 주일 예배를 드렸다.
물론 그 예배에 나름대로 회개도 있었을 것이고 열심도 있고 정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예배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예배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있는 지금 그 자리에서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새 언약 백성으로써 누가 누구를 가르칠 필요도 없고 누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다.
다만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하여 가르쳐주시는 그 은혜로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진짜 예배인 것이다.
그래서 요4장에서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께 대하여 우리는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하는데 하면서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예배는 이곳에서도 아니고 저곳에서도 아니고 이제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곧 ‘이 때’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 때’란 지금이란 의미와 함께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 시간을 정해놓고 예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예배는 지금, now.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이신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자녀들은 학교에서, 어른들은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또는 가정이나 교회나 어느 곳에서든지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장소요 시간인 것이다.
이것은 순간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코람데오를 의미하는 것이며 내 삶을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날마다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가지는 현재적 예배를 드리는 자는 주일날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에 가면 그 예배가 살아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 그 자체이다.
목사의 설교가 잘 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은 날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나는 이것을 몰랐다.
물론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 삶의 예배란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배웠다.
물론 그 말도 맞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말씀을 배제한 나의 삶은 나의 의로 행하는 것으로 그 또한 교만한 자의 표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존재이신 말씀을 외면하며 도외시하고 살았는가?
이제는 말씀이 곧 생명이라는 이 진리를 알고 날마다 말씀묵상을 통하여 더 깊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자로 살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믿어왔던 이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저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 되는 것인 줄 알고 얼마나 열심히 다녔으며, 교회에서 내 몸이 부서지도록 최선을 다하여 사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여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서도 나는 그 이상을 넘지 못하였나이다.
내가 아는 것 이상을 가르칠 수 없기에 나는 그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았나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게 하셨고 그것은 바로 영생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육신의 한계로 인하여 언제나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임에도 나는 예수 믿어서 이 땅에서 무언가 보란 듯이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욕심이요 자기주장의지이며 이 또한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탐욕이었음을 고백하나이다.
이 종이 이제는 육신의 썩어질 일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날마다 구하며 그것이 오늘 지금 현재적으로 임하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서 있는 이 때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장소임을 깨달아 날마다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그 자리가 영생임을 한 시도 잊지 말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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