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용달 코치님 감사하구요. 부모님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제 아내와 제 딸 사랑합니다.”
지난해 타율왕 박용택(LG)의 2009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 소감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두 가지가 빠져 있다. 하나는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이다. 박용택은 지난 시즌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한 선수였으니,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길 자격이 충분하다.
그가 빠뜨린 또 한 가지는, ‘운’이다. 박용택은 지난 시즌 프로야구에서 가장 운이 많이 따라준 타자 중 하나였다. 아니, 지난해만이 아니라 역대 프로야구를 놓고 따져봐도 그만큼 운이 좋은 타자는 많지 않았다. 이는 시즌 마지막까지 타율왕 경쟁을 펼친 홍성흔(롯데) 역시 마찬가지다.
두 선수의 팬이라면 ‘이게 대체 무슨 아사다 마오가 쿼드러플악셀 하면서 표정관리하는 소리냐’ 싶을지 모른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BAbip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BAbip란 무엇인가
지난 2001년, 미국의 세이버 메트리션 보로스 맥크레켄(Voros McCracken)은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를 통해 매우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페어 영역에 떨어지는 공이 안타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능력에는 투수들 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 홈런, 볼넷, 삼진 등을 제외한 인플레이 된 공이 안타가 될지 여부는 투수가 아닌 수비와 ‘운’에 의해 결정된다는 과격한 이론이다.
이후 맥크레켄의 이론은 여러 세이버 메트리션의 연구와 보완을 거쳐 다듬어지고 조정되었는데, 현재는 인플레이된 공이 안타가 될 확률에는 투수의 능력도 어느 정도는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가 우세한 상태다. 하지만 후속 연구에서도 수비와 운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이 뒤집히지는 않았다. 맥크레켄의 이론이 여전히 유용한 것은 그래서다.
이 이론은 투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타자가 안타를 치려면 일단 공이 배트에 맞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공이 페어 지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엇보다, 타구가 상대 수비수가 없는 빈 공간으로 가서 떨어져야 할 것이다. 아니면 아예 담장 밖으로 공을 넘겨 버리던가.
하지만 이는 타자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밀어치거나 외야 플라이를 노리고 타격을 할 수는 있겠지만, 쳐낸 공이 어디에 가서 어떻게 될지 컨트롤할 수 있는 타자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투수의 공을 최대한 배트 중심에 정확하고 강하게 때려 맞히는 것, 그래서 안타가 될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는 것 뿐이다.
이처럼 ‘타자가 친 공이 페어 영역으로 들어갔을 경우 안타가 될 확률’이 앞서 언급한 BAbip다. BAbip는 일반적으로 (안타수-홈런수)/(타수-삼진-홈런+희생타)로 계산하는데, 삼진과 홈런을 제외하는 것에서 이 스탯이 ‘페어 타구’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BAbip가 타자의 타격 스타일이나 선천적인 능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가르시아처럼 극단적으로 당겨치는 타자일 경우에는 BAbip가 낮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공이 떨어지는 지역이 우측에 치우치게 되고, 수비수들 역시 그에 맞게 우측으로 수비위치를 조정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가르시아가 스프레이 히터로 변신하지 않는 이상 그의 BAbip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타구의 질이나 타자의 스피드도 관련되어 있다. 빠르고 강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주로 날리는 타자와 팝업이나 힘없는 땅볼을 주로 치는 타자의 BAbip가 동일하게 나타날 리는 없다. 또 같은 땅볼 타자라도 이대형과 이숭용의 BAbip는 큰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이숭용이 아바타를 동원하지 않는 이상, 1루에서 살 확률은 이대형 쪽이 월등하게 높기 때문.
이와 관련해 <하드볼 타임스>의 데릭 카티는 “타자들의 BAbip는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수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시즌 초반이나 특정 시즌 동안 어떤 타자의 BAbip가 특별한 이유 없이 평소보다 매우 높게 나타날 경우,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나중에는 원래 자신의 평균과 비슷한 수치를 내게 된다는 얘기다.
박용택·홍성흔의 ‘역사적인’ 2009년
그렇다면 BAbip를 통해 어떻게 타자의 ‘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이는 타자의 BAbip를 통산 BAbip와 비교해 보면 간단하다.
만일 누군가의 BAbip가 평소보다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면, 이는 그의 타구가 평소보다 유독 높은 비율로 수비수 없는 곳에 가서 떨어지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그에게 평상시보다 훨씬 ‘운’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는 얘기다.
*물론 BAbip의 증감이 무조건 ‘운’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드볼 타임스>에 따르면 여기에는 운 외에도 타자의 스피드, 타구 비거리, 컨택 능력, 라인드라이브 비율 등이 관련될 수 있다. 만일 김종국이 피나는 훈련을 통해 김상현 수준의 장타자로 변신을 했다거나, 가르시아가 교타자로 변신한다면 그들의 BAbip 수치 역시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경우 BAbip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변수는 ‘운’이다.
실제 지난 2008년 프로야구에서 커리어 평균보다 높은 BAbip를 기록한 타자들은 대부분 2009년에 성적이 하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왜냐. 2008년에 따라준 ‘운빨’이 2009년에도 계속해서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이 평상시 수준으로 돌아오자, 타구가 수비수 없는 곳에 가서 떨어지는 확률도 줄어들었고, 타율도 제자리를 찾게 된 것.
조성환과 이용규의 부상으로 인한 하락은 제쳐두더라도, 최정이나 박기혁 등의 2008년 고타율이 상당부분 행운이 따른 결과였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럼 타고투저 경향이 심화된 지난 2009년의 경우는 어떨까.
위의 표는 작년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들 중 통산 기록보다 3푼 이상 높은 BAbip를 기록한 선수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박용택과 홍성흔의 압도적인 BAbip 수치가 눈에 들어온다. 홍성흔의 BAbip는 1987년 장효조가 기록한 .412에 이어 통산 2위에 해당하며, 박용택 역시 통산 3위에 달하는 ‘역사적인’ BAbip 수치를 보였다(1994년 이종범 .391/1982년 백인천 .387 기록).
다시 말해 지난해 박용택과 홍성흔의 타율왕 경쟁은 본인들의 노력 외에도 상당부분 ‘운’이 함께한 결과라는 얘기다. 만약 두 선수의 BAbip가 평상시 수준을 기록했다고 가정하고 역으로 계산하면 박용택의 타율은 .311로, 홍성흔의 타율은 .294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랬다면 타율왕은 상대적으로 ‘운’이 덜 따라준 기계곰의 차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김동주, 정근우, 최준석, 채태인, 클락, 송지만 등도 평소보다 훨씬 높은 BAbip의 혜택을 톡톡히 보면서 타율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 생애 최고의 성적을 낸 삼성 강봉규(0.010 증가), 넥센 황재균(0.020 증가), SK 박정권(0.018 증가) 등의 BAbip 변화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이들의 맹활약이 결코 ‘뽀록’이 아니었다는 증거로 봐도 좋겠다.
반대로 평소보다 낮은 BAbip로 타율에 손해를 본 선수들도 있다.
이들은 지난 시즌, 다른 해에 비해 운이 덜 따라준 한 해를 보냈다. 특히 강정호, 최형우, 임재철, 나지완 등은 BAbip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생애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선수들. 만일 이들의 ‘운’이 평소 수준으로만 따라 준다면, 이번 시즌에는 더 나은 성적을 기대해 볼 수 있다. 특히 KIA 타자들은 김상현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소와 비슷하거나 낮은 BAbip를 기록했는데, 이는 올 시즌 KIA 타선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 혹시 박용택과 홍성흔의 비약적으로 높아진 BAbip가 ‘운’이 아니라 두 선수의 타격 스타일 변화에 의한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박용택의 경우 홈런 비거리와 밀어친 타구의 비율이 다른 해에 비해 높았고, 홍성흔 역시 우측 타구 비율이 6% 이상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올 시즌 두 선수의 성적을 보고 난 뒤에야 판단이 가능한 부분이다. 지난해의 BAbip가 운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면, 두 선수는 올 시즌에도 작년과 유사한 BAbip를 보일 것이다. 반대의 경우, BAbip는 타율과 함께 하락세를 보일 테고.
분명한 것은 ‘운’도 ‘실력’이 있어야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운의 지원이 제거된 박용택과 홍성흔의 예상 타율을 살펴보자. 그렇게 해도 박용택의 타율은 3할을 넘었고, 홍성흔도 2할 9푼대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운 없어도 원래가 잘 하는 선수들이라는 얘기다. ‘운’이라는 요소는 이들의 성적을 평소보다 훨씬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을 뿐, 없는 실력을 억지로 쥐어짜낸 것이 결코 아니다.
운을 사람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 어떤 때는 운이 몹시 따르기도 하지만, 다른 때는 지독한 불운에 시달릴 때도 있는 법. 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최선을 다해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것뿐이다. 거기에 우연찮게 운까지 따라줄 때, 타율왕도 나오고 골든글러브도 제 발로 찾아온다.
일단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뒤에 운을 기다린다. 이걸 다른 말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던가. 박용택과 홍성흔의 2009년이 바로 그랬다. 노력하지 않는 이에게는, 운도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기록제공 - 스탯티즈(www.statiz.co.kr)
이 글은 ‘Redbirds Nest in Korea(http://birdsnest.tistory.com)'의 ’BABIP란 무엇인가‘를 상당부분 참조해서 쓰여졌습니다.
http://yagoora.textcube.com
응원 횟수 0
첫댓글 역시 운도 노력해야 따라오는 법^^
용택 선수도 올해도 일내주셔여~이병규 옹과 타격 1~2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