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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개
서 론
이 책은 학개 선지자가 받은 4편의 계시로 성전 재건을 주제로 구성되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파괴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 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대적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쳐 낙심하고 세상일에 몰두하였다. 이때에 학개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며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다.
구약의 모든 책들 중에서 이 책만 비평가들의 비평에서 자유롭다.
선지자 학개가 사역한 때는 다리오 왕 2년 즉 주전 520년이다. 에스라서에 의하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 곧 주전 537년에 하나님의 은혜와 바사 왕의 배려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 록 자
이 책의 기록자는 학개(Haggai)이다. 이름의 의미는 '나의 축제, 절기, 쾌락, 즐거운 축제일'로 이는 학개가 성전 축제 기간에 태어났다는 것을 시사한다.
(1) 12 소선지자중의 한 사람으로 학개서의 저자이다(학 1: 12-13. 2: 1).
(2) 그는 스가랴와 동시대 사람(슥 5: 1. 6: 14)으로 어떤 축제일에 출생한 듯하다.
(3) 바사 왕 다리오 1세 제 2년 주전 520년 6월에서 9월까지 예언하였다.
그의 예언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의식주 생활에만 치중하고 하나님의 성전재건을 위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책망하고 격려한 것이다.
(4) 2장 3절의 말이 파괴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을 직접 본 학개의 말이라면 활동했던 시기는 노년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에스라서에 의하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 곧 주전 537년에 하나님의 은혜와 바사 왕의 배려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스룹바벨은 여호야긴 곧 여고냐의 손자였고 스알디엘의 아들이었다. (스 3: 2. 학 1: 1. 눅 3: 27). 그러나 스알디엘은 친아버지가 아니고 양부였던 것 같다. (대상 3: 19).
학개는 구약에서 오바댜서와 함께 가장 짧은 예언서(총 38절)를 남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가 더욱 유명한 이유는 4개월도 못 미치는 최단 기간(주전 520년 6월부터 9월까지)의 사역(학 1: 1, 2: 10)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사건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성전 재건(스 5: 1, 6: 14)은 물론 거기에서 개최된 계약갱신 축제(느 8)와 주후 70년까지 500여년 지속될 제2 이스라엘(유대교)의 핵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점이요 구약 신학의 구심점이었던 솔로몬 성전이 400여년 만에 파괴됨으로써(BC 587/6) 야웨 예배의 중단과 함께 유대인의 비극적 포로 생활이 시작됐다. 바사의 고레스 해방령(BC539/8)으로 고국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최우선적 과업으로 성전 재건을 시도했으나 대적들 특히 사마리아 공동체의 방해 공작으로(스 4: 1-24) 성전공사가 중단되고, 야웨 임재의 영원한 처소로 예정된(신 12: 5) 성전터는 20여년 동안 방치된다. 설상가상 기근(학 1: 6, 10-11)까지 겹쳐 성전 재건의 특명을 받고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스룹바벨(여호야긴의 손자)마저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예언자가 바로 학개였다.
학개(Haggai·학가이: ‘나의 명절/절기’)는 3대 명절/절기(Hag/하그) 가운데 하나인 신년 절기 곧 초막절에 태어났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새 시대를 도입하는 새해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듯 포로 이전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 거기서 맛본 명절의 환희를 잊을 수 없는, 나이든 예언자 학개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외친 종말의 가장 큰 명절 곧 새 성전에 임하실 메시야의 도래(2: 1-9, 20-23)는 절망에 빠진 유대인들이 거부하기 힘든, 희망과 용기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다.
예언자 학개가 네 번에 걸쳐 신언(神言)으로 선포한 짧은 설교들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황무하게 방치된 성전터를 지나치면서도 “야웨의 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1: 2)고 말한다는 것은 위선적 변명일 뿐 백향목 널빤지로 단장한 자기 저택을 성전 건축보다 우선시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고도 남을 큰 죄악이다.
둘째, 성전 재건에 동참하려는 사마리아 공동체(2: 14)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시체에 접촉된 자가 손 댄 물건도 부정해지는 것처럼(2: 13) 우상숭배에 젖은 사마리아인들의 동참을 허락할 경우 성전의 거룩성은 물론 야웨의 임재도 기대할 수 없다. 이는 성전의 거룩성과 야웨의 임재 사이의 긴밀한 연속성을 강조한 것으로, 거룩한 성전과 함께 피폐했던 삶(2: 16, 19a)도 풍요로 바뀔 것(2: 19b)을 예고한다.
셋째는 성전 건축을 진두지휘하는 스룹바벨(다윗의 후손)이야말로 다윗 왕조를 계승할 야웨의 인장반지(2: 23)로서, 성전 건축과 아울러 만국을 진동시킬 종말의 메시야 시대가 도래한다. (2: 4-9, 21-23).
기원전 6세기, 좌절한 유대인들을 강력한 신언으로 감동시켜 역사의 전환점을 제공한 학개를 생각하며, 강단에서 생명의 말씀 특히 종말론적 메시지를 듣기 힘들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한국 교회에 그와 같은 예언자가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기록연대
학개는 그의 메시지를 주전 520년경에 전했다.
배 경
바벨론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자신들이 포로 생활 중에 쌓아 올린 재정적인 안정과 위안을 선택했다.
귀환을 결정한 포로들은 약 오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이 귀환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폐허가 된 땅들이었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보다는 오히려 집을 지어야 했고, 농경지를 복구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 주님께서는 학개와 스가랴를 세우셨다. 이들은 백성들이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성전을 건설할 것을 촉구했다.
백성들은 이 두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에 순종해서 주전 516년에 성전을 완성시켰다.
학개서는 어떤 선지서들 보다 더 연대에 대한 언급들의 밀도가 높다. 이 책에 나오는 네 개의 신탁들은 연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알려진 네 달 동안의 대중 사역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학개의 운명에 대해서 아무런 아는 것이 없다.
학개가 활동하기 전, 바사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유다로 돌아가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용했다. 본국으로 귀향한 유대인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했지만 이웃 백성들의 격렬한 반대로 2년 만에 공사를 중단했다(주전 534년).
이렇게 성전 건축을 중단한지 14년째 되던 해에 학개가 일어나 성전 건축을 독려했다.
(1) 역사적 배경
B. C. 605년 예루살렘의 1차 침입. 다니엘 등이 포로가 됨,
B. C. 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 성전이 파괴되었다.
B. C. 539년 바벨론의 멸망, 예레미야가 예언(렘 25: 11-12, 29: 10, 대하 36: 21)했던 대로 70년이 되었을 때(B.C.605년부터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제1차 귀한 한 B.C. 536년까지)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의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였다.
B. C. 536년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곧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지만 곧 어려움에 부딪쳐 성전재건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첫째, 주위에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스 4: 24) 둘째, 정치적 지원자였던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전쟁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캄비세스는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 못해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를 이용해서 유대인들이 모반하려 한다고 상소문을 왕에게 보냈었다. 곧 캄비세스는 성전공사를 중단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셋째, 바벨론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성전 없이 예배드리는 일에 순응하였다. 또한 그들은 황폐된 예루살렘과 그곳의 적대행위와 고난을 보고 귀환 운동에 환멸을 느꼈으며, 그 무렵 수확의 실패로 고난을 겪고(학 1: 10-11), 각자 자신들의 집을 짓기에 몰두하였다(학 1: 9).
B. C. 520년. 여러 원인에 의해서 이후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다"(학 1: 2)고 변명하면서 계속 성전을 방치해 두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계속 갈 때 이스라엘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70여년의 포로 생활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졌고, 또한 성전 재건이 중단된 15년 동안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심각한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말라기 선지자가 그들을 책망하며 말씀을 전한 것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공동체는 내적으로 개혁하여 영성을 회복하고 방향성을 찾지 않으면 이웃 민족들과 사회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결국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할 위험에 놓였다.
(2) 신학적 의의
학개의 신학은 바벨론 강제 이주에서 귀환 후 성전 재건이 지연되는 상황 속에서 선포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신학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귀환 시대에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성전에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됨으로써 그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주 제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처음 한 것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터를 닦은 것이었다. 그러나 대적자들의 방해 때문에 15년간이나 성전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사역으로 성전 건축의 일을 다시 하게 되었고 마침내 완성하였다.
에스라 6: 14는,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殿)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고 기록한다. 성전 건축을 통하여 하나님 중심의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영적인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의 활력을 잃었다거나 무기력한 삶을 살아간다면 이 책을 묵상하여 믿음을 회복하시기를 바란다. 이 메시지는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졌으므로 그 가치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능력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영적인 활력에 미흡함이 느껴진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사모하시기를 바란다.
문학적 구조 및 신학
학개서는 다리오(다리우스 1세 제 2년)라는 연대가 주어진 네 개의 신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선지서들과는 달리 학개서는 직접적으로 설파된 신탁들이 산문으로 된 네러티브 틀 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하기 때문에 이 책은 마치 학개의 말들과 그 말들이 청중들에게 끼친 효과에 대한 보고서처럼 보인다.
(1) 첫 번째 신탁 (1: 1-11)
주전 520년 8월 29일에 주어졌다. 아마도 신년 축제를 위해서 선포되었을 것이다. 귀환자들이 집과 경제를 재건하는데 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성전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23일 후에 일이 시작되었다.
(2) 두 번째 신탁
성전 작업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못된 520년 10월 17일에 주어졌다. 아마도 이날은 장막절 절기의 마지막 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성전 경내에 모였을 때 선포되었다. 학개는 다시 짓고 있는 두 번째 성전의 영광이 첫 번째의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3) 세 번째와 네 번째 신탁
520년 12월 18일 같은 날에 주어졌다.
그는 성전이 마술적인 부적이 아니라는 것을 세 번째 신탁에서 선포한다. 성전을 짓는 것이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네 번째 신탁은 스룹바벨에게 주어졌다.
신약으로의 접근
두 번째 성전을 지었고, 스룹바벨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차 올 일들에 대한 임시적인 단계일 뿐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가시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제 2성전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이 함께 거하며, 모든 눈물이 닦여질 바로 그 때를 향한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스룹바벨이 선택받은 것은 단지 다윗 계보의 통치가 시작된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주의 천재지변을 미리 형상화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종말론적인 시대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주요 인물
학개 : 제사장, 저자
스룹바벨 : 포로 귀한 자들의 지도자
스룹바벨은 여호야긴 곧 여고냐의 손자였고 스알디엘의 아들이었다(스 3: 2. 학 1: 1. 눅 3: 27). 그러나 스알디엘은 친아버지가 아니고 양부였던 것 같다.
* 대상 3: 19 -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의 매제 슬로밋과
여호수아 : 당시 대제사장
참고 : 성전의 역사
창세기 곳곳에 세워진 제단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에 세워졌었다. 그곳은 그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1) 야곱
벧엘에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이고, 그래서 바로 그러한 곳에서 제단을 쌓았다.
(2) 광야의 성막.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증거하는 성막을 지었다. 그래서 성막에는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스라엘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용을 짰었다. 성막을 앞세우고 광야를 여행했다. 성막, 회막, 장막이라 불리웠다. 이는 장막에 거하는 여호와의 임재를 강조하고 있다.
(3) 사사시대의 성막
주로 실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수 18: 1, 삿 18: 31, 삼상 1: 3). 이곳은 지파들의 중심지로서 에브라임 지파 영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그 이전에는 세겜과 벧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존브라이트 p.224)
(4) 다윗이 언약궤를 옮겨옴
왕위에 오른 다윗은 예루살렘을 여부스족으로부터 점령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이곳은 남부와 북부 두 지역의 중앙에 위치하고 어느 지파의 영토에도 속해 있지 않았기에 타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는데,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정치적, 종교적 수도가 되었다. 이를 통해 다윗은 거의 독립적인 지파 동맹체제였던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민심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할 수 있었다.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했던 것은 당시 성소의 이동성을 원칙으로 한 전통과 지파 동맹의 중심으로서 그 지위를 회복 계승하기를 희망했던 선지자들의 요구에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존브라이트 p.272)
(5) 솔로몬의 성전 (대하 2: 1 – 7: 22)
* 대하 6: 20 -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이 말씀은 성전을 그들의 삶의 중심에 두겠다는 다짐이면서 동시에 중심에 둔 성전에 항상 계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였다.
* 대하 6: 41 -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의 제사장으로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로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게 된 신학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다윗과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도읍하고 그곳에 성전을 세워 법궤를 가져옴으로 예루살렘은 정치적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은 침략자들에 의해 약탈을 당했고(왕상 14: 26), 자주 왕들에 의해서 정치적 힘이나 평화를 얻기 위해 약탈되었다. (왕상 15: 18, 왕하 16: 8)
요시야 왕(B.C. 640년경) 대대적인 보수(왕하 22: 4이하) 하엿으나 B.C. 587 or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약탈 파괴됨(왕하 25: 9이하)
(6) 학개, 스가랴, 스룹바벨에 의한 성전(제2 성전)
귀환 포로들에 의해 B.C.536년 착공되었으며 B.C.534년 중단되었다가 15년 후인 B.C.520년 학개에 의해(스 5: 1, 학 1: 1) 재건되어 B.C. 516년에 완공되었다. (스 6: 14-15)
1차 파괴 뒤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에 의해 재건되었기에 이 성전은 보잘것 없이 작았고, 없는 것도 많았다. (학 2: 3) 쉐기나(하나님의 영광), 거룩한 불, 언약궤, 우림과 둠밈, 예언의 영 등 5가지가 없음,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등대 하나만 있을 뿐,
(7) 헤롯 성전
B.C. 19년에 재개발을 시작하여 10년만에 핵심 건물 완공 A.D. 64년 까지 공사가 계속됨. A. D.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참고 주석
Meyers, C. L., and E. M. Meyers. Haggai ; Zephaniah 1~8. AB. Garden City : Doubleday, 1987.
고고학자들인 두 저자들은 본문을 다루면서 역사적이고 고고학적 발견을 적절하게 사용하였으며 매우 좋은 참고도서 목록을 싣고 있다.
Petersen, David L. Haggai and Zechariah 1-8 : A Commentary. Philadelphia : Westminster Press,1984(학개서 부분).
온건한 비평주의 색채를 띤 이 주석은 텍스트와 의미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잘 다루었다. 주석은 매우 분별력이 있고 명료하다.
Pusey, E. B. The Minor Prophets : A Commentary. Grand Rapids : Baker,1966 (reprint of 1860 edition, 학개서 부분).
학개서의 주석들 가운데 면밀하고 아주 상세한 것으로 푸시의 것을 능가하지 못한다. 약점은 1860년대의 푸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확성과 무지를 들 수 있다.
Smith, Ralph L. Micah-Malachi.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 Word Books, 1984(학개서 부분).
간결하지만 이 책은 매우 좋은 참고도서 목록과 아주 완벽하게 텍스트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학개서를 처음으로 다루려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학개서의 주제와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 좋겠다.
Verhoef, P. A. The Books Haggai and Malachi. NICOT. Grand Rapids : Eerdmans, 1987.
남아프리카 학자인 저자는 포로후기 문헌에 박학하다. 이 주석에서 저자는 히브리 본문 주해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탁월한 신학적 메시지를 찾아내고 이를 신약에 연결시켰다.
이 주석은 다른 NICOT 시리즈와는 달리 매우 학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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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군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랍니다.
어머니에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로운 설교 감사합니다.