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기 –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
< 질문 >
위빠사나는 법의 실재를 보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혹자는 선정의 힘으로 알아차려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순수 위빠사는 강한 선정의 힘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보는 깊이가 다른 것 아닌가요?
욕망이 생각이 몸의 감각이 지속되지 않고 일시적인 것은 느리지만 알아차려집니다. 그런데도 욕망의 집착은 끊임없이 올라오는데 이것이(순수 위빠사나) 진짜 효과가 있은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 답변 >
법이란 의미는 매우 다양한데 크게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알아차릴 대상이란 뜻과 둘째는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대상이 없으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의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이것을 사념처라고 하며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네 가지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봅니다. 이때의 무상, 고, 무아는 존재하는 생명의 성품이라서 진리입니다. 진리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말하는데 아무런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 수행입니다. 선정이라고 할 때는 사마타 수행을 의미하고 고요함까지가 목표입니다. 이때는 강력한 힘으로 번뇌를 억누릅니다. 하지만 번뇌를 억눌렀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한 상태가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하려면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존재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찰지혜수행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통찰지혜가 깨달음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번뇌를 억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번뇌를 말립니다. 이렇게 해야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고요함이 있는 선정의 상태에서는 윤회를 합니다. 통찰지혜가 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무상, 고, 무아를 알아 윤회가 끝납니다. 이때 선정수행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위빠사나로 시작하는 수행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를 건관자라고 하는데 선정수행을 거치지 않고 바로 통찰지혜를 얻는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사마타 수행인 선정수행은 욕망을 억누르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욕망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그러므로 번뇌를 대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욕망을 억누르면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따라 괴로움이 완전하게 소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번뇌를 말리면 통찰지혜가 나 괴로움이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어느 수행을 하거나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가보지 않은 정신세계는 혼자서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혼자서 가는 사람을 붓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붓다가 아니면 누구나 반드시 스승의 도움을 받아 한걸음씩 나가야 합니다.
묘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