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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성공한 황제인가, 실패한 황제인가
사료로 고증하고 분석한 건륭성패!
CCTV 백가강단 인기 강연!
인류 역사상 실질적인 통치 기간이 가장 길었던(63년 4개월) 제왕이자, 가장 장수한(89세) 군주 중 하나. 인자하면서도 잔인했고, 상냥하면서도 냉정했으며, 검소하면서도 사치스러웠고, 겸손하면서도 거만했던 인물. 일생 동안 위대한 정치적 업적을 쌓았고, 재임 기간에 태평성대를 이룬 성공한 황제이자, 말년에 정치적으로 중대한 실수를 범하면서 스스로 태평성대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아편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은 실패한 황제. 그는 바로 청나라의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 정치가와 학자, 시인, 여행가, 사냥꾼 등 다양한 모습이 합쳐져 있는 별종 황제에 대하여 가까이 다가가 그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한다.
장훙제의 『건륭: 63년 4개월의 절대 권력』(원제: 乾隆成敗)은 청淸나라 6대 황제 건륭(재위 1735∼1795)의 초년 시절부터 사망할 때까지 거의 80여 년에 달하는 기간을 밀착하여 취재하듯이 모든 것을 세밀하게 지켜보는 책이다. 숨죽이며 마련된 무대에 올라간 건륭이라는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의 억양, 이마에 맺힌 땀방울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세계 제1의 제국을 통치한 지도자의 내면과 사생활, 즉 다양한 취미생활, 심리적 콤플렉스와 경향성, 공부와 학습의 역사 등은 물론 주요 정책들이 결정되고 시행된 과정, 청나라 만주족 권력의 생리, 관료체제의 운영,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권륭이라는 한 권력자의 성공과 실패를 조목조목 짚어보고 있다.
그를 위해 총 23개의 강의로 이뤄져 있으며, 황위를 물려받기 전 살떨리는 경쟁 시스템에 대한 소개와 타고난 사주팔자의 행운, 일찍이 강희제의 눈에 들어 부친 옹정제의 황위 등극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점, 황위에 오른 뒤에는 부친이 시행한 큰 정책들을 과감하게 폐지하는 모습, 대신들을 다루는 방법, 황후의 사망에 따른 중년기의 고통, 태평성대의 절정에 이르는 과정까지가 책의 전반부를 이룬다. 나머지 후반부는 변화와 위기, 기이한 사건들,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이를 상징하는 화신이라는 인물의 등장, 신하들과의 대결 국면, 영국의 통상요구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대응 끝에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드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저자 소개
장훙제
몽골족 출신으로 1972년 랴오닝성에서 태어났다. 둥베이차이징東北財經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칭화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대표작으로는 『중국 국민성의 변천 과정』 『대명왕조의 일곱 가지 얼굴』 『증국번의 앞면과 옆면』 『간독簡讀 중국사』 등이 있다. 중국의 인기 프로그램 「백가강단」의 강연자이자 대형기록물인 『초나라 800년』의 총 편집을 맡기도 했다.
📜 목차
1강 건륭의 이력서
2강 남다른 사주팔자
3강 미리 물려받은 황위
4강 뜻을 거스른 후계자
5강 권력을 손에 쥐다
6강 대신들을 다루는 법
7강 황제의 사랑
8강 불길한 건륭 13년
9강 황제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와 함께 있는 것
10강 장정옥의 죽음
11강 태평성대의 절정에 이르다
12강 변화와 위기
13강 기이한 사건들
14강 문文으로 다스리다
15강 나이 든 황제
16강 화신의 등장
17강 부정부패에 물든 관료들
18강 황제와 신하의 대결
19강 청나라를 찾아온 영국인
20강 영국의 선물
21강 아편전쟁의 씨앗
22강 물려주고 물려받기
23강 건륭제 사후
주
🖋 출판사 서평
각 장의 주요 내용
건륭제의 성은 청나라 황실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이며 본명은 홍력弘曆이다. 청나라 초기에는 황족 이름을 짓는 데 특별한 규칙이 없었다. 그래서 황족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족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강희제康熙帝는 황자皇子와 황손皇孫들의 이름을 짓는 규칙을 마련했다. 이제 황자들은 이름 첫 글자는 반드시 윤胤자로 쓰고, 두 번째 글자는 보일 시示 변이 있는 자를 써야 했다. 그래서 윤진胤?, 강희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옹정제雍正帝의 이름 등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황손들은 이름의 첫 번째 글자는 반드시 홍弘, 두 번째 글자는 날 일日 변이 있는 글자를 써야 했다. 건륭의 이름인 홍력의 ‘역’은 ‘曆’이다.
건륭의 생일은 강희 50년인 1711년 음력 8월 13일이다. 띠는 토끼띠이고 별자리는 천칭자리다. 태어난 곳은 베이징 옹화궁雍和宮으로 알려졌지만 이를 두고는 이론이 분분하다. 건륭의 아버지는 알려진 대로 옹정제고, 어머니는 만주족 유호록?祜祿 씨다. 혈통으로 보면 건륭제는 만주족 피 81.25퍼센트와 몽골족 피 6.25퍼센트, 한족 피가 12.5퍼센트 섞인 사람이다. 건륭의 외모는 외국인의 기록이 신뢰할 만하다. 건륭제 말년에 영국의 사신 매카트니George Macartney가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는 눈짐작으로 건륭제의 키가 약 5.2피트 정도 된다고 말했다. 이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60센티미터 정도다. 자금성에는 건륭이 여름에 입었던 십이장十二章, 중국 황제의 예복에 붙어 있던 열두 가지 장식 조포朝袍가 남아 있는데 이 옷을 근거로 했을 때 그의 키는 166센티미터 정도였을 거라고 본다.
건륭제는 평생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바꿔 말하면 건륭제의 주요 업적과 역사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
건륭 말기 중국 인구 3억…그 전대보다 2배 늘어
첫째,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청나라 이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인구수는 아무리 많아도 700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일정 시점에는 중국의 인구수가 잠시 1억을 돌파한 때도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데 건륭제 초기인 건륭 6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중국의 인구수는 이미 1억4000만 명에 달했다. 건륭 60년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얼마나 나왔을까? 3억에 가까웠다. 건륭제가 나라를 다스린 50여 년 동안 중국의 인구수가 몇 배나 늘어난 것이다. 이는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둘째, 경제 규모가 세계 제일을 차지했다. 건륭제 시기 중국의 GDP는 전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당시 중국 제조업의 총 생산량은 영국의 여덟 배, 러시아의 여섯 배였다. 1990년대에 독일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안드레 귄터 프랑크Andre Gunder Frank는 『리오리엔트』에서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에서도 막강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셋째, 청나라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건륭 24년 중가르准?爾, Jungar, 17세기 초에 일어나 18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몽골 오이라트족의 부족집단과 그 국가를 평정한 뒤 청나라 영토는 14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현재 중국의 면적이 960만 제곱킬로미터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크기다. 또한 중국의 역대 왕조와 황제들이 회유하거나 느슨한 제도로 변방을 거느렸던 것과 달리 건륭은 변방을 정치적 관할구역에 포함시키고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렸다. 역대 다른 황제들은 전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넷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문화적 기록을 남겼다. 건륭제 때 만들어진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중국 역사상 글자 수가 가장 많은 책이다. 책은 약 8만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자는 9억 9600만 자에 달한다. 중국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총서라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기록은 건륭제가 중국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황제 중 하나라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한다. 경제와 정치뿐만 아니라 군사와 문화 방면에서도 그는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최장 재위기간, 최장수, 신친 7대…기록 갱신의 제왕
이 외에도 건륭은 몇 가지 특별한 역사적 기록을 만들어냈다. 우선, 그는 전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이 가장 긴 군주였다. 건륭제는 60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었고, 그 후 3년간 태상황太上皇, 자리를 물려준 뒤 살아 있는 황제의 부친 자리에 올라서도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정리하자면 건륭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청나라를 통치한 기간은 63년 4개월로, 이는 전 세계 통치자들 중 가장 긴 기간이다.
강희제의 통치 기간이 더 긴 것이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연호가 강희는 61년, 건륭은 60년까지였다. 하지만 강희는 태상황에 오르지 않았고, 또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겨우 여덟 살이었기 때문에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실질적으로 통치한 기간은 55년에 그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72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왕위에 올랐을 때가 겨우 다섯 살이었고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실제 통치 기간은 50년에 불과하다. 이란의 국왕 샤푸르 2세Shapur II는 총 70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그가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는 아직 어머니 배 속에 있었다. 따라서 실제 정치에 참여한 기간은 60년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기간이 64년이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에 영국은 이미 군주입헌제를 택했기 때문에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군주일 뿐 권력은 중국 황제와 비교되지 않는다.
건륭은 또 세계에서 장수한 왕들 중 하나다. 중국 역사상 나이를 고증할 수 있는 황제는 500여 명인데, 그중 일흔 이상 살았던 왕은 아홉 명, 여든 이상 왕은 네 명이다. 바로 양나라 무제武帝, 무측천武則天, 송나라 고종, 건륭이다. 건륭은 여든아홉까지 살았으니 네 명 중 가장 장수했다. 하지만 전 세계로 범위를 확대해보면 그는 두 번째가 된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Ramesses II가 건륭보다 한 살 많은 아흔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건륭은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신친 7대身親7代’를 경험한 황제다.
‘신친 7대’란 자신을 포함한 7대를 모두 직접 만났다는 의미다. 위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래로는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까지 보았고, 거기에 건륭 자신을 합치면 7대가 된다. 이 기록은 역대 제왕들 중 유일무이하며 누구도 이를 뛰어넘은 적이 없다. 황실에서 유일할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역사 기록을 조사해보니 수천 년 동안 당나라 시인 전기錢起에서 명나라 화가 문징명文徵明까지 겨우 여섯 명만이 신친 7대를 이루었다. 이런 몇 가지 기록을 제외하고도 건륭에게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부분이 또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문무文武 겸비
그중 하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많았다는 것이다. ‘무武’ 방면에서 건륭은 기초체력이 아주 뛰어났다. 평생 건강한 신체와 체력을 유지했으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문文’ 방면에서는 아이큐가 높아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았고 만주어, 한어漢語, 한족의 언어로 지금은 중국어를 뜻함, 몽골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다섯 가지 언어를 구사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었다. 평생 시를 몇 수 남겼을까? 총 4만3630수나 된다. 『전당시全唐詩』에는 당나라 시대에 활동했던 2000명이 넘는 시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모두 합쳐도 4만8000수가 채 되지 않는다. 건륭 한 사람이 당나라 시인 2000명의 시 선집만큼 시를 지은 것이다. 이 역시 흥미로운 기록이다.
또한 운이 좋았다. 건륭제는 즉위 과정이 순조로웠는데, 옹정제가 비밀리에 태자를 세우는 제도를 마련해놓은 덕분에 그는 황위를 두고 다른 황자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옹정제가 건륭을 후계자로 정한 뒤 일찍 세상을 떠나 건륭은 젊고 혈기왕성한 스물다섯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즉위했을 때는 정치적 기초도 아주 잘 다져져 있었다. 강희제와 옹정제가 7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아주 안정된 상태였고, 나라 안팎으로 특별한 우환도 없었다. 말하자면 정치라는 무대 위의 모든 세트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
마무리도 완벽했다. 역사상 유종의 미를 거둔 황제는 많지 않다. 중국 황제가 횡사橫死, 즉 정상적이지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확률은 44퍼센트나 되었다. 정말이지 고위험군에 속하는 직업이다. 이에 반해 건륭은 6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성공적으로 의식을 거행해 자신이 고른 후계자 가경嘉慶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 후에도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말년의 탐욕, 지나친 문자옥, 자만과 폐쇄정책
‘시비是非’와 ‘공과功過’를 모두 따져보자면 건륭제의 ‘잘못’을 이야기해야 한다.
건륭의 첫 번째 잘못은 말년에 태평성세에 취해 탐욕을 부리며 부패를 만들어내고 청나라를 쇠락의 길로 내몬 것이다. 그는 화신和?을 중용해서 황실 수입을 늘리도록 했고 대신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공물로 바치라고 강요했다. 이 바람에 청나라 정계에는 횡령과 부패가 성행했고, 결국 백련교白蓮敎, 송·원·명·청나라에 걸쳐 유행했던 신흥종교로 청나라 가경제 때 가장 큰 반란을 일으킴의 난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두 번째 잘못 역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이다. 바로 ‘문자옥文字獄’이다.
건륭은 훌륭한 일을 역사적 기록으로 많이 남겼지만 일부 잘못도 역시 기록으로 남았다. 그는 중국 역사상 문자옥을 가장 많이 일으킨 황제다. 청나라 이전에는 중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예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삼대에 걸쳐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그래도 강희제는 열 차례에 그쳤지만 옹정제는 스무 차례에 달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얼마나 되었을까? 130여 차례나 되었다.
건륭의 또 한 가지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바로 폐기한 책의 권수다. 그는 『사고전서』를 만들며 문화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런데 실상은 그 기회를 틈타 청나라 왕조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책을 모두 불살랐는데,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 양이 적어도 6∼7만 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사고전서』를 만들면서 또 다른 ‘사고전서’를 불태운 셈이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문화적 재앙의 하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잘못이다. 바로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외교방식을 택한 점이다. 건륭이 살던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다. 물질적으로는 건륭이 즉위한 이듬해인 1733년 영국인 케이John Kay가 플라잉셔틀flying shuttle, 직조기계의 씨실을 넣는 장치로 직물 생산을 능률화 한 발명품을 발명하며 산업혁명의 서막이 올랐고, 건륭 34년(1769)에는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해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문화적으로는 건륭의 나이 마흔넷이 되던 건륭 19년(1754)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명작을 발표했고, 말년인 건륭 54년(1789)에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시민들은 「인권선언」을 발표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정신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여든다섯이 된 건륭이 아들 가경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태상황에 오른 이듬해인 1796년, 미국의 워싱턴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연임하지 않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은 연임할 수 없다는 관례가 생겼다. 이 두 역사적 거물이 보인 권력에 대한 태도에서 당시 청나라와 서양 정치문명 사이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건륭은 서양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기본적으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는 ‘청나라는 위대하며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던 때에 오히려 문을 닫고 나라를 봉쇄했다. 학자들은 건륭의 이런 뒤처진 외교적 사고가 청나라 몰락과 관련이 깊다고 말한다.
복잡한 인간, 건륭
저자는 한 단어로 건륭의 성격을 표현해야 한다면 ‘복잡複雜’을 고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는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인자하고 선량한 면이 있었다. 옹정은 임종 전 남긴 조서에서 건륭을 ‘천성이 인자하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나 개가 죽으면 반나절을 울곤 했다는 것이다. 또한 건륭은 나라의 재난 현장을 보고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어느 해에는 안후이성 타이후현에 심한 기근이 닥치자 먹을 것이 없어진 백성이 들로 나가 ‘흑미黑米’라는 것을 파먹으며 허기를 달랬다고 한다. 흑미란 오래되어 검게 변한 곡식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건륭은 이 소식을 듣고 관리들을 시켜 흑미를 가져오도록 했다. 도대체 무엇을 먹는지 직접 보려고 한 것이다. 흑미가 오자 그는 맛을 보았다. 그런데 입안에 넣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 그것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흑미를 황자들에게 나눠주며 백성의 힘든 생활을 가슴에 새기도록 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정확한 것을 좋아한 건륭은 유독 재난 복구 과정에서만큼은 ‘낭비’를 허락해주었다. 설령 관리들이 일부러 상황을 부풀려 보고하는 한이 있어도 모든 백성이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그는 매우 인자한 황제다.
하지만 그에게는 폭력적인 면도 있었다. 『청대문자옥당淸代文字獄?』을 살펴보면, 건륭 18년에 정문빈丁文彬이라는 자가 저장성에서 산둥성 취푸에 있는 공부孔府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더니 며칠 전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자신에게 공부의 두 딸을 주시겠다고 했으니 이 집 사위가 되겠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바로 관아로 끌고 갔다. 관리들이 몸을 수색하니 책이 한 권 나왔는데 표지에 알 수 없는 연호가 적혀 있었다. 그는 관리에게 자신의 귓가에서 천자가 될 운명이라는 말이 자꾸 들린다며, 그 목소리를 따라 이 연호를 적었다고 말했다. 관리들은 이 사실을 바로 건륭에게 보고했다. 건륭은 그가 그저 정신 나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 ‘미치광이’를 거리로 끌고 나와 백성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하고 산 채로 몸을 3600번 베게 했다.
건륭이 이런 처벌을 내린 까닭은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우민愚民’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건륭은 인자함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외에도 그에게는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 사교적이고 기품 있으며 주변 사람이 ‘봄바람과 따뜻한 기운’을 느낄 만큼 온화했지만, 매우 오만해서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깔보았으며 정책을 시행할 때는 엄격하고 냉정했다. 또 절제되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지키며 평생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지만 극도로 사치스러워서 여섯 차례나 남쪽지방을 순행하며 엄청난 경비를 지출했다. 젊어서는 총명하고 겸손하며 신중한 성격으로 청나라를 태평성세에 올려놓았지만 말년에는 고집불통에 기고만장해서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고 스스로 그 성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