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책 <나를 따르라>는 제자도의 핵심을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나로서는 그동안 산상수훈의 첫 주제인 팔복 부분에 첫 구절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에서 항상 걸려 넘어졌었다. 진보적 기독교인 중에는 마태복음보다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이 원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앞부분의 '마음'은 부자인 마태가 가난하게 살 수 없어서 첨가한 것이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나라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것은 맞는 말인 것같다. 미국의 신학자 중에 한 분은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했다. 하나님나라는 지금 당장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도 민중 신학자들이나 미국의 신학자같이 하나님나라와 실제적 가난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래서 늘 가난하게 살고자 노력했으며, 그래서 프란체스코를 한때 바울 사도보다 더 사랑했었다.
프란체스코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자기에게 주는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아무 성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그런데 프란체스코보다 더 지독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수도사들이 아닌 인도의 자이나교의 승려들이었다.
올해 들어서 우연히 본 TV의 교양 프로그램에서 인도 자이나교의 승려들의 모습을 방영한 것을 보았는데 충격적이었다. 말 그대로 이들은 전대도 두 벌 옷이 아닌, 완전한 알몸으로 순례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인도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의 영향으로 그들은 행여 신발을 신으면 감각이 무뎌져서 죄 없는 생명체들을 밟을까 봐 맨발로 걸어 다녔다.
도대체 예수님이 요구하는 가난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나는 내가 만족하는 가난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나를 아내는 비웃고 있었다. 입으로는 가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씀씀이가 헤프고 낭비벽이 심하다는 것이다. 치약도 자기보다 항상 많이 짜내 쓰고, 지하철보다 광역버스 타기를 즐기는 등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가난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율법주의자였다. 즉 가난을 이데올로기화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 내 의지로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껏 말로만, 입으로만, 머리로만 가난을 떠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항상 가난을 두려워했다. 가난을 혐오했다. 가난을 어려워했다. 가난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더 가지려고, 성공하려고, 부자가 되려고 항상 긴장하고 노력했다. 그런데 성경에 가난하라고 하니까, 그리고 놀부가 욕심쟁이인 것처럼 대부분의 부자도 그럴 것이라는 가정 하에 부자들을 혐오했다. 나는 가난에 대하여 이중적이고 분열적이었다.
며칠 전 나는 갑자기 가난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드디어 나는 마음의 가난과 물질의 가난을 내 몸 안에서 하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진정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 거기가 하나님나라였다. 아무런 욕심과 이기심이 없는, 가난한 마음은 에고가 없는 진정 무아의 경지와 같았다. 왜 모든 성자들이 가난에 처했는지를 알 것도 같았다. 더는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또 부자가 부럽지도 않았다, 부자를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졌다. 이런 마음의 경지에선 인생의 성공과 패배가 더는 구분이 되질 않았다.
이제는 악인에게 "너 착한 일 하지 않으면 지옥 가!"라는 말이 두렵지 않듯이, 나에게 "너 성공하지 않으면 거지가 돼"라는 말이 더는 두려운 말이 아니었다. 나는 30~40대를 자기모순 속에서 지내고 육십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참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민중을 위한다고 그들 편에서 일했고 또 스스로 가난하게 살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의지와 달리 마음으로는 가난을 기피하고 있었다. 비록 가난해도 세상적으로는 시민운동가로 성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제 그런 마음조차도 내려놓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가난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났고 더불어 마음의 평화가 밀려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고 아픈 이웃을 긍휼히 여기게 되고, 또 교만하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자기가 처한 위치나 일에 만족하고, 하나님께 산제사를 지내듯이 그렇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경쟁이나 욕심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충일케 하고 남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맡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였던 목사님이 계신 것을 알았다. 그분도 물질적 가난에 앞서서 마음이 가난해야 함을 역설하신 것이다. 내 글을 보고 카페 회원이 올린 김영호 목사님 글 중에 일부분을 옮겨 본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교회들은 오늘날 우리가 잘 모르는 법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인데, '서로 남의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쉽게 말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새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본래 예수의 제자들은 어려운 처지에 살았던 사람들이니, 예수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이제 제자들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법은 듣기에는 매우 쉬운 것 같으나, 실제로 그렇게 살기에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인생살이가 언제나 위에 있는 것만 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짓눌려 기를 못 펴고 사는 사람들은 나도 언젠가 힘 있는 자가 되어 큰소리치며 살아보자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잘사는 사람들에게 괄시받고 사는 사람들은 나도 언젠가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것이 꿈이 되고, 배운 자들만 출세하는 세상에서 못 배워 서러움 받는 자들은 자식들의 세대에서는 그런 서러움 받지 말라고 논 떼기 밭떼기 팔아 너희들은 많이 배운 자 되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살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힘 있고 잘살고 많이 배운 자들을 싫어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들과 같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연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같은 사람들이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경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빈민 선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빈민 선교의 가장 어려운 점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치고 박고 서로 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설움은 가난한 사람들이 잘 아니까 서로 잘 지낼 것 같은데도, 서로 싸우기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못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잘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동안 무의식중에 자신들이 부러워하는 잘사는 사람들과 자신들이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못살지마는, 무의식 가운데서는 잘사는 사람처럼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못사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보다 못난 사람들로만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혼자만 그런 무의식 세계에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자기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도 꼭 같은 무의식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싸움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웃집 사람이 오히려 나를 못난 사람이라고 경멸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서로 싸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위에 있는 것을 부러워하고 사는 동안, 무의식중에 위에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하게 되었다는 심리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예수 당시 어려운 처지에 살던 사람들, 못사는 사람들을 함께 모아 제자들을 만들어 놓으니까, 이 제자들에게도 꼭 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본래 뱃사람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한 것입니다. 문제가 그것에만 끝나면 다행이겠는데, 다른 제자들 사이에까지 다툼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돌보는 사람들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어려운 처지에 사는 사람들을 섬기러 온 자이며, 고난당하는 자들의 종이 되려고 오신 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난당하는 자들의 종'의 삶을 사는 '고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고난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자신만을 위하여 행복한 삶, 축복의 삶, 영광의 삶을 추구하셨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남보다 더 높은 사람, 더 힘 가진 사람, 더 부요하게 사는 사람,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원하셨다면, 그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되어 그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이하 생략)."
이 글을 쓰신 김영호 목사님은 1947년 경남 진해에서 출생하셨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교육학박사 (Ed.D.) 연세대 원주캠퍼스 교수, 교목 역임하셨다. 위스콘신 주 미국인 감리교회 목사 등을 거쳐서 생의 후반기에는 겨자씨교회 운동을 주창하시고 실천하시다 베트남 선교 중에 소천했다고 한다. 이런 분을 나는 지금에야 알게 되었지만, 글을 쓰실 당시만 해도 기독교 일각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신 것으로 카페 회원이 알려 주었다.
이제 글을 마쳐야겠다. '내 안에 이명박'이라는 말이 진보 진영에서 떠도는 때가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마음 안에는 자본주의사회의 경쟁 심리, 소유욕이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총선 기간 중이다. 선거에 임하는 야권 정당들은 이번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성찰이 부족한 것만 같다. 대다수 서민은 부자 감세, 20대 80의 세상을 만든 친재벌적인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준비가 덜 된 것만 같다. 이제는 디지털TV의 시대이다. 후보자들 표정이 금방 읽혀지는 시대다. 진정성이랄까, 80%에 해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공감 능력이 탁월한, 마음이 가난한 정치인이 많아지길 기도한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롬 8:6)."
첫댓글 공감되는 글입니다.
공감되는 글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나의 의지로 잘안됩니다.
오십을 훌쩍 넘기고 육십이 코앞인데도 말입니다. 공감하는 글을 읽고 다시
마음을 비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