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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년~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부 기록에 나오는 젊은 시절의 아들딸을 제외하면 자식이 오랫동안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 기록에 나오는 자들도 잠깐 나오다 만 것을 볼 때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여럿 들이는데, 여동생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처남의 아들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일족 중에서 긁어모은 자들이었다. 이외에 정치적인 이유로 들인 양자도 여럿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로 유키 가에 보낸 유키 히데야스,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있었다.
50대의 나이에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의 딸인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낳지만 츠루마츠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나이가 50대 후반이라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거라 여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동생의 아들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정하는데,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그 때문에 방해물이 되어버린 히데츠구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딸과 히데요리를 혼약시키는 등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국 1595년에 히데요시는 모반을 이유로 히데츠구를 고야산으로 추방한 뒤 할복을 명하고 히데츠구 일가를 처형하였다. 이 때 어린 처자식까지 공개 처형한 이런 잔인한 처사 때문에 히데요시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민중들의 평이 크게 저하되고 후일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죽고 손자 도요토미 쿠니마츠가 붙들려 처참한 죽음을 맞자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게 모두 인과응보라는 내용의 풍자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후계자로 선정되지 않았던 양자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고 혈연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유키 히데야스는 유키의 양자가 되었으며,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가 그냥 놔둬서 도요토미氏를 계속 이었다. 임의로 우키타 히데이에라 표현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기록에서 "풍신수길의 아들 풍신수가"라 나오는 점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이에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츠구만 안습. 사실 도요토미 츠루마츠와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전부터 요도도노가 외간남자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었고 후대에는 거의 정설이 되어버린 걸 생각할 때(에도 시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불쌍하다.
전국 최고의 출세아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갖고 있으나, 이는 역으로 보자면 다른 유력 다이묘나 무장들과는 달리 그 지지기반이 탄탄치 않음을 의미한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안배를 하는데 그 핵심은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封行) 지방의 유력 다이묘인 오대로와 도요토미 가의 가신인 오봉행의 합의로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각 다이묘에게 히데요리에의 충성 맹세를 받고, 4살에 불과했던 히데요리를 원복시키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유지를 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 가지 설로 추측하는데 매독설, 위암설(임진왜란에 의한 스트레스 화병), (심유경에 의한) 독살설 등이 있다.
1598년에 히데요시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오대로의 앞에서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을 거듭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오대로와 오봉행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히데요시의 죽음을 한동안 극비로 부친 채 군의 철수를 명령한다. 이렇게 임진왜란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의 조선에서의 패퇴나 다름없는 철수로 종결된다.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사세구가 유명한데 그 내용이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매독, 결핵, 이질, 위암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독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제는 이 독살설의 주역이 명나라의 강화 사신으로 온 심유경과 조선인 소년 양부하라는 것. 이 이야기의 원전은 숙종조 문신 염헌 임상원의 개인문집 <염헌집>에 실려있다. 임상원은 직접 90세 고령의 양부하를 만나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해 들은 얘기를 채록했고, 후대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정조대에 <국조인물고> 등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대체로 염헌이 정리한 독살설이 수록돼있다.
양부하는 어린 나이에 동래에서 살다가 왜군이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동래성을 함락시키는 와중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직후 포로로 끌려간 양부하는 하루 만에 간단한 일본어 회화를 구사해 총명함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보내졌고 지근거리에서 수발을 들었다. 몇 년후 강화 교섭으로 건너온 심유경을 만났고 그와 히데요시 독살을 모의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이와 같다.
처음 히데요시는 사신들을 엄중히 가두고 감시하는 등 일종의 길들이기를 시전했고, 사신들의 하소연에 만나주는 척 응했다. 심유경은 히데요시와 대면하면서 이상한 환약을 자꾸 섭취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약을 집어 삼키는 심유경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궁금하게 여겼다. 이윽고 히데요시의 질문에 심유경이 대답하길 대륙과 열도의 풍토가 맞지 않아 몸이 허해졌는데 그 허해진 기운을 보충해주는 아주 좋은 강장제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의심해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자꾸 권하는 심유경의 권유에 결국 약을 들이삼켰다. 그런데 얼마 후 히데요시는 몸에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되고 심유경에게 약을 받아 그 후로도 자주 약을 섭취하는데…….
이것이 사실 심유경이 진정 의도한 바였다.
그 약은 사실 복용한 사람을 점점 말라 죽이는 비소 계열 독약으로 심유경은 객사로 오자마자 바로 해독약으로 응급처치를 해서 아무 탈이 없었으나 이를 모르고 해독제 없이 복용한 히데요시는 그 탓에 점점 말라가고 기운이 빠져 사경을 헤메여 백약이 무효인 채 얼마 안가 비명횡사했다.
다만 이야기의 출처가 정식 사서가 아닌 개인이 기록한 야사이며 현재도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므로 단순히 조선과 일본 소수 측에만 돌던 가설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튼 이 설이 맞다면 세 나라를 속이고 더 나아가서 뛰어난 사기로 전쟁을 일으킨 전범까지 골로 가게 만든 심유경은 도대체.
사후 교토 동산의 아미타봉에 묻혔고, 일본에서는 드물게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격화하여 신사에 신으로서 봉안되었다. 신명은 도요쿠니 다이묘진(豐國大明神). 보통 신사에서 신격화된 인간, 즉 히토가미(人神)을 받들 때는, 해당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어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할 때, 그 원혼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신토의 논리로 볼 때 무척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권력자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신으로 받들린다니 그것 참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고, 동상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 후예들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는 등 허영심과 실익을 겸한 효과가 매우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러한 상징을 노려 자기가 죽은 뒤 신사를 세우도록 미리 유언을 남겼다.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사를 해체하였고 히데요시의 무덤은 아예 폭탄으로 박살내버렸다.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학자 강항은 히데요시를 기리는 탑에다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남의 나라를 침략해 놓고 죽어 버렸으니 앞으로 내부 분열이 진탕 일어날 텐데 이런 화려한 건물이나 성채가 다 무슨 소용이냐?' 라는 낙서를 해서 강항과 학문적 교류를 했던 후지와라 세이카가 급히 그 낙서를 떼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각지의 다이묘와 혼인 관계를 맺는 등 히데요시가 사전에 정한 법도를 무시하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생전에는 어떻게든 오대로-오봉행 체제가 작동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할 수 있었으나 그 기간은 결국 1년 남짓에 불과 했다. 토시이에 사후 도요토미 가신 내부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오대로-오봉행 체제는 와해된다.
사실 이것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잘못인데 완벽하게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 없었던 것을 괜히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인 가라샤를 납치하는 바람에 가라샤가 가신을 시켜 죽었고 그게 이유가 되어 오봉행에서 짤리고 만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해 거병하지만 이에야스는 몰래 연락하고 있던 무단파의 지지를 얻어내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를 비롯한 문치파를 격파하고, 논공행상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해체, 도요토미 가문을 65만 석의 다이묘로 전락시키고 에도 막부를 연다.
1615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공격, 두 번의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한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살했으며 손자 쿠니마츠는 숨어 있다가 결국 사로잡혔다. 쿠니마츠는 당시 불과 7세에 불과했으나, 도요토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교토로 끌려와 살해당했고, 결국 히데요시의 대는 완전히 끊겼다. 히데요리의 서녀였던 나아히메는 센히메와 가이히메의 조명을 받아 목숨을 건졌지만 그대로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쪽 혈통도 단절되었다.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이후 제일 먼저 한 일들은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는 일들이었다. 히데요시에게 추증된 신호는 이에야스의 건의에 의해 고미즈노오 덴노에 의해 영구 박탈되었으며, 히데요시를 위해 세워진 토요쿠니 신사를 폐쇄하고 인근 사찰에 신사 건물을 시주했으며 히데요시의 묘를 파괴해 그 행방이 묘연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가문과 에도 막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두되고 존황양이 사상이 커짐에 따라 막부에 의해 평가 절하된 히데요시도 누명을 벗고 신호가 재추증되었으며 토요쿠니 신사와 그의 묘도 재건되어 크게 꾸며졌다.
사실 도요토미 가의 멸망 과정을 보면 이시다 미쓰나리의 삽질 못지않게 히데요시가 저지른 삽질도 컸다. 후계 구도를 확실하게 다지기 위함이지만 히데츠구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한 처분은 다이묘들에게 광역 어그로를 시전했다. 차라리 히데츠구만 죽였다면 모를까 그 계실, 측실들과 때론 그 아버지들까지 죽였는데 문제는 이 계실과 측실들은 히데요시 자신의 가신들의 딸들이었고 히데요시를 섬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아있던 유력 다이묘들의 친족까디 덩달아 처벌받아 이들을 개빡치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성심이 한순간에 사라졌냐면 그건 아니다. 히데요시의 잔혹한 숙청이 신망을 많이 잃게 만들기는 했어도 그 세키가하라 전투마저 명목상으로는 도요토미 가의 내전일 정도로 아직도 옛 가신들의 충성심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심지어 이후에도 가토 기요마사 같이 끝까지 히데요리를 배려한 다이묘도 있었을 정도, 그러니까 중간만 했다면 도요토미 가는 생명연장을 이루거나 잘 되면 생명연장 정도가 히데요리가 장성해서 아버지인 히데요시를 완벽하게 이어받거나 그게 불가능해도 적어도 막부 말기의 상황처럼 기본적인 정도는 지켰을 수도 있었겠지만 히데요시의 개삽질은 이시다의 병크와 함께 많은 이들이 도쿠가와에게 붙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그 끝은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9.1. 후손들
중국을 제외한 당대 국가들의 정적 숙청 대부분이 그렇듯이 히데요시의 일족 및 방계 후손들은 살아남았고, 그 중 상당수가 현재 일본에 생존해 있다. 키노시타 가는 네네의 오라비 키노시타 이에사다에서 이어진 방계로서 여러 곳에 분봉되었지만 적손은 대대로 현재의 오이타 현언저리에 위치한 소규모 번인 히지 번의 번주가 되었고, 19대손인 키노시타 무네토시(木下崇俊)씨는 1998년 사가현 나고야 성 터에서 이순신의 직계 15대손인 이재엽(李載燁)씨와 만나 화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방계 후손인 키노시타 가에서는 오사카 성 전투 이후 붙들려 어린 나이에 처형당한 쿠니마츠가 사실 사나다 유키무라의 아들 다이스케와 함께 시마즈 가문의 도움으로 사츠마로 도주했고, 사츠마에 있을 수 없게 되자 키노시타 가의 히지 번에 와서 2대 번주 키노시타 노부하루의 동생 '키노시타 노부요시'로 위장해 아예 타테이시 번이라는 별개의 번으로 독립해 나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구전은 당주에게만 대대로 비밀로 전해졌다(일자상전)고 한다.
실제 타테이시 번의 독립과정이 몹시 수상쩍기 때문에 이 설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오직 노부요시 본인의 위패에만 용납되지 않는 도요토미 성씨가 적혀 있는가 하면, 3만석밖에 안되는 번인데 초대 영주 노부토시는 무리해서 노부요시에게 1만석이나 되는 영토를 찢어 주려고 했다.
단, 몇 가지 상충되는 증거도 있어 진실은 아직 미스터리 속에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자를 꽤 좋아해서 전국에서 미인을 끌어모았는데 그럼에도 밝혀진 자식은 3명이며 2명은 요도도노 소생이다.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주 시절 결혼하고 10년만에 처음으로 첩을 맞이하고 1번째 측실이 된 여인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후계자 아들을 얻기 위해 히데요시는 이후 15명의 측실을 두었고 그 가운데 5명은 출산 경험이 있는 재혼녀였다. 그런데도 자식을 낳은 사람은 요도도노뿐이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시절 때부터 있었고 1번째 측실의 자식도 히데요시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가 아니라 그녀가 데려온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원래 본인 정처인 네네는 젊은 시절 연애 결혼을 한 사이였는데 너무 허구한 날 바람을 피워 댄 데다 자식도 없던 탓에 부부 사이는 갈수록 안 좋아졌다. 네네는 연애 결혼을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겠지만 전국 시대 최고의 현모양처이면서 동시에 괄괄한 여걸이었던지라 전국 통일 이후에도 부부끼리 있을 때는 고향 사투리를 사용하며 부부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반쯤 가족 같은 사이였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내 마츠가 네네에게 자기 딸을 양녀로 보내서 중재해주기도 했다.
네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남편의 바람기를 가지고 하소연하자 이에 상관인 오다 노부나가는 "일전에 보았을 때 그대는 더 아름다워지셨소. 토키치로(히데요시) 녀석이 그대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도단. 저 대머리 쥐새끼 녀석이 그대만큼 훌륭한 여성을 또 얻을 리는 없을 테니 그대도 부인답게 당당하게 행동하고 질투는 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는 토키치로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시게."라는 서신을 보내 네네 편을 들어줬다. 상관 눈으로 봐도 지나치기는 했던 모양.
주라쿠다이 저택에 수백 명의 첩을 둘 정도였는데 의외로 취향은 건전해서 오로지 성인 여성들뿐이었다고 하며 측실 중에 과부 출신도 많은 편이었다. 그 중에는 오랜 친구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도 있었는데 나이차는 당연히 30세 이상이지만 일본 통일 시점에 이미 히데요시의 나이 자체가 50세가 넘었다.
출세한 이후에는 낮은 신분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고귀한 여성들이 취향이었고 전국 통일 이후 측실들 중에는 과거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혈연이 몇몇 된다. 노부나가의 딸,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의 딸 요도도노, 노부나가 남동생의 딸 등. 특히 요도도노는 전국 시대 최고 미녀였던 이치히메를 닮아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최고 미녀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가장 총애했다.
본인도 호색한이라는걸 알고는 있었는지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너는 여색만큼은 나를 닮으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한미한 출신 때문인지 당시 다이묘나 무장 중에서는 드물게도 남색을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다. 당시 일본 상류층에는 미소년들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으며 이를 와카슈도라고 했는데 히데요시는 전혀 즐기지 않아 반대파들은 이를 두고 "천한 출신이라 풍류도 모른다"고 깠다. 한 번은 이러한 평판을 불식시키려고 부하들이 미소년 수십 명이 있는 방에 히데요시를 데리고 갔는데 히데요시가 미소년 중 하나를 보고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소년이 돌아오자 부하들이 그 미소년에게 "총애를 받았냐"고 물으니까 미소년 曰, "누나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리 천주교를 매우 탄압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같은 선교사는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극도로 음탕하고 악덕에 오염되어 있었다. 빈틈없는 책모가이다. 그가 지은 오사카 성에는 300여 명의 여자들이 우글거려서, 성이라기보다는 유곽에 가까웠다."라고 히데요시를 평가했다. 이에 반해 그의 부인인 네네에 대해서는 "이교도이지만 대단한 인격자이며, 그녀에게 부탁하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1587년 바테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써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그리스도교 포교가 상대국의 식민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규슈 정벌 중에 쿠마모토 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
이처럼 당시 일본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간 이유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딱히 없었던 일본이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포로 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큐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겼으며, 여기에는 서양 선교사도 가담한 경우도 있어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금압하는 주된 이유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세상을 하직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등이 인신매매 1, 2위를 다툰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그때문에 히데요시는 16세기 말에 천주교 금압과 함께 일본내에서 노예매매 또한 금지시키게 된다. 다만 노예 장사를 완전히 금지시킨 건 아니고, 노예로 전락시키는 대상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포로들로 바꿨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노예무역은 17세기 초 에도막부 시절에 가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지면서 조선인 노예들은 전국시대 당시 일본인 노예들만큼 많이 팔려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