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년~1598년)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에 대한 제재에 나선 것은 종교적인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가 더 강한 결정이었다. 애초에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은 이후의 에도 막부의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독교도 박해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바테렌 추방령의 내용은 신토나 불교에 대한 배척 그리고 강제개종(하거나 혹은 시키거나)을 금지하되, 영지의 백성들이 제 뜻대로 기독교를 믿는 생각까지 막은 것은 아니었고 다만 다이묘가 기독교인이 되려거든 내 허락 받고 되라고 함으로써, 예수회가 다이묘들에게 선교를 빌미로 접촉해 연계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기독교 선교사 자체는 이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시절부터 여러 차례 보아왔던 것이었지만, 그가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달리 보게 된 것은 대체로 규슈 정벌(1586.7~1587.4)을 전후해서였다. 당시 규슈 지역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아리마 하루노부, 타카야마 우콘, 오토모 소린, 오무라 스미타다], 가모 우지사토 같은 기독교 다이묘들이 꽤 많이 있었다.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과의 연줄을 통해 남만이라 불리던 유럽 국가들의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재력을 쌓거나, 조총이나 불랑기포 같은 신무기를 수입해 보유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기독교인 다이묘들에게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들 다이묘의 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모습은 가뜩이나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와 만인의 꼭대기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난 히데요시에게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규슈 정벌이 시작되기 전인 덴쇼 14년(1586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Gaspar Coelho)와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이 끝나면 조선에 출병해 명나라가 있는 중국 대륙까지 침공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코엘료에게 털어 놓으면서 “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지원해 줄 테니까,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선박 2척과 항해사를 나한테 좀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코엘료는 이러한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는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들이 많습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제가 주선해 드릴 테니까, 그들과 합동해서 작전을 짜보도록 하시지요”라고 제안했다. 코엘료로써는 최고 권력자가 된 히데요시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동시에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도를 더욱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도리어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코엘료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자들은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들에게 영향을 주는군! 위험하다!” 라는 위기감을 품었다. 한마디로 센고쿠 시대 불교 세력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종교가 정치세력화 됨이 기독교와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규슈 정벌이 끝난 뒤인 덴쇼 15년(1587년) 6월 10일 히데요시가 하카타에 왔을 때 가스파르 코엘료는 다시 자신이 타고 온 범선인 푸스타(Fusta) 호를 타고 하카타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했는데, 거의 군함 수준으로 무장이 되어 있는 푸스타 호 안을 둘러본 히데요시는 “이거 군함 아니냐?”라고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도 히데요시에게 포르투갈 전함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이런 무장력을 가진 예수회라는 집단에 대한 공포감을 더 부추겼다는 지적이 있다. 선교사로써 코엘료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전도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권력자 히데요시에게 “예수회는 언제든 당신의 편에서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며 환심사기용으로 예수회가 가진 무장력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히데요시는 그걸 “우리 예수회는 이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히데요시 네가 권력자랍시고 함부로 나대지 마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 마디로 소헤이의 기독교 버전.
이후 가스파르 코엘료는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발호하고(1587년) 나가사키 등 일본 내의 예수회 영지를 몰수해 히데요시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며 무력으로 몰수당한 예수회 영지를 되찾기 위해 키리시탄 다이묘들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으려 했지만, 키리시탄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나 아리마 하루노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코엘료는 다시 마닐라, 마카오, 고아에 연락해 2,300명의 병력을 일본으로 급파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예수회 동인도 관찰구역 순찰사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의 조치로 끝내 무산되었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뇨는 덴쇼 18년(1590년)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 주라쿠다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회견하고 외국의 진기한 물품을 선물한다. 이는 히데요시가 내린 바테렌 추방령, 즉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 명령을 철회시켜보려는 목적이었고,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의 조선 침략 계획에 전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발리냐뇨와 함께 히데요시를 만난게 덴쇼 소년사절단이다.
미친한 신분이라서 글을 거의 읽지 못하는 문맹으로 이 때문에 사이쇼 조타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신 글을 읽어주는 역할을 전담했으나 철저한 실력주의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중용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유능한 장수였다고 한다. 특히 공성전에 능하여 수공을 성공하거나 포위를 하기 전에 미리 인근 지역에 사람을 풀어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곡량을 긁어모아 두는 등 용의주도했다. 또한, 인물을 씀에는 노부나가를 본받아서 실력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설이나 게임의 영향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도 적지 않은데 전국시대의 공명이라고까지 불리는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원래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시게하루 항목에도 있듯이 엄연한 오다 가의 직속 가신이었으며 히데요시 휘하에서 종군한 것도 '요리키(일종의 파견 근무)' 자격으로 종군한 것이었다. 이는 또 다른 그의 참모로 알려진 구로다 간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래 신분이 미천했던 히데요시는 적 아군 할 것 없이 인재를 끌어모았고 최종적으로 그것이 노부나가의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는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노부나가의 횡사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당장 눈앞에 모리의 군이 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그대로 교전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군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이것은 그대로 전투를 계속하면 분명히 마에다나 시바타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꿰어찰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군을 돌리면 당장에 모리가 등 뒤에서 달려들어서 히데요시를 캐발살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던 히데요시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히데요시에게 회군을 진언한 것이 바로 귀모(鬼謀: 귀신같은 모략)라고도 불리는 구로다 요시타카였다. 히데요시가 구로다의 제안에 따라서 한 신속한 회군은 일본사에 남는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일본의 상업을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도 알려지는데 사실 이건 노부나가의 정책을 본받은 것이다. 원래 밑바탕이 없던 히데요시는 자신을 써준 노부나가에게 심취하여 노부나가 흉내를 많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출신이 미천한 탓에 귀족들의 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어서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제법 높은 지위와 재산이 손에 들어오자 이를 흉내내기에 바빴다고도 한다. 일본의 정치사적으로 보면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린 에도시대 체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토지 조사(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칼사냥), 상업통제와 사농공상 신분제를 철저히 한 것은 도요토미 정권이 시행한 정책들로, 히데요시 정권의 정책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그대로 수행해 나갔고 이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전근대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춧돌이 된다.
이 외에도 정치력 역시 특기할 수 있다. 흔히 히데요시는 오다의 업적을 날로 먹은 먹튀로 평가받지만 사실 혼노지의 변당시만 해도 히데요시는 오다 사천왕에도 들지 못한 일개 방면군 사령관에 불과했다는 걸 보면 자기보다 급이 높은 시바타 가츠이에를 비롯한 이들을 제치고 사실상 오다의 영토를 회복하다시피 한 것도 녹록하진 않았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주군의 복수를 명분으로 삼은 것 외에 명목상 사령관으로 오다 가문 사람을 앉힌 것부터 시작해서 니와 나가히데, 마에다 토시이에같은 오다 노부나가 생전 자기보다 급이 높았던 거물조차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부하로 만든 점, 이 외에 모리, 오토모, 류조지 가문, 그리고 넓게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되도록이면 정벌에 따라 국력 소모를 막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고 시마즈, 호조 정복에서 보이듯이 이른바 다굴 형상을 만드는 능력은 발군이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습했으나 되려 역관광당해 군대로는 도저히 이에야스를 굴복시킬 수 없자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를 끌어들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도 그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자신의 정권을 지켜내긴 했다.
장사하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생 여정 때문인지, 만화 등의 매체에서 묘사할 때는 물건이나 사람 보는 눈이 좋은 인물로 묘사된다. 어느 만화에서는 생선장수로 나오는데, 말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출신을 알아내고 그 지역의 입맛에 맞게 소금간을 해서 인기를 끄는 모습도 보여줬다. 상인으로서도 대성했을 것 같은 모습이 긍정적인 면으로 자주 부각되는 인물.
미천한 출신 때문에 후다이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인적 기반이 없었다. 이건 심각한 결점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임명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보내거나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의 양자로 들여 세력을 맡기는 등 어떻게든 정권의 기반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초 병크를 터트리고, 같은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기존 후계자이자 많은 가신들을 거느리고 인망도 높았던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일족들을 몰살시키면서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많은 신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편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드는 계기를 만드는 등 정치적으로 실책을 많이 저질렀다.
권력자로 등극하고 나서는 과대망상적인 언행이 자주 보이는데, 후시미에 대지진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거나 다치고 후시미 성과 함께 조영하고 있던 대불이 무너지자 대불에 활을 쏘면서 "나라와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만들어 놨는데 네 몸 하나 못 지키냐!"라고 화를 냈고, 자기가 어머니가 태양 꿈을 꾸고 낳은 태양의 아들이라느니, 제국의 영토를 넓혀서 억만 년을 다스리겠다느니 하는 몹시 자뻑스러운(...) 구절을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 집어넣기도 했다. 조선에 보낸 국서 자체가 외교문서로서의 기본적 서식이나 의전 등의 격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중2병에 가까운 내용으로, 히데요시의 당시 배경이 부족했음을 나타내준다.
이외에도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는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세이와 겐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정이대장군의 목상을 보고 "당신은 천황의 후손에 명문 가문의 출신이므로 유배지에서 거병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따랐지만, 나는 천한 신분으로 일어나 내 능력만으로 천하를 잡았으니 당신보다 내가 낫다"라고 말했다는 설화가 있다.
또한 권력을 잡은 후에는 자신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도 자주 엿보인다.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은 후 반드시 황실로부터 태정대신과 간파쿠 직을 제수받으려 한 것도 사실은 그것이 본래 황실로부터 노부나가에게 주어질 지위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노부나가는 생전에 일본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종2위 우대신과 우근위대장직을 제수받았고, 혼노지의 변 직전에는 정1위에 올라 태정대신, 간파쿠, 정이대장군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제수받기 위해 우대신직과 우근위대장직을 사퇴한 상태였다.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 후 정1위 태정대신으로 사후추서되었으므로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생전에 태정대신이나 그 이상의 관직을 얻어야 하는데 정이대장군은 황족, 하다못해 10촌 이상이라도 좋으니 황실 방계의 피가 들어있어야 하므로 농민이나 다름없는 아시가루 출신의 히데요시로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관직이라 간파쿠로 만족했다는 것이다. 요도도노 즉 차차히메를 첩으로 들이고 과할 정도로 총애했던 것도 본래는 그 모친인 오이치 부인을 맞아들이고 싶어했으나 오이치 부인이 남편과 자결함으로써 이루지 못한 데 대한 보상심리이며, 오이치 부인을 탐한 것도 부인의 미모도 물론 한몫했지만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과 결혼하는 것이 사실상 오다의 친족으로 편입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하룻밤 만에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사실 성이라 하기에도 뭐한 뼈대만 세우고 외형만 그럴싸하게 한건데, 그걸 본 적장이 일하는 속도를 보아 엄청난 대군일거라 지레짐작하고 도망갔다는 일화가 점점 부풀려져서 정말로 하루만에 해냈다는 식으로 뻥튀기가 되었다고.
그러나 임기응변에 능하여 미천한 신분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된 반면 대국적인 안목도 없고 한마디로 인스턴트라는 단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하기에 가장 알맞는 영단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기응변의 천재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 있을 때부터 매사를 순간적인 기지로 해결했지만 사전에 긴 시간을 두고 뭔가를 계획하는 일 따위는 일절 없었으며 처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무력으로 맞붙었다가 고전한 끝에서야 오다 노부카츠를 꼬드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에게 맞설 명분을 없애버려서야 겨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켰을 정도이다.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청 건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은데, 당시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지정한다고 한들 그가 어린 나이에 자신이 죽을 가능성이 높아서 이미 장성하고 수많은 휘하를 거느린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숙청시키는 것보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배제하는 게 더 나았다. 물론 사람 마음이 양자보다 친아들을 더 삼고 싶겠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그의 생전부터 요도도노가 바람 피워 낳은 아들이라는 말이 많아서 그조차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정 친아들을 배제하기 싫으면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히데요리를 차차기로 지명하고 히데츠구를 징검다리 후계자로 남겨두는 게 나았다. 이중의 권위라는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 히데츠구 본인도 히데요리와 자기 딸을 약혼시키는 등 타협을 시도했고 어쨌든 도요토미 친족이니 불가능한 일이라곤 할 수 없다. 그의 죽음이 훗날 무슨 파장을 불렀는지 생각한다면 그가 장기적인 시야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력이 엄청나게 뛰어났기에 빠르게 돌아가는 전쟁터에서만큼은 이만한 전투지휘관도 없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능력은 그게 전부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뛰어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임진왜란 역시 천하를 얻은 이후 시종일관 임기응변에만 능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는 갑자기 대폭 불어난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매우 잔인하게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함을 최대한 이용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몰락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너무 강하자 그 힘을 약화시키려고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험지였던 간토 지방으로 전봉시켰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되려 그걸 핑계로 아직 기반이 닦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병력을 일절 보내지 않으면서 간토 지방을 그 특유의 극에 달하는 정치능력으로 안정시키고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게 몰래 힘을 키우며 임진왜란이 끝난 시점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여타 다이묘들과 비교도 안 되는 250만 석을 초과하는 유일한 다이묘로 성장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옛 영지에 대한 영향력마저 그대로 보존했으니 사실상 전 일본의 절반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권이 되고 만 셈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장의 크고 강력한 적이라서 전봉으로 세력을 깎는 임기응변을 감행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되려 그걸 핑계로 힘을 키워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전봉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아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임진왜란에 참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조선에서 전사시키기만 하면 도요토미 가문이 근대화 이전까지 세력을 누릴 수도 있었다.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제하는 게 불가능한 유일한 다이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히데요시의 능력은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일본 전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이며, 일본 역사상 최초로 중국과 인도를 무력으로 지배할 계획을 실행에 옮긴 정복군주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망이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꺾이며 2대를 넘기지 못하고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다. 자신의 적이었던 선조와는 반대로 난세에는 명군이었으나 치세에는 암군이었던 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에 히데요시를 유일하게 패배시켜 어머니를 인질로 바쳐 겨우 항복을 받아내게 한 사람. 본거지를 내주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에도를 개간하여 차근차근 힘을 길러온 인내심의 대가. 평소 안하무인의 독재자인 히데요시의 출병요청도 거부할 만큼 정권내의 압도적인 2인자이며,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재통일한 걸물이다. 비록 히데요시는 이런 이에야스조차도 히데요시에 대한 반역을 꿈꾸지 못하게 했지만 반면 이에야스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에야스보다 나은 사람은 아니다.
12. 후세의 평가
12.1. 일본
밑바닥의 병사부터 시작해서 최고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의 대표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임진왜란의 원흉인 탓에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이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과 일본 국내에서의 업적, 평소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던 성격에 더 많이 주목한다. 일본인들이 자주 쓰는 히데요시의 호칭 중 하나는 생전에 그의 경칭으로 쓰인 '타이코(太閤)'다.
에도 막부 시절에는 저평가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그가 쇼군을 자처하지 않고 (명분상이지만) 천황을 중시하여 관백 직위를 받은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상적인 공무합체(公武合體) 사례로 여겨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신사를 재건하는 등 이후 일본 제국 시절에는 상당히 고평가되었다. 대외 침략에 매진했던 그들에게는 히데요시가 선구자였던 점도 주효하였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경술국치 당시 "코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날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시를 지을 만큼 그들에게는 임진왜란이 대륙 침공의 모범적 사례, 히데요시는 그 나름의 국위선양을 이룬 인물로 인식된 모양이다.
일본의 패전 후 이에야스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버프를 받아 평가가 수직상승하며,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하여 임진왜란 전의 업적은 인정한다. 이래저래 이데올로기에 따라 평가가 왔다갔다 하는 인물들이지만 말년에 시원하게 말아먹은 걸 제외하면 분명 저마다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사카 성을 쌓고 오사카를 크게 발전시켰던 인물이라 그런지, 오사카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오사카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타이코한(太閤はん)이라는 친숙한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
오사카성 앞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호코쿠(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다. 일본의 107대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明神)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라고 불리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과 정보의 발달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가는 일본 내부에서도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현실에 놓였다. 실제로 NHK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에서는 일본 사극으로서는 최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고의 역린인 임진왜란을 슬금슬금 묘사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측 장수들이 쓸데없이 춥기만 한 썩어빠진 조선을 굳이 점령해야 하냐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주 장난이 아니게 난장판인 상황으로 묘사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시대극으로 정면 비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영웅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게, 실패했기에 혹평하는 것이지 '타국 침략' 자체는 자국민이나 제3자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당장에 한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인인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은 한국에서 업적으로 생각하지 타국을 침략한 행위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비슷하게 인류 역사에서 손꼽히는 정복 군주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칭기즈 칸은 그 침략을 직접적으로 받은 나라들에서는 이를 갈지만, 이 침략을 받지 않는 나라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점 또한 침략 전쟁이 피해국을 제외한 나라들 입장에서는 문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말년에 고구려를 무리해서 침공했다가 크게 패퇴했다는 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슷한 당 태종만 해도 고구려 침략 이전의 업적들을 두고 당 태종을 영웅이자 성군으로 칭송하며, 고구려 침략은 오판이자 흑역사 취급하며 넘어간다.
사실 일본 내에서 히데요시에 대한 인식이 처음부터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일본군이 철수를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왜군의 대다수는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강제로 전쟁에 동원되었을 뿐, 전쟁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임진왜란에 동원된 물자와 병력들은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일본의 백성들을 고스란히 쥐어짜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히데요시가 서민적인 이미지이니 출세의 상징이니 하는 것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히데요시에 대한 존숭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생겨난 인식으로 생각된다. 히데요시가 당시 일본의 귀족, 영주, 무사들, 심지어 천황보다도 더한 권세를 누렸고 임진왜란을 위해 자국의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하였는데 당시 오늘날과 같이 서민들에게 사랑받았을 리 만무하며, 신분제를 무너뜨리고 정계 진출에 대한 공평한 기회를 창출했다는 일본 정부의 공로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프로파간다였을 수 있다. 심지어 이에야스가 파괴했다던 히데요시의 묘도, 사실은 이에야스가 아니라 히데요시의 가혹한 수탈과 폭정에 치를 떨던 농민들이 부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현대의 일본 서민들이야 당시 임진왜란을 경험했던 세대도 아니니 히데요시를 특별히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을 구실은 적을 것이므로, 히데요시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과거보다 현재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혐한 일본인들에게는 신으로 숭배받다시피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유는 알다시피 이걸로 한국을 때렸다는 이유에서이다.
12.2. 한국
병자호란과 더불어 한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일본 역사의 인물 중 한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인물 수위를 다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도도 다카토라,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등 임진왜란 때 참여했던 무장들도 상당수 있지만 그래도 당연히 임진왜란을 주도했던 우두머리인 히데요시보다는 덜 유명하다. 대개는 부정적인 쪽으로, 특히 임진왜란에 관해서는 살인광전범 같은 인식.
조선왕조실록이나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없지만 강항 선생의 간양록이나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 히데요시를 특별히 감싸 줄 이유가 없는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는 한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을 시역했다는 식의 풍문이 널리 퍼진 바 있다. 이러한 풍문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역했다는 사실은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수교를 꺼린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는 사극 징비록에도 나타나 있다. 훗날 강항 등이 도착해서 찬탈, 즉 반역을 한 것은 맞으나 시역은 아니라고 했다. 고전소설 임진록에서도 일부 이본에서는 평수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병권을 장악한 뒤 왜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관백이라 칭했다는 설정이 나온다.(경판본) 근데 좀 뜬금없게도 사쓰마 출신이고, 어머니는 납치당한 중국인(...).
조일 관계가 정상화되고 상당히 악감정이 해소되어 일본에 대해서 꽤나 좋게 평가하게 된 이후의 조선 통신사들도 히데요시에 관한 문제만큼은 늘 민감했고 임진왜란 전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바뀌어도 적어도 왜란 이후의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용서 못할 국적이자 침략자, 천하만민의 원수'라는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숙종 때는 히데요시를 모신 사찰에서 조선 통신사들의 연회가 열렸는데, 히데요시를 모신 절이라는 걸 알게 된 통신사 일행이 노해서 항의하는 바람에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 측은 얼버무리기 위해 가짜 사료를 들고 와서 '이 절은 다른 사람이 세운 것이며 히데요시와는 관계가 없다.'고 거짓으로 해명했는데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자 통신사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지 연회가 재개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