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웅
중고 특성상 거래한 물품은
반품이 안 된다는 고지를 들으며
악기점을 나왔다
한때 누구보다도 시선을 듬뿍
받았을 듯한 여자는 은빛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낡은 가방 속에서 나와 오래된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사늘하게 식은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손끝이 밸브를 건드리자
낯선 사내의 손놀림에 수축된 혈관이 열린다
피스톤이 아래로 내리 꽂히자
밋밋한 정음에서 벙벙 거리던 선율은
더는 참을 수없는
크라이막스에 다다랐는지
절제를 쥐어짜고 있다.
투명한 파문이 일렁이며
낙엽 한 장, 가을빛에 익어 내려앉는다.
흩어진 음들 속에서 그녀의
몸을 닦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붙잡는다.
단편소설
트럼펫
그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 여겼다. 지방의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취직해, 월급의 절반은 월세와 생활비로 사라졌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무채색 일상 속에서, 그는 자신이 점점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들어선 곳이 동네의 중고 악기 매장이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낡고도 다양한 악기들이 그를 끌어당겼다. 마치 오래전 꿈에서 본 풍경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이었다.
“무엇을 찾으세요?”
매장 주인은 그를 쓱 훑어보며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눈길을 돌리다가, 한쪽에 놓인 은빛 트럼펫을 발견했다. 직사각형의 낡은 케이스 안에서 은은히 빛나는 트럼펫은, 오래전 자신이 꿈꾸던 동네 밴드의 악기를 떠올리게 했다.
"이거 얼마인가요?"
“연주할 줄 아세요?”
주인은 얼굴을 힐끔 보며 물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곧바로 돈을 꺼내들었다. 악기를 품에 안고 나온
그는 어딘가 들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도 스며들었다. 이 낡은 악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트럼펫과의 첫날밤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입술을 악기에 대고 불었을 때 들려온 것은 찢어진 바람소리 같은 불협화음이었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제대로 된 음 하나 나오지 않았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어쩌면 트럼펫은 자신과 닮아 있었다. 녹이 슨 듯 낡아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빛을 발할 잠재력을 가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후 일상은 트럼펫으로 채워졌다.
출근 전, 퇴근 후, 주말 아침에도 그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악기를 불기 위해 필요한 호흡법을 배우고, 온라인 동영상 강좌를 찾아보며 따라 했다. 그의 열정은 대단했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회사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트럼펫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가 놀랐지만, 대다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나이에 악기를 배워서 뭐 하려고?”
“시간 낭비 아니야?”
그는 웃음으로 넘겼지만,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모한 도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말들이 오히려 그를 더 자극했다. “나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겠어.” 더 열심히 연습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중, 그는 동네 카페에 붙은 작은 포스터를 발견한다. ‘아마추어 연주회 참가자 모집’이라는 문구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금 수준으로 나가도 될까?”
그는 망설였지만, 신청서를 작성하며 자신에게 약속했다. “무대에서 단 한 곡이라도 제대로 연주해 보자.”
그는 연주회 준비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바이올린 연주자 유미였다. 그녀는 프로 연주자가 될 꿈을 가졌지만, 사정상 포기하고 지금은 취미로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악기를 다룬다는 건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악기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거죠.”
유미의 말은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와의 만남 이후, 그는 연주를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여겼다.
두 사람은 함께 연습하며 점차 가까워졌다. 음악으로 연결된 대화는 악기, 삶, 그리고 각자의 과거와 꿈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유미는 그에게 연주의 감각을 가르쳐 주었고, 그는 그녀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연주회 당일,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무대에 섰다. 관객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자신을 향하자, 그는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나 트럼펫을 손에 쥔 순간, 모든 긴장이 사라졌다. 마치 악기가 자신에게 용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첫 음이 울려 퍼졌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점점 음악에 몰입했다. 음들이 점차 조화를 이루며, 무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를 느꼈다.
연주회가 끝난 후,
그는 유미와 함께 작은 밴드를 결성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하며 사람들에게 음악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트럼펫은 더 이상 낡고 녹슨 악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고, 사람들과 연결되는 매개체였다.
첫댓글 존경하는 선생님 와, 낡은 트럼펫이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들려줄 줄은 몰랐어요! 시는 정말 음악을 들려주는 것처럼 예쁘고, 소설은 트럼펫 덕분에 삶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느껴졌어요. 둘 다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언제 또 소설을 쓰셨대요! 시도 멋지신데 소설까지, 정말 대단하세요. 트럼펫 이야기가 이렇게 풍성하게 펼쳐지다니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할게요!
과찬이십니다 ㅎㅎ
정연희 시인 님께서는
내보다 더 잘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